그래서일까. 일본에서 한국보다 나은 부분을 발견할 때 그 차이는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우리는 간혹 그것을 무시하고, 때로 질시한다. 물론 진보를 향한 자극으로 삼을 때도 있다.
"나는 왜 한국을 떠났나?"
지난 7일 일본 오사카에서 만난 변미양 씨는 이런 작은 차이에서 희망을 찾은 경우다. 1990년대 중반까지 서울에서 빈민 탁아운동을 하던 변 씨는 1997년 사고로 한 쪽 다리를 다쳤다. 사고의 순간은 변 씨의 삶을 면도날처럼 둘로 갈랐다.
변 씨는 활달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사고 이후 세상은 잿빛으로 변했다. 그 무렵 재일교포 유학생인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변 씨에게 말했다. "일본에서는 당신도 마음 편히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다"고. 그래서 결혼했다. 그리고 일본에 건너갔다.
남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파란 신호등이 켜져 있는 동안 횡단보도를 다 건너지 못 해도 경적이 울리지 않았다. 서울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변 씨는 다시 활기를 찾았다. 그는 현재 오사카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횡단보도를 다 건너지 못한 장애인을 기다려주는 여유.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하드웨어'의 작은 차이가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를 바꾼다
한국에서 재활병원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푸르메 재단이 마련한 이번 취재는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취재에 동행한 박대운 씨는 일본에서 '소프트웨어'의 차이를 느꼈다고 말했다. 그도 두 다리를 쓰지 못 하는 장애인이다. 그는 장애인을 위한 엘리베이터 시설 등과 같은 '하드웨어'에서는 별 차이를 못 느꼈다고 말했다. 그 대신 문화와 제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소프트웨어'의 차이가 거저 생겼을 리는 없다. '하드웨어'의 뒷받침 없이 '소프트웨어'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지체 장애인들의 '의지'(義肢. 인공으로 만든 팔과 다리. 의수(義手) 및 의족(義足)을 아울러 이르는 말)를 만드는 공장이다. 장애인들이 가장 먼저 접하는 '하드웨어'이기 때문이다. 변미양 씨는 "의수와 의족의 품질이 장애인들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의 지체장애인들 중에는 다친 다리와 의족을 연결하는 소켓 부분이 부드럽지 않아 다리에서 피가 난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6살 때 사고로 다리를 다친 박대운 씨는 학창 시절 내내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장애인이 찌푸린 표정을 짓고 있으면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족이 몸에 맞지 않아 다리에서 피가 나는데도 웃는 표정을 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의족과 다리를 연결하는 부분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느냐의 차이. 이 작은 차이가 거리에 나선 장애인들의 표정을 바꾼다. 그리고 그것이 장애인을 대하는 비장애인들의 태도를 바꾼다.
대를 잇는 장인 정신이 몸에 맞는 의족을 만든다
기자가 찾아간 곳은 오사카에 있는 카와무라 의지 주식회사. 일본 최대 규모의 의지 제조 업체다. 사장 카와무라 케이 씨의 할아버지가 이 회사를 세웠다. 의족을 만드는 일은 이 집안의 가업이었다. 카와무라 사장 역시 의지를 만드는 기술자인 의지장구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 창업자인 카와무라 가즈코 씨는 평생 오사카에서 의지를 만드는 장인으로 지내다 노년에 이 회사를 세웠다.
카와무라 집안의 역사는 이 회사의 역사인 동시에 의수와 의족의 역사다. 이 회사 건물 한켠에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나무와 가죽으로 된 메이지 시대의 의족과 첨단 소재로 만든 현대식 의족이 함께 전시돼 있다.
히로히토 일왕이 태평양 전쟁 당시 다리를 다친 군인에게 하사한 '어제(御製) 의족'이 눈에 띈다. 일왕이 하사한 의족을 받은 군인은 그것을 쓰지 못했다. '어제 의족'으로 땅을 밟고 다니는 게 황송해서? 그건 아니다. 몸에 맞지 않아서라고 한다. 그 군인은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의족을 가보로 보관하다 이곳에 기증했다.
공장 안으로 들어가도 바깥 공기와 별 차이가 없다. 화학 약품 냄새와 먼지가 별로 없다. 공기정화장치가 한 시간에 세 번씩 가동되고, 먼지나 유해물질이 많이 나오는 공정은 따로 분리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장 내부는 항상 외부인에게 개방돼 있다. 청결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왜 그렇게 깨끗함을 강조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장애인 보장구는 기본적으로 맞춤 생산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사람마다 몸의 크기와 생김새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를 무시하면 일왕이 하사한 의족을 평생 가보로 모셔두기만 했던 군인과 같은 경우가 생겨난다. 결국 몸의 특징에 맞춰 보장구를 만들어내는 기술자들의 섬세한 손놀림이 관건이다. 그리고 이런 섬세한 작업은 청결한 환경에서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보장구 산업은 장애인 고용 확대의 기반
36년째 이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가라 테루오 씨. 그도 한쪽 다리를 쓰지 못 하는 장애인이다. 그는 적어도 이 공장 안에서는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것 때문에 불편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 회사 직원은 700명 정도다. 이중 장애인의 수는 30명 쯤 된다.
카와무라 사장은 이 회사에서 근무하는 장애인의 수가 몇 명이냐는 질문에 잠시 머뭇거렸다. '장애인'이라는 규정이 모호하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직원을 뽑고 관리할 때 장애인인지의 여부를 중요하게 고려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장애를 경험한 직원들이 되도록 많이 포함됐으면 했다. 보다 전문가적인 태도로 업무에 임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과 한국은 닮은 점이 많다. 그 중 하나가 인구 고령화의 급속한 진행이다. 이런 현상을 일본이 먼저 겪었고 한국이 뒤따라가고 있다. 인구 고령화에 따른 문제점으로 여러 가지가 제기됐다. 그 중 하나가 노동력의 부족이다. 장애인 고용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은 단지 인권과 복지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이처럼 경제적 맥락에서도 나오고 있다.
이 회사를 안내하는 홍보 담당직원은 이 회사에서 생산하는 보장구가 장애인 고용을 늘리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며 흐뭇해했다. 장애인들이 일자리를 얻고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으려면 좋은 의수와 의족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거의 같은 수준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보장구도 많이 나왔다"며 "이런 보장구를 활용해 장애인들의 경제 활동 참가율이 높아지면 결국 정부의 세수가 늘어나 복지 예산도 확충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장애인들이 경제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지원하면 결국 복지 확대를 통해 다시 장애인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선순환 구조가 그려지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다.
10%의 차이가 가져올 변화?
하지만 이런 낙관적인 전망을 꼭 수긍하기만은 어렵다. 1990년대를 거치며 진행된 일본 사회의 우경화 때문이다. 일본의 우경화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은 주변국 국민들에게는 상식에 가까운 사실이다.
그리고 어느 사회나 그렇듯 이런 우경화의 영향을 가장 민감하게 받는 것은 복지 부문이다. 고이즈미 정권은 장애인 복지 부문에 대한 '개혁'을 표방하며 '장애인자립지원법'을 제정했다. 지난해 10월 일본 의회를 통과해 올해 4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이 법의 취지는 "장애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자립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정부가 무상으로 지원하던 부분을 축소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비판이 따랐다. 정부가 '개인의 자립'을 명분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회사 역시 이런 정책 변화의 영향권 안에 있다. '장애인자립지원법'의 시행에 따라 올해 4월부터 장애인들은 가격의 10%를 지불하고 보장구를 사용해야 한다. 나머지 비용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공공보험이 부담한다. 얼핏 들으면 이게 왜 우경화된 정책인가 싶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전에는 비용 전액을 공공 부문이 부담했다.
겨우 10%의 차이지만 그 함의는 간단치 않다. 과거에는 이 회사와 같은 업체들이 품질 경쟁만 하면 됐다. 의사의 추천과 장애인들의 호평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게 관건이었다. 그런데 이제 달라졌다. 가격과 품질 모두를 놓고 경쟁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정부는 과거보다 단지 10%만 줄어든 예산을 지출하게 되는 게 아니다. 전반적인 가격 인하에 따라 훨씬 큰 비용을 절감하게 된다는 게 정부의 계산이다.
그 대신 개별 회사들은 가격과 품질 중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를 놓고 고민해야 한다. 그래도 가격의 10%면 거저나 다름없는데 굳이 가격 경쟁을 하겠느냐는 생각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맞춤 생산을 해야 하는 의수, 의족 등의 가격이 워낙 비싸기 때문이다. 수십만 엔을 넘는 게 기본이다. 이 회사에서 생산하는 의족은 약 20만~100만 엔(한화로 160만~ 810만 원) 정도다. 의수는 약 20만~30만 엔 정도다. 손가락은 16만 엔, 손 천체는 400만 엔 가량이다.
카와무라 사장에게 이런 정책 변화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고급화 전략으로 승부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높은 기술력을 가진 기업들이 고급화 전략을 취하면 군소 업체에서는 만들 수 없는 정교한 보장구를 써야 하는 장애인이 비용 때문에 구입할 수 없는 경우도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우리도 이윤 극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인 이상 어쩔 수 없다. 이윤의 사회 환원이 이뤄지도록 노력하겠다"는 싱거운 대답을 내놨다. 애당초 기업인의 몫이 아니었던 질문이었다.
고이즈미 정권의 '장애인자립지원법', 일본 장애인운동의 시험대
그래서 장애인운동 활동가에게 질문을 돌렸다. 오사카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하며 한일 장애인 교류활동을 하고 있는 변미양 씨는 "'장애인자립지원법'에 대한 대응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 법에 대한 투쟁이 일본 장애인운동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리라는 것이다.
일본의 장애인운동은 1974년 '푸른잔디회'의 투쟁을 계기로 크게 성장했다. 당시 장애인 아들을 보살피는 데 지친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졌다. 처음에는 부모를 비난하던 여론이 그 집안의 어려운 형편이 알려지면서 금세 동정론으로 바뀌었다. 오죽하면 자식을 살해했겠느냐는 것이다.
이 때 장애인 단체인 '푸른잔디회'가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장애인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환경을 조성하지 않고 그들을 부양해야 하는 짐으로만 여기는 인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푸른잔디회'라는 조직은 그 이후 부침을 겪었지만, 이들의 투쟁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앞서 변미양 씨나 박대운 씨가 이야기한 장애인에 대한 일본 사회의 섬세한 배려는 이들의 투쟁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하지만 일본의 장애인운동은 그 뒤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다. 1960~70년대 활발했던 사회운동의 전반적인 침체와 맞물린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장애인자립지원법'을 둘러싼 논란은 한동안 침체됐던 장애인운동에 다시 불을 지폈다. 지난해 일본 의회 앞에서 열린 반대 집회에 1만2000여 명의 장애인이 참가했다. 일본 장애인 운동사상 최대 규모다.
하지만 변미양 씨는 일본의 장애인 운동을 한국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한국에서와 같은 치열한 열기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변 씨는 최근 한국을 다녀갔다. 활동 보조인제 도입과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요구하는 활동가들의 치열한 투쟁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장애인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동안을 기다려 줄 여유가 없었던 한국, 그래서 떠났던 그곳은 이제 변 씨에게 희망을 보여줄 수 있을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