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청와대 기자실 분위기는 한 마디로 흉흉했다.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이해찬 전 총리의 후임으로 한명숙 열린우리당 의원이 유력하던 분위기가 또다시 급반전해,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이 일제히 '오보'를 낸 셈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오후 브리핑에서 "대통령은 현재도 총리 인선문제로 고심 중"이라고 밝혔다. 아직도 최종 후보인 한 의원과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는 것.
노 대통령의 이같은 태도가 가장 신뢰하는 참모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에 대한 '미련'을 끝까지 버리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24일께로 예정된 최종 발표까지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의도적인 '언론 플레이'인지, 그도 아니면 후임 총리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여권 내 권력다툼 때문인지 파악할 길은 없다.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한명숙 의원이 유력한 것처럼 전하던 청와대 관계자들도 일제히 "노 대통령이 여전히 고심 중"이라고 말을 맞췄다.
분명한 것은 야당의 반발이 비교적 적고 헌정사상 첫 여성 총리라는 명분이 있는 한 의원이 아니라 김병준 실장이 최종 낙점을 받는다면 야당이 강도 높게 반발할 것이라는 점이다. 또 한껏 기대에 부풀었던 여성계의 비난도 불 보듯 뻔하다.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노심초사하고 있는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올 것으로 보인다.
임기 하반기를 맞아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모습을 보이려던 노 대통령의 야심찬 계획도 물거품이 될 전망이다.
***청와대 "노대통령 여전히 고심 중"**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후임 총리 인선과 관련해 "대통령은 현재도 총리 인선 문제로 고심 중"이라며 "아마 하루이틀 더 검토하실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대변인은 "정책의 연속성을 고려하면 김병준 실장이 적합하다는 판단이 있고, 최근의 정치적 분위기를 본다면 한명숙 의원이 보다 강점이 있는 것 아닌가, 이 두 지점에서 계속 고심과 검토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노 대통령이 구술한 내용이며, 이날 오후 김 대변인에게 전달됐다고 한다.
김 대변인이 이 같은 입장을 밝히자 기자실은 혼란에 빠졌다. 이날 오전까지 감지돼던 기류와는 상당히 달라졌기 때문.
전날인 21일 이병완 청와대 비서실장은 청와대 기자실을 찾아 "야당의 전폭적인 지지는 아니더라도 선선하게 큰 반대 없이 인준 동의를 해줄 수 있는 분을 총리로 지명할 것 같다"며 노 대통령이 사실상 한 의원 쪽으로 마음을 굳힌 듯한 발언을 여러 번 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간에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도 "이해찬 총리의 후임에 여성 인사를 기용할 것을 건의했다"고 보조를 맞췄다.
청와대 비서실장과 여당 의장이 동시에 한명숙 의원이 유력하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는 사전에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21일 밤과 22일 오전 사이 청와대 및 여당 관계자들은 사실상 한 의원이 내정단계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이 사이에 거의 모든 언론이 한 의원이 유력하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라 기자들은 김만수 대변인이 다시 한번 기자실을 찾아 입장을 명확히 해줄 것을 요구했고 김 대변인은 이날 오후 늦게 다시 기자들을 만났다. 그는 "대통령이 두 후보 중에서 여전히 고심 중인 게 현재의 정확한 스탠스"라고 거듭 밝혔다.
그는 전날 이병완 실장 브리핑에 대해 "이 실장의 얘기가 상대적으로 한쪽으로 좀 치우친 것으로 들렸을 지도 모르지만 대통령이 '정책 연속성'과 '국회 인사청문회'를 모두 고민하고 계시다고 분명히 밝혔다"고 해명했다. '정동영 의장 발언이 청와대와 교감 하에서 나온 게 아니냐'는 질문엔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한 기자는 "기자들이 없는 얘기를 지어서 쓴 것도 아니지 않냐"며 전 언론이 일제히 '오보'를 낼 수도 있는 상황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김 대변인은 "하루이틀만 더 기다려 달라"며 곤혹스러워할 뿐이었다.
***우리당 "최종 판단은 청와대 몫이니 지켜볼 밖에"**
우리당은 청와대의 기류 변화에 짐짓 무심한 표정이다. 김병준-한명숙 카드를 모두 공개한 이상 여론의 검증과 야당의 반응을 좀 더 지켜보자는 뜻에서 한 의원 쪽으로의 쏠림을 차단한 게 아니냐는 것. 당 일각에선 한 의원 유력 쪽으로 여론이 굳어지자 김병준 실장을 밀던 세력이 반발해 서둘러 "여전히 고심 중"이란 입장을 밝히게 된 것 아니냐며 여권 내 권력투쟁 양상으로 보기도 했다.
정동영 의장 측은 "지난 14일 노 대통령과 독대 때 정 의장이 당의 의견을 말한 것 외에는 지금까지 일체 어떤 말도 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최종 판단은 청와대의 몫인 만큼 지켜보고 결과를 존중하는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당의 다른 관계자는 "청와대 쪽 얘기 그대로 노 대통령이 두 가지 카드를 놓고 고심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 아니겠느냐"면서도 "하지만 한 의원에 대한 배려에다 야당과 여론의 검증을 좀 더 지켜보자는 차원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시소게임을 통해 최종적으로 누군가 결정됐을 때 극적 효과가 더 커질 것"이라며 "그런 과정을 통해 (여성인) 한 의원이 총리 후보로 결정된다면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영입과 최근 최연희 의원 성추행 문제 등과 맞물려 관심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동영 의장이 이미 한 의원에 대한 총리 추천 사실을 공개할 정도로 당의 입장이 대외적으로 확인된 마당에 청와대가 최종적으로 '김병준 카드'를 선택했을 경우 떠안게 될 부담도 내심 걱정하는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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