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2차 협상이 '결렬'됐다고 하지만 노무현 정권은 이에 개의치 않고 애초 설정한 일정에 따라 협상을 밀어붙일 심산인 듯하다. 2차 협상이 결렬된 이후 한 모임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소신과 양심'에 따라 FTA 협상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판단했기에 협상 추진을 결단했다고 고백해 이를 확인시켜줬다.
예정된 전향…극복대상이 된 '그들의 민주주의'
사회 양극화로 고통받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농민 등 대중의 절규와 양식 있는 지식인들의 비판에 귀를 열지 않는 노무현 정권의 일관된 행태를 보면서 '그들의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도 아주 쓸모없는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문제를 반추하는 것은 단순히 노무현 정권이 한미 FTA 협상의 내용 및 형식에 대한 대중적 공론화 과정 없이 관료주의적으로 이를 추진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지구화를 추진하는 사회에서 국가의 권위주의화, 관료화의 확대심화는 일반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으며, 노무현 정권 또한 한미 FTA 협상에서뿐만 아니라 중요한 사회정치적 사안들의 결정에 있어서 이런 행태를 반복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한미 FTA 협상을 둘러싼 설전을 넘어 '노무현 정권의 민주주의'에 대해 근본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이 정권 스스로가, 또 많은 대중과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노무현 정권을 민주화 운동의 성과물로 인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민주정부'라고 믿고 기대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노무현 정권이 민주화 운동의 성과라는 것은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집권이 1987년 6월항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부분적이나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역사적 뿌리를 지적하는 것이 '지금 노무현 정권이 과연 민주적인 권력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이 될 수 없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한국사회에서 최소 민주주의는 이미 달성됐고, 지금 대중이 직면하고 있는 절박한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다방면에서 강제하고 있는 고통스런 삶이다. 이는 과거 군부독재 시절에 그랬듯이 '권위주의냐, 최소 민주주의냐' 또는 '파시즘이냐 최소 민주주의냐'가 화두가 아니라 '최소 민주주의냐, 더 많은 민주주의냐'가 화두임을 의미한다.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1997년 IMF 관리체제 속에서 김대중 정권의 등장과 함께 지배블록의 중심축이 되었고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로 '전향'해 대중이 겪는 고통을 외면하거나 공공연히 조장해 왔으며, 그로부터 야기된 사회정치적 문제들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방관해 왔다. 이런 의미에서 이미 이들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극복의 대상이 됐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초 진보적 발상들과의 교감 속에서 산출된 '민중지향적인 대중경제론'이 IMF를 계기로 최종 폐기됐다는 지적은 이를 반증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상황으로의 발전은 이미 예정된 것이기도 했다. 1987년 신군부의 '6.29 선언'이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동의에 의해 '6.29 협약'으로 관철된 것은 사회 각 분야에서 제기된 민중의 삶의 요구를 축소하고 배제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이른바 '87년 체제'가 지니고 있는 핵심적인 한계이자 지금 '거리의 정치(street politics)'를 활성화시키고 있는 근원이기도 하다.
'최소 민주주의'에 맞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노무현 정권이 민주화 운동의 '부분적인 성과물'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따라서 바로 이 지점은 노무현 정권으로 하여금 한미 FTA 협상을 저토록 강하게 밀어붙이게 하는, 반민중적이고 반민주적인 역사적 뿌리와 그 정체성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노무현 정권은 스스로를 참여 민주정부라고 인식하고 있고, 여전히 많은 대중과 일부 지식인들이 현 정권을 '민주정권'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를 선거에 의한 정부와 의회 구성이라는 최소주의의 기준에서 보면 이런 인식과 규정도 가능하다. 1987년 이후 네 번의 대통령선거와 총선거를 통해 정부와 국회가 구성된 마당에 노무현 정권을 '비민주적 권력'이라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 당혹해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인식 때문이며, 노무현 정권 자신이 '민주정권'의 실패를 바라는 '좌우 세력들의 음해'를 받고 있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규정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와 의회를 구성하는 과정이 민주주의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주권자들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정부를 구성하는 이유를 살펴야 한다. 그 이유는 사회 각 분야에서 재생산되는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사회관계들을 해소하고 극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수단을 갖추는 것이며, 이렇게 보면 문제는 크게 달라진다.
이런 의미에서는 억압적이고 비대칭적인 관계들이 이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한 민주주의가 완결된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목도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 일하는 가난한 여성들의 문제, 이주노동자 등 소수자의 문제 등은 이런 우리의 현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가 한편으로 고통스러운 현실의 관계들 속에서 삶을 영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 관계들을 더 호혜적인 것들로 만들고자 하는, 대중의 자발적이고 역동적인 열망과 실천에 의해 진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자, 농민, 여성, 의료인, 장애인, 소수자, 문화인 등 전 분야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참여하고 논의하고 비판하고 저항하게 하는 한미 FTA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대투쟁은 민주주의의 산 교실이기도 하다.
따라서 대중과 지식인들의 의사표현과 행동은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자체가 민주주의를 위해 옹호돼야만 한다. 그들이 기존의 법과 제도, 특히 신자유주의 보수정치 세력들이 지배하는 정당체계와 사회정치적 구조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쉽지 않은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현 정권이 진정 스스로를 민주권력, 민주정부라고 칭하고자 한다면, 최소한 그들의 의사표현과 행동을 불온시하거나 거기에 장애물을 설치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이런 소리들을 봉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특정 시점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그 자체로 치환해 그 확대심화의 가능성을 동결시키려는, 그렇게 해서 당대에 민주주의가 완성됐다고 선언함으로써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불온한 의도의 발로라고밖에 볼 수 없다.
지금 노무현 정권의 모습은 어떠한가. 신자유주의 권력의 가장 발전된 형태인 현 정권이 민주주의에 관한 이런 발상에 공감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평택 대추리 시위에서 그랬듯이 이번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보여준 노무현 정권의 원천봉쇄 작전은 이같은 회의가 기우가 아님을 다시 한번 입증해줬다. 이런 행태의 반복은 노무현 대통령이 말한 '소신과 결단'이라는 것의 근원적 뿌리가 무엇인지를 따져보게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노 정권의 담당자들이 최소 민주주의의 강력한 옹호자들이라는 점으로 귀결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선거에 의한 정부와 의회의 구성이라는 최소 민주주의의 내용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최소 민주주의조차도 대중의 눈물겨운 투쟁을 통해 획득한 소중한 성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되는 것은 노무현 정권이 최소 민주주의에 매몰돼 법, 제도 등을 사회구성원의 삶을 규정하는 사회관계들의 민주적 변화와 재구성이라는 맥락에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이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되면 비정규직 노동자, 농민, 사회적 소수자 등의 삶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비판을 코 끝을 스치는 봄바람 정도로 체감하며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근본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이 제시하는 것은 과거 권력이 그랬듯이 미래에는 좋아질 것이라는, 말 그대로 주관적인 소신에 근거한 장밋빛 환상뿐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고통스런 삶의 관계를 고발하는 대중의 비판과 항의, 절규가 민주주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이기주의, 혹은 기존의 법, 제도를 무력화하는 불온한 시도로, 따라서 관리의 대상으로만 인식될 뿐이다.
노무현 정권은 6월항쟁 아니라 6.29협약 계승한 정권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 강행을 비판하는 일부 논의들조차 이를 간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어느 논의는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민주주의를 왜곡해 6월항쟁을 계승한 노무현 정권의 '돌진적 개방화'를 촉진시켰다고 분석한다. 이런 맥락의 연장선에 있는 또 다른 논의는 탈권위주의 민주정부가 정치적 민주화와 동시에 경제적 자유화-시장화-개방을 추진함으로써 우리 국민을 '두 국민'으로 분열시키는 모순적인 얼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꿰뚫어 보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한미 FTA가 타결되면 사회의 갈등과 불안정이 심화돼 외국자본이 유입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한나라당 또한 '참여정부'가 망가지는 것을 즐길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걱정하기도 한다.
일견 의미 있는 지적인 듯하다. 하지만 무엇이 민주주의를 왜곡한다는 것인가? 이미 살펴봤듯이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6월항쟁을 계승한 노무현 정권의 민주주의를 왜곡시킨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무현 정권은 6월항쟁 자체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신군부와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타협한 '6.29 협약'을 계승한 정권이며, 그것은 최소 민주주의로 상징된다. 이런 목표는 이미 달성됐고, 지금 그들은 신자유주의로 전향해 한미 FTA 협상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고 있다.
즉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민주주의를 왜곡시킨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그들이 최소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지구화를 신봉하기 때문에 이런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는 단일하고 균질적인 그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이 왜곡되는 게 아니라, 애초에 복수이며 긴장과 모순, 그에 따른 불평등과 억압, 갈등을 다른 한 측면으로 하여 발전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고정될 수 없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내용과 형식을 지니고 있는 민주주의인가를 둘러싸고 상이한 사회정치세력들 간에 긴장과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최근 한미 FTA 협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긴장상황에 내재되어 있는 핵심적인 정치적 의미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왜곡시키거나 억압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더 많은 민주주의'일 것이다.
다른 한편, 무엇이 모순된다는 것인가? 오히려 노무현 정권의 민주주의가 이미 달성된 최소 민주주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회를 권력과 부를 지닌 소수와 그렇지 못한 절대 다수로 분리시키는, 이른바 '두 국민으로의 분화'를 조장하는 경제적 자유화, 시장화를 일관되게 추진하는 것은 아닌가.
노무현 정권이 한미 FTA 협상을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관계를 더 악화시키는 기획으로 보기보다 풍요를 가져다주는 단순한 경제의 문제로, 중립적인 시장의 문제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각 행위자들 사이에 공정한 거래가 이뤄지는 것으로 보이는 시장의 이면에서 실제 그 거래를 작동시키는 비대칭적인 역사적 인간관계, 권력관계들을 외면하기 때문은 아닌가?
이런 맥락에서 노무현 정권의 정치적 민주화와 시장의 자유화, 개방화는 서로 모순되는 게 아니라 호응한다. 지금 정작 중요한 모순이 형성되고 있는 지점은 노무현 정권과 그들의 민주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더 호혜적인 사회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세력들 사이에서 형성되고 있다.
한미 FTA 반대 투쟁은 '더 많은 민주주의'의 희망
바로 이것이 고통받는 대중과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사회정치세력이 직면해 있는 냉엄한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시도를 멈출 수 있는 저지력은 일국적 차원은 물론 지구적 수준에서 심화되는 비대칭적이고 억압적인 관계들을 더 호혜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투쟁하는 대중,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향한 진보세력의 비판과 저항뿐이다.
이번 한미 FTA 2차 협상의 결렬은 향후 그것이 어디로 귀착될지 미리 예단할 수 없으나 이런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2차 협상의 결렬은 노무현 대통령의 '소신과 양심'에 반한 보건복지부 장관의 의지와 결단 때문이 아니라 대중적인 요구와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소신과 양심을 갖고 한미 FTA 협상 추진을 결단했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고백이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공명도 주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그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와 같은 고백으로 인해, 스스로 주체할 줄 모르는 부와 권력을 지닌 세력들을 대변하고 있는 그의 정치적 행보가 가려지거나 정치를 이윤보장의 사적 기제로 전락시킨 그의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고통스런 현재의 삶, 사회관계들을 더욱 악화시키는 조치를 취하면서 그에 따라 고통을 당하는 대중에게 아이들을 위한 밝은 미래를 역설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미래는 오직 현재의 관계들을 매개로 해서만 자신의 모습을, 그것도 아주 조금씩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미 FTA 협상을 둘러싼 긴장과 갈등은 이 협상의 문제점을 다각도에서 드러내는 데 일조했을 뿐 아니라 노무현 정권이 말하는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돌아보며 '더 많은 민주주의'에 대해 심화된 인식을 공유할 수 있게 하는 이론적, 실천적 계기가 됐다.
한미 FTA 반대 투쟁은 민주주의를 화석화시키려는 시도에 대항하는 '더 많은 민주주의의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 한미 FTA가 신자유주의 지구화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한국사회가 대외지향적 경제발전의 전형적인 성공 모델로 회자돼 왔다는 점에서, 한미 FTA 반대운동은 향후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대한 세계적인 반대운동의 성패를 가를 분수령이 될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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