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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앞에서 펼쳐진 '진동아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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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동아일보 앞에서 펼쳐진 '진동아굿'

동아투위, 강제해직 후 세 번째 공연

17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는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위원장 문영희, 이하 동아투위) 주최로 '동아일보 광고탄압 및 언론인 무더기 축출'의 진상 규명을 위한 문화제가 열렸다.

***동아 언론인 150여 명 해직된 날**

1975년 3월 17일은 자유언론실천운동을 벌이던 동아일보 소속 언론인 150여 명이 해직된 날이다. 이번 행사는 이날로부터 꼭 31년째 되는 날을 맞아 열린 것이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언론에 대한 간섭을 거부하고 언론인에 대한 불법 연행을 거부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10.24 자유언론실천 선언을 발표했다. 엄혹한 상황에서 터져나온 저항에 대한 대가는 컸다. 중앙정보부가 광고주들을 압박하여 동아일보에 광고를 주지 못하게 하고, 선언을 주동한 기자들을 퇴직시키도록 동아일보를 압박한 것이다. 결국 광고가 끊긴 동아일보에 백지 광고가 나갔다.

그것이 다시 대대적인 동아일보 살리기 운동으로 이어졌다. 동아일보를 격려하는 문구와 함께 보내온 시민들의 후원금이 봇물을 이뤘던 것이다. 당시 한 대학생이 적어 보낸 "동아, 너마저 배신하면 나 이민갈 거야"라는 문구는 오랫동안 화제가 됐다.

***자유언론의 정신은 현재진행형**

이날 행사에서 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이돈명 변호사, 신학림 언론노조 위원장 등은 격려사를 통해 '동아사태'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된 동아일보 광고 탄압 및 언론인 대량해직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동아투위는 이날 발표한 성명을 통해 31년 전 폭력과 억압에 맞서 지키고자 했던 자유언론의 정신은 현재진행형이라며, 오늘날의 언론 현실을 질타했다.

이들은 "동아일보를 비롯한 족벌언론은 언론 본연의 기능을 망각한 채 갈등과 분열을 일삼는 횡포를 부리고 있다"며 "많은 언론인들이 정치권력의 외압이 사라진 빈 자리에서 과잉의 자유를 누리며 오만과 편견에 도취돼 있다"고 비판했다.

***37년 전의 '진동아 굿' 다시 벌어져**

이날 행사에서는 31년 전 서울대에서 공연하여 큰 호응을 얻었던 마당극 '진동아 굿'이 재연됐다.

'진동아'는 '진짜 동아일보'의 줄임말이다. 제작거부 투쟁을 하던 동아일보 기자들이 '가짜 동아일보' 대신 만든 신문의 이름이다.

'진동아 굿'은 1975년의 첫 공연이 열렬한 반응을 끌어내면서 대학가에 동아사태의 본질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서울의 봄'이 도래한 1980년 4월에 한 차례 더 공연한 뒤에는 세인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31년 전의 '진동아 굿'을 다시 기억하게 된 것은 지난해 동아투위가 '동아투위 30년사'를 발행하면서다.

"동아투위 30년사를 정리하면서 '진동아 굿'을 빠뜨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도무지 대본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진동아 굿' 대본이 빠진 채로 '동아투위 30년사'를 발행했다. 얼마 전에 가까스로 '진동아 굿' 대본을 찾아냈다. 그래서 올해 다시 '진동아 굿'을 재연하기로 하고 당시 출연자였던 박인배 실장에게 연락했다." 김동현 동아투위 운영위원의 말이다.

박인배 민족예술인총연합 기획실장이 이번 공연의 연출을 맡았다. 1975년의 첫 공연에서 당시 대학생이던 그는 기자 역으로 출연했다.

"'진동아 굿'은 우연한 계기로 기획한 것이다. 연극반의 선배와 친하게 지내던 동아일보 기자를 통해 동아사태의 전모에 대해 듣고 마당극으로 꾸며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진동아 굿'은 마당극의 역사에서도 상당한 의미가 있는 공연이다. 참가자 중 일부에게만 대본을 주고 나머지 배역은 관객이 즉석에서 대본 없이 연기를 하게 했다.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로 인해 학생들의 관심이 뜨거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실험이었다. 실험적인 형식을 도입한 것인데 반응이 뜨거웠다." 박 실장의 말이다.

이날 공연도 1975년과 마찬가지로 관객이 참여하는 마당극 형태로 진행됐다. 동아투위 위원들이 공연에 참가했다. 당시의 기자 역을 맡아 즉석 연기를 펼친 것이다.

이제는 대부분 환갑을 넘긴 이들이지만, 이날은 잠시 30대의 청년 기자로 돌아갔다. 이들은 "부당해고 철회하고, 관선주필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아침이슬'과 '우리 승리하리라' 등의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와 구호들은 당시의 투쟁할 때 쓰던 것들이다.

31년 전의 열정을 재현한 데 이어 동아투위 위원 총 113명 중 먼저 세상을 떠난 12명의 위원들의 혼을 위로하는 살풀이춤이 펼쳐졌다. 살풀이춤이 끝난 뒤 동아투위 위원들은 같은 자리에 천막을 치고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동아일보, 반성하라"**

이 자리에 참가한 동아투위 위원들은 31년 전 자신들을 거리로 내몰았던 동아일보에 대해 한결같이 반성을 촉구했다.

"동아일보는 당시의 사태에 대해 권력이 짓누르는 시대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기만 할 뿐 한 번도 공식적인 사과를 한 적이 없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사과를 통해서만 동아일보는 국민에게 신뢰받는 신문으로 거듭날 수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우리는 반드시 동아일보의 사과를 받아낼 것이다" 동아투위 위원인 이부영 전 의원의 말이다.

이들은 또 최근 일어난 최연희 의원 성추행 사건에 대해서도 언론이 반성할 지점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동현 동아투위 운영위원은 "최 의원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와 같은 술자리 문화를 형성하는 언론계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 반성하는 목소리는 접하기 어려웠다"라고 말했다.

***동아투위, 언론민주화 운동의 주역**

동아투위 사건은 한국의 언론사에 큰 상처를 남겼다. 권력에 저항하는 결기 있는 기자들이 대거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의 목소리를 듣기 힘든 암흑의 시간이 1980년대 말까지 이어진다.

이날 행사에서 기자와 만난 이재민 씨는 동아방송 아나운서 2년차이던 24세에 동아사태를 겪었다. 당시의 해직자 중 최연소자다. 그는 1988년 창간한 한겨레신문에 입사할 때까지 신문과 방송을 멀리하며 지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게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는 동아방송에서 해직된 이후 아무에게도 동아사태로 퇴직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냥 회사를 관뒀다라고 말할 따름이었다.

동아사태 해직자라는 낙인은 독재정권이 부여한 주홍글씨였기 때문이다. 이같은 낙인 때문에 그는 해직 이후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그를 받아주는 회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중소기업의 사무직에 취업할 수 있었지만 언론인의 꿈은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다른 동아투위 위원들과 함께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하면서 긴 고통에서 벗어났지만, 그에게 1975년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한 아픔이다.

하지만 이같은 개인들의 아픔이 모여 역사를 이뤘다. 동아투위를 빼놓고 언론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기록할 수는 없다. 한국 언론사의 상처인 동시에 성숙의 밑거름인 셈이다.

동아투위는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결성과 월간 '말' 지 창간,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을 주도하고, 사회와 언론의 민주화에 지울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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