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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화교 학생들이 유독 의사 선망하는 이유는?"

[인터뷰] 한성화교중·고교 손수일 교장

서울 연희동의 한 학교 운동장. 교실에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이 저마다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재잘거리기 시작한다. "졸라 재수없어"와 "완전 짜증이야"를 연발하는 한 아이에게 다가갔다. 무엇이 그리 재수없고 짜증나는 것일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수업을 마친 뒤 가는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젊은 강사가 그렇게 싫을 수가 없단다. 휴대폰을 들고 수다를 떠는 아이들, 수업이 끝난 뒤에도 빡빡한 학원 일정에 시달리는 아이들. 모두 익숙한 풍경이다.

그런데 잠시 고개를 돌리면 '國父 孫中山 先生'(국부 손중산 선생)이라는 문구가 밑에 새겨진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 이곳은 화교들이 다니는 학교다. 올해로 개교 58년째를 맞는 이 학교의 정식 명칭은 한성화교중·고등학교. 일제에서 해방된 직후 서울의 화교들이 이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 학생 중 40% 가량은 화교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다. 나머지 아이들 중 대부분은 양친 모두 화교, 몇몇 아이들만 한국인 아버지와 화교 어머니를 두었다.

말끝마다 "졸라"와 "완전"을 연발하며 SBS 개그 프로그램 '웃찾사'를 빠뜨리지 않고 챙겨본다는 이 학교 아이들은 방과 후 학원에서 만나는 한국 학교 아이들과 자신들이 크게 다르다고 느껴본 적이 별로 없다. 화교 아이들이 놀림을 받거나 따돌림을 당했다는 것도 아주 옛날 이야기다.

그런데 이 아이들 중 상당수는 학교를 마칠 무렵 방과 후 학원에서 어울리던 한국 학교 아이들과 차이를 경험한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검정고시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학교를 졸업해도 한국의 교육부가 학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면 유학을 가야 한다. 외국에서는 이 학교의 학력을 인정한다.

이 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사로 재직했던 담 모 씨가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아간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 학교 졸업생이 정규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인권위는 담 씨의 진정을 받아들였다. 인권위는 13일 오전 국내 화교 학교의 학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출신국가를 이유로 한 차별 행위 등에 해당한다며 교육부총리에게 화교학교 학력인정 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를 따라 한반도에 들어온 화교는 그 이후 1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확고하게 뿌리내렸다. 인권위는 화교의 이런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화교 학교의 학력을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이날 발표한 인권위의 권고에 감격한 화교들은 한둘이 아니다. 이 학교 손수일 교장 역시 마찬가지다. 손 교장 역시 이 학교 졸업생이다.

그의 부모는 20세기 초 대륙의 혼란을 피해 중국 산둥성에서 한국으로 이주했다. 양조장 총무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리던 그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자식의 교육에 대한 열정만큼은 놓지 않았다. 그런 덕분에 그 역시 화교학교인 명동 소학교와 이 학교를 거친 뒤 대만사범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다시 한국에 돌아와 모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자신의 소년 시절을 보낸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그의 오랜 꿈이었던 까닭이다.

자신이 가르친 아이들이 정규학력을 인정받지 못 한 것은 손 교장의 오랜 안타까움이었다. 하지만 인권위의 이번 결정으로 이런 안타까움이 풀릴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한성화교중·고등학교 교장실에서 들뜬 표정의 그를 만났다.


"화교학교, 교육부 인가 받으나 마나"
▲ 손수일 한성화교중·고등학교 교장은 13일 인권위의 화교학교 졸업생에 대한 정규학력 인정 권고로 한껏 고무된 표정이었다. ⓒ프레시안

프레시안 : 인권위의 이번 권고를 계기로 화교 학생들이 정규학력을 인정받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손수일 : 그렇다. 담 씨가 인권위에 진정한 것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화교학교의 학력을 인정해줄 것을 정부에 요청해 왔다. 지난 6월 국무조정실 산하 규제개혁기획단이 외국인 학교에 관한 규제를 주제로 공청회를 연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도 화교학교 학력인정 문제가 다뤄진 적이 있다. 공청회를 앞두고 국무조정실 관계자들이 우리 학교를 찾아와 이 문제를 논의했다. 교육부에서도 전향적으로 검토하리라고 본다.

인권위의 이번 권고를 보도한 기사들을 보면 한국의 화교 학교가 총 17곳이라고 돼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더 많다. 서울, 인천, 대구, 부산에 각각 중·고등학교가 있다. 그리고 소학교가 26곳이 있다. 이렇게 총 30곳이 있는데 언론에 17곳이라고 보도된 것은 이중 정부가 인가한 곳이 17곳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나머지 13곳의 학교는 정부의 인가를 받지 않았을까. 인가를 받건 안 받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인가를 받아도 학력 인정이 안 되고, 정부의 지원도 없다. 굳이 받아야 할 필요를 못 느낀 것이다. 이런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 : 정규 학력을 인정받지 못 하는 것 외에 화교 학교가 어떤 제약을 받고 있는지 궁금하다.

손수일 : 한국에서는 화교 학교에 대해 재정 지원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학교에서는 고등학생은 일년에 324만 원, 중학생은 304만 원의 학비를 받고 있다. 한국 학교는 사립학교라 해도 정부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이런 경제적 부담이 없다.

가까운 일본과 비교할 때 매우 대조적이다. 일본에서는 화교 학교에 대해 학생 한 명 당 한국 돈으로 80만 원 가량의 지원을 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왜 화교 학교를 지원한다고 보는가. 정부가 화교 학교를 지원해서 얻는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최근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중국을 잘 이해하는 인재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다. 이런 수요에 화교 학교 졸업생들이 제격 아닌가. 한국 학부모들 중에도 자식을 화교 학교에 보내고 싶어하는 경우가 크게 늘었다. 비싼 돈 들여 중국에 유학을 보내는 것 보다 낫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정부가 유학으로 인한 외화 유출 때문에 고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화교 학교를 지원하여 활성화하는 것도 좋은 대책이 될 수 있다. 한국의 화교 학교를 나온 인재들이 중국과의 교역에서 활약하면 그 성과는 한국에 남는다. 한국 정부가 조금만 더 유연한 생각을 가지면 좋을 것 같다.

30년 동안 5분의 1로 줄어든 한국의 화교, 이유는?

프레시안 : 지난 수십 년간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의 수가 크게 줄었다고 들었다. 학생 수도 많이 줄었을 것 같다.

손수일 : 1970년대만 해도 우리 학교의 학생 수는 2000명이 넘었다. 그런데 지금은 620여 명 수준으로 줄었다. 수십 년 동안 많은 화교들이 한국을 떠났기 때문이다. 1960~70년대만 해도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의 수는 10만 명을 웃돌았다. 하지만 지금은 2만2000여 명 수준에 그친다.
▲ 한성화교중·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손문의 동상. 이 동상이 이곳이 화교 학교임을 보여준다. ⓒ프레시안

대부분 미국으로 떠났다. 내 경우만 봐도 그렇다. 나는 이곳에서 교편을 잡고 있지만 나의 두 아들은 한국에서 살 생각이 없다. 큰 아들은 대만에서 의과대학을 나와 그곳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 작은 아들은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현지에서 취업했다. 이런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화교에 대한 여러 제약 때문이다. 화교학교의 학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 중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1960년대에는 화교의 토지소유를 완전히 금지한 법이 시행되기도 했다. 게다가 1962년의 '긴급통화조치법'에 의한 통화 개혁은 화교들의 경제활동에 큰 타격을 줬다. 대부분의 화교들은 토지를 보유할 수 없어서 재산을 주로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끊임없이 이어진 서울의 도심 재개발 사업 역시 시내에서 음식점 등을 경영하며 살아가던 화교들을 밖으로 몰아내는 계기가 됐다.

이런 역사 속에서 많은 화교들은 한국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1990년대 말부터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 1998년에는 화교의 토지 취득이 자유화됐다. 일정 기간마다 외국인 등록을 갱신해야 했지만 2002년에는 영주 자격도 부여받을 수 있었다. 이미 크게 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이라고 본다. 올해 선거에서 투표권이 부여된 데 이어 정규 학력까지 인정된다면 한국을 떠나는 화교들은 더 이상 늘지 않을 것 같다.

"화교 학생의 꿈은 의사뿐, 다양한 진로가 열렸으면"

프레시안 : 당신은 한국 전쟁 직후의 혼란기에 화교학교를 다녔다. 화교를 대하는 당시 한국 사회의 태도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 같다.

손수일 : 내가 9살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지독한 혼란 속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 살던 한국 아이들과 참 함께 어울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다가가면 '짱깨'라는 놀림이 돌아왔다. 울면서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가 조용히 나를 쓰다듬어 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우연히 '짱깨'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거북해진다. 당시 나는 어린 아이였지만 어른들이 겪은 차별은 더 심했다고 한다. 한국인들에게 폭행을 당해 심하게 다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 한국의 대중문화에 푹 젖어 지내는 아이들. 이 아이들이 한국에서 좀 더 다양한 진로로 진출할 수 있다면 하는 게 이 학교 교사들의 바람이다. ⓒ프레시안

하지만 이것은 모두 지나간 이야기다. 요즘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 믿지 않을 것 같다. 화교라고 해서 아이들이 놀림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차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 학생들은 대학에 진학할 때 법과대학을 선호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우리 학교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법대를 나오면 공직으로 진출해야 하는데 화교는 공무원 시험을 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의과대학과 약학대학에 대한 선호가 매우 강하다. 물론 한국 학생들도 이들 학과를 선호한다. 하지만 우리 학교 학생들은 그 정도가 훨씬 더 강하다. 어지간하면 의대, 약대, 한의대에 진학하려 한다. 화교 출신으로 가장 높은 목표로 삼을 수 있는 진로가 전문직 자영업자이기 때문이다.

과거 많은 화교들이 다른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 주로 음식점을 운영했다. 그 당시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자영업이라는 틀에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이런 모습이 무척 안타깝다. 우리 학교 졸업생들이 이런 전문직 자영업 이외에도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데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직업으로도 많이 진출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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