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지도자의 리더십과 그 역할은 그 시대의 역사적, 정치사회적 조건과 상호작용하면서 구현된다. 정치지도자의 리더십이 시대적인 과제를 해결하는 구심점이 되는가 하면, 그 시대의 구조적 한계를 넘지 못하고 무력해지거나 오히려 정치사회의 발전에 질곡이 되기도 한다. 이른바 양김 집권시대에 대한 평가도 이런 시대적인 환경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정치지도자는 나름대로의 정치적 자산과 장점을 바탕으로 지도력을 확보하게 된다. 그렇다면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권좌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김영삼과 김대중, 이른바 양김의 정치적 자산은 무엇이었는가. 두 사람의 차이를 논할 수도 있지만, 일단은 두 사람 모두 한국민주화 운동을 이끈 야당의 대표적 지도자였다는 점이다.
과연 이들이 어떻게 야당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좀더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야당의 지도자가 된 이후 이들은 군부독재정권의 대표적인 탄압대상이 되었고, 그럴수록 이들의 정치적 구심력은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집권 대통령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YS, DJ 모두 지역주의와 결합된 카리스마적 리더십**
그러나 정치사회적 환경은 변화하기 마련이고, 그런 만큼 정치지도자의 리더십도 변화를 필요로 한다. 이들 양김에 있어 리더십과 정치적 인식의 변화를 필요로 하는 계기가 몇 번 있었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계기는 집권세력이 된 것이었다. 민주화 운동 시기에는 저항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이 이들의 리더십이었지만, 집권 이후에는 스스로 민주화를 구체화시키고 국정을 이끌어 가야 했다. 여기에는 지역주의적 갈등의 민주적 해결도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다. 물론 김영삼의 집권과 김대중의 집권환경에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도 크다.
알다시피 민주화 운동 시기에는 이들 개인의 카리스마가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었다. 김영삼의 카리스마와 김대중의 카리스마는 좀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집권 이후에는 카리스마뿐 아니라 민주적 제도화에 기초한 리더십도 필요로 했다.
경험적, 이론적으로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오래갈 수 없다. 특별한 인간처럼 보이는 사람도 일상적 경험을 오래 하다 보면, 그냥 보통 사람과 별 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미 87년 대선 이후로 양김의 카리스마는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호남의 한을 바탕으로 지역주의적 카리스마를 지속할 수 있었고, 카리스마적 요소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김영삼은 반DJ에 의존한 지역주의적 리더십을 기초로 집권했다.
지역주의 문제를 둘러싸고 이미 87년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양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혹자는 한국의 정치적 지역주의에 대한 책임을 이 당시의 양김 분열에 두기도 한다. 이는 최근 노무현 등의 '신민주연합론'과 관련해 다시 거론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당시 양김 분열이 지역주의적 분열에 대한 일단의 책임이 있지만, 마치 한국 지역주의가 이들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식의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또한 당시 국민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세력이 집권에 실패한 배경으로 이들의 분열을 비판하기 앞서 노태우 후보를 지지한 36.6%가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차원에서 지역주의를 악화시켰던 결정적 계기는 1990년의 '3당합당'이었다.
***YS정부, '개혁'은 다소 진전, '통합'은 실패**
김영삼은 집권 이후 자신의 민주화 명분을 구체화시켜야 했다. 구시대 반민주적 유산을 청산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 이의 일환으로 하나회 해체 등 과거 정치개입 배경이 된 군부의 사조직을 해체했다. 어떤 경로에서든 군부 독재정권 책임자에 대한 사법적 처리도 했다. 금융실명제 실시 등 정경유착 및 비리의 요인도 제거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정치제도 및 통치방식의 민주화는 크게 진전되지 못했다. 일부에서는 3당합당을 통한 절반의 민주화 정권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기도 하지만, 한계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일찍이 토크빌 등이 말했듯이 민주화 운동 세력이 집권 이후 민주적 체제를 이루기가 쉽지 않다는 주장이 김영삼 정권, 김대중 정권 모두에서 현실화되었다.
반체제운동 과정에서는 집중화된 비민주적 리더십이나 카리스마가 도움이 되지만, 집권 이후에는 그것이 비민주적 정권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입지와 수성은 다르다는 말이 나온 것 같다. 김영삼, 김대중 모두에서 나타나듯이 민주화 운동 기간 수십 년 간 형성된 리더십 행태를 집권 이후 획기적으로 바꾸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김영삼 정권 내부의 비민주적 구조는 대통령에 집중된 정부권력 구조 등 제도적 한계와 맞물려 나타났다. 제도적 민주화가 달성되지 못한 상태에서는 사적 관계가 통치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이같은 폐해는 김대중 정권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권력층 주변의 비리로 나타났다.
김영삼 정권이 갖는 역사적 소명이 자칫 대립적인 요소로 보일 수도 있는 '개혁과 통합'이었다. 그런데 개혁에는 부분적인 성과를 거두었다면 국민통합은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오히려 악화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 중요한 통합과제는 집권과정에서 심화시켰던 호남고립의 지역주의 구도에 따른 문제였다.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구국의 결단'이라는 그의 '3당합당의 변'은 나중에라도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권유지 차원에서는 당면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 문제에 대한 심각한 고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3당합당의 구도를 그야말로 구조화시켰다. 그리고 김대중이 정계복귀를 하면서 지역주의의 다른 축으로 기능했다.
지역주의 문제를 제외한다면 김영삼 정권의 비민주적 한계와 제도화의 실패는 최초 민간 민주화 정권이 갖는 한계로서 불가피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물론 여타 정책들의 방향이나 성패를 논할 수 있으나, 이는 민주화운동세력이 갖는 시대적인 한계와는 다른 차원에서 조명될 부분이다.
***DJ정부, YS보다 구체적 개혁.통합 전략 필요했으나 사실상 없어**
김대중의 집권은 단지 양김 중의 한 사람이 집권한 것 이상의 차별성을 가졌다. 김영삼 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자산은 민주화운동세력에 있었지만, 집권 기반은 사실상 그가 대항했던 역대 집권세력이었다. 김대중 정권은, 최초의 정권교체라는 말이 함의하고 있듯이 호남고립의 지역주의를 포함한 한국 정치 구도에서 최초로 주변부 세력에 기반을 둔 정권이었다. 역대 집권세력 중 가장 진보적인 정권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이런 성격은 정권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크게 하기도 했지만, 역으로 새로운 정권의 활동을 제약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가 진보적 성향을 보였던 대표적인 정책이 '햇볕정책'으로 표방된 대북 포용정책이었다. 이 정책이 북한 및 김정일의 태도 변화와 맞물려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 회담의 성과로 나타났다. 이후 단절과 교류를 반복해오고 있지만 김대중 정부 들어 대북 교류는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또 제도적으로 아직 정착되지는 않았지만, 복지정책의 강화도 대표적인 진보적 성향의 정책이었다.
김대중 정권의 진보적 성향은 보수, 진보 양쪽에서 공격을 받아 왔다. 대북정책이나 복지정책을 두고 야당 등에서는 '좌파적'이니 '사회주의 정책'이니 하면서 공격하고 있다. 반면에 진보진영의 일부에서는 구조조정 및 노동자해고, 외자유치 방식, 미비한 사회보장제도 등을 두고 반민중적 반민족적 신자유주의 정책이라며 김대중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논란을 여기서 간단하게 정리할 수는 없으나, 김대중 정부의 정책이 일반 국민들의 평균 수준보다는 진보적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김대중 정부는 김영삼 정권보다는 더 개혁과 통합의 구체적인 전략이 필요했다. 김영삼 정부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를 보여야만 정권교체의 의미에 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의 한계로 나타났던 정치적 리더십, 사당화된 정당정치, 그리고 지역주의 구도 등도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에 비해 상대적으로 카리스마가 더 강했던 만큼 대통령 1인에 의한 국정 운영 방식은 김영삼 정부보다 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김대중 정부는 이른바 소수정권으로서 새로운 과제와 그에 따른 정치전략이 필요했다. 그러나 집권 말기에 이른 오늘의 시점에서 구체화된 개혁전략도 통합전략도 사실상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구체적인 개혁과 통합 전략이 없는 상태에서 나타난 국내정치의 혼란은 대북관계, 외환위기 극복, 노벨평화상 수상 등의 성과를 무력화시켰다. 급기야 대통령 아들 등 권력주변부의 비리가 연이어 터지면서 국민적 신뢰가 극도로 추락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양김 정권들의 한계를 지적하는 동질적 기반이 되고 있다.
***지역독점의 비민주성 극복이 앞으로의 과제**
지난 1980년대를 전후해 민주화를 이룬 이른바 후발민주국가들에서 개혁을 달성하고 안정을 이룬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개혁을 표방하는 집권 민주화세력은 구 지배세력을 개혁에 저항하는 수구 기득권 세력으로 비판한다. 구 지배세력들은 민주화 세력을 두고 '무능' 독단' 집단으로 반박한다. 정치는 정쟁을 반복하고, 국민통합의 기능을 상실하기까지 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들 나라의 경제 위기상황도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다. 우리의 경우 일부에서는 폄하하고 있지만, 후발국가 중 경제가 가장 양호한 편이다. 이제 정치발전이 과제이다.
양김, 또는 3김 정치는 개념화 배경이 그렇듯이 대체로 부정적인 함의를 갖고 있다. 혹자들은 양김 집권 10년이 '성공이냐, 실패냐' '공(功)이 크냐, 과(過)가 크냐'를 따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평가는 불가능하고 필요하지도 않다. 현 단계에서 우리의 과제는 역사에서 그들의 역할을 평가하면서 남긴 과제를 반면교사로 삼는 것이다.
최근 '신민주연합론'을 둘러싸고 3김정치 복원에 대한 우려가 거론되기도 하는데, 3김의 주도력은 자연스럽게, 적어도 2선으로 물러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3김정치의 유산이 극복과제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지역간 적대적 대결의 정치구조와 지역독점의 비민주적 정당체제이다. 최근 정계개편 논란과 오는 12월의 대선을 앞두고 이를 위한 우리의 실천 과제와 전략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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