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은 역시 DJ를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DJ가 민주당 쇄신파의 총력압박에 대해 타협을 한 것인가.
아직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는 이르지만 어쨌든 민주당 쇄신파동이 3일 청와대에서 열릴 민주당 최고위원 간담회를 앞두고 일단 한 고비를 넘어 숨을 고르고 있다.
민주당 쇄신파가 청와대의 요구에 따라 3일 최고위원 간담회와 김대중 대통령이 ‘아세안+3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귀국하는 6일 이후 소속의원 전원 면담을 통해 당정쇄신방안을 건의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일단 쇄신파의 당정쇄신안을 받아들여 이달 중순이후 구체적인 당정쇄신안을 내놓기로 했다.
따라서 민주당의 내홍도 일단 이달 중순까지는 잠복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동영, 한화갑, 김근태 최고위원이 최고위원직 사퇴라는 배수진을 치고 청와대의 결단을 겨냥하고 있어 당정쇄신의 불길은 여전히 내연하고 있다.
1일 당정의 조속한 전면쇄신을 주장하는 민주당 5개 개혁모임의 공동기자회견은 당초 예상과 달리 ‘확전’(擴戰)이 아닌‘일단 정전’(停戰)으로 강도를 낮추는 것이었다.
이날 공동기자회견에서 ‘열린정치포럼’ ‘바른정치실천연구회’ ‘새벽21’ ‘국민정치연구회’ ‘여의도 정담’ 등은 ‘개혁연대’라는 공동기구 결의문을 통해 5개항의 쇄신조치를 촉구했다.
▲ 국민의 신뢰회복을 위한 전면적인 여권의 체제개편과 인적쇄신 단행 ▲ 그동안 국정운영을 주도해온 당.정.청 핵심인사들의 정치적 책임 추궁 ▲ 당의 정치 중심화와 비공식 라인이나 비선조직의 국정 및 당무 개입 배제 ▲ 당의 모든 쇄신방안에 당원의 총의 반영 및 이의 당 공식기구를 통한 실행 ▲ 당내 민주주의의 극대화를 위한 모든 실천적 방안의 강구 등이다.
이러한 내용은 사실상 당초 주변의 예상과는 달리 강도가 낮은 것이었다.
개혁모임들이 전날까지 보여준 강도높은 실력행사와 발언에 비추어보면 이날 기자회견에서도 매우 강력한 발언이 예상되었다.
***쇄신요구 의원 연대서명 유보**
그러나 이날 결의문에서는 ‘새벽21’ 등 일부 개혁모임에서 거명한 인적쇄신 대상의 실명이나 쇄신의 시기 등이 언급되지 않았다.
기자회견 직후 열린 민주당 당무회의도 주요 당직자들과 중진 등 50여명이 참석해 고성과 격론이 벌어지긴 했으나 별다른 충돌없이 각자의 주장을 피력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이러한 상황은 이미 전날인 지난 달 31일 개혁그룹과 일부 최고위원들의 태도 변화에서 예고된 것이었다.
당초 핵심 개혁그룹인 ‘바른정치연구회’와 ‘열린정치포럼’ 등은 조속한 당정쇄신을 촉구하는 의원 연대서명을 벌인 뒤 김근태 또는 정동영 최고위원을 통해 3일 청와대 최고위원 간담회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실행단계에서 반나절만에 유보되었다.
또한 쇄신파의 주요한 지지세력이 될 것으로 예측됐던 노무현 최고위원이 지난 달 31일 아침 ‘조속한 쇄신론’에 동참할 의사를 표명했다가 오후에 갑자기 ‘조기 전당대회와 실권 대표선출’을 주장하며 중간 입장으로 물러섰다.
그리고 동교동 구파를 비판하며 반동교동계의 입장에서 섰던 한화갑 최고위원도 ‘연말 당정개편’에 동의하며 쇄신파에 대한 지지에 나서지 않았다.
쇄신파는 이러한 상황에서 더 이상의 사태진전을 막으려는 청와대측이 긴급진화에 들어가자 연대서명을 유보했다. 그리고 심야 긴급회동을 갖고 1일 공동기자회견은 인적쇄신 대상 실명 및 시기를 거명하지 않고 쇄신에 대한 기본 원칙을 표명하는 선에서 일단 마무리 짓기로 한 것이다.
청와대측이 개혁연대의 움직임에 결정적인 제동을 건 것은 서명작업 등 더 이상의 사태진전은 민주당 전체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여권의 분열을 초래하는 한편 DJ의 리더십을 훼손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청와대 나서자 쇄신파 주춤**
당정쇄신을 요구하는 의원 연대서명이 이루지고 이것이 DJ에게 직접 전달되는 경우 결국은 DJ가 가시적으로 최종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현재 민주당에서 소속의원 전체의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는 리더십은 DJ가 유일한 상황이다. 이는 쇄신이 여의치 않거나 쇄신에 대한 정치적 불만이 생길 경우 더 이상 민주당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판단인 것이다.
청와대는 이러한 판단아래 개혁모임들에 대한 각개격파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오는 6일 귀국이후 개혁그룹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겠으며, 쇄신시기는 연말보다 앞당기겠다’는 DJ의 의중이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청와대가 민주당의 잠재적 대선후보들에 대해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모종의 개별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한화갑 최고위원이 적극적으로 쇄신파에 동조하지 않고, 노무현 최고위원이 쇄신파와 동교동사이를 고민하다가 결국은 중도적인 입장으로 변화한 것이 관측의 근거이다.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흥미로운 사실은 유선호 청와대 정무수석의 역할이다.
유 수석은 지난 당정개편에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초.재선 의원 그룹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정무수석으로 임명됐다. 이번 쇄신파동에서 쇄신파와 접촉, 더 이상의 실력행사를 막고 타협책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와 관련, 청와대는 최근 정무수석 비서실에 대한 일부 개편 작업에 착수해 초.재선 의원 그룹들과의 접촉라인을 강화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교동 반발 거세**
동교동 구파의 격렬한 반격도 청와대가 긴급진화에 나선 중요한 고려요소이다.
인적쇄신 대상으로 권노갑 전최고위원의 실명이 거론된 이후 김옥두, 조재환, 이훈평 의원 등이 전면에 나서 “야당의 주장과 같다”고 공개적인 반격에 나서고 있다. 이렇게 될 경우 본격적인 당내 대결이 벌어져 여권으로서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쇄신파에서도 당정쇄신 문제가 대권후보 조기가시화 문제와 맞물리면서 권력투쟁의 양상으로 비춰지고 있어 당초의 취지가 엷어졌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이에 따라 쇄신파들은 그동안 개별적으로 흩어졌던 모임들이 ‘개혁연대’라는 단일 기치로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는 선에서 ‘전과(戰果)’를 정비하고, 일단 공을 최고위원 회의로 넘긴 뒤 향후 방향을 모색하는 휴지기로 접어든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단락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쇄신파동은 아직도 꺼지지 않고 내연하고 있으며 언제든지 다시 불붙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는 쇄신파와 동교동계를 아우르면서 여권을 쇄신할 뾰족한 해법이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기 때문이다.
또 당정쇄신이 인적쇄신 및 차기 대선후보 선출 문제와 연결되는 한 민주당내의 이해관계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뚜렷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아**
청와대로서는 인적쇄신 문제에 있어서 구체적인 사실 관계와 국민 및 민주당 개혁파의 정서 사이에 큰 괴리가 존재한다는 점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아직 구체적인 잘못도 드러나지 않았는 데 쇄신대상으로 지목된 당사자가 납득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개혁파의 의견을 듣는다 해도 당직도 없는 사람에게 얼마만큼 어떤 방법으로 책임을 물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렇지만 쇄신파들은 ‘일단 지켜보겠지만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그냥 있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미 한화갑, 정동영 최고위원 등은 1일 민주당 당무회의에서 3일 청와대 최고위원 간담회에서 쇄신안을 건의한 뒤에 최고위원직을 사퇴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배수진을 치고 있다.
김영배 상임고문도 이날 “대표와 최고위원 전원이 사퇴서를 써놓고 기다려야 한다”며 동반사퇴론을 개진했다.
따라서 이들 최고위원들이 사퇴할 경우 최고위원 및 지도부 책임론이 대두되며 ‘동반사퇴론’ 등 쇄신파동이 또 다시 거세게 불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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