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55)에게 2006년은 특별하다. 3대째 일본에서 살아온 서경식이 한국을 처음 찾은 것은 1966년 그의 나이 열다섯 살 때. 그는 40년 만에 온전하게 모국을 '원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한 번도 모국에서 오래 머문 적이 없던 그는 3월부터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지내고 있다. 그는 40년 전 경주를 찾았던 일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경주를 찾은 느낌을 고스란히 살린 그의 40년 전 습작 시는 '모국을 잃은 자의 슬픔'을 말하고 있다. 바로 '디아스포라(diaspora)'의 삶이다.
비록 평생을 일본에서 살아 왔지만 서경식에게 한반도는 단순히 모국 땅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의 둘째 형과 셋째 형은 박정희 시대 국가보안법의 희생자였던 서승, 서준식이다. 1965년 한일 간 국교가 정상된 후 모국을 알기 위해 군사 독재 정권에 맞서는 모국의 동포들과 함께 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던 이제 스물을 갓 넘긴 재일 조선인 형제는 1971년 봄 간첩으로 몰려 각각 19년, 17년의 수감 생활을 했다. 그는 형들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모국과 인연을 맺었다.
어디에도 정을 둘 수 없었던 서경식은 수많은 사연이 깃든 미술 작품에 깊이 매료됐다. 그리고 그의 미술 작품에 대한 독특한 해석에 1980년대의 열정과 1990년대의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한국의 젊은이들은 푹 빠져들었다. 그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박이엽 옮김, 창비 펴냄)는 1992년 처음 번역돼 나온 후 15년 가까이 단지 입소문만으로 수많은 독자들에게 읽혔다. 그러나 그가 진짜 관심을 뒀던 것은 단순히 미술 작품이 아니라 그 작품에 녹아 있는 '삶' 그 자체였다.
서경식은 자기와 같은 처지의 수많은 디아스포라들에게 시야를 넓힌다. 그 중에는 아우슈비츠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탈리아의 유대인 작가 프리모 레비도 있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역사의 상처'를 증언했던 레비처럼 서경식도 기꺼이 '폭력의 증언자'가 되고자 한다. 지난 6월 20일 인사동 평화박물관에서 상영된, 그의 도움을 받아 일본 NHK가 만든 다큐멘터리 <아우슈비츠 증인은 왜 자살했는가>는 그 노력의 산물이다.
서경식은 40년 만에 머물고 있는 모국이 낯설다. 그는 일본에서 오른쪽으로 달려가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정면으로 거스르며 양심적인 목소리를 높여 왔다. 그러나 모국에 머물고 있는 지금 여전히 외롭다. 또 불편하다. 한 발자국씩 민주주의를 확장해 오던 것처럼 보이던 모국의 실체는 '자본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두 줄에 매달려 절벽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위기 상황이다. '역사의 상처'를 '증언'하기보다는 '망각'하는 길을 택한 지식인의 모습도 우려스럽기만 하다.
한 번도 '소수자(minority)'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 또 '소수자'이면서도 '다수자(majority)'라고 믿는 사람들 속에서 서경식은 계속 외로울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속 이웃들에게 손을 내민다. "너희들은 자신의 출생을 생각하라. 짐승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덕과 지를 구하기 위해 생을 얻은 것이다." 레비가 인용했던 단테의 말이다.
김상봉 이야기
김상봉(48)에게는 한때 '거리의 철학자'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1999년 대학을 떠난 뒤 그는 대학이 '연구를 잘 하는 것'과는 큰 상관이 없는 공간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지난 수 년간 묵직한 주제를 깊이 천착한 수 권의 저서는 그 물리적인 증거들이다. 특히 2006년 초 나온 <나르시스의 꿈>(한길사 펴냄)은 그의 전공인 서양 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그것의 극복 방향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담고 있어 출간 전부터 큰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런 성과를 주류 학계에서도 마냥 무시할 수많은 없었을 것이다. 2005년 7월 김상봉은 전격적으로 전남대에 임용돼 큰 화제가 됐다. 그를 임용한 전남대 철학과는 이미 정원이 가득 찬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부산 출신인 그는 전남대는 물론이고 광주와도 인연이 전혀 없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는 '지연'과 '학연'을 무시한 이 조치에 당사자 역시 적잖이 놀랐다. 특히 그가 대학 사회에서 기피하는 '운동권' 학자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더욱더 그렇다.
김상봉의 삶의 한 축이 '철학'이라면 다른 한 축은 '공동체'이다. 그는 이 땅에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바로서야 한다고 믿는다. 그 '교육'을 왜곡시키고 더 나아가 공동체를 좀먹는 '학벌'이야말로 꼭 해체되어야 할 '마지막 권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주장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그가 몸담고 있는 단체 '학벌 없는 사회'는 이 문제를 공격적으로 제기했고, 그는 항상 맨 앞에 섰다. 그가 펴낸 <학벌사회>(한길사 펴냄)는 이 운동의 기본 논리를 제공하는 책이다.
김상봉은 최근 한국 현대 사상사를 정리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쏟고 있다.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재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공감'의 폭을 넓혔던 20세기 한국 사상가의 독특한 사유와 경험이 계승·발전되기는커녕 잊히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20세기 현대 사상사를 정리하는 것은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이 땅의 보통 사람들에게 쥐어줄 수 있는 '한 자루의 칼'을 만드는 과정과도 연관돼 있다. 20세기 현대 사상이야말로 그들이 온 몸으로 체험한 역사가 새겨져 있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 번도 공부가 세상의 삶과 무관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강단을 떠났던 수 년간 오히려 더 많은 이웃과 눈높이를 맞추고 같이 공부하는 기회를 만들고자 노력했던 것도 이 연장선상에 놓인 일이었다. 그가 일선 학교 도덕 교사들과의 토론을 토대로 철학하는 방법을 처음 가르치는 도덕 교육의 문제점을 고발한 것 역시 이런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2005년 <도덕 교육의 파시즘>(길 펴냄)을 내놓아 논란의 중심에 섰었다.
김상봉은 스스로를 '긍정'하는 진정한 개인, 타자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는 개인, 그런 개인들이 '연대'하는 공동체를 꿈꾼다. 그는 이런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철학'이라는 칼을 벼르고 있다.
서경식-김상봉 이야기
두 사람이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하자는 얘기는 2005년부터 있었다. 그러나 가끔씩 한국을 찾는 서경식과 광주에 터를 잡은 김상봉의 시간을 맞추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다행히 서경식이 3월부터 서울에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상황은 좀 더 나아져 어렵사리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서경식이 연초에 펴낸 <디아스포라 기행>(김혜신 옮김, 돌베개 펴냄), <난민과 국민 사이>(이규수·임성모 옮김, 돌베개 펴냄)를 중심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사적인 경험부터 동·서양의 사상을 넘나드는 그들의 대화는 오후 4시에 시작해 밤 12시가 넘도록 계속 됐다.
서경식이 고등학생이던 1960년대 한국을 처음 방문해 경주의 한 사찰에 있는 석불을 보고 쓴 시로 시작된 두 사람의 대화는 서경식의 "한국은 이제 상처, 고통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형성된 자기 인식인 저항적 민족의식을 잊었나"라는 문제제기로 이어졌다.
제국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저항적 민족주의가 사라진 자리를 민주화와 경제 발전에 기반한 막연한 자부심과 자긍심의 발로인 '월드컵 민족주의'가 대신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두 사람은 우려를 표명했다.
이처럼 인간의 상처에 대한 기억이 없는 역사의식은 '자랑스러운 역사 찾기'로 이어지고 최근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도 이런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런 '월드컵 민족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폐쇄성은 시대적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다. 식민 지배와 2차례의 세계대전, 지역분쟁, 지구화된 자본주의 등에 의해 '디아스포라'가 늘고 있는 현실은 '민족이라는 공동체를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프레시안>은 두 사람의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해 2회에 걸쳐 소개한다. 두 사람의 대담엔 서은혜 전주대 교수가 배석해 통역과 진행을 도왔다.
"모든 고통은 일회적인 반면 모든 영광은 수치화 된다"
서경식 : 한국은 민주화 투쟁을 거쳐 소위 진보세력이 집권하게 됐는데 오히려 폐쇄적인 민족주의 국가로 바뀐 것 같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또 1965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으로 이어진 과거 개방적인 성격의, 또 제국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민족주의가 지금도 한국에 남아 있는지 묻고 싶다.
김상봉 : 민족주의가 자기에 대한 기억을 통해 형성된다고 할 때, 저항적 민족주의는 상처, 고통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형성된 자기의식이다.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소위 '월드컵 민족주의'는 더 이상 상처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은 민족주의다. 지금 우리시대 많은 한국인이 더 이상 역사의 상처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서경식 : 갖고 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김상봉 : 그렇게 표현해도 될 것 같다. 내가 위험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 이 지점이다. 인간의 상처에 대한 기억이 없는 역사의식은 영광스러운, 자랑스러운 역사로 흘러버린다. 정신적인 허영과 소수자 및 타자에 대한 배제는 늘 짝을 이룬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엷어지는 게 문제다. 일본에서는 과거 전쟁의 고통에 대한 기억이 엷어지면서 침략의 영광에 대한 향수만 남았다.
요즘 한국 사회의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도 마찬가지다. 그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고통을 겪었는가를 잊을 수 있다면 모든 역사는 다 아름다워질 수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식민지 개발론'이 나오는 것도 일제시대에 살아 있는 인격체로서 개인들이 얼마나 고통스런 삶을 살았는지 잊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박정희 시대를 기억한다고 할 때, 그 시대가 얼마나 끔찍한 시대였는지를 알려준 사건이 서승 선생의 '난로 사건'(편집자 주: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서승.서준식 형제가 간접 혐의로 보안사에 검거된 뒤, 서승 씨는 심문과정 중 심한 고문으로 자신의 의지와 달리 거짓 자백을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경유 난로 기름을 끼얹고 분신을 기도한 바 있다)이었다.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으면 그런 방식으로 사람이 죽음을 과감히 선택할 수 있을까 생각했고, 지금까지도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잊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고통을 잊는 한 역사의식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모든 고통은 일회적인 반면 모든 영광은 수치화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통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박제화된 것만 남는다. 수치화된 박정희 정권, 그의 치적만 남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억도 똑같다. 최근 경남 통영을 방문했는데, 고속도로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온통 작곡가 윤이상 선생으로 도배를 했다. 윤 선생은 한국 정부로부터 끝끝내 거부됐지만 그가 죽고 나서 한국 정부에게 더 이상 무해하게 됐을 때, 그의 수난을 그런 식으로 박제화, 상업화하는 것은 고인에 대한 최고의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한국 지식인들이 동아시아인의 공통성을 쉽게 얘기하나"
서경식 : 동감한다. '이 나라 사람들이 고통의 기억을 잊어버렸는가'에 대한 의문은 일반 젊은이들만이 아니라 지식인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최근 창비에서 주최한 한 포럼의 주제가 '동아시아인으로서의 공통성'이었다. 동아시아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서의 공통성을 갖고 미국의 일방주의에 저항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동아시아인으로서의 공통성'은 과거 일본이 아시아를 침략할 때 내세웠던 논리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한국과 중국은 일본에 계속 배신당했다. 어떻게 한국에서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공통성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자는 얘기를 그렇게 가볍게 할 수 있는가. 언제, 어느 시점에서부터 일본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는가. 최근 <한겨레>에 서강대의 한 중국전문가가 '동아시아인의 건배'라는 글을 썼다. 벌써 건배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한국인들이 역사의 고통을 다 잊어버렸는지 의심이 든다. 일본 시민들의 역사망각증, 즉 역사의 기억을 지우고 자기를 긍정하고 싶은 욕망을 보면서 불안하고 위험하게 느껴졌는데, 한국에 와서 점점 더 불안해지고 있다. 어떻게 이 나라 사람들은 식민지 경험이 있으면서도 일제 식민지 시절의 고통의 기억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김상봉 : 완전히 망각했다 보지는 않는다. 또 외적 조건이 완전히 망각할 수도 없다.
지금 우리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기보다는 즉자적이다. 광주에서 살면서 느끼는 것도 그런 부분인데, 역사에서 언제라도 다시 침탈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저변에 깔려 있는 한 방어적 무의식이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다만 역사의 고통에 대한 기억이 매번 즉자적으로 부딪힐 때만 환기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의식의 수면 아래로 내려간다면, 그 슬픔은 힘이 되지 못한다. 수동적인 의미의 고통의 감수성은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든다. 방어적이 되고 자기 보전 본능만 강해진다. 이럴 경우 고통의 기억은 인간을 용렬하게 만들 뿐이다. 이런 고통의 기억은 차라리 없는 게 좋을 수도 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고통의 기억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과 타자와 연대를 위해 자기 고통에 대한 성실한 성찰을 요구한다.
서경식 : 일본은 전쟁의 가해자인데도 히로시마, 오키나와 등 피해자로서의 기억만 보존해 왔다. 학생들을 데리고 히로시마 평화박물관에 가보면, 전부 피해의 기억이며 다 기호화돼 있다.
반면 한국은 피해자로서의 기억을 다 잊은 듯하다. 한국의 시를 보면 김수영 시인도 그렇고 신경림의 '농무'도 패자의 역사, 패자의 아픔을 담고 있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도 같은 범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패자의 아픔을 통해 자기 인식으로 형성된 감수성이 있었는데, 오히려 내가 그걸 잘 기억하고 있고, 한국 사람들이 신기하게 다 잃어버린 것 같다.
김상봉 : 더 늦게 전에 우리 시대의 지성사를 성찰해봐야 한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 수난의 역사를 살아 왔다. 그러나 타자의 고통에 대한 참여, 또는 연대로 확장되지 못했다. 오히려 단순한 자부심과 긍지, 이를 통해 왜곡된 민족주의로만 나타나는 게 대단히 위험스럽고 걱정된다.
이전 세대는 고통이 가까이 있고 거기에 사로잡혀 있다. 거꾸로 지금 세대는 그런 고통의 기억은 없다. 우리 세대가 6.25를 기억 못 하듯 지금 세대는 5.18을 기억 못한다. 이들이 아는 것은 그 이후에 누린 상대적인 경제적 풍요고, 이런 경제 풍요가 고통에 대한 기억을 다 희석시킬 뿐 아니라 막연한 자부심, 자신감을 주기까지 한다. 이런 자신감과 자부심이 그 이전까지 민족적 열등감과 묘하게 맞물려 별로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과도하게 표출된 게 '월드컵 민족주의' 등 '과도한 운동장 민족의식'이 아닐까.
서경식 : 지금 세대적 단절에 대한 말씀이 나왔는데, 젊은 세대의 경우 상상을 못 하니까 당시의 고통의 의미가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된 것은 젊은 세대보다 기존 세대의 책임이 무겁다. 프리모 레비 (편집자 주: 현대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했던 유태계 이탈리아인으로 2차대전 말 아우슈비츠로 이송됐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한 뒤, 40여 년 동안 문학 작품 등을 통해 자신의 경험에 대해 '증언'하는 작업을 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홀에서 투신자살해 당시 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같은 전쟁 생존자가 자신들이 겪었던 경험을 젊은 세대에 전달하려고 할 때 느껴지는 어려움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윤동주의 시도 하나의 예로 들 수 있다. 윤동주의 '서시' 중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을 이부끼 사토(伊吹鄕)라는 일본 사람이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일어로 번역했다. 이부끼는 윤동주는 기독교인으로 그의 시는 기독교적인 사랑의 표출이다, 미움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윤동주 시인의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가 윤동주의 시에 대해 "그는 일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없었을 것"이라고 얘기한 것을 자신의 번역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제시했다.
윤동주가 표현한 '죽어가는 것들'은 일제 치하에서 조선적인 것, 사라져가는 것들을 의미한다. 반면 이부끼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라고 번역한 것은 일본의 애니미즘(animism : 모든 것에 신이 깃들여 있다는 믿음)에 기반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깊은 미움과 동의적 의미다. 미움이 있으니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설사 윤동주가 일본사람들에게 기독교적 사랑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일본인들이 그렇게 주장해서는 안 된다.
"목격자는 방관자가 아닌 증언자"
김상봉 : 일본 사람들이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누군가를 학대했는데 그 학대받은 사람이 자기를 사랑해주기까지 바라는 것은 어린애 같은 기대 아닌가. 일본인들의 정신적인 허약함을 보는 것 같다.
서경식 : 이런 게 일본의 허약한 제국주의적 인식의 전형이다. 그래서 나는 일본인들에게 '상상 못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생각해보자', '바깥에서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를 안 보려는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생각해보자'고 얘기한다.
민족이 타자, 침략하는 사람에 대한 반동을 통해 형성된다면 그 관계성과 운동성을 제고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윤동주가 민족 시인이라고 할 때 어떤 의미인가. 모순적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난 디아스포라이므로 민족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윤동주가 왜 조선말로 시를 썼는가. 조선말밖에 못 썼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간도에서 자랐기에 초중등 교육을 조선말로 받았다. 그래서 자기 진심을 조선말로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그 당시 이미 조선의 문학가들은 일본어로 글을 쓸 수 있었다. 일본말을 쓴다는 것을 일본 문화를 배우는 의미도 있다.
김상봉 : 윤동주는 연희전문 출신이다. 연전이 당시 우리말에 대한 자의식이 상당히 강했다. 조선어학회 사건(편집자 주 : 1942년 일제가 국학연구의 탄압책으로 조선어학회의 관계자를 대거 투옥한 사건. 최현배 등 조선어학회 관계자들은 1년 동안 일본 경찰의 갖은 야만적인 고문에 시달린 끝에 '학술단체를 가장하여 국체(國體)변혁을 도모한 독립운동단체'라는 죄명으로 기소돼, 6년에서 2년까지 징역을 받았다) 으로 정인보, 김윤경 등이 잡혀가기도 했다.
난 윤동주 같은 이가 역사에 있어 '목격자'라고 생각한다. 정신의 강건함이 없는 상황에서는 순수함이 없다. 인간을 감동시키는 순수함은 여린 감수성으로 나타난다.
우리 역사를 보면 저항운동에 두 가지 전통이 있다. 하나는 테러리스트의 전통이다. 동학, 항일 의병, 서승과 서준식 선생이 바로 이들이다. 1970~80년대 군부 독재정권에 항거하면서 감옥을 들락날락 했던 이들도 이 전통을 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함석헌, 윤동주, 한용운은 '목격자'들이다. 하지만 '목격자'는 방관자가 아닌 '증언자'다. 시인, 철학자들은 증언자가 돼야 하고, 이 증언은 언어에 대한 치열함, 몰입이 필요하다. 이들은 저항의 역사 속에 같이 존재했지만, 우리 사회에서 증언자의 전통은 별로 진지하게 반추된 적이 없다. 이제 이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미 부여해야 한다.
끝끝내 할 수 없는 일을 안 했을 때 순교자가 된다. 수난의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적극적으로 해서 순교자가 된 게 아니다. 악한 사람들이 나의 악에 동참하라고 할 때 거기에 동참하지 못해서 순교자가 된다. 그래서 윤동주는 죽었고 함석헌은 죽지 않았지만 똑같다고 생각한다.
삶의 알량한 안락함, 명예, 지위 등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으려면 타협해야 한다. 같은 시인으로서 서정주와 윤동주의 차이는 사소한 것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차이가 절대적인 것이다. 자기가 선 자리에서 아닌 것은 죽어도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단순히 소극적이라고만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서경식 : 윤동주의 시 '십자가'를 보면 자기 운명을 아주 냉담하게 예측한다. 하지만 윤동주는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 사람들이 이런 것을 다 잃어버리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김상봉 : 그런 전통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지고 승화될 수 있다고 본다.
내 경우를 보면, 무엇이 살아있게 했는가? 내 인생에 각인된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서승선생의 '난로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일방직사건(편집자 주 : 1978년 인천의 동일방직이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노조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노조 사무실을 부수고 인분을 투척한 사건)이다. 내게는 이 두 사건이 하나이자 전부로 삶을 이끌어 왔다. 내가 당한 상처였다면 세월이 지나면서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의 고통이 한 사람의 삶에 지울 수 없이 각인돼 삶의 에너지로 살아 있는 경우가 있다.
이들의 고통은 혼자만의 무익한 고통이나 수난으로 끝나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수 많은 다른 타인들의 응답 속에서 역사가 발전한다. 내가 마음속으로 빚지고 있다고 느끼는 분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얘기는 그 고통을 누가 대신해줄 수 없었지만, 그분들이 품었던 이상주의적 열정이 절대로 역사 속에서 속절없이 배신당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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