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인신매매 피해자의 수는 세계적으로 70만에서 400만으로 추정되는데 이처럼 추계치의 차이가 큰 이유는 흔히 인신매매를 밀입국, 불법이주, 매매춘 등과 혼용하거나 그 성격상 정확한 파악이 어려운 데 기인한다. 공식통계로 자주 인용되는 지난해 미 국무부 인신매매보고서에 의하면 매년 80만~90만 명이 인신매매를 당하고 있으며, 이중 약 30%인 23만 명이 동남아시아에서 매매되고 있다. 또 이 지역 성산업 종사자의 30%가 18세 미만의 아동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금년 4월에 발표된 유엔마약범죄국(UNODC)의 보고서에 따르면 아시아 지역의 인신매매 피해자의 80%는 성적착취에, 20%는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인신매매 피해자들이 공장, 농장, 낚싯배, 가정에서의 강제노동, 특히 여성과 어린 소녀들의 경우 매매춘 등 성적착취에 시달리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현대판 다용도·다목적 노예제도가 뿌리내리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인신매매의 세계화
태국, 버마, 베트남, 방글라데시, 필리핀 등으로부터 우리나라, 일본, 대만, 멀리는 유럽과 호주, 미국 등으로 유입되는 인신매매 피해자들의 인권침해 문제는 이미 전지구적 차원의 현안이 됐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필리핀, 러시아 등에서 팔려온 여성들을 동두천, 의정부, 파주, 평택 업소에서 쉽게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1990년대 말에 비해 현재 이들의 숫자는 2~15배까지 늘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중국의 윈난성 출신 여성과 소녀들은 버마를 거쳐 태국으로 팔려가거나 다시 말레이시아, 필리핀, 대만 등으로 매매되기도 한다. 유럽에서는 체코, 에스토니아 등에서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으로 여성들이 매매되고 있다. 아프리카 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서아프리카는 아프리카 내 다른 나라로부터 유입, 매매된 사람들의 최종 기착지로, 특히 아동의 강제노동은 심각한 문제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최근까지 인간의 존엄성과 절대적 기본권을 송두리째 빼앗는 반인도적 범죄인 인신매매에 대해서 정치적으로나 인권적 측면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경계가 불분명한 이주와 인신매매 - 이주노동의 인신매매화
사회적 무관심과 정치적 외면으로 인신매매가 날로 기업화, 무장화, 국제화 되자 2000년 유엔 특별총회는 뒤늦게 '인신매매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이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유엔은 인신매매 네트워크를 차단하고 연루범죄자들을 강력하게 처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송출국, 경유국, 기착국들의 관련 법이 제각각인 탓에 인신매매 조직은 법망을 피해 손쉽게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
그동안 인신매매업자를 처벌하는 내용이 몇몇 인권관련 조약에 포함됐지만 인신매매에 대한 정의를 내린 것은 최근에 이르러서다. 인신매매를 처음 정의한 것은 2003년 12월 25일 발효된 유엔의 「여성과 아동의 인신매매 방지, 억제, 처벌을 위한 의정서」인데 이 의정서에 따르면 '인신매매'는 매매춘 등 성적착취, 강제노동이나 서비스, 노예나 노예와 유사한 행위, 장기적출 등 착취를 목적으로 이루어지며 물리력이나 강제력을 사용하고 납치, 사기, 기만, 권력남용 또는 상대방의 열등한 지위를 악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뿐만 아니라 매매되는 당사자에 대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약속이행의 대가로 금품이나 기타 이득을 얻고 사람을 모집, 수송, 전달, 은닉 또는 수령하는 행위를 포괄하고 있다.
이 의정서는 강제력 사용 여부를 기준으로 이주자 밀입국 알선(smuggling of migrants)을 인신매매와 구분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이 둘 간의 경계는 모호하기만 한다. 합법적인 이주의 요건이 까다롭거나 빈곤으로 인해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선택의 여지 없이 이주를 가장한 인신매매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이주노동의 탈을 쓴 강제 인신매매가 발생하게 된다. "국제적인 인신매매를 가장 강력하게 단속하는 길은 이주노동의 합법화다." 홍콩에 근거지를 둔 아시아이주노동자센터의 렉스 바로나의 말이다. 이는 밀입국 알선업체, 고용주와의 불리한 계약, 사기에 의한 강제노동, 유입국 공무원들의 부패 등으로 자행되고 있는 '이주노동을 가장한 인신매매'의 실체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특히 메콩강 유역, 태국북부, 라오스, 버마에 사는 20여개의 산악 소수민족, 즉 고산족(hill-tribes)은 불법적으로 이주노동을 알선하는 사람들과 인신매매업자의 주된 타겟이 되고 있다. 태국-버마 국경지역에 사는 고산족은 19~20세기에 티벳, 중국, 버마 또는 라오스에서 이주한 사람들로 주요 집단은 미엔(Mien), 카렌(Karen), 아카(Akha), 라후(Lahu), 몽(Hmong), 리슈(Lisu) 족이다.
문제는 태국 정부가 이들 고산족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을 뿐 아니라 태국 내에서 출생하는 버마, 라오스 난민의 자녀들의 출생신고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시민권도 없고, 출생신고나 혼인신고가 되지 않는 이들, 특히 여성들은 교육과 노동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공공보건 서비스의 사각 지대에 놓이게 되고 아무런 법적 지위를 갖지 못한 채 인신매매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증빙할 서류조차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이들에게 합법적인 이주노동이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인신매매로 내모는 정치적 상황
인신매매가 그 성격상 공식 통계에 포착되는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동남아시아 지역의 인신매매가 전체의 30%라는 비율은 이 지역의 현실을 반영하며 우리가 이 문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메콩강 유역에 국경을 접한 6개국 - 태국, 버마,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중국은 정치적 불안정과 억압,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 성차별, 빈곤 등 복합적인 요인들이 얽히고 섥혀 인신매매 유입-유출, 수요-공급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인신매매의 송출국이자 경유국이며 가장 큰 규모의 기착지인 태국은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유럽 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다. 따라서 주변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성매매가 만연해 캄보디아, 버마, 중국 윈난성 등으로부터 수 많은 이주민과 난민이 유입되고 있다.
캄보디아의 경우, 도시와 농촌 간의 사회경제적 불균형, 극심한 빈곤, 교육과 취업기회의 제한 외에도 내전에 의한 황폐화가 이들을 국경지대로 밀어내고 있다. 60년대 말~70년대 초 론롤 정부에 대항해 크메르루즈 게릴라들이 캄보디아 전 국토의 4분의 1에 해당되는 지역에 설치해 놓은 지뢰는 현재까지도 농지활용을 어렵게 하고 있다. 따라서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고향을 떠나 새로운 정착지를 찾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가족과 친지에 의해 돈을 받고 팔려나가 태국으로 넘어가고 있다.
1962년 자급자족형 '버마식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기치 하에 네윈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 오늘날까지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버마. 그러나 이는 결국 경제파탄을 불러오고 1988년 집권한 탄 슈웨이는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1990년 총선을 치렀다. 하지만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자 이에 위기를 느낀 나머지 아웅산 수지와 민족민주동맹의 지도자들을 구속, 가택연금 하며 정치적 탄압을 지속하고 있다.
소수민족에 대한 제도적 차별
이러한 정치적 현실에서, 버마족만을 인정하는 버마 군사정권에 대항하며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카렌민족연합 (KNU), 카레니 민족진보당(KNPP), 샨국군(SSAS)을 결성한 소수민족 소속의 여성들은 버마 군부의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남편이 군부의 강제노동에 동원된 사이에 버마군이 여성들을 집단 강간하는 일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나마 카렌족과 카레니족은 국경지대에 난민촌이 있으나 그것마저도 없는 샨족 여성은 군인들에 강간 당한 후 오히려 가족들로부터 "매춘부"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결국 이러한 여성들은 이를 피해 태국으로 밀입국하거나 팔려가는 신세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기본적인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 외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산업에 종사하게 되고 원치 않는 임신, 안전하지 않은 낙태, 에이즈감염 등에 노출되고 있다.
한편 버마 군사정권은 지난해 말 수도를 남부의 양곤에서 카렌족 거주지역 인근인 피인마나로 옮기면서 카렌족을 강제노역에 동원하기 위해 살인과 강간, 고문 등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인구 600만 명으로 버마 전체 인구의 7%를 차지하는 카렌족은 영국의 식민지배 시절 주민의 30∼40%가 국교인 불교가 아닌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50년 이상 무장투쟁을 벌여 온 까닭에 군사정권엔 '골칫덩어리'였다. 이에 최근 버마 군사정권의 폭정을 피해 탈출에 성공한 카렌족이 버마-태국 국경에 난민촌을 세웠다. 버마와 국경을 맞댄 태국의 매홍손 주당국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최근 버마 신수도 건설을 위한 강제노동 동원이 두려워 태국으로 넘어온 카렌족이 1841명에 달한다. 이들 중 여성과 아동의 숫자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오랜 난민 생활 끝에 이들의 미래가 국내 혹은 국경간 이주와 인신매매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것은 지나친 우려만은 아닐 것이다.
인신매매를 양산하는 '성 인지' 관점에 대한 무지
성 인지적(gender perspective) 관점이 결여된, 전통적 가부장에 기초한 인신매매 방지 정책은 도리어 여성을 인신매매에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버마 군사정권의 경우 인신매매에 대응한다는 명목 하에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여권 발급을 제한하고 25세 이하의 여성은 보호자 없이는 국경을 넘을 수 없게 함으로써 이들의 자유로운 이주를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주의 제한은 인신매매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보다는 오히려 동행인을 찾기 위해 여성들이 매매되거나 아예 밀입국을 시도하도록 내몰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뇌물수수로 자신의 배를 불리고 있다. 또한 불법 출국이 적발돼 본국으로 송환될 경우 7년간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한 버마의 법은 국경을 넘어 매매된 여성들이 본국으로 송환된다는 협박에 의해 보다 열악한 조건과 환경에서 착취당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인신매매와 불법 이주알선 등이 지속적으로 횡행하는 데에는 알선업자와 결탁한 태국 국경수비대와 관련 공무원들의 부패가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인신매매 과정에서 뇌물을 수수하는 것 외에도 알선업자, 그리고 이들을 단속해야 할 경찰들이 여성과 소녀들을 강간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지만, 이것이 적발되었을 때 피해자인 여성과 소녀는 본국으로 송환되거나 감옥에 갇히는 데 반해 업자와 경찰 등 공무원이 처벌받는 일은 거의 없다. 이것이 바로 '인신매매와의 전쟁'을 무색케 하는 근본원인 가운데 하나다. 반인신매매법을 제정한 나라든 그러한 법을 가지고 있지 않는 나라든 거의 동일하게 인신매매의 유출, 유입이 일어나는 것은 이 법의 집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성별화된 이주정책과 보호책의 일환으로 마련된 법률은 오히려 여성들의 합법적인 이주를 가로막고 있다. 일례로 합법적으로 이주할 수 있는 취업기회는 통상 건축, 노동집약적인 농경 등 주로 남성지배적인(남성중심적인) 부문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들은 이러한 합법적인 기회를 활용할 수 없게 된다.
피해자 보호정책, 국가간 공동정책 필요
이처럼 무력분쟁 등 국내 정치적 상황과 이로 인한 강제 퇴거, 경제적 빈곤, 소수민족에 대한 제도적 차별, 성차별, 관리들의 부정부패, 가부장적인 권위주의 등 이루 열거하기도 힘든 각종 요인들이 취약한 지역의 사람들, 특히 여성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는 인신매매와 불법이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국경을 넘나드는 인신매매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되어야 할 점은 합법적 이주의 폭을 확대해 원천적으로 불법이주의 발생을 줄이는 것일 것이다.
또한 불법이주와 인신매매에 대한 대응책을 구분하는 것도 필요하다. 즉 인신매매 피해자를 범법자로 취급,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로 인식하는 보호 위주의 정책과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감옥이 아닌 쉼터의 제공, 처벌없는 본국 송환, 의료적, 법률적 지원, 쉼터 제공, 적절한 노동기회의 제공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인접국가나 관련 국가들이 양자간 혹은 다자간 공동 정책과 해결의지를 갖고 이 문제에 적극 개입하지 않는 한, 여성으로서, 소수민족으로서, 하층민으로서, 불법이주민으로서 겪는 이들의 고난과 인권침해는 그 회복의 길이 요원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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