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가 참 무섭다는 생각이 처음 든 게 1990년대 말 '군대'를 둘러싼 각종 논란을 보면서였다. 한국사회의 이런 무서운 광기는 1997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아들 병역 기피 의혹, 1999년 군 가산점제 논란, 2002년 가수 유승준씨의 입국 거부 사태, 최근 병역기피 국적포기 논란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 남성들에게 군 복무는 '평등'의 코드로 인식된다. 군 복무는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이지만 특권층 자제는 유유히 빠져 나간다는 엄연한 현실이 계속돼 왔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군필 남성이 군 미필자에게 갖는 우월감과 보상심리는 성별을 불문하고 동일할 수밖에 없다.
"니들이 군대를 알아?"
그래서 군대에 대한 얘기는 항상 군대를 다녀 왔으리란 가정이 성립하는 남성들만이 해 왔다.
***한국 '남성성'의 키워드, 군대**
<대한민국은 군대다>(권인숙. 청년사)라는 도발적 제목의 책을 쓴 사람은 '군 미필자'인 권인숙 명지대 교수다.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내 안의 군사주의(Militarism in My Heart)'를 기반으로 쓴 책이다. 그는 군사주의를 "군대의 존재와 힘의 부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라고 정의했다.
"대표적 군사도시인 원주에서 자라고 커서 전쟁이 일어나는 꿈을 수도 없이 꾸었고, 북한에 태어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를 자주 생각했었다. 2년 정도 살았던 속초에서 북한 간첩의 침투를 막기 위해 설치했다는 모래 속의 지뢰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었고, 바다를 둘러싼 살벌한 철조망을 집 앞에서 바라보았었다. 반공에 대한 절규의 상징으로 배를 긋는 자해 행위를 동반한 멸공 궐기대회 맨 앞에서 깃발을 잡기도 했고, 고등학교 때에는 학도호국단 간부로 대열의 앞에 서기도 했다. 대학 시절에는 폭력투쟁을 큰 의문 없이 정당한 방법으로 받아들였고, 돌이나 화염병을 잘도 던지는 남학생들 옆에서 왠지 자신의 육체적 열등함이 혐오스러웠던 경험도 있었다. 게다가 군사정권에게 직접적인 억압을 당하기도 했던 나였다. 어떻게 이런 삶을 산 내가 한번도 나 자신을 군사주의나 군사화, 아니 쉽게 군대와 연결 지어서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그가 스스로, 또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앞서 군사화, 군사주의라는 개념이 사회.제도적 측면에서 고찰돼 왔다면 여성학자들은 군사주의의 개념을 일상생활로 끌어들여 설명한다. 군대는 한국 사회에서 '남성성'을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다. 따라서 군사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남녀간 성별관계를 조직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쳐 왔다. 더 나아가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말은 군 미필자일 수밖에 없는 여성, 장애인 등이 우리 사회의 온전한 성원권을 획득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동성애보다 늦게 등장한 양심적 병역거부**
한국의 징병제는 55년간 아무런 문제 없이 유지돼 왔다. 오죽하면 소수자들 중 동성애보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더 늦게 등장했을까. 권 교수는 "동성애 거부 정서보다 병역거부 기피 정서가 한국 사회에서 더 뿌리 깊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며 "징병제를 유지하는 전 세계 76개국 가운데 여러 나라에서 징병제 유지 여부가 뜨거운 감자 노릇을 하는 현실과 비교해 보면 한국의 논란 없음은 예외적"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이중국적을 소지한 18세 이하 남자의 경우 병역의무를 마쳐야만 한국 국적을 포기할 수 있도록 하는 새 국적법이 통과된 뒤 '병역기피 국적포기' 논란이 일었을 때도 징집제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없었다. "왜 너희들은 안 가냐"라는 문제 의식만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권 교수는 "'나는 가기 싫어도 가는데 왜 너희들만 안 가냐'라는 논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 하는 젊은 남성들의 희생적 측면만을 가시화한다"며 "자기 희생을 했다는 사실에 대한 국민 모두의 공감은 결국 한 사회의 남성적 특권 구조를 유지.보존.확대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고, 국민적 정체성이 남성 중심적으로 형성되는 데에 중요한 근거가 된다"고 주장했다.
"재산권의 대부분을 행사하는 남성들은 세금을 내고, 국가 방어의 의무를 담당하면서 여성을 2등 시민화해 왔다"고 권 교수는 지적한다.
***"억울하면 군대 가라"면서 남성 24.9%만 여성 징병에 찬성**
군 가산점 논쟁을 비롯해 군대를 매개로 한 차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늘상 나오는 반박은 "억울하면 여자도 군대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여성징병에 대해 찬성하는 남성은 24.9%에 불과하다. 여성은 56%가 여성징병에 찬성했다(중앙일보 2005년 7월 1일자 여론조사). 권 교수는 "여성들이 못 하는 것을 한다는 것은 남성성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고, 여자와 다를 뿐만 아니라 여자를 보호할 수 있는 자로서의 정체성은 군대적 남성성에서 핵심을 이룬다"고 남성들의 여성징병 찬성 비율이 낮은 이유를 설명했다. "남성들은 자기와 함께 전방의 참호에 있는 여성이 아닌, 저 후방의 어딘가에 있을 여성들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같은 참호에 있는 여성은 남성의 자아를 짓밟는다."(이옥순, <여성적인 동양이 남성적인 서양을 만났을 때>, 푸른역사)
***군가산점제 논쟁에서 장애남성은 왜 빠졌나**
이처럼 군대를 매개로 형성된 남성들 간의 연대감은 군가산점제 논쟁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고 권 교수는 분석했다. 군가산점에 대한 위헌 판결 이후 군가산점제 폐지를 찬성하는 여성에 대한 불특정 다수 남성들의 공격은 집요했다. 당시 여성민우회 등 여성단체와 위헌 소송을 제기한 한 여성의 출신 대학인 이화여대의 홈페이지는 남성들에게 해킹당했다. 또 각종 토론 사이트에서 군가산점제 폐지 입장을 밝힌 여성들은 핸드폰으로 '죽여 버리기 전에 입 닥치라'는 등 협박 메시지가 수없이 찍혔고, 학교 및 직장을 알아내 찾아오겠다는 협박도 있었다고 한다.
"군대 가는 것이 국가에 대한 희생일뿐 아니라 군대 가는 남자는 가지 않는 남자에 비해 사회적 약자라는 의식의 확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수의 기득권 남자에 비해 군대에 가야 하는 이들이 약자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사실이 아니다. 남성의 80%가 군대에 가고 소수의 기득권 남자 수만큼 아니면 그 이상으로 많은 장애인 등의 남자들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에서 군대에 간 남자들을 약자로서 기억하는 것은 약자임에도 약자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자를 양산하게 된다."
군대에 가야 하는 남성들이 '약자'로 인식되는 현실은 군가산점제 논쟁이 '군대 가는 남성' 대 '엘리트 여성'의 구도로 만들어진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군가산점 폐지를 가져온 헌재 소송은 여성 청구인 네 명과 장애인 청구인 세 명이 제출했다. 그러나 '장애 남성'은 이 논쟁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권 교수는 "장애인은 누구나 공감하는 사회적 약자로 한국 사회에서 남성의 병역의무와 관련해 구성된 희생과 사회적 약자 논리를 설득력 있게 유지할 수 있는 대상이다. 결과적으로 여성만 강조돼 진행된 군가산점 논란은 여성은 희생도 하지 않고 평등만 원하는 파렴치한 집단으로 낙인 찍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김정열 소장은 "위헌 판결에 대한 일부 남성들의 반발은 장애우에 대한 국가기관의 차별이 정당했다고 강변하는 셈이라 당혹스럽기 그지 없다. '가산점 받고 싶으면 군대 가라'는 반응은 장애우들에게 비수를 들이대는 것과 다름 없다"고 '장애인'이 배제된 군사점제 논란의 문제점을 지적했다고 권 교수는 밝혔다.
결론적으로 그는 "문제는 병역기피가 아니라 '모두 다 가야 한다'는 병역의무의 강제적 평등성을 극복하고 개인의 다양한 사상과 의지가 인정될 수 있는 제도 개선을 통해 일방적 희생 논리나 약자 논리를 사회 전체적으로 극복해 나가는 것"이 우리 안의 '군사주의'와 맞대면하고 이를 극복해 나가는 첫 발걸음이라고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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