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6일 혼혈인 및 결혼이주자에 대한 지원대책을 마련했다.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위원장 이혜경)는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국무총리, 여성가족부, 보건복지부, 법무부 등 관계부처 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국정과제회의를 열고 '혼혈인 및 이주자의 사회통합 기본방향'과 '여성결혼이민자 가족의 사회통합 지원대책'을 확정했다.
최근 미국 슈퍼볼 MVP를 수상한 한국계 미국인 하인즈 워드의 방한을 계기로 혼혈인의 사회적 차별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급증하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이번 대책은 그간 우리 사회가 혼혈인 및 이주자 문제에 대해 무관심과 냉대로 일관해 왔다는 점에서 비약적 발전이다.
하지만 결혼이민자에 대한 기본적인 통계조차 없을 정도로 전무했던 정책을 이주 과정부터 정착 후 적응 단계까지 갑자기 완비하려다 보니 적잖은 진통이 예상된다. 당장 차별시정위가 이날 제시한 안에 대해 천정배 법무장관은 "눈에 보이는 불법체류자들을 허용하자는 것인데 국가 권력이 그렇게 하긴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다. 관계 부처간 의견 조율이 쉽지 않을 것임을 예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결혼이민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 vs '이주노동자에 대한 싸늘한 시선'
또 이날 차별시정위에서 발표한 정책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이주자 및 외국인에 대한 이중적 시선을 엿볼 수 있었다.
결혼을 통한 이주는 지구화된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별에 따라 다른 이주의 한 방식이다. 중국, 필리핀, 몽골, 베트남 등 저개발국가 여성들은 결혼을 통해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으로 이주한다. 역방향의 이주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결혼'과 '이주'는 따로 떨어져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위장결혼'이라는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노동자로 한국에 올 수 없는 여성들 중 일부가 결혼을 통한 이주를 선택한다. 외국인 노동력 유입에 대한 강력한 통제 정책과 남녀 간 서로 다른 자원의 교환을 의미하는 가부장적 결혼 제도가 맞아 떨어져 1990년대 이후 한국 남성과 저개발국 출신 여성의 결혼이 급속히 증가했다.
그러나 '농촌 총각과 결혼해 사는 필리핀 새댁'으로 이미지화 돼 있는 여성 결혼이민자에게 쏟아지는 온정적 시선이 이주노동자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여성 결혼이주자는 한국 여성과는 결혼하기 힘든 한국 남성과 결혼해 한국 가족제도를 유지시켜주는 고마운 존재지만 이주노동자는 불법 체류까지 하면서 우리나라의 부를 갉아 먹으려는 귀찮은 존재로 인식된다.
이날 발표된 '혼혈인 및 이주자의 사회통합 기본 방향'에서도 국내 이주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대책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인식조차 되지 않는 남성 결혼이민자
또 이날 발표된 정책은 '한국인 남성'의 관점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결혼 자체를 매개로 한 이동은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일 수 있겠지만 결혼이민자는 여성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주노동자로 일하다가 한국 여성과 결혼한 외국인 남성들도 엄연한 결혼이민자다.
이들 외국인 남성들은 여성 결혼이민자와 마찬가지로 혼인 후 2년이 지나야 한국 국적을 획득할 수 있다. 2005년 말 현재 한국인과 사실혼 관계에 있는 외국인 배우자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사람은 모두 7만5011명(여성 6만6659명, 남성 8352명)에 달한다.
하지만 '부계 혈통주의'가 공고한 한국 사회에서 이들 남성 결혼이민자들이 한국에 적응해서 사는 것은 여성 결혼이민자들보다 훨씬 어려운 과제일 수밖에 없다.
또 아버지가 한국인이어야만 자녀가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던 국적법이 지난 1998년 어머니만 한국인일 경우에도 자녀가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개정되긴 했지만 여전히 한국인 여성과 외국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양육 및 교육 문제는 심각하다.
한국 국적법, 속인주의 버리고 속지주의 택할 수 있을까
결혼이민자, 이주자, 혼혈인 문제는 궁극적으로 국적법과 연관된 사안이다. 한국 국적법은 자국 영토에서 태어났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삼는 '속지주의'가 아니라 부모의 국적을 기준으로 삼는 '속인주의'를 택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국가의 경계가 약화되고 노동자, 국제결혼 등으로 국가간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이 점점 증가하는 세계화 시대에 혈통에 근거한 '속인주의' 원칙만을 고수하기는 힘들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주 노동자가 국내로 유입되기 시작한 역사가 20년이 넘으면서 한국에서 태어난 이주노동자 2세들의 국적 문제는 이미 발생하고 있는 일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말을 쓰지만 이주노동자의 자녀는 영원히 한국인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국적법에 속지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이를 거부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이다.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은 지난해 12월 ▲대한민국에서 출생한 사람은 부 또는 모의 국적에 관계없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며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자를 둔 외국 국적의 부 또는 모 역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국적법 개정안을 제출하려 했으나 포기했다. 네티즌 등의 강력한 반대 여론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하인즈 워드의 영향으로 일시적 변화가 있을 수 있겠지만 국민들의 배타적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이날 차별시정위원회에서 발표한 정책들도 실효성을 갖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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