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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보다 파업을 좋아하는 노동자는 없다"

<데스크 칼럼> '월드컵 무파업' 바라보는 걱정

14년전인 1988년 9월 17일 서울올림픽이 개최되던 날, 기자는 파업중이었다.

당시 기자는 현대사회연구소에 재직중이었고 노동조합위원장이었다. 조합원 두 명에 대한 해고조치에 맞서 한달 넘게 파업을 진행중에 올림픽 개막일을 맞았다. 조합원들과 함께 농성 현장에서 TV로 올림픽 개막식을 지켜본 기억이 새롭다.

하지만 올림픽 기간 동안 우리 노동조합은 파업을 태업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현대사회연구소는 경기도 성남 산골에 동떨어져 있었고, 노조 파괴에 맞선 우리의 외로운 투쟁은 언론보도를 통해서만 외부에 알려질 수 있었다.

조합원 전원이 철야농성을 하고 꽹가리와 북을 치며 "부당해고 철회하라"고 아무리 외쳐도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야말로 '메아리 없는 외침'이었다. 다만 신문지상에 간간히 우리의 투쟁 소식이 전해지는 것이 유일한 외부와의 통로였다.

그런데 올림픽이 시작됐다. 누구도 우리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올림픽 기간 동안 파업을 중단하고 태업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올림픽 폐막과 함께 다시 파업을 재개했다.

***노사 양측 서로 '월드컵 악용한다' 비판**

14년전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 것은 '월드컵 무파업' 때문이다.

정부는 일찍부터 '월드컵 무파업'을 추진해 왔다. "세계적 이목이 집중되는 월드컵 기간에 파업과 집단행동이 벌어지면 국가이미지를 실추시켜 경제에 큰 타격이 예상된다"는 것이 이유다.

재계는 노동계가 월드컵을 노리고 일부러 임금협상과 파업기간을 조정했다고 비난한다. 반면 노동계는 재계가 월드컵을 핑계로 임금 및 단체협약 협상에 무성의하게 임하고 부당노동행위를 일삼고 있다고 비판한다.

양쪽 다 있을 수 있는 얘기다.
노동계 입장에선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협상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 투쟁력을 월드컵 기간에 맞추었을 수도 있다. 반대로 재계는 월드컵 때문에 파업에 대한 국민여론이 악화될 것이므로 노동계가 강하게 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 기초해서 노조와의 협상에 오히려 더 무성의하게 임했을 수도 있다.

반대 경우도 있다. 실제로 상당수 사업장에서는 노조와 사업주가 월드컵 시작하기 전에 협상 끝내자고 함께 서둘러서 임단협이 원만히 타결된 사례가 많다.

이러저러한 역관계 속에 이제 월드컵 개막이 다가온다. 정부는 21일에도 양대 노총에 무파업 선언 동참을 촉구했고,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담화 발표를 건의하기로 했다. 반면 민주노총은 22일 금속노조를 시작으로 파업에 나설 계획을 굽히지 않고 있다.

***'월드컵 무파업'의 전체주의, 비민주성**

문제는 '월드컵 무파업'에 대한 정부 태도이며, 정치권의 반응이다.

먼저 정부의 자세를 보자. '1백년만의 민족적 대사'인 월드컵을 훌륭히 잘 치러서 국가경제 도약의 계기로 삼자는 뜻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사 당사자의 입장과 현재 임단협의 진행상황 등은 고려치 않은 채 정부가 앞장서서 '월드컵 무파업'을 유도하고 나선 것은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다.

한국을 주목하는 외국인의 눈에 거짓으로라도 평화로운 노사 분위기를 억지 연출해 보자는 것밖에 더 되는가? 군사독재정권기에나 있을 법한 전체주의, 획일주의적 방식의 재연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정치권에선 일언반구 시비도 없다. 사사건건 정부에 시비를 걸고, '월드컵 무정쟁'에 대해서는 펄쩍 뛰는 한나라당도 '월드컵 무파업'에는 찬성하고 나선다. 민주당, 자민련 모두 일치단결이다.

정부의 태도를 정면공격은 안 하더라도 "노사 자율에 맡겨야 할 사안이지 정부가 먼저 나설 문제가 아니다"라는 정도의 점잖은 코멘트 하나 없다. "전체주의, 획일주의적 방식이므로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 위배된다"는 원론적 반론도 전혀 없다.

적어도 노조문제, 노사관계에 관한 한 이 나라 정치권엔 여야가 따로 없다. 말끝마다 '민주'를 들먹이는 정당들이지만 진짜 민주주의의 원칙이 이럴 때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하나도 없다.

***'성숙된 민주사회' 아직도 먼 과제**

회사마다 사업장마다 현재 노사간 쟁점과 협상정도는 모두 다르다. 노조의 힘도 다르고, 사업주의 태도도 다르다. 따라서 끝내 파업으로 가는 사업장도 있을 수 있고, 서둘러 협상이 마무리되는 사업장도 있을 것이다.

또 일부 경우는 정부의 얘기대로 월드컵 시작까지 열심히 협상해 보다가, 정 안되면 월드컵 기간 동안은 협상을 쉬고, 끝난 이후 다시 시작하는 사업장도 있을 수 있다. 물론 그때 가서야 파업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모든 걸 한꺼번에 싸잡아서 월드컵 기간 중 파업은 절대 안 된다고 앞장서 바람을 잡는 정부의 자세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축구보다 파업을 좋아하는 노동자는 없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월드컵 기간 중 파업을 벌여야만 하는 노동조합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노동조합이 일부 있다고 해서 이 나라 국가경쟁력이 실추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에 투자하려 고민하는 외국자본들은 한국의 노사관계 일반에 대해, 각 기업 노사관계의 구체적 상황에 대해 면밀히 검토하기 마련이다. 월드컵 기간 중 파업이 하나도 없었다고 해서 갑자기 안 하려던 투자를 결정하는 정신 나간 외국자본은 없다.

그런데도 국가 이미지를 들먹이며 '월드컵 무파업'을 부르짖는 정부의 얄팍함이 걱정이다. 그 속에 도사린 구시대적 총력동원체제의 논리가 두렵다.

이런 문제에 대한 정치권과 여론주도층의 무감각, 너무도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반(反)노조주의, 친(親)자본편향, 민주주의 원칙 부재가 새삼 섬뜩하다.

바로 이런 것들이 오히려 우리의 국가경쟁력을 깎아 먹지나 않을까?
'월드컵을 유치한 자랑스런 한국'은 여전히 노동자들에겐 살아가기 힘든 나라다. '성숙된 민주사회'는 아직도 머나먼 과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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