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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기독교의 명암 : 종교가 아편이면, 신도는 마약중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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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기독교의 명암 : 종교가 아편이면, 신도는 마약중독자?

박노자-허동현 서신논쟁 3부 〈14〉

반갑습니다. 박노자 선생님

***아직도 남은 근대 훈육의 무속 멸시를 넘어서야**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광고 카피나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새로 만들어진 한자어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는 서구인의 파란 눈으로 스스로를 재단하는 서구 맹신의 "근대제일주의"에서 벗어나 전통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할 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했습니다. 요즈음 우리들은 동지에 붉은 팥죽을 먹는 것이 귀신을 쫓기 위한 주술행위만이 아닌 나름의 과학성을 갖고 있는 세시풍속임을 잘 알고 있고, 한 세기 전 싸늘한 타자의 시선으로 낮추어 본 무속의례의 전통 춤사위와 노래 가락을 소중한 전통 문화유산으로 보존하려 하니 말입니다.

그렇다 해도 개화기 이래 무속은 없애야 할 "악습"이자 "미신"이라는 생각을 우리 마음 속 깊숙이 주입한 근대 교육 프로젝트의 잔재는 아직도 그 꼬리를 끌고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들은 오색 전구가 영롱하게 명멸하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볼 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뜨곤 했지만, 색동천을 휘감고 있는 성황당의 성황나무를 보면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끼곤 했지요. 크리스마스트리에 걸린 양말 속에는 선물이 담겨 있었지만, 성황당의 돌무더기와 성황나무에 소원을 빌며 던진 돌이 그러한 영험을 보이지 않아서일까요? 크리스마스트리와 성황나무, 그리고 굿판의 신간(神竿: 무당이 굿을 벌리는 곳에 세워 신이 내려오는 길을 상징하는 나무)과 교회의 첨탑은 신과 인간을 이어준다는 상징적 기능 면에서 매 한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둘이 너무도 판연하게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눈에는 아직도 문명과 야만의 표상으로 비취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 속 한 모퉁이에 아직도 무속은 미신이라는 근대의 훈육이 꿈틀거리며 숨쉬기 때문은 아닐까요?

1960년에 나온 초등학교 3학년 『도덕』 교과서에 실린, 고려말 주자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安珦, 1243~1306)의 "미신타파" 이야기가 우리들이 무속을 어떻게 보도록 교육받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옛날에 안향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안향은 서른세 살 때 판관이 되어 경상북도 상주로 갔습니다. 그 때 상주 골에는 세 사람의 무당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상한 귀신을 받들고 천장에서 소리를 내어 그것이 귀신의 소리라고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습니다. 무당들은 이 귀신을 받들지 않는 사람들은 귀신의 화를 입을 것이라고 을러댔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두렵고 겁이 나서 서로 다투어 돈과 물건을 무당에게 바쳤습니다. 안향은 자기가 다스리는 골에서 미신을 없애 버릴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당들을 모두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무당들은 처음에는 '우리들은 괴롭히는 이는 반드시 귀신의 벌을 받으리라' 하고 큰 소리를 쳤지만, 안향은 조금도 이런 말을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그런 귀신한테 벌을 받을 리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간 무당들은 처음에는 여러 가지로 큰 소리를 쳤지만 괴로움을 받는 것은 무당들뿐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무당들은 마침내 견딜 수가 없어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이제부터 다시는 사람을 속이지 않겠사오니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빌었습니다. 안향은 그들을 잘 타이른 다음에 감옥에서 놓아주었습니다. 그 후 그 곳에서는 미신을 믿는 이가 점점 줄어졌습니다."

이처럼 개화기에 시동된 무속 신앙을 "미신"으로 간주해 근절하려던 노력은 일제하를 거쳐 개발독재 시절까지 이어진 근대화 프로젝트의 일환이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생각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기를 꿈꾼다면, 무속신앙도 이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신념체계라는 점에서 종교임에 틀림없기에, 무속에 대한 탄압과 배척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될 폭거임에 분명합니다.

인류학자 조흥윤은 무속신앙의 순기능으로 공동체적 특성 못지않게 공존과 조화의 정신을 중요하게 꼽습니다. 다종·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우리 사회에서 심각한 종교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보고, 이러한 무속 신앙의 사회적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지요. 무속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모든 종교의 신앙 형태에 영향을 미친 고유 전통이 분명합니다. 불교는 산신당·칠성각·삼성각 등이 웅변하듯 현세적 이익을 얻는 소원성취의 수단으로 무속과 타협했고, 오늘날의 기독교도 기복신앙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매 한가지이니 말이지요. 저 역시 고유의 춤과 음악이 어우러진 무속 의례를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전통문화의 하나로 생각하며. 인간 소외 현상이 날로 심해지는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무속인들이 이를 완화시키는 일종의 상담심리 전문가로서의 사회적으로 순기능을 발휘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나아가 무속신앙이 다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데 기여하였다고 생각하며, 특정 종교의 우열을 논하는 종교적 제국주의 관점을 배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의 믿음이 지닌 정신문화적 가치를 존중하는 종교상대주의와 종교다원주의를 따르는 것만이 다종교 사회인 우리 사회에서 혹시 일어날지도 모를 종교적 갈등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일 터이니 말입니다.

***종교가 마약이라면, 신도는 마약중독자일까요?**

그런데 박 선생님과 저는 종교를 보는 눈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이후 중국에서 벌어진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놓고 벌어진 중국학자들 사이의 논쟁이 우리 두 사람의 생각 차이와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종교를 연구하는 오재환에 의하면, 비교적 일찍 개방된 장강 이남의 학자들과 그렇지 않은 북방의 학자들 사이의 종교에 대한 생각이 크게 다르다고 하더군요. 수많은 종교 인구가 존재하는 현실에서 종교를 아편에 비교한다면 종교는 마약이고 신도들은 마약중독자가 되고 말 터인데 이는 현실을 무시한 것이라는 남방 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북방의 학자들은 "아편이 진통 효과가 있듯이 종교도 신앙자의 정신에 안위를 주는 것은 사실이므로, 사회 자체에 결함이 있고 그 결함을 사회 제도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하게 되면 고난 가운데 있는 인민들이 정신적인 진통 혹은 마취를 종교에서 찾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이니 아직 사회에 결함이 남아 있는 한 종교의 존재 의의를 완전히 부정할 것만은 아니다"고 반박한다고 하더군요. 양자의 차이는 "남방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종교론을 부정하고 대체적으로 종교 존재의 긍정론을 주장하고 있으나, 북방학자들은 마르크스의 종교관을 옹호하면서 사회 구조의 취약성이 남아 있는 한 종교도 한시적으로는 존재 의의가 있다는 식으로 예전과는 다른 절충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라더군요.

아마 박 선생님의 종교에 대한 견해가 중국의 북방학자들과 비슷하다면, 저는 남방학자들의 생각에 공감하는 쪽 같습니다. 박 선생님께서는 근대 자본주의 계급사회에서 무속이건 기독교건 불교건 모든 종교는 살벌한 생존경쟁의 장에 내몰린 노동대중이 가질 수밖에 없는 "공포를 잠재우는 마취제" 내지 민중들의 저항의지를 잠재워 체제의 변혁에 나서지 못하게 만드는 정신적 "아편"으로서 기존체제의 버팀목으로 기능할 뿐이라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나아가 살벌한 약육강식의 정글 같은 살벌한 세상에서 느끼는 공포나 스트레스를 제거하는 근본적인 길은 자본주의를 제거하는 혁명적 행동에 민중들이 나서는 것이 최선책이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이 불가능한 상황이니 공포나 스트레스를 술이나 마약에 의존해 달래는 것 보다는 차라니 예배나 굿판을 벌리는 쪽이 차선이라는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현실 사회의 변혁이 아닌 내세나 해탈을 꿈꾼다고 해서 신앙인들을 마취제나 아편에 중독된 이들로 보고 교역자를 "마취제 장사"로 비유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2003년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 중 무속신앙을 제외한 종교를 믿는 인구비율이 53.9%―종교별 분포는 불교 47%, 개신교 36.8%, 천주교 13.7%, 유교 0.7%, 원불교 0.7%, 기타 0.4%―로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도 성전 높이기와 불사 키우기에 여념이 없는 "종교 장사"를 비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허나 신교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인데 전 인구의 절반 이상인 신앙인들을 "마약중독자"로 만들 순 없지 않습니까? 조선 후기에 가톨릭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200여 명의 순교자나 이슬람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성전에 나서는 이들을 우리와 세속적 가치를 같이 하지 않는다고 이들의 행동을 "마취제"에 취해 저지른 일로 깎아내릴 수는 없는 일이지요. 역사적으로 볼 때 "무소유의 공산사회"의 실현을 위해 신명을 바친 이들 보다 종교적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은 이들이 더 많다는 점에서 우리는 종교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와 무속의 명암을 고루 비추어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박 선생님께서는 자본주의와 국민국가 체제의 본질은 백성을 살육으로 내모는 것이고, 이에 순치된 종교들은 이를 막은 적이 없다고 보십니다. 따라서 박 선생님께서는 자본주의와 계급사회로 필시 귀결되는 국민국가 만들기를 꿈꾼 개화파나 이들이 호의적으로 수용한 가진 자의 종교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이신데 비해 예나 지금이나 대체로 고통 받는 민중용 "마취제"일 수밖에 없는 무속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잣대를 들이대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와 종교의 소멸을 꿈꾼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대량 학살은 자행되었으며, 근대 이전에도 전쟁과 살육은 그친 적이 없던 것이 우리가 사는 인간세상 아니던가요?

1924년 발행된 잡지 『개벽』(48호)에 실린 「경성의 미신굴(迷信窟)」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당시 무속이 행한 "마취제 장사"의 부패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귀신이 많기로는 강원도 영동이 유명하지만은 귀신도 영동보다 몇 곱절이 많고, 굿 잘하기로는 개성이 손꼽는 곳이지만 서울은 그보다 몇 백배다. (…) 국사당(國師堂)의 장구 소리는 항상 그칠 날이 없고 노량진의 굿 구경꾼은 밤낮으로 이어진다. '왔소. 나 여기 왔소. 바람에 불려왔나. 님 보려 나 여기 왔네'하는 무녀의 노래 가락은 화류계까지 보급이 되고 '불설명당, 아이금강, 심신금강, 발월풍륜'하는 안택경(安宅經, 무당이 집터를 지켜주는 신인 터주를 위로할 때 읽음) 읽는 소리는 말 배우는 아기라도 다 흉내를 낸다. (…) 감기가 들면 패독산(한방 감기약)이나 '가제삐린(일제 감기약)'은 잘 먹지 아니하여도 국밥은 의례이 해 내버려서 길바닥을 더럽히고 사람이 죽으면 가산을 탕진하야서라도 '자리거지도' 하고 재도 올린다. (…) 채동지(蔡同知)라는 요물이 한번 나오매 장안 만호(萬戶)의 남녀가 과자를 사 가지고 선후를 다투어 그 놈의 침을 단 꿀같이 받아먹었고 백인(白人)이라는 사주장이가 간판을 부친 지 오래지 않아 수 만 원의 졸부가 되었다 한다."

이처럼 무속은 80년 전 서울의 번창하는 "마취제" 사업이자 일상생활의 일부였습니다. 최근의 통계를 보면 역술인과 무속인이 각각 10만 명과 20만 명을 상회하고 영업 중인 점집이 20만 개를 헤아리더군요. 운세·궁합 등의 역술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터넷 사이트 중에는 하루 400만 회의 방문 횟수를 기록하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무속은 성리학자들과 개화파 인사들, 그리고 일제의 탄압과 견제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불가지(不可知)의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우리의 심성(psyche)을 지배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저는 "신령(신)·무당(사제)·고객(신도)·굿(종교의례) 등 신앙체계를 갖춘 어엿한 전통종교이자 기층문화로서 다종교 공존의 바탕이기에 앞으로도 지켜나가야 할 전통문화"라는 생각에도 공감하지만, 한 세기 전이나 요즘이나 무속을 가장한 금품 갈취나 지나친 일탈행위에 대해서는 비판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무속이 현대인들의 스트레스와 소외감을 소통시켜주는 순기능을 발휘하지만, 한편 기복에만 매달리는 무속신앙은 상충하는 개인의 이해만을 대변하기에 사회 문제의 합리적 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공동체 문화의 형성을 저해한다는 지적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나눔과 더불어 삶의 정신을 망각할 때 그것이 어떤 종교이든 비판을 받게 마련이겠지요. 무속을 믿는 사람들이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하는 기복행위에만 관심을 두고 무속인들도 고려시대의 팔관회나 연등회, 조선시대의 당제와 성황제와 같은 사회적 통합의 옛 전통과 순기능을 오늘에 되살리거나 이웃 사랑과 나눔의 정신을 끌어내려 하기보다 기복의 대중심리에 편승해 영리추구에 급급하다면, 무속은 사회적 질타의 대상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전래 이후 한국사회에 부정적 영향도 많이 끼쳤기에 이에 대한 비판이 필요한 만큼, 긍정적 역할을 한 것도 평가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박 선생님 표현을 빌리자면, 근대화 지상주의자 박영효가 1894년말 내무대신으로 갑오경장을 주도할 때 어느 미국인에게 개혁을 도와 달라고 요청한 다음과 같은 말은 한번 곱씹어 볼 만합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위하여 훌륭한 일을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들은 지리적으로 조선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어떤 [영토적] 욕심을 부리리라는 의심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민]교육과 기독교화입니다. 당신들은 선교활동과 기독교계 학교를 통해 조선국민들을 교화시킬 수 있고, 그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은 매우 훌륭하면서도 매우 힘든 과제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위대한 공화국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귀국의 선교사들은 이미 조선에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우리의 민신은 누그러져 있으며 기독교화로의 길은 활짝 열렸습니다. 많은 기독교 교육자들과 사업가들이 우리나라의 모든 분야에서 활약해주기를 바랍니다. 우리 민족은 어떤 제도적 개혁을 단행하기에 앞서서 먼저 교육수준을 높여야 하고 기도교화 되어야만 합니다. 그 다음에야 우리는 입헌정치를 이룩할 수가 있을 것이며, 먼 훗날 아마 미국과 같은 자유롭고도 개명된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F. A. McKenzie, The Tragedy of Korea)"

이 글에 의하면 박영효는 분명 미국과 같은 국민국가 만들기를 꿈꾸었고, 그 전제 조건으로 미국 선교사의 힘을 빌려 한국의 기독교화를 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1900년을 전후해 한국의 근대화를 도모한 서구 중심주의적 친미개화파 세력은 기독교를 유교를 대체할 정신적 지주로 보고 미국식 공화제를 전제왕권과 양반지배체제를 대신할 국가체제로 받아들였던 것이지요, 박 선생님이 보실 때 박영효는 살육을 일삼는 근대 국민국가를 이 땅에 도입하려 한 근대화 지상주의자이고 세계평화를 깨는 악의 세력인 미국의 앞잡이를 자임한 매국적 계몽주의자이자, 가진 자를 위한 종교인 기독교를 수용하려한 "마약중개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해 보면, 한 세기 전 사회진화론이 지배하던 살벌한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이 땅의 민중을 외세의 침략에서 보호하기 위한 실질적 수단이 국민국가 만들기 말고 어떤 것이 있었을까요? 물론 기독교가 "서양 제국주의의 앞잡이" 역할을 한 측면도 분명히 있고 선교사들 중에도 돈벌이에 나서거나 일제에 야합한 이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족적으로 일으킨 국민국가 세우기 운동인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계열의 대표가 16인으로 가장 많았고, 당시 전체인구에 2%에도 못 미치던 기독교도가 피체자 중 17.6%로 가장 많았다는 사실은 기독교가 한국의 근대국가 수립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잘 웅변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전통이 20세기에 들어와서도 한국의 기도교도들이 민족·민중적 정치운동에 앞장서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끝으로 작은 문제지만, 박 선생님은 전래의 무속을 "신도(神道)"라는 이름으로 국가화해서 내셔널리즘의 상징물로 만든 메이지 일본의 근대주의자와 달리 우리의 개화파 인사들은 외래 종교인 기독교를 수용하려 했기에 민족의 상징인 무속을 악습으로 지목했다고 보시더군요. 그러나 일본의 근대주의자들이 내셔널리즘의 상징물로 만든 것은 엄밀히 말해 전통적인 무속이 아니었습니다. 메이지 유신의 주축세력들은 애초에 왕정복고(王政復古)와 제정일치(祭政一致)를 내걸고 신도를 국교로 정하면서 1869년 기독교 신자 3000명을 유배시키는 등 기독교를 탄압하고 신도와 불교가 엄연히 다르다―신불판연(神佛判然)―는 명분을 내세워 신사에 남아 있는 불교적 요소도 없애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도 국교화 정책이 서구열강의 반발을 초래하자 국가의 제사로서 "신사(神社)신도"를 일반의 종교로부터 분리해 내셔널리즘의 상징인 국가신도로 하고 무속에 해당하는 신도를 "교파(敎派)신도"로 구별하는 제사와 종교의 분리를 추진해 1882년에 국가신도가 신도·불교·기독교 위에 군림하는 특이한 국교 제도를 확립한 것입니다. 따라서 근대 일본에서도 미코(무당) 등 민간종교인들의 기복, 주술행위를 금압하고 민중이 사사롭게 신사를 세우는 것도 철저하게 막았습니다. 즉 기독교 수용을 거부한 일본의 근대주의자들도 무속을 탄압하고 배제한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더 읽어 볼만한 논저**

김인회 외. 『한국무속의 종합적 고찰』. 고대 민족문화연구소, 1982.
김태곤. 『한국의 무속』. 대원사, 1991.
이필영. 『마을신앙의 사회사』. 웅진, 1994.
조흥윤. 『한국의 샤머니즘』,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오재환, 「개방 20년 기간 중국 종교 정책의 변화」, 『중국학보』48, 2003.
유영익. 「개화파인사들의 개신교 수용 양태」, 『한국근현대사론』, 일조각, 1992.
村上重良·高橋昌郞. 「敎派神道·キリスト敎」. 『(岩波講座)日本歷史: 近代 2』15. 東京: 岩波書店, 1967.
村上重良·吉田久一. 「明治期の宗敎」. 『宗敎史: 体系日本史叢書 18』. 東京: 山川出版社,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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