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사립대학의 일년 등록금이 1000만 원에 가까워지면서 많은 대학에서 등록금 인상을 둘러싼 갈등이 확대되고 있다. 총학생회와 대학본부가 의례적으로 실랑이를 벌이다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하고 등록금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던 예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경희대가 지난 13일 등록금 협의과정에 절차상 잘못이 있었다는 학생들의 지적을 받아들여 등록금 인상 여부와 인상폭 등을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학교가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등록금 인상에 대해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 온 학생들의 주장을 대학본부가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경희대에서 등록금 인상 재논의 결정을 끌어내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한 학생이 그간의 과정을 설명한 글을 〈프레시안〉에 보내 왔다. 대학 등록금 문제가 쟁점이 되자 정치권에서 지방선거를 앞두고 다양한 해법들을 내놓고 있지만, 정작 이 문제의 실질적인 당사자인 학생들의 목소리는 접하기 힘들었다. 이 글은 '등록금 1000만 원 시대'의 대학 현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구체적인 해법을 고민할 것을 우리 사회에 요구하고 있다. 〈편집자〉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더 이상 불안하게 만들지 말라"
"2006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A군이 입학한다. 그는 전년에 비해 6.8% 오른 285만 원의 등록금을 낸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아버지를 둔 그에게 285만 원의 등록금은 만만한 금액이 아니다. 그는 학자금 융자를 받아 1학기 등록금을 납부한다. 그런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부담이 더 커진다. 집안 형편은 그대로인데 등록금은 계속 오르기만 한다.
결국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A군은 군 입대를 선택한다. 2년 간의 군 복무를 마친 뒤 인터넷으로 복학신청을 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은 A군은 자기 눈을 의심한다. 군에 입대하기 전보다 등록금이 200만 원 이상 오른 것이다.
하지만 집안 사정은 변화가 없다. 아버지는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고, 대학 4학년인 형은 취업을 위해 어학연수는 필수라며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가기 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고 있다. A군은 절망한다.
등록금 때문에 군대에 입대했는데, 제대하고 복학해 보니 등록금 부담이 더 불어난 것이다. A군은 다시 학자금 융자를 신청하기 위해 과 사무실로 힘없이 걸음을 옮긴다."
이는 현재의 대학 등록금 문제를 방치할 경우 미래에 닥쳐올 상황을 가정하여 쓴 글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영화 <터미네이터>에나 나올 법한 먼 미래의 묵시록이 아니다. 요즘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예감하는 아주 가까운 미래의 상황이다. 주위의 친구들도 다들 공감한다.
빚을 지지 않고는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는 현실, 군 입대나 휴학을 한 뒤에는 더 큰 빚을 져야 하고, 취업을 위한 어학연수 때문에 다시 빚을 져야 하는 상황. '등록금 1000만 원 시대'가 도래한 2006년, 대학생들의 삶은 과거 어느 때보다 불안하다.
등록금 인상에 대해 대학생들이 거부하고 나선 것은 이같은 불안함에 저항하는 몸짓이다. '등록금 인상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정서가 깔려 있는 것이다. 필자가 다니고 있는 경희대의 사정 역시 마찬가지다.
대학본부와 총학생회의 '밀실야합'에 화가 난 학생들
경희대는 지난 1월 열린 등록금책정특별위원회를 통해 등록금을 지난해 대비 6.8% 인상하기로 했다. 등록금책정특위는 원래 총학생회 간부 외에도 2명의 학생대표를 포함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당시의 특위는 총학생회 간부가 아닌 학생대표의 참여가 배제된 상태로 열렸다.
총학생회는 '등록금 6.8% 인상안'에 합의한 뒤 "소모적인 등록금 투쟁 대신 다른 요구안에 힘을 집중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총학생회의 이같은 입장에 수긍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학생대표의 참여를 배제한 상태로 총학생회와 대학본부가 등록금 인상에 합의한 것은 정치권에서나 볼 수 있는 '밀실야합'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겨울방학 기간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분노는 주로 온라인 공간에서 표출됐다. 경희대 홈페이지의 '경희게시판' 코너는 대학본부와 총학생회의 합의를 규탄하는 글로 가득 메워졌다.
경희대 역사상 최초의 '비운동권' 총학생회라며 주목을 받았던 현 총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실망은 컸다. "우리가 직접 선출한 대표기관이 등록금 인상처럼 중요한 결정을 아무런 의견수렴 없이 내릴 수 있느냐"는 내용의 글이 홈페이지 게시판을 가득 메웠다.
등록금 문제에서만큼은 비운동권/운동권의 구분이 별 의미가 없다. 등록금 문제는 모든 대학생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이기 때문이다.
이 무렵 누군가가 게시판에서 '릴레이 항의 글 올리기'를 제안했다. 자신이 게시판에 올린 글의 제목 앞에 [릴레이 1], [릴레이 2], [릴레이 3]… 등의 표시를 하는 것이다. '릴레이'라는 단어 뒤에 붙은 숫자가 커질수록 학생들의 불만도 점점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됐다.
학생들은 등록금 문제을 소재로 한 패러디 시조, 창작소설 등을 자발적으로 올리기 시작했다. 과거의 선배들이 학생들로 가득 찬 노천극장에서 용기를 얻었다면, 올해의 등록금 6.8% 인상안에 항의하는 학생들은 발랄한 아이디어가 녹아 있는 글로 가득한 홈페이지 게시판을 보며 자신감을 얻었다.
전국 대학 최초로 '등록금 인상 재논의'를 이뤄내다
3월 개강을 하면서 온라인 상에서만 이야기하던 학생들이 학교 곳곳에서 직접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 등록금 인상에 대한 분노는 더욱 증폭됐다. 결국 온라인 공간에서만 떠돌던 분노는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단과대 학생회, 과 학생회, 동아리, 단체 등을 중심으로 <우리교육지킴이 운동본부>가 구성된 것이다. 이들은 학생들에게 대학본부의 부당하고 비민주적인 등록금 인상 사실을 알려나가고, 다양한 근거를 들어 비판했다.
하지만 학생들을 대표하는 의사결정기구인 총학생회가 등록금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라는 점은 여전히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우리교육지킴이 운동본부>는 총학생회보다 상위에 있는 의사결정기구인 '확대운영위원회'를 소집하고, 이 자리에서 '6.8% 등록금 인상 반대, 학우의견 수렴, 등록금 책정 재논의 총투표'를 제안했다. 이 제안은 통과됐다.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투쟁을 진행할지의 여부를 전체 학우들의 의견을 물어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총투표 결과가 부결로 나올 경우 총학생회의 방침대로 "등록금 문제는 합의하고, 다른 요구안에 역량을 집중하기로"했다. 하지만 가결된 경우에는 <우리교육지킴이 운동본부>의 입장대로 '등록금 재논의와 다른 요구안을 병행'하기로 했다.
당연히 총학생회는 학생 총투표를 부담스러워 했다. 그 이유로 총학생회장은 "(총투표 결과가 가결로 나올 경우) 총학생회가 갖고 있는 전체 학생의 대표기구로서의 성격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3월 27일부터 사흘간 치러진 투표 기간 동안 총학생회는 지난 1월 대학본부와 합의한 등록금 6.8% 인상안에 대해 학생들이 이해해줄 것을 꾸준히 설득했다.
마침내 사흘간의 총투표가 끝나고 투표함이 개봉됐다. 총투표 결과는 놀라웠다. 투표율이 56.6%에 달한 것이다. 이는 총학생회 선거보다 높은 참여율이다. 찬성률은 더 놀라웠다. 투표 참가자 중 93%가 찬성한 것이다. 다음날 대학본부와의 면담이 성사됐다. 이 자리에서 부총장은 학생들의 총투표 결과를 수용해, 교무위원회에서 등록금 문제를 원점에서 재논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 결정은 4월 13일 언론을 통해 공식으로 발표됐다.
각 대학들이 과도한 등록금 인상으로 학내 갈등을 겪고 있던 시점에 불거진 경희대의 '등록금 재논의' 결정은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경희대 7000 학생들의 힘으로 이루어낸 등록금 재논의 결정은 한 학교의 문제를 넘어, 전 국민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여전히 뻔뻔한 대학본부…김병묵 총장이 직접 나서야 한다
하지만 등록금 인상에 대해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는 기쁨은 금세 실망으로 바뀌었다. 경희대 대학본부의 뻔뻔스러운 자세 때문이었다.
대학본부의 등록금 재논의 결정 이후 등록금 책정특위가 다시 열렸다. 이 자리에서 대학본부는 '등록금 6.8% 인상안의 내용은 수정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하자'며 이 자리의 성격을 '등록금 6.8% 인상 설명회'로 전락시켰다.
이 자리에서 학교 측은 학교 재정이 나빠졌다는 상투적인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희대 학생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10년 전과 비교할 때 경희대를 운영하는 '고황재단'의 자산은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예산을 쓰고 남아 다음 해로 이월하는 적립금 역시 매년 늘어났다.
학교 측은 등록금 인상에 대해 재논의하는 자리에서 등록금을 올린 대신, 교육환경이 나아지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교수 한 명이 가르쳐야 하는 학생 수는 1997년에 비해 5.5명 늘었다.
경희대 측은 학생들의 요구에 대해 더이상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김병묵 총장이 직접 나서서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김 총장은 현재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회장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등록금 1000만 원 시대'가 도래한 데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립대학의 등록금이 너무 비싸며,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책정되고 있다는 목소리가 드높은 시점에서 사립대학 총장들의 모임 대표를 맡은 이가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
김 총장이 할 일은 등록금을 올려서 학생들을 빚더미에 시달리게 하는 게 아니라 학내 구성원이 모두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인 등록금 책정의 사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례를 바탕으로 다른 사립대학의 총장들과 함께 등록금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해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 해법을 찾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국가의 교육재정을 GDP 대비 6% 수준으로만 확보해도 문제는 상당 부분 풀린다. 사립 대학들이 매년 물가상승률 이상으로 등록금을 올리는 것은 대학에 대한 국가의 재정지원이 부족한 데도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병묵 경희대 총장이 할 일은 정부가 고등교육에 대한 재정지원을 강화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총장이 직접 나서서 이같은 요구를 한다면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이다.
밀실을 넘어 광장으로…'4월의 기적'을 준비하는 학생들
경희대에서는 등록금 재논의에 불성실하게 임하고 있는 대학본부에 항의하기 위해 단과대 학생회장들이 14일째 단식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희대 학생들은 지난 4월 19일과 20일 학교 곳곳을 검게 물들였다.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뜻을 표현하기 위해 학생들이 검은 옷을 입고 학교에 오는 '경희인 블랙데이'였기 때문이다. 중간고사를 앞두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려는 학생들도 검은 옷을 입고 등교했다. 시험기간임에도 등록금 문제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식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지금 경희대 학생들은 4월 27일 대규모 집회를 열기로 하고 준비작업을 하고 있다. 집회의 이름은 '4월의 기적'이다. 중간고사가 끝난 뒤인 4월 말에 대규모 집회를 성사시킨다는 것은 요즘의 대학 분위기에서 '기적'과 다름없다. 하지만 학교 측으로 하여금 등록금 인상안을 다시 논의하겠다는 발표를 하게 만든 경희대 학생들의 힘은 '4월의 기적'을 반드시 이루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어차피 '등록금 1000만 원 시대'가 도래한 이상, 학생들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대학본부가 학생들의 등록금 인하 요구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학생들도 끝까지 싸울 것이다.
이같은 투쟁은 경희대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전국 대학생 교육대책위원회는 4월 28일과 29일 '전국 대학생 제2차 행동의 날'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
"더 이상 프랑스 대학생들을 부러워할 필요 없다"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CPE(최초고용계약, 프랑스에서 26세 미만의 청년들을 고용할 경우 2년 안에 특별한 사유 없이 해고할 수 있도록 규정한 법)를 철회하게 만든 프랑스 대학생의 단결된 힘을 부러워한다. 프랑스 대학생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불안하게 만드는 정부의 시도를 적극적인 저항으로 막아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도 더 이상 프랑스의 사례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28일과 29일에 열릴 집회에서 한국의 대학생들도 스스로를 짓누르는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집회를 통해 결집된 힘은 대학사회를 다시금 비판적 지성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거듭나게 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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