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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뭐 잘하는 게 있다고..

오동진의 영화갤러리

친구처럼 지내는 배우 권해효는 내로라하는 민주노동당 지지자다. 나는 뭐, 어느 특정당의 당원도 아니고 고집스러운 당파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구따라 강남가는 식으로 민주노동당에 덜컥 투표하는 사람도 아니다. 민주노동당원이어서인지 원래 그런 성향이 있어서인지 권해효는 때론 관념적으로 과격한 발언을 일삼는다. 종종 자신이 추구하는 이념적 방향과 실생활에서 괴리를 일으키기도 한다. 근데 난 그게 오히려 '인간적이어서' 좋다는 생각을 한다. 술을 엄청 좋아하는 권해효와 나는 그래서 제정신일 때는 논쟁을 벌이고 꼭지가 거나해졌을 때는 언쟁을 벌인다. 요즘 그와 나의 술자리 안주는 사표 논란이다. 나는 민주노동당 찍어 봐야 남 좋은 일만 시킨다는 주의고 권해효는 어차피 안되는 거, 소신과 이념이라도 지켜야 살 맛이 난다는 주의다. 하기사 요즘 돌아가는 품새를 보면 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뭐 잘하는 게 있다고... 지난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부시를 찍을 것이냐, 존 캐리를 찍을 것인가를 두고 할리우드에서도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었다. 대표적인 논객으로 떠오른 사람이 <볼링 포 콜럼바인>과 <화씨 9/11> 등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그 유명한 마이클 무어다. 마이클 무어는 마치 지금의 나처럼 미국 녹색당의 당수로 또 다른 대선 후보였던 랄프 네이더를 찍으면 안된다, 그러면 사표가 된다고 주장하고 다녔다. 할리우드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강경 좌파 부부배우인 수잔 서랜든과 팀 로빈슨은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며, 그럴수록 진보정당에 표를 모아줘야 한다면서 무식한 무어라고 공격했다. 결과적으로는 존 캐리가 워낙 큰 차이로 지는 바람에 양측간의 논쟁은 쓸모없는 것이 돼버렸지만 어찌 됐든 그 같은 논쟁은 어느 사회, 어느 정치구조에서도 늘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마이클 무어나 수잔 서랜든이 지금의 한국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보고 있으면 각각 어떤 충고를 할지 궁금해진다. 분명한 것은 그냥 극장이나 가서 영화나 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 <화씨9/11>의 마이클 무어(오른쪽)ⓒ프레시안무비
그러니까 문제는, 우리의 세상살이라고 하는 것이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늘 차선을 선택하는 상황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세상만사,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오죽하면 인기 개그프로에서 모든 걸 공짜로 얻으려는 한 백수가 끝맺음 말로 하는 대사가 늘 "우리나라에서 안되는 게 어딨니?"이겠는가. 안되는 게 너무 많으니까 개그에서라도 그걸 뒤바꾸고 싶어하는 욕망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 스스로가 지겹고 힘들어서 정말 얘기하기 싫지만, 스크린쿼터 문제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쿼터 논란은 워낙 복잡한 사안들을 다 끼고 앉아 있어 어디서부터 해법을 찾아야 할지 매우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싸움이 벌어져 있는 만큼 논의 구조를 매우 단순화시키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我)와 타(他)가 구별이 안되니까. 적과 동지가 뒤섞이니까. 그래서 늘 논쟁은 스크린쿼터 일수를 기존 146일로 회복시킬 것인가 아니면 정부 고집대로 73일 축소안을 받아들일 것이냐로 모아진다. 여기에서 다른 얘기를 하는 건, 참으로 한가한 사람 취급을 받거나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 취급받기 일쑤다. 최선만을 생각하는 사람들 틈에서 차선을 선택할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사람은 단박에 회색분자나 청산주의자로 눈총을 받는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작금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기승을 부리면서 전국 스크린을 장악하는 현상을 보이고 그에 따라 각종의 한국영화들이 일제히 동반하락하는 기미를 보이자 일제히 "그래서 스크린쿼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들 입을 모은다. 표면적으로는 맞는 얘기다. 그리고 그건 스크린쿼터 운동권 안에서 당연히 내세울 수 있는 얘기다. 그러나 논쟁의 범위를 조금 확대하면 그런 '직격탄'의 논리에 플러스 알파를 붙여야 할 사안들이 쏟아져 나온다.
화씨9/11 ⓒ프레시안무비
할리우드 독점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스크린쿼터 146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이상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할리우드 독점을 막는 것만큼 할리우드가 아닌 다른 대형 상업영화의 독주도 제어하는 장치가 필요한 것이 지금의 한국영화산업의 구조적 현안이다. 쿼터 운동가들은 말한다. 그건 한국영화산업 구조가 취약한 데서 비롯되는 얘기인 만큼 '先쿼터사수 後구조개선'의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놈의 구조개선이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쿼터를 사수한다 한들 문제의 골은 메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칫하면 쿼터운동이 지나친 '국수주의'적 행동으로만 비쳐질 가능성이 높다. 그건 구조개선에 소홀한 채 쿼터사수에만 몰두해온 지난 10여년의 결과가 보여준다. 영화계 현안중의 현안인 부율문제를 비롯해 입장권 통합전산망 구축 등 구조개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쿼터는 쿼터대로 풍전등화의 형국에 놓이게 됐다. 오죽하면 독립영화권에서 쿼터 투쟁으로 득을 본 측은 결과적으로 국내 메이저 상업영화권뿐이라는 얘기가 나오겠는가. 때문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발흥=스크린쿼터 사수'라는 단순 등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스크린쿼터 사수에 집중돼 있는 현재의 영화운동을 보다 다각화하고, 보다 체계화하며, 그럼으로써 보다 조직화할 필요가 있다. 세상사,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 때로는 자기가 지지하지 않는 당이 정권을 잡을 때가 있는 법이라는 걸, 이제는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뒤늦게나마 배우게 됐다. 내가 원하지 않는 정당이 그나마 지금까지 일궈놓은 사회민주화와 개혁 조치를 후퇴시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근데 정말, 정권이 바뀌면 스크린쿼터 문제는 또 어떤 질곡에 빠지게 될까. 이래저래 한숨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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