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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성 트로이카'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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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성 트로이카' 친구들

[기고]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가 이재유, 이효정 등의 서훈

국가보훈처는 8일 8·15 광복 61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313명에게 포상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이날 발표된 포상대상자에는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가 다수 포함돼 있어 주목됐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전설적인 노동운동가 이재유, 생존해 있는 최고령 여성 독립운동가 이효정 할머니(93세)도 여기에 포함돼 있다. 이재유는 해외에서 주로 활동하던 당시의 많은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국내에서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그는 이현상, 김삼룡, 정태식 등과 함께 '경성트로이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으며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을 자유자재로 뚫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재유가 일제에 검거됐을 당시 언론은 '신화적 인물이 드디어 잡혔다'라며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이효정 할머니 역시 '경성트로이카'의 한 구성원이었다. 그는 1920년 동덕여고보 동맹휴학을 시작으로 노동운동과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이들의 이름은 오랫동안 그늘에 가리워져 있었다. 일제강점기 혹독한 고초를 겪었지만 해방 이후에도 신산한 삶을 살아야 했던 다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이재유의 삶과 투쟁이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1993년 출간된 〈이재유 연구〉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후 그동안 언급조차 금기시 돼 왔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조금씩 학문적 조명의 대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서 사회주의 계열이 담당했던 비중에 비해 그간의 연구는 너무 미진하다는 지적이 줄곧 제기돼 왔다. 또 이들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예우와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소설 〈경성트로이카〉의 작가 안재성 씨도 이런 답답함을 느끼고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경성트로이카〉는 이재유와 '경성트로이카' 활동가들, 그리고 이효정 할머니를 소재로 다룬 소설이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안 씨는 이효정 할머니를 직접 찾아갔고 그 뒤 꾸준히 교분을 유지해 왔다. 이 소설에 담긴 1930년대 경성(서울)의 손에 잡힐듯한 묘사는 이효정 할머니의 생생한 증언에 바탕을 둔 것이다.

안재성 씨가 정부가 이재유, 이효정을 독립운동가로 인정하고 포상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한 소회를 담은 글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이 글에서 안 씨는 이효정 할머니를 비롯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더불어 안 씨는 이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오랜 무관심과 외면을 절절하게 질타했다. 다음은 안 씨의 글 전문이다. 〈편집자〉

보통, 나이가 들어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는 어렵다고들 한다. 중고등학교 동창까지가 스스럼없는 진짜 친구일 뿐, 대학동창만 해도 경쟁심이 개입되며 직장동료나 사회친구는 삶의 공간이 바뀌면 그만이라고들 한다. 나이 차이가 많은 경우는 물론 친구의 범주에도 들지 않으며, 죽은 사람과는 더더욱 교류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시대를 넘나드는 우정의 시작, 이효정 할머니를 만나다

노동운동이며 작가 생활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음에도 진짜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로 대인관계에 인색한 내가 40대 중반이 되어 새로운 벗들을 만나게 되리라곤 생각 못했다. 전북 고창군 미소사의 도의 스님, 백담사 효림 스님, 한국학연구소 김경일 교수님, 그리고 일제하 서울에서 혁명적 항일운동조직인 <경성트로이카>에 가담해 동맹휴학과 동맹파업을 주도했던 이효정 할머니 같은 분들이다. 하나같이 나보다 연륜이 많고 살아 온 경험이 다름에도 때때로 전화로 안부를 확인하고 별다른 일 없이 만나 한가한 시간을 보내도 편하고 기분 좋은 분들이다.

이효정 할머니는 그 중에서도 독특한 경우다. 내 나이의 꼭 두 배인 95세(한국식 나이)로, 화장실 드나들기도 불편한 처지임에도 정신은 놀랍도록 맑다. 누운 자리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아 최근까지도 이영희 교수와 임헌영 교수의 대담을 통독할 정도다. 대화나 편지는 한 마디 한 구절이 모두 시적이고 사려 깊다. 이효정 할머니를 통해서 나는 과거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들의 천재성과 따뜻한 인격을 읽는다.

어쩌면 나는 할머니를 통해 이미 죽은 이들과 교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경성트로이카를 주도했던 이재유, 박진홍, 이관술, 이순금 같은 인물들이 그녀의 모습에 투영되어 되살아나는 것이다. 취재 과정에서, 책을 쓰면서, 나는 그들의 영혼과 일체가 되어 버린 걸까? 어디 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불행하게 죽어간 옛 친구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 되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히곤 한다. 95세 노파와의 우정뿐 아니라, 이미 죽은 영혼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제는 조금도 놀랍지 않다.

그들의 아름다운 청춘을 되살리고파

이효정 할머니, 나아가 경성트로이카 사람들과 친구 되기는 우연으로 시작되었다. 일제하 노동운동사를 공부하면서 1930년대 서울을 누비던 그들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으나 먼 옛날이야기처럼만 생각하던 내게 이재유 전기를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오고, 그 방면의 전문가인 김경일 교수님으로부터 생존자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을 때만 해도 꼭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 최고령 여성 독립운동가 이효정 할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좌)과 최근 모습(우). ⓒ프레시안

예나 지금이나 다수 국민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있는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삶을 재조명한다는 게 보다 많은 대중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작가로서 썩 내키는 일은 아니다. 사회주의 이론서를 읽었다는 이유로 한때나마 감옥살이를 했던 나의 국가보안법 전과기록은 더욱 부담이 되었다. 바로 전에 쓴 장편소설 <황금이삭>에 베트콩을 우호적으로 표현하는 문구가 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집안 어른들로부터 빨갱이를 찬양, 고무했다는 비난을 받고 우울하기도 했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꼭 써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것은 순전히 이효정 할머니와의 만남이었다. 취재라기보다 여행 삼아 내려간 경남 마산에서 몇 사람과 함께 찾아간 이효정 할머니와의 한나절은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가들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야말로 편견과 오해에 기초한 것임을 깨닫게 했다. 그때도 이미 90이 넘어 거동조차 불편했음에도, 할머니가 보여준 예리한 정신세계와 풍부한 감성은 동행했던 이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사회주의자라면 일단 교조적이고 냉정한, 날카롭고 전투적인 인물로 상상하는 나의 관념이야말로 오랜 반공교육이 심어준 편견임을 확인했다.

내 스스로 경험하였듯, 80년대 진보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의 대다수가 이타적이고 따뜻한 인품을 가진 이들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오르기도 했다. 이념이 곧 권력인 북한에서는 몰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버리고 저항운동에 뛰어든 탄압받는 시기의 진보주의자들에 대한 평가는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악의적으로 과장되고 왜곡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반공이 국시이던 파쇼정권 치하에서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박해를 받으며 반세기를 살아 온 할머니 자신은 과연 자신의 이야기를 써도 될까 오히려 걱정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로 인해 또 다시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렵지 않으나 누군가 자신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 또 그것이 책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실로 경찰이 아닌 사람이 찾아와 자신의 과거사에 대해 궁금해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것만도 일생에 겪지 못한 충격이었으리라.

나 역시 70년 세월을 넘어 날아온 신선한 충격 속에 할머니 집을 나서면서 이재유뿐 아니라 경성트로이카 사람들 모두를 복원해야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보수 세력의 편협한 시각으로 왜곡되거나 대중에 영합하고자 하는 작가들의 무관심 속에 역사의 그늘 속에 짓눌러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숨겨져 온 이야기들을 되살려야겠다는, 그들의 아름다운 청춘을 되살려 보겠다는 내 마음의 약속이었다.

일제 하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에 대한 무관심에 놀라다

<경성트로이카>를 쓰기 위해 일제 중반기 이후 국내의 항일운동을 공부하면서 여러 측면에서 놀랐다.

첫째는 1920년대 후반 이후 해방까지 민족주의 진영의 항일운동이 한심할 정도로 지리멸렬했다는 점이요. 둘째는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이 예상보다 훨씬 깊고 넓은 반경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시기 사회주의운동사에 대한 은폐와 외면이 경악할 수준이라는 점이었다.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세워진 역사박물관에 가보면 1920년대 이후 국내의 항일운동은 전무한 것처럼 보인다. 이조 말기 의병운동부터 대형 그림으로 설명되어 있으나 일제 중반기 이후 도표는 거의 없다. 해방되는 그날까지 총 한 방 쏘지 않은 채 이합집산과 권력투쟁에 몰두했던 상해임시정부가 마치 항일운동의 유일한 상징처럼 전시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1930년대 검거된 치안유지법 위반자가 해마다 수천 명임에도 그 대다수가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철저히 제외된 것이다.

또, 어떤 대형 도서관에 가도 일제하 사회주의자들의 항일운동에 대한 연구나 자료는 책장의 한두 칸을 넘기 어려웠다. 아니, 일제강점기 자료 전체를 합쳐도 책장 하나를 통째로 채우지 못했다. 중세 왕조사나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 자료가 책장 하나로 부족한 것과도 비교가 되었다.
▲ 이재유의 체포를 다룬 <경성일보> 1937년 4월 30일자 호외 기사. 1면 머릿기사로 크게 다뤘다. 당시 이재유를 검거한 서대문 경찰서는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프레시안

고의적인 은폐는 남한뿐 아니라 북한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남한에서는 진보적인 학자들에 의해 적지 않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으나 북한에서는 최고 대학의 교수들조차 국내 항일운동의 역사에 무지할 만큼 어두웠다. 경성트로이카 구성원 중 월북하여 고위직을 지냈던 박진홍과 이순금의 뒷소식을 알기 위해 여러 경로로 북한의 기록을 확인했으나 어떤 정보도 얻지 못했다. 역사학 교류를 위해 방한한 김일성대학 교수들에게 간접적으로 질문까지 해보았으나 전혀 처음 듣는다는 반응이었다. 답변을 거부했다기보다 애초에 배운 적도, 연구한 일이 없는 것이었다.

이런 실정에서 일제하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예우는 바라기 힘들었다. 예우는커녕 빨갱이였다는 이유로 이효정 할머니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90년대 초반 문민정부가 출범할 때까지도 감시와 통제 속에 살아야 했다.

이는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무지와 오해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경성트로이카를 비롯해 일제하 사회주의 조직의 제일 중요한 목표는 조선의 완전한 독립과 일본군 철수, 조선어 교육 등이었다. 인간평등에 대한 강령으로는 8시간 노동, 13세 이하 노동금지, 국민연금과 의료보험 실시 등 오늘날 대부분 실현되고 있는 내용들이다.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사회란 언젠가 이룰 이상적인 국가 형태를 의미할 뿐, 실천 강령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들로 이뤄졌고, 모든 것은 항일운동에 접속되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 정부가 사회주의 항일운동가들에 대해서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기로 한 것은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이효정 할머니를 포함한 다수는 여전히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해 왔다. 할머니의 가족들은 그녀가 일제 치하에서 수십 차례나 연행되고 감옥살이를 했던 경륜을 들어 독립유공자 포상을 요청했으나 보류 상태로 계류 중이었다. 책을 완성하고도 이러저런 이유로 수 차례 할머니를 방문하고, 시시때때로 안부 통화를 할 때마다 안타까웠던 것도 그 점이었다.

마침내 이효정 할머니로부터 이번 광복절에 이재유와 함께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게 되리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내가 직접 포상을 받는 듯 기뻤던 것은 작가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였다.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에 죽어간 이재유, 박진홍, 이관술 같은 친구들에 대한 일방적인 짝사랑이 결실을 맺은 것만 같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효정 할머니의 겸손은 혹독한 투쟁 감내한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의 표현
▲ 이재유가 속한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준비그룹' 사건을 다룬 <조선일보> 1937년 5월 12일자 기사. 사진 맨 위가 이재유. ⓒ프레시안

이효정 할머니는 늘 자신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 왔다. 유공자 지명을 받던 날도 친구들에게 미안하다는 말부터 했다. 자기보다 훨씬 더 열심히 싸운 동덕여고 동기동창 박진홍과 이순금 같은 친구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그들을 빼놓고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게 되어 미안하고 부끄러울 뿐이라고 말했다. 전화라서 볼 수는 없었으나 할머니의 눈에 맺힌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연구서가 아니라 소설 형태로 집필된 <경성트로이카>에서는 이효정 할머니 부분이 다소 과장되어 있기는 하다. 이재유와의 직접 만나는 부분은 또 다른 생존자인 이병희 할머니의 증언을 인용하기도 했다. 반면, 이효정 할머니가 수십 번이나 왜경에 연행되어 고생한 이야기들은 글의 맥락 때문에 제외되었다. 책에 나온 것과 똑같지는 않을지라도, 할머니가 그보다 더 열심히 활동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혼 이후 활동을 중지했지만 여전히 항일운동을 계속한 남편을 보조한다.

그럼에도 늘 자신은 한 일이 없다며 겸손해 하는 것은 당시 국내의 항일운동이 얼마나 힘들고 가혹했는가를 반증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해방되는 그날까지 전향서 한 장 안 쓰고 고문과 감옥살이를 감수한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과 존경의 표현이었다. 만주에서 총을 들고 싸우는 게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방어할 어떤 무기도 지니지 못한 채 맨손으로 싸워야만 했던, 오로지 동맹휴학과 파업, 그리고 자신의 희생 그 자체가 무기요 선동수단이었던 그들의 고난을 오늘의 우리가 어떻게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으랴. 더구나 해방 후에는 빨갱이로 지목되어 또다시 박해 속에 수십 년을 주눅들어야 했던 마음의 상처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한다고, 위로한다고 말할 수 있으랴.

해방 이후 활동한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정당한 평가 이뤄져야

다행히 한 많은 생을 마치기 전에 포상을 받게 된 것은 국가보훈처가 지난해부터 심사 지침을 바꾸어 일제하 사회주의운동가라도 해방 후 좌익 활동을 하지 않은 경우는 포상키로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효정 할머니와 가족들은 과거 어떤 정부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해낸 노무현 정부의 용기에 대해 감사의 말을 잊지 않는다.

언젠가는 해방 직후 좌익 활동을 한 인물들에 대해서도 일제하 활동을 인정해 주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조심스러운 진단이기는 하지만, 친일파와 친미 보수주의자들이 득세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모순에 저항하는 수단으로서 사회주의의 옳은 측면이 있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은 앞으로 내가 관심을 갖고 집필하려는 분야이기도 하다. 이 역시 관심을 보이는 작가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들 무관심하거나 혹은 조심스러워 한다.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산당 내지 사회당이 합법화된 오늘날 여전히 이런 이야기에 조심스러워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전쟁이라는 치유하기 어려운 살상극을 겪은 우리 윗세대가 살아 있는 한편으로 여전히 최악의 위험을 간직한 북한이 존재하는 한반도의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일제로부터 조국과 민족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회주의자들을 인정하는 일이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를 지키려 목숨을 바친 이들을 평가 절하하는 일은 결코 아니라는 진심을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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