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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허무주의자들에게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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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허무주의자들에게 고한다"

[대화]〈12〉서경식 & 김상봉 : 디아스포라, 민족, 그리고 역사

재일조선인 3세 서경식은 1966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한국에 올 수 있었다. 당시 '재일거류민단 하계학교' 프로그램에 참석해 경주를 방문한 그는 먹고 살기에 급급해 문화 유적 따위는 돌볼 겨를이 없는 모국의 가난을 보았다. 그리고 경주의 한 박물관에서 제 몸뚱이조차 잃어버려 머리만 남은 석불을 보고 시를 썼다.

돌부처

머리가 아플 만큼 하늘 깊은 날
시골 마을 작은 박물관, 기와 조각 무너져 내릴 듯한 붉은 문을 들어서다
머리 하나 서늘하게 미소 짓고 있네
불타버린 돌단 앞 굳은 얼굴로 마주선 내 앞에
머리만 남은 그대는 담담히 미소 짓고 있네
비를 피할 수 있는 처마도 없고 위험을 지킬 철책도 없이
말라 숨죽은 잡초 위에 머리만 남은 그대
나는 그대를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매미도 울지 않는 여름 눈부신 빛 속을 나는 그대 향해 다가선다
비틀어져 볼품없는 소나무
그 조그만 그늘 속, 돌로 된 그대는 미소 짓고 있네
얼마나 긴 세월을 그대는 그렇게 웃어왔는가
제대로 된 논밭도 없는 산악 경상북도
가난하고 시커먼 백성들에게 그대는 그렇게 미소를 건네 왔다
하지만 세월의 태풍은 그대의 강건하고도 부드러웠던 몸을 앗아가고
코조차 떨어져 나가 여기저기 이끼가 돋기도 하였건만


그대의 이 안정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세월이 흐르게 만들었던 백성들의 눈물조차 마침내 말려버리고 마는
경상북도의 이 여름에 평화로이 웃고 있는 그대
그대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또한 무엇인가
나는 남의 나라 일본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그대의 이름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도시인의 손을 가졌으니 그대를 흔들어 움직일 수 없다
나는 야간열차와 배를 갈아타며 일본에서 왔다
그러니 이 마을에서 가끔 교토를 떠올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대는 분명 일본을 알고 있으리라
그대가 몸통을 잃어버린 것도 코가 떨어져 나간 것도 그 나라와 무관하지 않으니
그대 눈으로 그 나라 인간들이 이 나라에서 무엇을 했는지 보았을 것이다
나는 일본에서 온 나그네
그대는 왜 나를 비난하지 않나
그럴듯한 얼굴로 카메라를 들고 그대를 가엾어하려드는 이런 나를


그대는 미소 짓고 있네
정원석과 같은 산들에 벌레처럼 매달려 살아가는 백성들에 둘러싸여
그대는 미소 짓고 있네
시골마을 박물관 마당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짓는 그대
시커먼 세월의 흔적, 돌로 된 그대
그대를 금이나 동 같은 것이 아닌 돌로 만든 조상의 그 지혜가 얼마나 애틋한지
나는 그대 앞에서 무심결에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간밤에 해협을 건너 처음 이 나의 나라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그러니 나는 정말 납득할 수 없다


그대의 풍요로운 입가
어째서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뒤틀리지 않을까
그대의 부드러운 눈의 윤곽
어째서 피눈물이 흘러넘치지 않을까
나는 무엇을 구경하고 있을까
나에게 보이는 것은 그대의 부드러운 미소
하지만 내 귀에는 나의 관광으로 먹고 살겠다는
껌팔이 소년들의 조숙하고 쉬어버린 목소리만 날아드는 것이다

▲서경식 도쿄 게이자이대 교수(왼쪽) ⓒ프레시안

거리의 성매매 여성들이 15세 소년인 자신마저 붙들어 세우는 어둡고 우울한 모국의 모습, 또 그 모국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 첫 한국 여행을 통해 얻은 문제의식은 평생 그의 화두가 됐다. 조국 방문 후 2년이 지나, 그는 이 시들을 묶어 박일호라는 필명으로 자비 출판했다. 그리고 그 시집의 머릿글에서 첫 고국 여행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년 전 나의 첫 한국 여행은 고향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스스로의 존재기반으로서의 고향 또는 민족을 실제적으로 이미지화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나는 고향의 실체를 잡고 싶었다. 한국의 8월은 둔기로 얻어맞는 것처럼 더웠다. 나는 그 더위 속에서 마비되려는 의식에 피를 흘리는 듯한 방식으로 고향의 모습을 기록하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목격자이고자 했다. 목격자는 방관자가 아니다. 목격자는 언젠가 증언을 한다. 그리고 나는 목격으로부터 증언까지 나에게는 2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의 무능력은 나에게 진실을 증언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말은 공중을 떠돌고 의미를 잃어버린 채 허망하게 부서져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말은 그대들의 머리를 자극하는 데는 너무 가벼운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대들 일본인들에게 있어 나의 시는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모른다. 아마도 이 책은 내 마지막 시집이 될 것이다. 나는 일본어로 고향을 쓴다는 것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고, 모국어로 고향을 쓰기에는 나는 너무나 일본인인 것이다. 자, 나는 증언했다. 내일, 이미 나는 목격자에 머물러 있지는 않으리라."


서경식은 마치 평생을 '경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스스로의 미래를 예고라도 하듯이 재일조선인으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와 글 곳곳에 토로하고 있다. 서경식이 40년 전에 쓴 시와 글을 읽고 김상봉은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이 시와 글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김상봉 전남대 교수 ⓒ프레시안

전편의 대담("2006년 한국은 '고통의 역사'를 잊었나")에서 서경식이 '동아시아인으로서 공통성'을 쉽게 언급하는 한국 지식인들에게 문제의식을 느낀 것도 그의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에 기반한 것이다. 역사의 고통을 잊은 사회는 막연한 자부심과 긍지에 기반한 왜곡된 민족의식에 사로잡힐 수 있다. 이처럼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의식은 국가의 경계를 넘는 디아스포라가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현재', 그리고 '미래'와 연관된 것이기도 하다.

서경식은 20세기 소수자의 삶이 배어 있는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이 새로운 보편성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서경식이 김상봉과 만나는 부분도 이 대목이다. 김상봉 역시 (패권적,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해 왔기 때문이다.

서경식과 김상봉은 타자와의 만남이 가능한 주체를 꿈꾼다. 김상봉이 '서로 주체성'이라고 이름 붙인 그것은 서경식이 '디아스포라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대안적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자발적 연대를 통한 '공동체', 바로 이것이야말로 21세기의 '민족'이 되어야 한다.

대담 후반부를 발췌해서 소개한다. 두 사람의 대담엔 서은혜 전주대 교수가 배석해 통역과 진행을 도왔다.

"민족을 새롭게 정의해야 할 때"

서경식 : 윤동주의 시 '별을 헤는 밤'을 보면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프란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나온다. 윤동주는 이를 통해 열린 형태의 민족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본다. 민족의식이 형성되는데 타자와의 만남은 아주 중요하다. 타자와 만나지 않을 때 국수주의적 민족의식이 우선한다.

윤동주의 모어(母語)는 조선어였다. 나는 일본어가 모어다. 한국에서 일본의 지배는 35년 만에 끝났지만 아프리카처럼 100년 가까이 식민 지배를 받았다면 모어가 없어지고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개인들에게 모어가 절대적이라면 별 문제가 없다. 자기가 쓰고 있는 모어에 대한 의심이 없었다면 나도 운동주의 '서시'를 보고 이부키 같이 번역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 내 사고엔 일본적인 사고가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아름답다, 좋다는 느낌 자체가 일본어로 구성된다.

일본어라는 모어는 자기가 선택한 게 아니고 아기일 때 투입된 것이다. 어머니가 아기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것, 그것이 원초적인 폭력이다. 이 과정이 폭력으로 인식되면 근원적인 것도 의심하게 된다. 애국심이나 가장 깊은 수준까지 생각하면 자기가 쓰고 있는 말에 대한 의심까지 든다.

김상봉 :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고 하는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민족이 '실체'냐 '무(無)'냐 하는 잘못된 인식으로 빠질 수 있다. 민족은 '실체'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다. 집단적 주체다. 그것은 '우리'라는 공유된 자기-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있으면 존재하고, 그것이 없으면 사라진다. 진정한 주체성은 타자와 만남을 통해 형성된다. 언제나 타자와 만남을 통해 참된 의미의 주체성이 형성되고 그게 '서로 주체성'이다.

나는 이전에 민족을 가리켜 역사와 언어라고 하는 어떤 전제, 조건 위에서 수립되는 '공동 주체성'이라고 풀이했는데, 서경식 선생을 만나면서 내 안에 굉장히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타인과 만남에 전제가 필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은 역사나 언어라는 전제를 버려야할 때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땅에 들어온 피부 색깔이 다른 이주민들과의 '공동 주체성'의 형성이란 과제를 생각해 봐야 한다. 민족은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맞닥뜨린 '만남의 공동체' 정도로 느슨하게 개념 지어져야 한다.

윤동주 시인이 패, 경, 옥 등 이국 소녀 이름들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민족주의 개방성에 대해 개념적인 말로 형상화시켜야 하는 게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디아스포라적인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지금까지의 민족 개념이 아닌 다른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 혼자서 곱씹으면서 도달한 결론이 우리 시대에 추구해야 할 개념은 만남의 지평 그 자체를 민족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서경식 : 5·18에서 '서로 공동체'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이 다 나서서 싸운 것은 군사독재에 대한 분노, 일상적인 지역적 억압에 대한 분노 등이 근간이 됐다. 한국 사람이니까, 광주니까, 이렇게 보는 게 아니다. 다소 진부하지만 정치적 목표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 ⓒ프레시안

김상봉 : 5·18을 생각하면 정치적 이념에 앞서야 하는 게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의 문제다. 그것 없이 정치적 이념이 먼저 갈 때 인간은 수단화된다.

서경식 : 1960년대에 일본에 재일조선인들의 정체성이 문제가 됐을 때 일본 내에서 조선 문화를 얘기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주장은 일본이 고대와 중세 때 백제, 고려 등으로부터 문화를 전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것이다.

문화가 있다, 없다는 문제와 지배, 피지배는 다른 얘기다. '문화가 있다'고 강조하는 것은 자기가 천대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은 욕심이다. 그렇다면 '문화가 없는' 사람들은 지배당해도 되는가? 이런 사고방식은 서양인들이 인디언들을 문명화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남경태 옮김, 그린비 펴냄)에 보면 식민지 지식인의 인식의 세 단계가 나온다. 처음에는 백인에 동일화하려고 노력하고, 두 번째 자기들이 고대에 있어 얼마나 훌륭한 문화가 있었는지 증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고대 아프리카에 훌륭한 문화가 있었다고 해도 백인들은 그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문화를 시발점으로 자기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눈앞에 있는 싸움을 통해서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 세 번째 단계가 바로 디아스포라인 내가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파농도 디아스포라다. 알제리와 별 상관없는 사람이었지만 알제리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새로운 보편성을 위해 싸웠다.

김상봉 :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금 나누는 얘기들이 한국 사람들만의 얘기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보편성을 갖고 있다.

서경식 : 디아스포라적인 객관성이 있다. 디아스포라야 말로 자신의 존재조건, 즉 언어조차 의심하면서 그래도 남는 자신을 근거로 타자와 서로 공동체를 만들 수밖에 없다. 피부 색깔이 다른 이주 노동자를 한국 사람으로 만드는 게 아니고 그들과 만남을 바탕으로 새로운 보편성을 이 사회에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허무주의에서 나오는 삶의 의지?"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언제나 그게 마음에 걸린다.
외국이 숙소에서 눈을 떠, 잠들지 못한 채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삶의 실감이 급격히 흐려질 때가 있다.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다. 슬프다거나, 우울해진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과는 좀 다르다.
(…)
'누군가가 뒷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는 말이 있지만, 내 뒷머리를 이승으로 잡아끄는 힘은 너무 약하다.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계속 살아야만 하는가.
(…)
이렇게 나를 이 세상에 잡아매 두는 끈들을 그 어떤 것도 인공적이고 불투명한 것이다. 내가'죽음'을 향해 몸을 내밀었을 때 그 끈들이 나를 꽉 잡아줄 것인가. 그럴 것 같지 않다. 내 쪽에서 손에 쥐고 있는 끈을 살짝 놓으면 그걸로 그만일 것이다.(<디아스포라 기행> 46~49쪽)


김상봉 : 서경식 선생의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제일 가슴 아프게 읽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낯선 도시 호텔방에서 내가 뛰어내린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나를 붙잡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한 인간이 놓여 있는 측량할 수 없는 뿌리 없음, 허무함 등에 대해, 이 절규에 대해 내가 뭐라고 응답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허무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교양인이 아니라는 식의, 우리 시대의 가벼운 허무주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허무주의라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아스포라로서 아주 절대적이고 실제적인 허무의 체험과 또 정반대로 보통 허무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삶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이 어떻게 같이 갈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정말로 서경식 선생이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조금만 더 정면으로 선생이 그 지점을 대면해줄 수 있겠나.

서경식 : 아주 근본적인 문제다. 민족과 관련된, 디아스포라와 관련된 허무주의라고 할 때는 두 가지가 생각난다. 가네코 후미코(편집자 주: 조선인 남편 박열과 함께 1923년 히로히토 당시 일본 왕세자와 고관들을 폭살하려다가 붙잡힌 일본인. 1926년 3월 이들 부부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가네코는 석달 후 감옥에서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무정부주의자는 죽음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주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사생아라서 호적이 없었고, 그래서 소학교도 들어가기 힘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후미코는 가부장제와 국가 제도에 대해 아주 철저한 증오를 갖고 이를 끝까지 관철했던 사람이다. 그는 죽음으로 자기를 관철했다.

이봉창(편집자 주: 193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의 지시로 일왕 히로히토의 암살을 시도했던 인물로 그해 10월 사형을 당했다)도 마찬가지다. 과자점 직공, 철공소 직공 등을 전전하던 그는 유가다를 입고 게다를 신고 김구 선생을 찾아가 '죽고 싶다. 죽을 명분을 마련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봉창이 마지막에 히로히토를 암살하기 위한 폭탄을 가지고 일본에 갈 때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그는 평생 집착이 없었다. 이봉창도 다이스포라였고 그래서 그런 허무주의자의 분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 ⓒ프레시안

김상봉 : 삶에 집착하는 한 누구도 자유를 쟁취할 수 없다. 죽음을 무릅쓰고 자기를 걸 수 있다는 것은 별로 놀랍지 않다. 오히려 궁금한 것은 삶에 대한 의지다. 삶의 이유, 존재의 이유, 근원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허무주의 때문에 병든다. 삶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고 냉소에 빠지면 모든 게 다 면죄부를 부여받게 된다. 정반대로 그 허무주의를 참을 수 없을 때 맹목적인 우상숭배에 빠져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소련이 망하기 전까지 역사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 유토피아도, 절대자도 오지 않는 시대다. 서경식 선생은 디아스포라로 그걸 누구보다도 철저하고 처절하게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살았다.

서경식 : 진부한 말이 될 것 같아 쓰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정의'다. 정의롭게 살고 싶다는 욕심이다. 중국의 루쉰은,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어떤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길이 있다고 해서 걸어가는 게 아니다. 소련이 무너졌다고 해서 그만두는 건 싸움이 아니다. 근거가 없더라도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다. 전부 다 없어도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는 뭐냐고 물으셨는데, 그럼 전부 다 없으면 죽는 것이냐. 개개인의 허무주의와의 싸움이다. 19세기 러시아 허무주의자들은 다 귀족이었다. 사치스럽게 살 수 있었는데 노예를 해방시키고 재산을 나눠줬다. 이런 허무주의적 테러리스트들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변화가 있었다.

김상봉 : 수백년 전 사람이 경험했을 무조건적이고 직접적인 삶의 동력 같은 것은 이제 누구에게도 없다.

서경식 : 나는 유한이다. 국가나 국민은 무한이다. 내가 국가를 위해서 죽으면 불사가 된다. 새로운 우리라는 걸 구성할 때는 이런 사고방식을 거부해야 한다. 죽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직시하지 않는 한 국가나 국민이 재생되고, 국가주의나 국민주의로 후퇴할 수 있다.

진짜 자유인이 되려면 이것부터 거부해야 한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게 자기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 되는 길이다. 마음 아프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를 태어나게 만든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이 삶의 끈을 잡는 행위 자체가 될 수 있다. 이를 놓는 게 패배라고 생각해서 끈을 놓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내일 여기에서 몸을 던지고 죽었다고 해도 놀랄 필요나 가슴 아프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냥 자살한 것처럼 뚝 끊어지는 것도…"

허무주의와 삶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의 관계를 두고 두 사람 사이에 아주 가깝지만 결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보였다. 답이 없는 문제를 두고 대화는 끝이 없이 계속되었고 그럴수록 점점 더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불편한 긴장감이 자리에 있던 모두를 옥죄었다. 대화의 에너지는 거의 최고조에 달했다.

윤리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초월적 계기를 찾아내야 하는지, 혹은 그런 믿음에 기대지 않는다는 그 자체가 동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은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대답은 좀 더 철학적인 탐구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기에 이 정도로 대담을 마치기로 했다.

대담이 결말 없이 중간에서 끊긴 느낌이라 마무리 멘트를 부탁하자 서경식은 "그냥 자살한 것처럼 뚝 끊어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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