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해효는 아는 것이 많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그를 가리켜 권해효 닷 컴이니 '권해효 지식검색한테 물어봐'라느니 하는 우스개 소리를 하기 일쑤다. 그의 생생한 지식은 반경 폭이 정말로 어마어마한데 비행기를 타면 각종 여객기에 대해 엔진의 종류에서부터 승객 수용규모, 심지어 여객기 발전사까지 도무지 막힘이 없는 데에다 위스키를 마시면 또 그걸 마시는 대로 위스키의 종류에서부터 각각의 맛에 이르기까지 침이 마르고, 자동차 얘기를 하면 반드시 각 나라의 자동차 기술수준에 대한 강의가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런 그를 보고 있으면 그래서, 순간 이런 탄성을 지르고 만다. 오 권해효 이제 그만해! 그는 정말 이 시대의 진정한 딜레당트인 셈인데, 그의 딜레당티즘은 단순히 애호가의 수준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그의 사회과학적 인식은 상당한 수준이어서 딜레탕트로서 그는 종종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가 어떻게 이 세상과 씨줄, 날줄로 얽혀 있는지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분석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선보인다. 권해효와 마주 앉아서 술잔을 기울일 때, 가장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그의 진정한 내면보다는 TV에서 만나는 탤런트 권해효로만 대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시대 연극계와 영화계, 그리고 방송가에서 숨겨져 있는 '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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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해효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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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연극 얘기만 하자. 골프정국과 성추행 사태에 대해서 얘기하지 왜?
- 차라리 야구 얘기나 하지 그럼? 공중파 9시 뉴스에서 요즘 3분의 2가 야구 얘기더구만. 하기사 우리는 요즘 축구, 야구밖에 잘하는 게 없으니까. 이해찬 총리가 내기 골프를 치지 않고 내기 축구를 했으면 어땠을까? 그래도 사퇴했을까?
- 내기 축구는 모르겠고 내기 야구를 했으면 좀 낫지 않았을까 싶네. 아 그딴 얘기 그만하고 연극 얘기 하자. 연극한다며? 연극 두 편 할 거거든? 어떤 거? <날 보러와요> 아니면 <a number>?
- <날 보러와요>. 난 영화기자니까. <날 보러와요>는 <살인의 추억>으로 만들어진 연극 원본이니까 그게 더 궁금해. 이 연극이 초연된 게 언제지? 1996년 초였으니까 윽, 벌써 10년이 됐네. 그때부터 지금까지 7,8차례 계속 재공연이 됐어. 그동안 버전들을 조금씩 바꿨는데, 이번 공연은 가장 오리지널에 가깝게 하고 있어. 대사도 초연 때 것을 그대로 복원해서 하려고 노력중이고.
- <살인의 추억>을 만든 봉준호 감독도 물론 연극을 보고 영화로 만든 거겠지? 당근. 봉준호 감독은 이 작품과 묘한 인연이 있어. 1996년 초연 때 연극을 보러 왔고, 그로부터 7년동안 꾸준히 이 작품을 개발한 것으로 알고 있거든. 작품에 대한 애착이 보통이 아니었지. 물론 그 사이에 <플란다스의 개> 같은 작품도 있었지만 원래는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 생각이었을 거야. 아무튼 그 기간 동안 무대에 올려지는 모든 버전의 <날 보러와요>를 다 봤으니까.
- 그래서 연극을 그대로 만들었다? 보통은 그렇게들 생각하고 또 그렇게들 하지. 왜냐하면 자꾸 보다보면 그 작품, 그 연극 자체에서 빠져나오기 힘들 테니까. 하지만 봉준호는 안 그랬어. 오히려 이걸 영화로 만들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 같은 걸 면밀하게 관찰하고 계산하고 있었던 것 같아. <날 보러와요>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내용이지만 연극적 상상력이 뛰어난 작품이거든. 특히 내가 맡고 있는 김 형사 역할(영화 속에서는 김상경이 맡았지)이 가장 연극적인 인물이야. 가장 비현실적인 인물이면서 연극적인 긴장감을 주고 결국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주는 인물이지. 하지만 봉준호의 영화에서는 이 김형사가 가장 현실적인 인물로 그려졌어. 그게 아주 특이해.
- 시대 배경도 다르던가? 영화는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전두환 정권에서 노태우 정권으로 넘어가는 시대의 공기를 담아내는 데 충실했지. 화성이라는 작은 공간을 통해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그 연출의 관통력이 대단했다고 봐. 근데 연극에서는 오히려 시대적인 공기를 드러내지는 않거든. 시대적인 상황이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는 거야. 그리고 연극 속에서는 극중 인물들 간의 연애담이든가 여러 형태의 사랑 이야기가 포함돼 있어. 영화보다 오히려 간접적이고 우회적이야. 이번 공연도 그래. 무대미술 정도만으로 그 당시의 혼란과 사건의 엽기성을 드러낼 뿐이야.
- 그 차이가 뭘 의미하는 걸까? 그건 이 작품이 왜 무대에 계속 올려지는가와 깊은 관련이 있어. 시의성이 담겨진 영화에 비해 <날 보러와요>는 같은 화성사건을 모티프로 하고 있지만 단순히 엽기적인 이야기만은 아냐. 근데 영화는 조금 그런 쪽으로 기울고 있지. 연극은 대신, 이 놈도 범인이고 저 놈도 범인이다, 그러니까 곧 진실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셈이야. 그리고 연극은 인물 사이의 에피소드가 굉장히 많아. 김 형사도 다방 레지와 연애를 하고 조 형사(영화 속에서는 무지막지한 워커발로 나오지)도 연락책이자 끄나풀인 여기자와 연애를 해.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범인 역시 실패한 사랑의 결과로써 추악한 범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 살인사건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어떻게 될 건지, 세상이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혼란스러운 상황 맨 마지막에 결국….
- 연극을 안 본 독자들을 위해 마지막 얘기는 좀 삼가시지! 그러니까 결국 이 연극은 구원에 대한 이야기라는 거야.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지. 그게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조금 다른 점일 거야.
- 10년동안 계속 상연되는 이유가 뭐라고? 얘기할 때 잘 들으슈 그러니까. 한때의 이슈를 내세우는 연극이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계속 공연되기 힘들었을 거야. 버전이 계속 바뀐 건 당초 소극장에서 시작한 연극이 대극장 위주로 공간이 바뀌면서 불가피한 일이었던 것 같아. 극장 공간에 따른 극적 긴장감이나 캐릭터 간의 긴장감이 다 달라지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1996년 초연 때만 하더라도 화성사건에 기억들이 생생했거든. 모티프만 하나 던져도 충분히 얘기가 가능했어. 하지만 지금은 설명이 필요하다…기보다는 관객들이 이걸 현실의 사건이라기보다는 그저 이야기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 이런 얘기가 상상이나 가? 어쨌든 그때의 상황을 좀더 현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형사들의 애환이나 스트레스 등이 강조되고 비주얼한 측면들이 강화되기도 했어.
- 영화만 보고 아직 연극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해줄 어드바이스는? 연극 무대에서는 주요 공간이 하나야. 강력반 사무실. 근데 영화를 안보고 연극을 보는 사람들은 등장인물들이 강력반 바깥에 있으면 인물들의 행위에다가 자신의 상상력을 입히는 것 같아. 그런데 영화를 본 사람들은 자신의 상상력보다는 봉준호가 만들어 낸 구체적인 그림이나 이미지를 붙이는 것 같더라고. 어느 게 좋은 건지 쉽게 가치판단을 할 수는 없지만 그 뉘앙스의 차이는 큰 거 같아.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어쨌든 영화를 보신 분들은 이 연극을 보면서 잠시 영화에 대한 기억은 제껴두시라고 권하고 싶어.
- 다른 연극도 한다고? 4월 9일에 <날 보러와요>를 끝내고 연극계 중진인 이호재 선생과 <a number>라는 2인극을 할거야. 근미래를 배경으로 복제된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내용이고. 5월 18일부터고.
- 왜 영화는 안 해? 내가 안 하는 거야, 못하는 거야? 어떻게 생각해? 어쨌든 영화는 오기환 감독의 <선물>이 마지막이었네. 벌써 5년이 됐네. 글쎄… 영화라는 공간에서는 조금 다른 작업을 하고 싶어. 근데 영화 속에서도 유사한 캐릭터를 요구받을 때가 많고 그래서 별로 흥미를 못 느꼈던 게 사실이야. 제대로 된 코미디 역할이라든가 완전한 루저(loser)라면 한번 해보고 싶은데… 쩝….
- 여성연합에서 성평등디딤돌인가 뭔가 하는 상도 받았데…? 아 오늘은 연극 얘기만 하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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