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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홍관 "특유의 히죽거리는 모습, 정형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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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양홍관 "특유의 히죽거리는 모습, 정형근 맞다"

"나를 고소하면 스스로의 덫에 걸릴 것" 주장

'정형근 의원의 성기고문'을 주장한 양홍관씨가 정 의원의 거듭되는 부인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고문한 인물은 정 의원이 맞다고 재차 주장했다.

***양홍관 "정씨 특유의 히죽거리는 듯한 비웃는 표정"**

양씨는 14일 오후 서울 안국동 느티나무카페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당시 '성기고문'을 한 장본인이 정형근 의원임을 확신할 수 있다"고 거듭 주장했다.

양씨는 "바지는 청회색 정도의 양복바지였고, 상의는 전체적으로 진하지 않은 갈색이었으며,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고 옷차림을 설명한 뒤, "히죽거릴 때의 모습이 정형근 의원 특유의 비웃는 듯한 표정이었고, 말투는 경상도 말씨고 키는 내가 조금 더 컸던 것 같다"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당시 온갖 모진 고문을 받고 있던 양씨는 "인상이 상당히 부드러워 '날 살려주나'라고 약간 기대를 했었다"며 "그러나 점잖은 모습으로 들어온 그는 '이거 아직도 안 불어. 꼴통이네'라며, 가지고 온 막대기로 발가벗겨져 있는 내 몸의 성기를 10대 정도 때렸다"고 말했다.

양씨는 "그는 그렇게 나 자체를 무너뜨리려 했던 것 같다. 그 뒤로 내가 굉장히 무너지는 것을 스스로 느꼈고, '성기까지 치는 걸 보니 여기서 못 살아 남겠구나'라는 생각 확 들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분노와 모멸감을 끌어올리며 얼굴을 익혔다"고 얼굴을 또렷히 기억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형량만 봤을 때 내가 3~4번째. 어떻게 정 의원 날 기억 못하나"**

양씨는 이후 "수사가 마무리 돼 갈 즈음, 수사관에게 '성기고문을 했던 높은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었고, 수사관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우리 사장이야. 더 알면 너도 안좋고 나도 안좋다'고 말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며 "그 때는 안기부장 정도 되는 줄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양씨는 지난 98년 8월 형기를 6년 남긴 상태에서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됐고, 그 때 정형근 의원이 국회의원이 된 모습을 보고 분명히 기억해냈다"면서도 "그러나 준법서약서를 쓰고 나왔고,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이전부터 관심이 있던 생명.평화 사상을 가지게 돼 '내 안에서부터 화해를 하자', '내 안에서 내 상처 보듬지 않으면 어떻게 살겠냐'는 생각에 유기농 생명농업과 마을 공동체를 통해 생명에 대한 외경으로 돌아갔다"고 당시 정 의원을 문제 삼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양씨는 이어 정형근 의원이 '수백명을 수사하고 있어 양씨를 기억 못한다'는 최근 주장에 대해 "당시 사건에서 황인오와 장청우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최호경과 나는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는데, 형량만 두고 봤을 때 조직내에서 내가 3번째, 4번째라는 얘기인데 어떻게 기억 못할 수가 있느냐"며 "정 의원이 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반박했다.

양씨는 "이후 법정에서 모두 진술과 최후 진술, 항소이유서 등에서 안기부 내에서의 고문을 주장했고, 법원도 이를 인정했으며 이를 근거로 교도소에서 고문 수사관들을 검찰에 고소.고발을 했으나, 검사가 '특정인을 지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각했다"고 밝혔다.

***"정 의원, 서로 성찰하고 그 속에서 지난 과거를 반성하자"**

양씨는 또 "지금의 상황은 한나라당 지도부가 세력을 유지하고 수구냉전 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해 사활을 걸고 국가보안법을 옹호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지금 한국사회는 심각한 공동체 해체의 위기를 겪고 있는데, 인권국가로 거듭나기 위해 서로 성찰하고 그 속에서 지난 과거를 반성하자"고 제안했다.

양씨는 특히 "정 의원이 기어코 '나는 (고문을) 안 했다'라고 주장하면 당장은 빠져나갈 수도 있다"면서도 "그러나 정 의원이 고소.고발을 하면 당시 고문에 참여한 수사관이 10명에서 1백여명에 이르는데 수사과정에서 나도 상처를 받을 테고, 정 의원도 '성기고문'의 장본인으로 드러나게 되고 말 것이다"고 경고했다.

양씨는 정 의원에게 "당신을 위해서 제발 고소.고발을 하지 말라"며 "그렇지 않으면 결국 당신의 덫에 걸릴 것이다"고 덧붙였다.

***"어머니가 '혼자 다니지 말고, 가족들 피신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해"**

59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7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하던 양씨는 80년 광주민중항쟁 당시 "총칼이 난무하고 백주대낮에 시민이 폭도로 몰려 끌려가 죽는데 난 서울에서 지켜봐야만 하나"라고 충격을 겪었으며 "자신에 대한 모멸감과 사회에 대한 모순을 느껴 다시 태어났다"고 말했다.

양씨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키 위해 대학에 진학했고, 학생회를 시작했으며, 수도기계화사단 사령부에서 근무하는 동안 한미연합사의 작전 통제를 받는 모습에 큰 한국사회의 모순을 느끼고 전역후 본격적인 학생운동을 시작했다"며 "그 과정에서 이철우 의원 등을 만났고, 당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은 대선 과정에서 기획.조작된 사건으로 고문과 강압을 통한 파렴치한 수사였었다"고 주장했다.

현재 경기도 팔당호 인근에서 유기농 농업과 마을 공동체 운동을 하고 있는 양씨는 "앞으로 정형근 의원이 뭐라고 얘기해도 나는 오늘로 멈추고, 새로운 성찰과 반성을 통해 거듭나 평화와 공동체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양씨는 '가족들의 고통을 받지 않느냐'는 질문에 과거의 충격과 고통의 후유증이 상당한 듯, "나는 지금이 그런 세상이 아니라고 믿지만 어머니가 '아들아 혼자 다니지 말아라. 집에 가족들 어디 다른데 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에겐 아직도 그 사건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는 말을 남기고 서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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