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후 5시50분 지하철 7호선 이수역. 30여명의 시각장애인을 포함 50여명의 장애인단체 회원들이 갑자기 승강장 아래로 내려가 선로를 점거했다. 전날 시각장애인 이모(43)씨가 추락사한 바로 그 지점에서 '안전대책'을 촉구하는 항의농성을 하기 위해서다.
***장애인 50여명 이수역 선로점거 "몇 사람이 더 죽어야 합니까"**
선로에 내려간 한 시각장애인이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이 장면을 보고 웅성거리는 시민들에게 우렁찬 목소리로 자신들이 선로를 점거한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지난달에도 시각장애인이 떨어져 죽고, 어제도 또 한명이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관계당국은 안전대책은커녕 면담도 안해주고 있습니다. 저희는 차후 이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했습니다. 여러분의 불편은 잠시이지만 우리는 영원히 목숨을 걸고 지하철을 타야됩니다. 불편을 끼쳐 드린 점 백배 사죄드립니다."
<사진1> 지하철 선로점거
다른 시각장애인도 나섰다.
"오소리가 올무에 잡혀 죽은 것은 언론에 크게 보도되지만, 시각장애인이 지하철에 떨어져 죽은 것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시각장애인 생명이 오소리나 너구리만도 못하단 말입니까? 지하철에서 시각장애인 만났을 때 친절히 안내해주시고, 주위에 우리 사정을 널리 알려주십시오."
이날 한국시각장애인협회, 한국DPI(장애인연맹) 회원 50여명의 선로점거는 1시간 15분만인 오후 7시5분경 건교부장관, 도시철도공사 면담 약속을 받고 자진해산으로 끝났다.
***승강장-안전선 폭, 한 걸음도 안돼**
점거 파동은 이처럼 끝났지만, 이들이 제기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점거 농성을 하게 만든 직접적 계기가 된 이모씨 실족사만 해도 그러하다.
지난 18일 오후 6시경 시각장애인 이모(43)씨가 이수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다 승강장 아래로 떨어져 전동차에 치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CCTV화면에 의하면 안전선 위에서 멈칫했던 이씨는 선로방향으로 주춤거리며 세 걸음째를 내딛는 순간 아래로 추락했고, 전동차에 치여 숨지고 말았다. 화면상으로는 실족사임이 거의 확실했다.
<사진2> 사고지점 <사진3> 6-2번 승강장
이씨가 당시 추락한 지점은 8-1번 승강장. 대합실 및 환승통로로 이어지는 승강장 끝부분 계단 아래쪽으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유도블럭과는 다른 방향이다. 계단에서 이어지는 점자블럭은 8-1번 승강장이 아닌 6-2번 승강장으로 이어져 있었다.(사진 참조) 점자블럭을 따라갔더라면 이씨는 6-2번 승강장에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씨는 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 지하철 승강장에서 근무하는 공익근무요원 중 한 명은 "계단에서 내려와 점자블럭을 따라가지 않고 계단 난간을 집고 내려와 바로 8-1번 승강장 쪽으로 돌아 들어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대부분의 역은 점자블럭이 계단에서 내려와 바로 승차위치로 향하게 돼 있지만, 사고를 일어난 이수역 승강장의 경우 계단 앞에 기둥이 세워져 있어 점자블럭은 좀 더 먼 6-2번 승차위치로 가게끔 유도하고 있었다.
<사진4>좁은 안전선 <사진5>계단난간
또한 CCTV에서 이씨가 점자블럭 위에서 잠깐 멈칫거린 것을 봤을 때 안전선에 설치된 점형블럭은 느꼈지만 선로방향과 승차대기지점을 순간적으로 착각해 계속 선로방향으로 걸음을 내디뎠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안전선 점자블럭과 승강장 끝부분의 간격이 더 넓고, 안전선 안쪽에도 바깥쪽과 다른 표시가 있어 구별될 수 있게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안전선 안쪽의 실제 간격은 60cm~70cm가량으로 일반인의 보폭보다 좁다.
<사진6>이수역 계단 <사진7>고속터미널역 계단
하지만 도시철도공단측에서는 규정상 문제될 것은 없다는 입장이다.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시설에관한법'의 시행규칙에 따르면 "승강장의 가장자리로부터 0.3미터 내지 0.9미터 범위안에 위험방지를 위하여 점형블록을 설치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실제로 사고가 발생한 이수역은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역으로 1~4호선의 다른 역들보다 장애인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편이었다.
***"점자블럭은 '편의시설'일 뿐, '안전시설' 갖춰야"**
그러나 장애인단체들은 근본적인 '위험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스크린도어'를 설치해야 하고, 예산상의 이유로 지금 당장 설치가 어렵다면 최소한 '안전펜스' 정도는 시급히 갖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점자유도블럭이 설치돼 있지만, 이는 '편의' 목적이지 결정적인 순간에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안전장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법규에는 "추락할 우려가 있는 승강장의 경우에는 그 양끝부분에 승강장의 바닥면으로부터 높이 1.1미터이상 1.5미터이하의 추락방지용 난간을 설치하여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사진8>스크린도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역은 수도권전철(국철,1~8호선 포함) 3백77개 역사중 신길역이 유일하고, 안전펜스가 설치된 역도 1백95개역으로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지하철역이나 서울시내 도보를 보더라도 구색만 갖추었을 뿐 장애인의 눈높이에서 보면 불편하거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시설들도 대대적인 보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매번 반복되는 사고에도 바뀌지 않는 지하철**
시각장애인들에게 지하철은 공포의 대상이다. 지난달 30일 부천역에서 시각장애인 김모(30)씨가 실족사했고, 지난 3일에는 동대문운동장역에서 시각장애인 최모(29)씨가 선로에 떨어졌다가 용감한 시민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목숨을 건지는 등 시각장애인의 지하철 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사진9> 점자블럭 장애물
지난 18일 시각장애인 이모씨가 사고를 당하던 날은 심재옥 민주노동당 서울시의원이 엉망인 지하철역 장애인 편의시설에 대해 실태점검 결과를 발표 하는 날이었다. 심 의원은 "설치만 돼 있을 뿐 장애인 편의시설은 엉터리인게 많은데 이는 장애인의 눈 높이에서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장애인 정책에 장애인이 직접 참여토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심 의원은 다음날 이씨의 사고 소식을 듣고 대뜸 "부천 김씨처럼 사고를 당했구나"라고 안타까워했다. 사건 발생 상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고서도 어떻게 사고를 당했는지 알겠다는 뜻이었다. 시각장애인들의 지하철 사고는 매번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발생하는데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세우는 안전대책은 요원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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