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대세론', '이인제 대세론'이 흔들리고 있다.
박근혜 탈당, 강삼재 부총재직 사퇴, 홍사덕 경선 불참, 김덕룡 탈당 시사, 박근혜-이수성 신당 추진 합의 등 불과 열흘 사이에 '이회창 대세론'을 향한 연쇄 파도가 몰아닥쳤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김근태 고백, 한화갑의 혼탁경선 경고 및 경선불복 가능성 시사, 개혁연대 주장 등은 모두 '이인제 대세론'을 공격목표로 하고 있다.
대세론의 시대는 가는가. 여야 1등 주자에 대한 일시적 흠집내기 공격인가, 아니면 구조적인 변화인가.
그간 모든 여론조사 결과 이번 대선은 이회창 대 이인제 구도로 예상되어 왔다. 이러한 민심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따라서 두 대세론이 민심의 수준에서 꺾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정치권 내에서 대세론을 흔들기 위한 파상공세가 시작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이회창ㆍ이인제 대세론의 실체는 지역주의**
두 대세론의 구도가 정말 바뀔 것인지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3김정치와 포스트 3김정치라는 구조적 변화를 먼저 살펴야 한다.
3김정치의 특질은 지역주의와 카리스마적 1인 지배 정치의 결합이다. 또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수십년 역사 속에 구조화되었다. 따라서 3김이라는 '대세'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려웠다.
이제 3김정치는 사라져 가고 있다. 정치분석가들은 포스트 3김정치의 첫 시기는 군웅할거의 시대가 될 것으로 전망해 왔다. 3김이라는 카리스마가 사라진 공백을 노리고 그간 3김의 위세에 눌려 왔던 많은 정치인들이 한꺼번에 뛰어들 것이란 전망이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이회창ㆍ이인제 두 대세론이 부상했다.
두 대세론의 부상한 것은 두 가지 이유다. 첫째 3김정치는 사라져 가고 있지만 지역주의는 여전히 강고하기 때문이다. 정권탈환과 정권수호를 노리는 영남과 호남 유권자의 집단적 선택이 두 대세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둘째 이회창ㆍ이인제 두 사람이 지난 대선을 통해 여타 정치인보다 우위를 선점했기 때문이다. 이회창은 당시 신한국당 경선 1등을 차지하면서 3김 이후의 대안으로 일찌감치 자리잡았고, 아직까지는 그 위치를 성공적으로 지키고 있다. 이인제는 돌출행동이었지만 5백만표에 달하는 지지를 거뒀고, 이를 바탕삼아 김대중 정부에 합류하면서부터 다른 주자들보다 한발 앞선 행보를 펼쳐 왔다.
종합해 보자면 누가 되었건 미래를 담보할 대안을 찾고 있었던 영ㆍ호남민들에게 이회창과 이인제 카드가 먼저 던져졌고, 민심은 이 둘을 '일단 선택'했던 것이 대세론의 실체였다.
***이회창ㆍ이인제는 스스로 보여준 게 없다**
'이회창 대세론', '이인제 대세론'의 실체를 이처럼 규정하는 것은 대세론이 실상은 지극히 취약한 것이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함이다.
우선 이 대세론은 역사적으로 검증된 바 없다. 단 한번 지난 대선의 경험이 있을 뿐이다. 시기적으로 일천하다.
둘째 이들의 대세론은 대세론의 주인공인 두 사람 스스로의 성과물이 아니다. 두 사람은 아직 대중 속에 뿌리내리지 못했다. 여전히 친숙하지 못하고, 몰랐던 사실들도 새롭게 밝혀지는 게 많다. 두 사람 개인에 대한 고정 지지층의 폭과 깊이가 취약하다.
셋째 두 사람 모두 정치권내 지지기반이 약하다. 자금이나 논리적 명분, 개인적 관계 등 모든 면에서 두 사람 앞이라면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정치인들의 숫자가 몇 안된다. "지금은 그 사람 편에 서 있지만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돌아설" 사람들 투성이다.
정치권 뿐아니라 언론이나 재계, 관계 등 여타 인맥에 있어서도 뚜렷한 세력이 없다. 뭔가 일이 터졌을 때 보호장치를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취약한 두 사람의 대세론이 그래도 몇 년을 끌어 왔다. 그건 분명 두 사람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도 대세론에 본격적인 시비를 걸지 않았을 뿐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다 DJ의 민주당 총재직 사퇴를 계기로 본격적인 대선 국면, 즉 포스트 3김정치의 첫 번째 권력재편기에 접어들면서 '두 대세론'과 '대세론에 대한 도전' 사이에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그 첫 충돌지점이다.
***'대세론'의 앞날 역시 지역주의의 흐름에 달려**
이제 두 대세론이 유지될 것인가, 사라질 것인가를 전망해 볼 차례다.
여기서의 결정적 관건은 역시 지역주의다. 세대교체론, 진보 대 보수 내지 개혁 대 수구론 등 이번 대선을 규정하는 여러 변수가 있지만 여전히 지역주의적 선택의 힘이 가장 강할 것이라는 예측을 부정하기 어렵다. 여기서 지역주의라 함은 영ㆍ호남민의 집단적 선택이다.
YS와 DJ 집권 10년을 거치면서 두 권력집단의 잘못된 인사와 이권 챙기기로 인해 지역주의의 힘은 오히려 강고해졌다. 특히 영남의 지역주의가 과거 어느 때보다 강고해졌고, 이것이 이번 대선의 결정변수다.
'패권적 지역주의'와 '방어적 지역주의'란 구분법이 있다. 지배자가 패권적 지역주의이고, 피지배자가 방어적 지역주의다. 여기서 방어적 지역주의가 훨씬 강하다. DJ가 집권하기 이전 역대 선거에서 호남지역 표의 응집력이 타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는 점이 그 증거다.
그런데 지금 영남지역은 방어적 지역주의화하고 있다. 아니 이미 방어적 지역주의로 변한 지 오래다. YS 집권 5년 동안 경북민들은 '도와줬다가 배신당하는' 상처를 입었다. DJ 집권기 동안 이들의 상처는 더 깊어졌다. 또 경남민들은 '잠깐 실수로 모든 걸 잃는다'는 교훈을 갖게 됐다. 바로 '이인제 효과'다.
그래서 벌써부터 영남지역은 뭉치기 시작했다. 그 집단적 선택이 '이회창 대세론'을 만들어냈고, 지금껏 끌어 온 힘이다. 그리고 이 '이회창 대세론'에 놀란 호남민의 대안이 '이인제 대세론'을 만든 것이다.
이 지역주의의 힘은 이제 어디로 흐를 것인가. 군웅할거의 쟁투 속에 약화될 것인가, 아니면 일시적 혼란을 겪다가 다시금 뭉칠 것인가. 이제부터 정치권에서 벌어질 모든 싸움의 축은 바로 이 지점에 달렸다.
***군웅할거시대 여는 본격적인 정치게임 시작**
대세론에 도전을 받고 있는 이회창ㆍ이인제 두 사람은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정치권내 도전을 물리쳐야 한다.
그래서 자신들을 '일단 선택'했던 영ㆍ호남 지역민에게 '그 선택이 옳았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지금까지는 큰 도전 없이 안주해 왔지만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
도전하는 쪽은 이회창ㆍ이인제의 선점 위치를 능가할 수 있는 위력을 보여줘야 한다.
도전자로 나서고 있는 사람들, 박근혜 김덕룡 강삼재 홍사덕, 그리고 노무현 한화갑 정동영, 또 김윤환 이수성 정몽준, 게다가 새로 뛰어든 김상현까지, 이들 모두 앞서 이회창, 이인제에게 지적한 약점을 똑같이 갖고 있다. 아니 훨씬 더 크다.
정치권 안팎의 독자적 기반과 세력도 약하고, 고정 지지층도 일천하며, 역사적으로 검증된 바는 더더욱 없다. 이들 누군가 한 명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대세론을 깨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서로들 만나고 뭉치려 하는 것이다. 뭉쳐서 기존 대세론보다 더 유력해 보이는 대안을 만들어 내야만 영ㆍ호남민의 집단적 선택을 바꿔내든지, 아니면 최소한 분열시켜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이들의 뭉치려는 시도가 신당으로 가시화될 것이다. 어느 만큼의 명분을 갖고, 어느 정도 사람을 모아서 위력을 보여주느냐에 1차적 성패가 달렸다.
하지만 이들 각자도 '뭉치기엔 너무 먼' 관계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자세로 일단은 뭉치겠지만 서로의 이해차이가 너무 크다.
이번 기회에 나중을 위한 나의 교두보만 만들면 그뿐이라는 생각들을 서로 다 갖고 있다. 따라서 기존 대세론을 능가할 큰 위력으로 뭉칠 수 있을지는 극히 불투명하다.
***지역주의 약화시킬 계기될 수도**
3김시대가 가고 군웅할거의 시대가 오고 있다. 그 초입을 잠시 장식했던 '이회창 대세론', '이인제 대세론'이 흔들린다.
두 사람이 대세론을 굳힐 수 있을지 실력을 감상할 차례다. 아니면 대세론을 깨고 본격적인 군웅할거 시대가 개막될 것인지 도전자들의 실력 역시 감상대상이다.
이들의 정치력 차이에 따라 민심의 향배가 결정된다. 지금 도전자들이 하기에 따라서는 지역주의의 힘을 크게 약화시키는 정치발전의 계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아직 기대하기는 이르지만.
본격적인 정치력 싸움, 정치게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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