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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당신들만 잘 하면 된다

<데스크 칼럼> 정치권의 '포스트월드컵'에 고함

유사 이래 최대 인파인 7백만이 거리에 나와 열광하는 이유는?

복잡한 설명과 분석들이 등장하지만 정작 답은 간단하다. 우리 축구팀이 잘하기 때문이다.

월드컵 개막 이전 '홍3 비리'로 곤욕을 치르던 정부가 월드컵 열기를 띄우려 온갖 법석을 떨었어도 시중 분위기는 싸늘하기만 했다.

하지만 5월 들어 잉글랜드, 프랑스 등 선진 축구팀과의 평가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정말 놀랄 만큼 빠른 기세로 월드컵 열기가 떴다. 그리고 폴란드와의 첫 경기에서 승리하면서부터 대폭발이 일어났다.

'홍3 비리'는 평가전 성적만으로 이미 제쳤고, 지방선거까지 훌쩍 뛰어넘어 월드컵 하나만 남았다. 급기야 투표율 저하를 우려한 정부와 민주당이 월드컵 얘기 좀 그만 하라고 성화를 부릴 정도였다.

우리보다 한참 윗선으로 봤던 선진 유럽 강국들에게 우리 대표팀이 보기 좋게 한방 먹이는 멋진 모습, 골 골 골인 장면들, 숨막히는 접전과 대역전 드라마, 바로 이것이 4천7백만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것이다.

***정부, '제2의 월드컵' 시작**

이제 월드컵 폐막이 다가오면서 정치권이 바빠졌다. 생전 듣도 보도 못했던, 아니 상상조차 못했던 수백만 붉은 군중의 불타는 열기를 보더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모양이다.

정부는 '제2의 월드컵'을 시작한단다. 김대중 대통령은 24일과 25일 연이어 '월드컵 개최를 통해 조성된 국민적 단합 분위기와 국가이미지 상승 효과를 월드컵 이후에 극대화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내각에 지시했다.

이제 각 부처 실무자들이 바빠졌다. 뭔가 기획안을 내놓아야 한다. 당장 26일 '포스트 월드컵' 대책 관련 경제장관회의를 시작으로, 7월 3일 국무총리 주재 '포스트 월드컵' 대책 관계장관회의, 7월 12일 '포스트 월드컵' 분야별 종합보고회의, 7월 18일 '포스트 월드컵' 경제효과 극대화 보고회의가 열린다.

매번 회의 때마다 온갖 대책들을 쏟아내야 하니 부처 실무자들은 축구대표팀보다 더 바쁘게 뛰어야 하게 생겼다. 각 부처마다 누가 더 멋진 기획안을 내놓는지 경쟁이 벌어질 것이다. 정말 '제2의 월드컵'이다.

***'업그레이드 코리아', '한민족 대도약'**

한나라당은 '업그레이드 코리아'다.

25일 서청원 대표 주재로 열린 주요 당직자회의에서 '월드컵이 우리나라를 한 단계 끌어올릴 좋은 기회인 만큼 국민의 결집력과 자발적 힘을 정치를 비롯한 사회 각 분야의 개선 및 수준 향상으로 연결시키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강두 정책위의장과 허태열 기획위원장을 중심으로 후속대책 마련에 착수했고, 각계 전문가들이 참가한 가운데 '업그레이드 코리아'의 확산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키로 하는 등 여론수렴에도 나선다고 한다.

민주당은 좀더 거창하게 '한민족 대도약'이다.

25일 한화갑 대표 주재로 고위당직자회의를 열고 ▲국민통합 ▲제반 분야의 선진화 ▲정치의 업그레이드 ▲경제 재도약 ▲문화체육의 선진화 등 5가지 주제를 논의하기 위해 임채정 정책위의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별도의 팀을 구성했다.

'한민족 대도약 프로그램'과 '포스트 월드컵 프로젝트'라는 두개의 큰 과제를 추진하기 위해 국민 각계의 의견을 듣고 아이디어도 내서 당 나름의 정책을 만들고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허황된 '구호 장난', 신뢰 안 가**

다들 좋은 얘기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와 정치권의 이런 거창한 계획들을 접하는 첫 느낌이 왜 이렇게 시큰둥할까? 기자가 원래 심사가 몹시 뒤틀려 있는 족속이라 그런가?

아니다. 정부와 정치권이 너무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 얘기에 아예 귀 기울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온갖 더러운 비리 스캔들로 국민의 심사를 뒤흔들어 놓은 사람들이 누군가. '누가 누가 덜 못났나' 경쟁하듯이 선거판을 추잡한 헐뜯기 승부로 만들어 놓은 사람들은 또 누군가.

온 국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축구 하나에 열광하는 데에는 그간의 답답함을 풀어 버리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가 깔려 있다. 스산한 삶의 고통과 짜증을 일거에 해소할 돌파구를 우리 팀의 멋진 승리에서 찾은 것이다.

초등학교부터 밤늦도록 과외에 시달려야 하는 어린 학생들의 스트레스, 취직도 제대로 안되는 답답함, 생활고와 직장의 압박, 이런 모든 삶의 힘겨움을 벗어던질 해방의 공간이 열린 것이다.

이런 4천7백만 국민의 짜증과 답답함을 그야말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놓은 사람들이 누군가. 스트레스 지수를 '대도약' 하게 만든 사람들이 도대체 누군가.

그런 장본인들이 '업그레이드 코리아' '한민족 대도약'을 부르짖고 있으니 듣는 사람 기분이 좋아질 리 없다. 때 되면 등장하는 허황된 '구호 장난'에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이다.

***정치인, 당신들만 잘하면 된다**

이제 월드컵이 끝나고 나면 온갖 장밋빛 구호들, 휘황찬란한 계획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이 나라가 잘 될 것이다, 이제 앞으로 이렇게 하자' 라는 참 좋은 얘기들이 신문 방송을 도배할 것이다.

하지만 제발 부탁이다. 우리 국민들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아 달라. 가뜩이나 힘든 삶을 사는 분들에게 또 한번 긴장하고 분발하라고 강요하지 말아 달라.

정치인, 당신들만 잘 하면 된다.

대한민국을, 우리 국민을 이렇게 만들자는 계획을 내놓기 전에 먼저 철저히 반성하라. 정부가, 각 정당이, 대통령 후보부터 정치인 한사람 한사람이 이렇게 달라지겠다는 다짐부터 내 놓으라. 그리고 실천하라. 축구 대표팀처럼 골을 넣어라.

우리 축구 대표팀은 도저히 넘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유럽 축구팀들과 대등한 경기를 펼치고 있다. 바로 거기에 온 국민이 박수를 보낸다.

유럽엔 선진축구만 있는 게 아니다. 선진정치도 있다. TV만 켜면, 신문만 펼치면 독일의 국회의원이 어떻게 일하는지, 프랑스의 장관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소상히 나온다.

우리 정치인 가운데 그 누구라도 유럽의 선진 정치인처럼만 행동해 준다면 국민들은 거기에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것이다.

4천7백만 국민들은 언제든 다시 열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정치인, 당신들만 잘 해 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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