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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유의 별 떨어지다…'축구계 비틀즈' 베스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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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유의 별 떨어지다…'축구계 비틀즈' 베스트 사망

[프레시안 스포츠]슬픔에 빠진 영국 축구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의 전성기를 이끈 슈퍼스타 조지 베스트가 25일(현지시간) 폐렴과 내출혈 등으로 사망했다. 향년 59세.

영국 축구계가 '축구 천재' 베스트의 사망 소식으로 슬픔에 빠진 가운데 이번 주말 열리는 프리미어리그 모든 경기에서 1분간 고인의 명복을 비는 묵념 행사를 갖기로 결정했다.

맨유는 "베스트의 무시무시한 드리블 능력과 많은 득점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버티 아헌 아일랜드 총리는 "베스트는 이름 그대로 영원히 '베스트'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도 "베스트는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축구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며 애도를 표했다.

***베스트, '그라운드의 비틀즈'가 되다**

베스트는 1960~70년대 팝 아이콘으로 등장했다.'5번째 비틀즈 멤버'란 별명도 이런 이유로 붙여졌다. 베스트의 머리 스타일이 비틀즈와 비슷하기도 했지만 베스트는 축구선수가 대중문화 스타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해낸 최초의 선수였기 때문이다.그는 환상적인 축구실력뿐 아니라 긴 머리, 새로운 패션으로 '그라운드의 비틀즈'가 된 셈이었다.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출신인 베스트는 1961년 15세의 나이에 맨유로 향했다. 하지만 베스트는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베스트의 아버지는 베스트를 설득했고 맨유의 매트 버스비 감독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17세에 프로무대에 데뷔한 베스트는 향수병 때문에 완벽하게 팀에 적응할 수 없었다.

베스트는 맨유에게 "경기가 끝나면 나의 집이 있는 벨파스트로 가는 비행기편을 항상 마련해 줬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고, 베스트의 재능을 높게 평가하던 구단 측은 베스트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1958년 뮌헨 비행기 참사로 알토란 같은 선수 8명을 잃었던 맨유는 조지 베스트, 데니스 로, 바비 찰튼의 공격라인을 새로 형성하며 세계축구의 강자로 떠올랐다. 특히 청소년 팬들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던 베스트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65~66시즌 유러피안 컵 8강전 벤피카와의 경기 이후부터 포르투갈 사람들은 아직 20세가 되지 않았던 축구천재 베스트를 'El Beatle(비틀즈)'로 부르기 시작했다.

맨유와의 원정경기에서 3대2로 승리해 사기가 충천해 있던 포르투갈의 벤피카는 홈경기에서는 패배를 모르는 유럽 최강팀이었다.

'검은 표범' 에우제비우, 콜루냐, 제르마노를 앞세운 벤피카와 원정경기를 치르는 맨유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맨유의 감독 매트 버스비는 선수들에게 전반 20분 동안 탐색전을 하도록 주문했다. 하지만 베스트는 버스비 감독의 명령을 거부했다. 베스트는 전반 12분 경까지 2골을 뽑아내며 '리스본의 독수리' 벤피카를 침몰시켰다. 경기결과는 5대1로 맨유의 압승이었다.

경기 뒤 버스비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던 베스트를 가리키며 "그의 귀에는 틀림없이 귀마개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베스트의 귀를 덮는 머리 스타일을 빗대 재치있는 농담을 한 것.

***1968년 맨유를 유럽 정상에 올려 놓은 베스트**

이미 1966년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잉글랜드 축구는 2년 후 유러피안 컵 정상에서 맨유가 벤피카를 또다시 4대1로 따돌려 축제 분위기였다. 더욱이 10년전 비행기 참사를 딛고 일어서 정상에 오른 맨유의 매트 버스비와 선수들은 웸블리 구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

벤피카와의 결승전에서 골을 성공시킨 베스트는 "벤피카와의 경기에서 나는 상대팀 골키퍼를 무용지물로 만들며 내가 원했던 스타일의 골을 넣었다"며 자신만만해 했다. 맨유의 자존심을 한껏 세워 준 조지 베스트는 1968년 '올해의 유럽축구 선수'로 선정되는 등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팀 전술은 나를 괴롭히는 것"이라는 말을 할 만큼 모든 것이 제 멋대로였던 베스트는 경기장 밖에서도 여성들과의 파티 등 화려한 생활에만 탐닉했다. 베스트의 돌출 행동은 명장 매트 버스비가 팀을 떠나면서 더욱 심해졌다. 계속되는 음주와 연습불참으로 베스트는 맨유의 후임감독들과 불화를 겪어야 했다. 이때 베스트의 나이는 25세에 불과했다. 그는 이후 수 많은 팀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남은 재능을 뽐내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축구팬들은 조지 베스트와 같이 재능있는 선수들이 많이 출현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60년대 비틀즈의 열풍과 함께 팝 스타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던 조지 베스트. 단 한번도 월드컵 본선 무대에 서지 못했고 자기 관리에도 실패했던 베스트는 '축구 황제' 펠레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로 알려져 있다. 알코올 중독증세에서 회복되긴 했지만 베스트는 지나친 음주 때문에 2002년 여름 간 이식 수술을 받았고, 결국 그 수술의 후유증으로 3년 뒤 세상을 떠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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