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찬성하는 연구자들과 반대하는 연구자들이 21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aT센터에 모여 이례적으로 장시간 토론을 벌였다.
'한미 FTA가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열린 이날 토론회는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주최한 행사이긴 했으나, 한미 FTA에 대해 상반된 의견을 가진 연구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모처럼 토론회다운 토론회로 진행됐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소득 양극화 해법' 주장에 '투기자본만 이롭게 할 뿐' 반박
토론회에서 이시욱 KDI 연구위원은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소득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비스업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한미 FTA는 이런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위원은 "한국의 양극화는 중국의 부상, 세계화의 진전 등 대외적 요인과 기업구조조정 등 대내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며 외환위기 이후에 급진전됐다"고 말했다.
그는 산업구조 고도화와 이를 통한 소득창출을 통해 양극화에 대처하는 재원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대안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FTA와 같은 시장개방과 양극화의 관계에 대해 "소득 양극화의 주된 원인은 정보기술(IT) 등과 같이 전문직 인력의 수요가 높아지는 방향으로 기술과 산업구조가 변화한 데 따른 것이지 시장개방 자체가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 지배적 견해"라고 말했다.
또 한미 FTA의 득실에 관한 논란에 대해서도 "한미 FTA의 거시경제적 효과의 절대 규모는 생산성 증가 정도에 좌우된다"라며 "관세율 인하에 따른 단기적인 효과 위주로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를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그는 "일각에서 개발도상국과 FTA를 우선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선진국과의 FTA를 통한 기술학습 효과를 고려하고 세계적으로 FTA가 확산추세에 있는 것을 감안하면 어느 나라와 먼저 FTA를 맺는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런 주장에 대해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해영 교수는 "한미 FTA 1차 본협상이 끝난 상황에서 포괄적인 평가는 아직 이르다"면서도 "그러나 현재의 추세로 진행되면 낙관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갈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이 교수는 이달 초 열린 한미 간 1차 본협상의 문제점으로 "서비스 공급의 현지 설립의무 면제에 합의해줘 서비스 산업을 통한 고용창출 효과를 기대할 수 없게 됐다"는 점 등을 제시했다.
그는 "투자 자유화 규정에 대해 한미 간에 의견이 접근했다는 것은 해외의 사채와 투기자본에도 내국민 대우를 보장해주고 기술이전 요구 등과 같은 이행의무를 부과하는 게 금지되며 투자자가 정부를 상대로 제소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미국에 쇠고기, 스크린쿼터, 자동차 배기가스, 약값 등 4대 현안에 대한 해결을 약속한 국민 무시, 협상문안 비공개, 협상분과를 미국 요구대로 구성한 점 등도 협상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저지른 치명적인 오류"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한국의 주권과 사회적 공공성, 절차의 공정성 등을 고려할 때 쌀을 협상대상에서 제외하는 것, 미국의 농업보조금에 대해 즉각시정을 요구하는 것, 자동차 세제 개편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데 대해 인정받는 것, 서비스 부문 개방대상을 열거주의로 변경하는 것, 신금융상품 시장의 개방을 유보하는 것, 개성공단 생산품의 원산지를 한국으로 인정받는 것 등은 우리가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 되는 사항"이라고 주장했다.
"제조업, 안정적 시장 확보" 주장에 "중소기업은 큰 타격 예상돼" 반론
장석인 산업연구원 주력산업실장은 "한미 FTA 체결은 우리 제조업 제품의 세계 최대 선진시장 접근 기회를 증가시키면서 이미 미국에 진출한 주력제품이 안정된 시장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장 실장은 "참여정부가 집중 육성 중인 차세대 성장동력 산업의 조기 산업화와 핵심 부품소재 산업의 글로벌 공급기지화를 위해서도 안정적인 시장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 한미 FTA가 결정적 모멘텀을 제공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또 "한미 FTA로 미국의 거대한 서비스 분야의 하드웨어 수요를 정보기술(IT) 등 우리 제조업이 뒷받침하는 상호보완적인 발전구조를 구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상환 경상대 교수(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장)는 "한미 FTA에 따른 제조업의 수출 증대는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선박, 철강, 반도체는 이미 무관세여서 FTA 혜택을 받지 못하며 자동차는 관세율이 2.5%로 매우 낮고 현지생산이 늘고 있어 수출증가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섬유, 의류 등과 같은 상품의 경우, 고가품 시장에서는 어차피 선진국과의 품질경쟁이 어렵고 중저가품은 후발개도국보다 가격경쟁력이 낮다"며 "특히 섬유사를 기준으로 하는 미국의 섬유의류 원산지 규정 때문에 중국 등 개도국의 섬유사를 수입해 가공수출하는 한국기업은 관세인하 혜택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아울러 "개방확대는 취약한 국내 중소부품, 소재기업에 충격을 줘 중소기업 영세화와 제조업 양극화를 심화시킬 수 있다"며 "이로 인해 대량실업과 불안정한 고용이 발생하는 등 노동시장의 변화도 예상된다"고 밝혔다.
그는 이에 따라 "농업과 서비스업을 협상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물론 제조업도 현행 관세율과 보호제도를 최대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비스업 도약의 계기" 주장에 "제2, 제3의 론스타사태 속출할 것" 반격
송영관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한미 FTA를 통한 외국인직접투자(FDI)의 활성화는 지식기반 서비스의 수요를 증진해 궁극적으로 지식기반 서비스 육성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고 내다봤다.
특히 한미 FTA를 통한 시장과 경쟁의 확대는 현재 국내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통신, 케이블방송, 운수서비스 등을 더욱 발전시킬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미국의 높은 서비스업 경쟁력 때문에 한미 FTA가 국내 서비스업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가 있지만, 이는 우리나라 서비스시장이 외환위기 이후 많이 개방돼 있다는 점을 간과한 우려"라고 반박했다.
그는 또 "자영업자 비중이 큰 음식숙박업, 도소매업, 부동산업의 경우 한미 FTA로 인한 영향이 미미할 전망"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이런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 교수는 "한미 FTA에 따라 국내 서비스 분야에 대한 미국의 투자가 확대된다 해도 신규투자보다 인수합병(M&A) 형태로 나타나 고용창출 가능성이 희박하고 의무 강제조항 금지 등으로 인해 경영 노하우 등 선진기법 이전에도 한계가 있다"며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이 교수는 "가장 우려되는 결과는 금융의 투기화와 탈민족화로 '론스타 사태'가 속출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으며 의료와 약품 등 공공서비스와 방송, 영화 등 문화서비스에서 공공성의 훼손이 심각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아울러 "정부가 산업구조 선진화의 구도를 어떻게 가져가려는지가 불분명하다"며 "한미 FTA를 통한 미국과의 경제통합은 서비스업 경쟁력 제고는 고사하고 애써 쌓아놓은 제조업 기반까지 잠식할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美 反덤핑 대응에 도움" 주장에 "투기자본 규제장치 사라져" 지적
고준성 산업연구원 산업세계화팀장은 "한미 FTA 무역구제 협상을 통해 미국의 반덤핑 규제 개선에 대한 우리나라 수출업계의 요구가 수용되면 반덤핑 절차에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되고 미국에 대한 수출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했다.
고 팀장은 또 "미국 조달시장 개방이 확대되고 불합리한 조달관행이 개선되면 세계 최대의 정부조달 시장에 대한 우리 기업의 접근기회가 확대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에 따라 "한미 FTA에서 반덤핑 문제는 우리가 미국 측에 요구할 수 있는 소수의 공격적 의제 중 하나"라면서 "이를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진시원 부산대 교수는 "무역 및 투자와 관련해 한미 FTA가 도움이 될 여지는 거의 없다"고 논박했다. 진 교수는 "한미 FTA가 체결되면 생산적인 자본뿐 아니라 투기적이고 파괴적인 자본에도 동등한 자유가 부여돼 사실상 투기자본에 대한 규제와 관리가 원천적으로 봉쇄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진 교수는 특히 투자분쟁 해결절차에 대해 "미국 투자자가 우리나라를 상대로 소송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면 우리나라도 같은 권리를 향유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한미 간 투자액의 거대한 비대칭성을 고려하면 미국에게 유리한 조약이 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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