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역작 <살인의 추억>에서 박두만 형사(송강호)와 서태윤 형사(김상경)가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서 형사는 연쇄강간살인이 벌어지고 있는 경기도 화성의 관할 경찰서로 발령을 받아 그곳으로 택시를 타고 가던 도중 성폭행범으로 오인을 받아 박두만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온몸을 날려 이단 옆차기로 서 형사에게 일격을 가하는 박두만의 이때 모습은 영화 전편 가운데 가장 열혈 형사답다. 그러면서 박두만은 외친다. "에잇 씨발, 여기가 무슨 강간의 왕국이야?!" 이 대목에서 많은 관객이 폭소를 터뜨렸던 건 순전히 박두만 역할을 맡았던 송강호 특유의 말투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은 그 섬뜩한 유머 때문에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우리는 정말 강간의 왕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강간, 특히 여성에 대한 강간은 단순하게 성적 폭력의 문제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강간은 결국 권력의 문제이며 강간이나 성추행 사건이 자꾸 늘어나는 건 권력에 대한 그 사회의 시선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그건 최근의 사건이 국회의원이나 교도관처럼 대체로 권력을 일방적으로 행사할 수 있거나 행사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 그래서 정말 요즘은 짜증이 난다. 세상사가 정말 짜증이 난다. 나이를 먹으면 삶이 심플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정말 큰 오산이었다. 절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심플해지기를 원한다면 스스로 리미트를 정하고 복잡한 세상살이를 끊어 내야 한다. 예컨대 죽이되든 밥이되든 몇살까지만 일을 하고 은퇴를 하겠다는 식의. 하지만 그것도 참 배부른 얘기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이라면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만 하는 공포감이 만만치 않을 터이다.
|
|
살인의 추억 ⓒ프레시안무비 |
짜증나는 세상과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어보겠다는 요량으로 요즘 그나마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 운동이다. 예전같으면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던 일이다. 곰곰히 생각을 해보면 시간을 쪼개서 쓸 줄 아는 지혜란 것도 나이를 먹어야 생기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하는 시간이 늘 밤 10시가 가까운 것을 보면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주변에 사람들이 없어진다는 얘기인 것도 같아 씁쓸한 마음이 안드는 것은 아니다. 하기사 친구 좋은 것도 한창 때 일이다. 사무실 직원이나 후배들은 되도록이면 같이 안있고 싶어 할 것이다. 그렇다고 어릴 때처럼 여자 꽁무니를 좇아 다니는 일도 이제는 아예 불가능한 일의 범주에 들어서 버렸다. 그렇게 서서히 욕망이 줄어드는 것이다. 자칫 '귀차니즘'에 빠질 일, 마음속에서 애초부터 차단막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운동을 하는 체육관의 러닝머신 앞에는 중앙통제식 TV들이 죽 걸려있다. 최신식 피트니스 클럽일 수록 자기가 운동하는 바운더리 안에 모든 편의시설을 다 조종할 수 있는 리모콘이 있다지만 내가 다니는 곳만 하더라도 수년 전에 만들어진 곳이다. 그런 시설이 돼있지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 뜀박질 기계에 올라 1시간 가까이 걷는 동안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눈앞의 TV에서 나오는 공중파 방송의 갖가지 드라마들을 안볼 수가 없게 된다. 10시부터 11시까지, 나 같은 화이트칼러 샐러리맨들에게는 나름대로 프라임타임이 될 터인데 이 1시간 동안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방송사들이라는 공중파 TV 3사는 일제히 드라마들을 편성해 내보낸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꼬박 5일동안, 운동시간을 바꾸지 않는 한 자칫 한국에서 좀 한다는 TV드라마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보게 되는 것이다. 제목도 알 수 없고 (혹은 기억하고 싶지않고) 내용도 따라가기 힘든, 대체로 청춘멜로물 일색인 이들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그 황당함과 극단적 비현실성, 어이없는 내용은 둘째치더라도 일단 드라마 자체가 너무 많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여기서도 드라마, 저기서도 드라마라는 얘기다. 이건 사람들이 온통 드라마에 미쳐 사는 것일까, 아니면 방송사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드라마에 미쳐 살게 하는 것일까. 요령부득, 이 답이 저 답같고 저 답이 이 답같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뭔가 크게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 욕망하는 무엇인가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일상을, 사람들은 밤에 멍하니 소파에 앉아, 혹은 침대에 누워, 파트너와 섹스를 나누기 보다는 TV가 제공하는 드라마로 대신하는 것이다. 그건 생각만 해도 정말 그로테스크한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욕망하는 삶.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욕망. 그 가운데 우리의 드라마들이 있는 셈이다.
| |
|
굿 나잇, 앤 굿 럭 ⓒ프레시안무비 |
|
1950년대의 TV는, 적어도 이렇게까지는 아니었지 싶다. 에드워드 머로 같은 선각자가 나서서 앞으로의 방송저널리즘은 결국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들에게 잡아 먹힐 것이며 광고주들에 의해 좌지우지 될 것이라고 고민하고 예견했지만, 그래도 적어도 그때에는 바로 그 머로 같은 사람이 저녁마다 '굿나잇 앤 굿 럭'을 얘기해 주던 시대였다. 머로가 진행하던 '시 잇 나우'라는 토크 프로 역시 주말이면 연예인 부부를 초청하거나 그들이 사는 집을 방문하는 등 연성의 내용을 내보냈지만 매카시의 광기가 시작될 때면 어김없이 이 프로는 카메라 앞에 머로를 나서게 해 자유와 인권을 위한 멘트를 날리게 했다. 모든 장면이 다 인상적이고 가슴에 남지만 영화 <굿 나잇 앤 굿 럭> 중에서 이상하게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매카시에게 한방 펀치를 날리는 방송을 한 날, 머로가 뉴스PD인 국장 프레디(조지 클루니)와 동료 그리고 스탭들과 한잔을 하러 가는 모습이다. 이 한잔 자리는 결국 새벽까지 이어지고 프레디는 여직원인 셜리(패트리샤 클락슨)에게 새벽신문, 특히 뉴욕타임즈를 사가지고 오라고 한다. 셜리가 바를 나가 길가 어디쯤 있을 가판대에서 신문을 사가지고 다시 술집으로 돌아 오기까지 영화는 비교적 오랫동안 대사없는 묵음으로 처리된다. 마치 정지된 화면의 인물들처럼 머로와 프레디, 동료들은 아침신문을 기다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장면은, 아무런 장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친다. 방송을 한다는 것, 아니 방송이란 것, 그리고 그 방송을 본다는 것, 그 모든 관계에 대해 진정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이다. 지금의 우리 방송들에서 드라마를 좀 빼면 저런 모습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엉뚱한 얘기라고 난리 부르스들을 칠지 모르지만 요즘들어 우리사회에 부쩍 강간, 성폭행, 성추행 사건이 줄을 잇는 것도 드라마가 지나치게 많은 것과 무관하지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욕망은 들끓고, 그 욕망은 해소되지 못하고 있는데, 정작 올바른 욕망의 해소법을 배우지는 않고 오히려 자꾸 드라마와 같은 '허상의 치료제'만 먹어댄 꼴이니 결국엔 정신이 돌아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조금 다른 치료제를 먹어야 할 터이다. 드라마아닌 다른 것. 뉴스나 다큐멘터리, 교육용 프로그램 등등, 몸에 좋다는 강장제를 먹어야 할 것이다. 이런 보양제가 케이블이나 위성 같은 선택적 매체들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방향 공중파 방송에서 주어져야 할 것이다. 근데 그게 우리들에게는 거꾸로 돼있다. 사람들이 드라마만 좀 덜 보더라도 (필요한 매체를 통해서 좋아하는 사람들만 드라마를 보게 하더라도) 우리사회가 조금 덜 욕망하고, 조금 덜 비뚤어진 사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순진한 생각을 요즘 난 갖고 산다.
|
|
굿 나잇, 앤 굿 럭 ⓒ프레시안무비 |
우리보다 조금 더 나은 복지 체계를 갖고 사는,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를 가보면 거기도 우리와 똑 같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젊은이들이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워 고등실업이 많고 계층간 차이 때문에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격차가 자꾸 벌어지고 있으며 서민들 먹고 살기는 예나 지금이나 어렵긴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진외국들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공히 느끼는 것은 돈의 가치를 우리와는 상당히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1달러, 곧 돈을 벌기가 정말로 힘이 든다. 하지만 욕망을 줄이면, 곧 소비를 줄이면, 그래서 1달러를 아껴서 살아가면, 어쨌든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다. 학교도 갈 수 있고 아프면 비교적 맘놓고 병원에도 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어쩌면 천원쯤 벌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산다. 하지만 그 천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종종 놀랄 때가 많다. 우리의 경우엔 돈을 벌면, 더 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욕망을 줄이기 보다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아끼기보다는 쓰게 하고 또 그럼으로써 계속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악순환의 강박증에 빠져 살게 만든다. 계속해서 소비하고 계속해서 돈을 벌게 하는 이 이중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한 우리들의 삶은 점점 더 황폐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황폐한 삶에서의 유일한 낙은 결국 지금과 같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려는) 마약의' 드라마일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어딘가에서 그 고리를 끊어 내야 한다. 시스템과 사회가 그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을 기다리기 전에 우리 스스로가 먼저 실행해야 할 일이다. 예컨대 영화를 보는 일만 해도 그렇다. <가문의 위기>같은 영화나 <구세주>, <투사부일체>같은 영화에 늘 수백만명씩 몰려가는 일에 우리 스스로 이제는 제동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보다는 <스테이션 에이전트>같은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같은 영화, <굿 나잇 앤 굿 럭>같은 영화를 뒤져서라도 찾아 볼 일이다. 더 이상 스크린수 탓만 할 일이 아니다. 개봉을 하자마자 종영을 해버렸다는 둥의 핑계도 더 이상 대지 말아야 할 일이다. 이제는 그런 얘기를 듣는 것이 지겹다. 너무 지겹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