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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속도'로 추락한 KTX 여승무원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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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꿈의 속도'로 추락한 KTX 여승무원의 꿈

[수기] "부모님 주름 늘기 전에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다"

KTX 여승무원들이 6일 그동안 농성을 계속해 왔던 용산역 농성장에서 철수했다. 철도공사가 서울 지방법원에 신청한 용산역 퇴거 및 영등포역, 광명역 출입금지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진 탓이다.

그뿐 아니다. 여승무원들은 지난 5월 철도공사 서울지역본부에서 공권력에 밀려 농성장을 내줘야 했으며 지난 7월에는 서울역에서도 쫓겨났다. 그리고 9월, KTX가 정차하는 모든 역에서 농성을 벌일 수 없도록 가처분 신청이 떨어져 그들은 농성을 당분간 중단하기로 했다.

그러나 KTX 여승무원들은 "농성장을 뺏긴다 하더라도 결코 저항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철도공사의 정리해고 철회와 직접고용을 얻어낼 때까지 싸우겠다고 밝혔다.

사실 지난 3월 9일 여승무원들이 파업을 시작하던 당시 아무도 그들의 파업이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지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280여 명이 지난 5월 최종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뒤 6개월이 넘도록 파업을 진행하는 동안 '아리따운' 젊은 여성들의 싸움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직장을 구할 수도 있었을 충분히 어린 나이의 젊은 승무원들이 왜 그토록 어렵다는 장기 파업의 길을 걷고 있는지 그 사연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KTX 여승무원들이 '꿈의 열차' 안에서 겪어야 했던, 예쁜 유니폼 뒤의 어두운 그림자를 윤선옥 조합원이 생생한 글로 전하고 있다. 이 글은 6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여성노동네트워크 주최의 "철도공사의 성차별과 KTX 여승무원 문제" 토론회의 발표문으로 쓰인 것이다.

<프레시안>은 KTX 여승무원들의 오랜 싸움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KTX승무지부의 동의를 얻어 이 글을 요약·전제한다. <편집자>

난생 처음 파업가를 부르다
▲ KTX 여승무원들이 지난 3월 9일 이래 6개월 동안 파업을 벌이고 있다. ⓒ프레시안

난생 처음 파업가를 불려봤다. 낯선 음과 모르는 노랫말에 입만 벙긋거리는 게 무안해 괜한 팔뚝질만 열심히 해댔다. 2006년 3월 1일 두꺼운 잠바에 배낭가방 하나를 들쳐메고 파업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동아대 차가운 강당에 짐을 풀고 흩내리는 진눈깨비에 손이 발이 온 몸의 감각이 먹먹해질 때까지. 그렇게 모르는 노래말에 모르는 몸짓으로 모르던 사람들과 함께했던 파업 전야제의 밤이 끝나갔다.

과연 무엇이 나를 파업까지 이끌었던 것일까? 지금처럼 확실한 신념도 없고 비정규직 불법파견이 무언지, 노동법이 뭔지도 몰랐던 내가 어떻게 3월 4일 철도 총파업이 끝난 뒤에도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었을까?

그냥 억울했다. 뭐가 무엇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단지 너무 억울했다. 내가 KTX에서 보낸 2년이, 그리고 2월 26일 사복투쟁부터 3월 4일 철도복귀까지 당했던 설움이 날 그냥 집으로 돌아가게 만들지 않았다. 나뿐 만이 아니다. 서울 승무지부와는 달리 제대로 된 노조교육 한번 받아보지 못한 부산승무원 대다수가 총파업이 끝난 뒤에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를 인터넷에서 TV에서 또는 신문 한귀퉁이 가쉽란처럼 스쳐보는 사람들이 과연 알 수나 있었을까….

꿈의 속도 300㎞로 추락한 장밋빛 나의 꿈

2004년 4월 1일 화려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KTX승무원이 됐다. '시속 300㎞ 꿈의 고속철도! 지상의 스튜어디어스'라는 이름으로 내 평생 받아본 적 없는 찬사와 주목을 받았다. 동네 사람들에게 직장동료들에게 사돈에 팔촌에게까지 싱글벙글 전화기를 붙잡고 자랑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이런 게 효도구나' 내 자신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철도공사 전환 이후 정규직 및 정년보장! 준공무원대우! 20대 여성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 1위!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이 화려한 장밋빛으로만 보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철도 개통일인 2004년 4월 1일, 개통일 첫 날부터 내 생애 첫 승무가 삐걱대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승무원이 차를 타는데 가장 기본인 승무다이아(열차운행시간표)가 1일 자정이 넘어도 나오지 않았다. 과연 내가 무슨 차를 어떻게 타야 하는지 모르는 불안감에 밤새 잠들지 못하고 뜬 눈으로 전화기만 바라봤다.

이렇게 내가 꾼 그 장밋빛 미래가 아스팔트 타르처럼 까맣게 타들어 가는 데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순식간에 정상으로 올라간 롤러코스터가 올라갈 때보다 더 빠르게 바닥을 향해 치닫는 것 같았다. 꿈의 속도인 시속 300㎞로 말이다.

'나빠지는 건강, 가중되는 업무', 일일이 말하기도 치졸한 그 시간들
▲ "우리는 '슈퍼 승무원'이 돼야 했다. 더 이상 눈을 돌릴 수도 없이 현실은 나를 다그쳤다." ⓒ프레시안

승무사업을 위탁 운영한다는 한국철도유통(구 홍익회)은 한 달이라는 견습기간에 승무에게 줘야 할 견습비를 떼어갔고 초과근무수당과 상여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부산에서는 초기 2개월 동안 한국철도유통의 사무공간조차 마련되지 않아 철도청 여직원 숙소라는 5평 남짓한 공간에서 100명의 여승무원이 유니폼 갈아입고, 화장하고, 혹 있을 결승에 대비해 8시간 대기하고, 승무가 끝나면 지친 몸을 쉬어갔다.

바로 옆에 있는 남자 팀장님들의 널찍한 락커실, 휴게실에서 경쾌하게 들리는 당구공 소리는 여승무원에게 먼 나라 얘기였다. 한참 뒤 마련된 여승무원 락커실과 휴게실도 인원에 비해 너무도 좁았으며 부산역에서 유일하게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 곳이었다. 그리고 1주일에 한 번 휴무는 어느덧 10일에 하루, 보름에 하루로 바뀌었다. 무리한 스케줄에 승무원의 대부분이 종합병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병원과 약을 달고 살았다.

그러나 나빠지는 몸 상태와는 달리 열차 내 업무는 하루하루 가중돼 갔다. PDA를 던져주고 종이 한 장을 읽어보라고 한 뒤 교육확인서에 싸인을 하게 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바로 PDA를 들고 열차 내를 검표하며 돈을 벌어오라고 시켰다. 검표를 해서 부정 승차객을 잡아내 벌어오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수익금에 대한 인센티브는 열차팀장이 가져갔다. 그리고 PDA 조작 미숙이나 계산착오로 생긴 손실분은 여승무원이 사비로 메꿔야만 했다.

몇 달 뒤에는 차내 화장실까지 맨손으로 청소해야 했다. 화장실 청소가 안돼 열차팀장 눈에 찍힐까봐 치마 유니폼을 입은 채 무릎을 꿇고 화장실 바닥을 닦았다. 타는 시간대가 1시간 내외로 자유로워 미리 착발역을 알 수 없는 자유석 고객의 검표업무 역시 처음에 철도공사 열차팀장의 업무였지만 어느 순간 여승무원의 몫이 됐다. '초슈퍼 승무원'이 돼야 했다. 일일이 말하기조차 치졸해 입을 닫아버리고 지낸 시간이었다.

사회 초년생 신입승무원에게 퇴사한 승무원으로부터 반납 받은 헌 유니폼이 지급되기도 했다. 이런 온갖 부당함을 지적하면 다음해 재계약을 빌미로 협박과 폭언이 쏟아졌고 선별재계약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들었다. 아파서 응급실로 실려 간 승무원에게는 "쓰러져도 열차에서 쓰러지라"며 일하러 나오라고 했다. 더 이상 눈을 돌릴 수도, 입을 닫을 수도 없이 현실이 나를 다그쳤다.

"새마을 승무원도 하는데…KTX 여승무원만은 사복승무 안된다"

그러다 서울에서 노조가 설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2005년 9월 처음으로 단체행동에 나섰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처음으로 KTX 여승무원의 실상을 알리는 전단지를 열차를 타고 내리시는 고객님들께 나눠드렸다. 유니폼에 '여승무원 직접고용'이라는 빨간 리본도 달았다.

그리고 2006년 2월! KTX 여승무원들이 조합원 총투표를 통해 90%가 넘는 압도적 가결로 총파업을 결의했다. 현장에서는 3월 1일 철도총파업에 대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2월 26일 KTX 여승무원은 철도노조의 조합원으로서 노조의 행동강령에 따라 사복투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KTX 여승무원은 승무 자체를 저지당했다. 열차팀장, 전무, 새마을 여승무원까지 모든 철도노조원은 사복승무가 가능하지만 KTX 여승무원만은 안된다는 희한한 논리가 작용했다.

승무제지를 항의하러 철도 정규직 노조원들과 함께 5층 열차승무사무소를 찾아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곧장 가면10m길인 철도유통 사무실를 빙 돌아 300m를 걸어가야 한다고 말하니 철도노조원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철도공사 사무실을 통해 곧장 가면 금방 가는 길을 왜 300m나 돌아서 가야 하냐고? 열차팀장님이랑 철도공사 직원들이 사무실 쪽으로 가면 시끄럽다고 해서 승무하러 갈 때만 곧장 가고 아니면 이렇게 돌아서 유통사무실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그분이 원통해하며 "그런 게 어디 있냐!"며 버럭 화를 내셨다.

그 순간 갑자기 울컥 눈물이 솟았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같이 유통사무실로 몰려가던 모든 승무원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울면서 공사사무실을 통해 가는 걸 막는 사람들을 밀치고 곧장 유통사무실로 갔다.

10m를 걷는 동안 깨달은 것, 보지 않으려 했던 '억울한' 현실
▲ "왜 나는 이 부당한 일을 한번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프레시안

왜 나는 이 부당한 일을 한번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났을까? 왜 나는 우리 KTX 여승무원만 열차팀장님과 타 열차의 승무원들과 같은 일을 함에도 철도공사 소속이 아닌 걸까? 왜 월급의 반 이상을 중간에서 착취당해야 하는 걸까? 왜 다른 철도직원들은 사복투쟁이 가능한데 왜 KTX 여승무원만 승무를 제지당하는 걸까? 왜? 왜??

그 짧은 10m를 걸어 들어가는 동안 수많은 생각이 밀려들었다. 그동안 스스로 귀를 막으며 보지 않으려 했던 현실이 한 조합원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급류가 되어 나를 덮친 것이다. 왈칵 울어버린 우리 KTX 여승무원의 가슴을 덮친 것이다.

한 승무원이 생리통이 너무 심해 열차를 탈 수 없다고 하자 관리자가 말했다. 피가 철철 넘치더라고 열차를 타라고. 열차가 시커먼 터널 안에 멈췄다. 열차 안에 불은 깜깜하게 다 꺼졌고 바닥에서 2m가 넘는 승강문에서 뛰어내려 승객들을 일일이 붙잡아드리고 짐을 들어서 환승시켰다. 하지만 열차팀장이 하면 안전담당, 우리가 하면 서비스 업무다.

민족의 명절 추석이다. 색색의 한복을 입고 열차를 타란다. 휴무인 승무원 역시 나와서 역에 서서 인사를 하란다. 하지만 승무 후 남은 건 한복에 걸려 넘어진 상처, 그리고 휴무였던 동료에게 남은 건 2500원짜리 식권. 열차팀장님은 명절비 인센티브 얘기로 바쁘시다.

시속 300km로 달리는 KTX열차 내에서 나는, 우리는 KTX 승무원이 아닌 KTX 여승무원이었다. 같이 승무를 하고 같이 검표를 하고 같이 안전담당을 함에도 남자팀장님은 전문직업인, 우리는 열차 내 눈요깃거리고 1년 단위 소모품일 뿐이다. 억울하다. 계약직이 뭔지 위탁이 뭔지 몰랐다. 사업 초창기에 으레 있는 시행착오일 뿐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 처음 했던 그 약속이 지켜질 줄 알았다.

그 10m를 걷는 동안 깨달았다. 그동안 너무 서럽고 억울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골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가슴에 분노를 품고 3월 1일 총파업에 들어갔다. 그 때는 사복투쟁 동안 보여준 언론의 관심, 그리고 우리의 영향력에 '정말 어쩌면 뭔가 달라질 수 있겠구나! 남들이 얘기 하는대로 1주일만 버티면 된다'는 얇은 희망이 우리에겐 있었다.

하지만 따뜻한 방에 따끈한 밥에 익숙한 나약한 육신은 파업을 전면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차가운 시멘트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온 몸이 꽁꽁 얼어붙고 제대로 씻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지 스스로 깨달아가는 1분 1초였다. 절대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던 의지는 시시각각 흔들리고 하루 이틀이 지나자 파업복귀자들이 속속 눈에 띄기 시작했다.

3월 2일 부산철도노조 산하 전 조합원들은 민주공원으로 거점을 이동했다. 이미 많은 조합원이 추위과 피로에 절어 심신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처음으로 철도노조는 정규직 조합원 외에 비정규직 조합원을 철도노조원으로 삼았고 철도노조의 주요핵심 5대요구안 중 하나가 'KTX여승무원 철도공사 정규직화'였다.

제대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교육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첫 파업! 그리고 노사 간의 좁혀지지 않는 의견차로 인해 노사합의가 이뤄지지 않는 원인 중 하나로 KTX 여승무원 문제가 거론됐고 KTX 여승무원에 대한 정규직 조합원 간에 암묵적 적대시가 공공연하게 나타났다.

왔다갔다 움직이는 것조차 거슬린다고 해서 10시간이 넘는 시간을 한 장소에 앉아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기도 했다. 혹시라도 미움을 살까 제일 늦게 밥을 먹고 알아서 다들 먹고 난 잔반을, 화장실을 우리끼리 조를 꾸려 치우고 청소했다. 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골은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파업장의 분위기는 흉흉했고 날선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모두들 신경이 날카로웠다.

돌아갈 길이 없었다, 다시 그대로 2년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결국 서울지하철 기장의 복귀를 기점으로 차례차례 지부별 복귀가 이뤄졌다. 몇 시간 후 부산도 고속열차 기장의 복귀를 시작으로 파업의 대오가 무너져갔다. 결국 3월 4일 오후 2시부로 철도총파업은 '선 복귀 후 협상'이라는 사실상의 백기투항으로 무너졌다.

KTX 승무지부는 조합원과의 토의를 거쳐 파업을 중단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오로지 우리만 남아 총파업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그 땐 정말이지 승무원으로 일한 2년 동안 그리고 파업하는 동안 받은 상처가 온 몸에 욱신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돌아갈 길 역시 없었다. 다시 그대로 2년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187일이 지났다. 바닥의 한기에 얼어 죽을 것 같던 겨울도, 체포영장·연행·고소고발·손해배상에 힘겨웠던 봄도 지나고 이제는 하얗던 팔뚝이 억센 구리빛으로 변한 여름이 왔다. 이젠 더 이상 파업가도 몸짓도 동지란 단어 역시 낯설지 않다. 단 일주일도 버텨낼 수 없을 것 같던 파업을 187일, 아니 그 이상 버티게 할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 억울함이 나를 파업으로 이끌었다면 또 그 무엇이 나를, 여기 남은 140명을 지금까지 이끌었을까?

열심히 일하는데 더 가난해지고, 민주주의에 살고 있는데 평등하지 못한 사회
▲ "열심히 일하는데 자꾸만 가난해져간다. 자유와 평등에 기반을 둔다는 민주주의 사회라는데 우리는 평등하게 대우받지 못한다."ⓒ프레시안

더 이상 정규직 조합원에 대한 미움은 없다. 전국 곳곳에 흩어진 철도 현장을 순회하면서 그들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노동자를 갈라지게 한 진짜 무서운 적! 노동자에게 목숨보다 중요한 생존권을 쥐고 노동자가 서로 서로에게 악다구니를 쓰게 만든 진짜 적이 누군지 이제는 분명히 알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노동유연화 정책이라고 해서 어딜 가나 비정규직이다. 이제는 비정규직도 모자라 중간착취가 필연인 외주위탁이 판을 치고 있다. 학교에서 배운 교통, 통신, 전기 등등 부문에 있어서의 국가의 노력, 공익성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열심히 일하는데 자꾸만 가난해져간다. 자유와 평등에 기반을 둔다는 민주주의 사회라는데 우리는 평등하게 대우받지 못한다. 이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단지 우리 KTX 승무원의 잘못은 이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있던 약자라는 데 있었다. 같은 일을 해도 싸게 쓰다 쉽게 버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걸려든 것이다. 100% 사회적 약자인 여성으로 구성된 집단에 대다수가 사회초년생이라 어리숙하기만 하다. 나중에 끽 하더라도 외주위탁에 1년 단위 비정규직이니 잘라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다

그렇다. 우리는 그들 생각대로 1년 단위 비정규직으로 280명 전원이 해고됐다. 187일이란 파업을 통해 진짜 적이 무엇인지 노동자의 권리가 무엇인지 알았다. 안 이상 포기할 수 없다. 더 이상 스스로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닫을 수 없기에 싸우는 것이다.

날이 조금씩 쌀쌀해져가고 있다.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차다. 한 계절만 더 보내면 이 곳 파업장에서 사계절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부산 내 자취방은 아직도 뽀얀 먼지가 싸인 채 겨울로 남아 있다. 파업 끝나면 연락하기로 마음먹은 친구들이 걸어오는 부재중 통화도 이제는 조금씩 뜸해지고 있다. 부모님께 미안해 더 이상 안부전화 역시 걸기 미안해진다.

하지만 분명한 건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세모를 네모라고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내 눈 앞에서 하는 철도공사, 정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정규직에 목 매는 정신나간 여자애들로 매도하는 몇몇 사람들까지. 우린 보여줄 것이다. 잘못된 것이 어떻게 바로잡혀가는지를. 진정한 믿음과 단결된 힘이 있다면 그 누구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진짜 내 소망은 찬 바람이 나기 전에 더 이상 친구들의 부재중 전화가 걸려오기 전에, 부모님의 지친 주름이 늘기 전에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소망에 같이 기도하기를 바라며 짧은 수기를 마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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