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홍(41)이 이번엔 연기 좀 했다. 물론 그가 지금껏 연기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나 <내츄럴 시티>, 가장 최근 것으로는 <아라한 장풍 대작전> 같은 데서 그는 눈매에 힘이 팍 들어가는 악역 연기를 선보여 왔다. 하지만 정두홍은 지금까지 배우보다는 무술감독으로서 좀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다. 무술감독은 카메라 앞보다는 뒤에 있는 적이 많은 법이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 제대로 카메라 앞에 섰다. 그것도 악역이 아니라 착한 사람으로. 악을 응징하는 사람으로. 류승완 감독이 만들고 본인이 직접 출연까지 한 새영화 <짝패>에서 정두홍은 류승완과 함께 제대로 한판, 액션의 불을 당긴다. 와이어 따위 쓰지 않는다. 몸과 몸이 부딪히는, 고전적인 '다찌마와리' 액션으로 처음부터 끝을 장식한다. 여기엔 거짓이 없다. 눈속임이 없다. 잔머리가 없다. <짝패>는 말그대로 지금껏 사람들이 겪어 왔거나, 또 겪음직한 액션의 합을 보여주는 데 힘을 쏟는다.
|
|
무술감독 정두홍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 액션연기에서 전문배우의 연기까지 자 그러니 이 영화의 액션 감을 두고는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다. 문제는 과연 정두홍이 연기가 될 것이냐는 데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됐다. 이번 영화에서 태수 역을 맡은 정두홍은 자신의 친구 왕재(안길강)를 죽인, 자신의 또 다른 친구 필호(이범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또 한명의 친구 동환(정석용)의 동생인 석환(류승완)과 힘을 합친다. 태수는 왕재의 아내이자, 그 친구를 죽인 친구 필호의 여동생 미란(김서형)에게 찾아간다. 술을 잔뜩 먹고 성큼성큼 거실 소파에 몸을 던진 태수는 잔뜩 취기가 돈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한다. "좆 같은 게 뭔지 알아? 내 친구를 죽인 게 또 내 친구란 거야. 니 남편을 죽인 게 내 친구인 니 오빠라는 거야." 뜻밖의 사실에 충격을 받은 한 터프 가이의 풀린 눈과 좌절한 목소리를 정두홍은 여느 연기자 못지않게 훌륭히 소화해냈다. 근데 도대체 테이크가 몇번이 갔을까? 모두들 알고 싶을 것이다. 약간 과장해서 열댓번을 찍었다. 만약 액션연기였으면 한번에 갔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이번에 다른 연기에 힘을 쏟았다. 연기하는 게 어땠느냐는 질문, 보다 정확하게 주연을 맡은 기분이 어땠느냐는 질문에 그는 한결같이 류승완 감독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만나는 그와 현실 속에서 만나는 그와는 상당한 차이가 느껴지는데, 영화 밖에서 그는 그렇게 얌전한 사람일 수가 없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얘기를 하거나 제스처를 취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질문마다 약간은 틈이 생기며, 무대에 나가서 인사를 할 때는 약간은 엇박자의 몸짓을 보인다. 그는 사실 매우 수줍은 사람이고, 자신을 내세워 본 적이 별로 없는 사람이며, 인생에서는 주연보다 조연으로서의 성실성을 더 먼저 깨우친 사람이다.
. | |
|
무술감독 정두홍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
세상은 말로만 사는 게 아니다 충고하건대 정두홍에게 <짝패>가 어떤 얘기냐고 묻지말라. 그의 입에서는 자세한 대답이 튀어 나오지 않는다. 대략 이런 정도. "친구의 복수 얘기에요." 인터뷰 대상으로 삼기에는 심히 결핍감이 생기는 인물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왜 그가 그렇게 단답형으로 대답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짝패>는 친구의 복수를 하려는 두 남자, 두 짝패의 이야기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 안에는 찌든 삶에 몸부림치는 이 세상 아랫 것들의 심란한 마음들이 담겨져 있다. 선과 악의 사는 '꼴'들은 그리 큰 차이가 없다. 지방의 한 소도시를 무대로 조그만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영화 속 인물들은 알고 보면 거기서 거기, 비루하긴 마찬가지다. 서로의 등과 배에 칼을 꽂고 몸서리친다 한들, 인생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이 복잡한 이야기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정두홍처럼 짧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냥…친구의 복수 얘기에요"라고. 아마도 그건 극중 인물들처럼 정두홍 역시 지난한 인생살이를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힘든 인생, 바닥 인생을 겪은 사람일수록 말수가 적은 법이다. 세상은 말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우석 감독이 12억을 쾌척해 경기도 파주에 정두홍이 그렇게 꿈에 그리던 '서울액션스쿨'의 개원식을 있던 날, 소주집에 앉아 정두홍은 말했다. "어렸을 때 5원이 없어서 빵을 사먹지 못하던 때가 있었어요. 내가 어렸을 때처럼 돈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아요. 액션스쿨에서 배우는 스턴트 연기자들에게 수업료니 뭐니해서 돈을 한푼도 받지 않아 왔던 건 그 때문이에요. 난 배고픔을 알아요. 배우고 싶다는 게 어떤 심정인지 압니다."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를 배우고, 남달리 무술에 능했으며, 자연스럽게 이소룡과 성룡을 우상으로 삼게 됐던 이 아이는 자연스럽게 무술의 세계, 곧 스턴트의 세계로 들어오게 된다. 그때가 1990년대 초반이다. "1991년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로 데뷔하기 전, 우연한 기회에 스턴트 연기자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게 됐죠. 현장을 찾아갔더니 그러더라구요. 차에 부딪혀서 떨어지는 장면이 필요한데 할 수 있겠느냐고요. 그래서 할 수 있다고 그랬죠. 촬영 현장에 간 첫날, 차에 치이는 장면을 찍었죠. 그때... 어떻게 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원래 차에 치이는 장면도 다 매뉴얼이 있는 법이다. 차가 들이받기 전에 옆구리를 들어 올리고 한쪽 다리를 본넷에 걸치게 한 다음에 자동차 앞 유리에 굴러 들어갔다가 다시 굴러 떨어질 때는 한쪽 어깨부터 접어서 충격을 흡수하게 한다는 등등. 하지만 정두홍에게 있어 스턴트 연기의 시작은 그런 매뉴얼이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생짜'로 부딪히는 것부터였다. "드라마 촬영을 할 때였던 것 같아요. 마포대교에서 떨어지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때 잘못 떨어졌죠. 물에 떨어지는 순간 충격 때문에 장이 파열됐어요. 물속에 가라앉았다가 떠오르는 그 10초동안 입안에 피비린내가 가득했어요. 순간 아 이게 죽는 거구나 했어요. 난 죽으면 안되는데, 살아야 되는데 하는 생각이 머리에 스치더군요."
. 인생을 진실되게 살려는 남자 그런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정두홍이 이번 <짝패>에서 액션연기 아닌 전문배우 연기를 한 건 사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뭘 못하겠는가. 차에도 받쳐 보고, 가느다란 철선을 매고 고공에서 위험한 공중제비를 돌기도 했으며, 한강다리에서까지 뛰어내려 본 사람이 뭘 못하겠는가. 어쩌면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것은 정두홍이 지금껏 겪은 일 가운데 가장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연기자는 연기로서 말하는 법이다라는 얘기가 있지만 정두홍 같은 이에게는 연기자 역시 그가 살고 있는 삶의 테두리가 말을 한다는 느낌을 준다. 삶의 진실한 사람은 뭘 하든 진실한 법이며 그의 연기가 다소 익숙치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서 결코 책잡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오히려 약간 엉뚱한 듯해서 좋고, 오히려 그게 더 리얼해서 좋다. 삶은 결코 깔끔한 법이 없으니까. 삶은 원래 거친 거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두홍은 액션연기를 할 때 더없이 빛이 난다. 공중을 붕붕 날으며 이단 옆차기에 앞차기, 돌려차기까지 해낼 때면 어쩜 저렇게 잘 할 수 있을까 감탄사가 터져나온다. 객석 손잡이를 저절로 꽉잡게 만든다. 이번 <짝패>는 정두홍의 영화인생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건 그가 주연을 맡은 작품이어서가 아니다. 그가 어렸을 때 그렇게도 꿈꿨던 것, 그러니까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을 비로소 실현시켜 준 영화이기 때문이다. <짝패>는 비루하지만 진실되게 살려고 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다. 정두홍은 지금껏 그렇게 살았다. <짝패> 속의 정두홍이든 <짝패> 밖의 정두홍이든 그가 진정성 있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