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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던 것을 현실로 만들어 가며

[전태일통신 52]'전교조 통일학교 사건'을 겪은 교사의 고백

7.31 교육위원 선거를 며칠 앞둔 지난 7월 25일 <동아일보>가 이른바 '전교조 통일학교 교재 사건'을 기사화하여 한동안 사회적 이슈가 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교재는 이미 국내에서 출판되어 국내 학술논문에도 빈번히 인용되는 북한의 역사 교과서를 통일 교육에 관심 있는 전교조 부산지부 통일위원회 소속 교사들이 자료집으로 제작하여 읽고 토론한 것입니다. 전교조 탄압에 악용된 이 사건은, 아직 당사자에 대한 기소 여부도 결정되지 않은 채 해를 넘기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이 사건을 직접 겪은 부산 ㅁ여중 정지영 교사의 글을 통해 시대착오적인 이 사건의 내용과 의미를 알아봅니다. <편집자>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이 연말정산용 영수증들을 챙겨모으는 모습들을 보면서 연말이 왔음을 실감한다. 돈 쓴 내역 정리하는 연말 정산은 어렵지 않지만, 올 한해 내 '삶의 연말 정산'은 참 고통스럽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너무나도 힘들었고 숨가빴던 2006년이다.

수많은 일들로 힘든 한 학기를 보내고, 7월 여름방학을 맞았는데 꿈에도 꾸지 못했던 일을 겪게 되었다. 그게 바로 이른바 '전교조 통일학교 교재 사건'이다.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실렸고, 방학 내내 나는 이 세상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그리고 9월에 접어들어 2학기 개학을 했고, 이제는 별 일 없으려니 하며 학교일로 정신없던 어느 날, 생각만 해도 끔찍한 보안수사대 형사들과의 전쟁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지난 9월20일 새벽 6시 40분, 쿵쾅쿵쾅 대문을 두드리며 찾아와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동영상과 사진을 찍고 온 살림을 샅샅이 뒤지던 보안수사대 형사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노가 가시지 않는다.

어느 한시라도 마음 편히 생활할 수 있던 때가 없었던 올해였다.

통일학교 사건으로 지금도 고생하는 교사들

9월 중순부터는 보안수사대 형사들이 통일학교 참가자로 추정되는 교사 13인을 자기 멋대로 선정해서 참고인 조사랍시고 학교로 찾아갔다. 교장실에서 교장 선생님을 시켜서 교사들을 교장실로 불러내려 조사를 하는 대담한 짓을 벌였다. 조사내용도 가지각색이었다. "왜 그 교사와 친하게 되었냐? 어떤 연락을 받았냐? 당신 정도면 통일학교에 갔어야지 왜 가지 않았냐?"라는 유도성 질문으로도 모자라 "혹시 거짓말 하는 것 아니야?"라는 협박성 추궁에 이르기까지 죄인처럼 취조당해야 했던 동료 선생님들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수치스럽고 또한 그들에게 죄송할 따름이다.

그런데 한 번도 부족해서 얼마 전 11월 30일 경에는 보안수사대 형사들이 다시 6명의 교사에게 참고인 조사를 해야겠다고 연락을 해 왔다. 그 분들이라고 왜 자존심이 없겠으며, 분노가 없겠는가? 하지만 동료를 조금이라도 다치게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수사를 받겠다고 결정하신 것이다. 사람이 마음에 빚을 지면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 나는 아직도 그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 너무나 죄송스럽다.

알려져 있다시피 보안수사대 형사들은 교사들도 모자라 이 사건에 연루된 교사의 학생들에게까지 접근해서 교사들의 동태를 파악할 것을 요구했다. 형사들은 아이들에게 전교조 신문 스크랩을 보여주면서 "그 선생님은 이런 나쁜 일을 하는 단체에 소속해 있는 사람이다.", "그 선생님 점수 한번 매겨봐라"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했던 '기억할 만한 말'을 얻어내려 했다. 일제시대 밀정들이나 하던 짓을 21세기 민주화시대의 형사들이 자행한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수업시간에 아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이 사건을 국가인권위에 진정했고, 그 과정에서 다시 아이들의 진술과 학부모들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법이야 어떻든 간에 또 아이들을 괴롭혀야만 한다는 말인가. 인간 대 인간으로 솔직하게 학부모님께 전화를 해서 상의를 드렸다. 혹시나 아이가 다칠까 염려하시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었지만 또 다른 아이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 어렵게 동의를 해주셨다. 그러나, 막상 그 아이에게 다시 그 때 이야기를 종이에 기억나는 대로 적어달라는 말을 하자니 그 눈을 보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녀석은 흔쾌히 '선생님, 알겠어요'라며 집으로 서류를 가져갔지만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사건 내내 나는 아이들의 의연하고 사려깊은 마음씀씀이들을 느꼈다. 나는 또한 그 힘으로 견뎠다.

침묵의 고통

그들은 전교조 교육위원 선거를 며칠 앞두고 이 사건을 터뜨렸고, 이를 악의적으로 활용해서 목적한 바(교육위원 선거전에서 전교조에 대해 타격을 입히는 것)를 이루었다. 나와 동료 선생님들은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내 주변에서 그 상처는 여전하다. 주변의 침묵이 이렇게나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된 2006년이다.

나는 교무실에서 느껴지는 그 침묵이 너무나 싫다 못해 고통스러웠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와 눈빛을 부딪치기 부담스러워 하는 그 표정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누군가의 눈치만을 보고 있는 그 적막감.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은 그 어떠한 순간에도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지 않는다. 진정 할 말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것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한창 이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던 그 때에는 학교에서 밥도 제대로 넘길 수가 없었다.

도대체 우리 학교 아이들이 그 지경으로 국가권력에 노리개가 되었는데도 분노하거나, 혹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 교무실에 있는 것일까? 이런 원망스러운 마음도 많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또 한편으로는 바로 곁에 있는 동료가 이렇게 엄청난 일을 당했는데도 한 마디 말도 안하는 저 사람들의 가슴은 도대체 어떤 것으로 채워져 있을까? 하며 답답해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한 선생님이 '힘내세요'라는 짧은 메시지를 보내주기도 했다. 그 격려가 교무실에서 겪은 그 모든 침묵과 무력함의 슬픔을 잊게 해주었다.

미래를 위해 사는 사람들

보안수사대 형사들은 1차 소환조사가 끝나고 두 달이 넘었지만 검찰조사로 넘기지도 않고 있고, 아직 이 사건이 기소가 될 건지 말 건지 결정하지도 못한 채 올해를 넘기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사건이기 때문에 다시 그들이 유리한 때를 노리고 있는 것이리라.

그들은 아직도 밤이나 낮이나 우리 뒤를 캐면서, 혹은 도둑고양이처럼 핸드폰이나, 메일을 감청하면서 적절한 시기에 터트릴 껀수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물론 내가 아직 피의자 신분이기에 그들은 합법적으로 나의 행적을 추적할 법적 권리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우리 신랑과 나, 그리고 또 한 명의 사람과 같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지낸다. 가슴에 멍이 크게 하나 든 기분이라고나 할까?

국기경례를 거부해 징계 받은 부천 상동고의 이용석 선생님은 수업시간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악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선의 침묵이다.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좋아지지 않는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용기를 얻었다. 그래, 꿈꾸는 것을 현실로 만드는 과정일 뿐이라 생각하자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독였다.

그리고 나는 또 꿈을 꾼다. 교실에서건, 교무실에서건, 세상에서건,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표현을 자유롭게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그날을 말이다. 누구의 사상을 의심해야 할 필요도 없고, 또 의심할 수도 없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 잘난 사람들만이 누리는 학문의 자유 말고 못난 사람도 즐기는 학문의 자유를. 가진 자들만이 누리는 정치권력 말고 힘없는 자들이 누리며 행복해 하는 정치를. 다른 나라의 눈치 보지 않고 우리 동포들끼리 그냥 손잡고 펑펑 울 수 있는 그 날을. 이렇게 우리가 꿈꾸는 것이 곧 현실이 될 것도 믿는다. 어찌 그리 말할 수 있냐고?

지난 9월 말 보안수사대의 여중생 협박조사의 진상이 공개적으로 알려지자 부산에서는 여중생사건 부산시민대책위가 꾸려졌다. 부산의 진보적 시민단체 대표들이 주축이 되어 자기 딸, 아들의 문제로 여기고 보안수사대 책임자 처벌과 경찰청장 공개 사과를 요구하며 함께 싸웠다. 아무도 경찰청이 물러설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눈빛으로 싸우는 사람들이 매일 투쟁으로 모였다. 밤에는 촛불을 들었고 낮에는 1인시위 피켓을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20여 명의 대책위 대표들이 경찰청 방문중에 경찰의 기습 연행으로 모두 경찰서로 옮겨져서 새벽 4시쯤에야 나오는 기가 막힌 일도 있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은 이 사람들이 함께 싸우고 고생을 같이 나누면 나눌수록 더욱 더 애정이 돈독해 지고 또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신뢰를 서로에게 눈빛으로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 콧대 높다는 부산경찰청장의 유감표명을 받아 내고야 말았다.

시민운동 경력 20년 만에 처음으로 연행을 당하면서까지 여중생 문제를 해결하자고 소리 높여 외쳐 주셨던 부산민중연대 안하운 목사님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전한다. 선의 편에서, 약자의 편에서 함께 소리치는 사람들의 연대는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사랑하는 아이들이 정의가 승리하는 세상을 반드시 만들어 낼 것이다. 나는 그런 꿈을 아이들과 나누는 교사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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