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철학자 송두율 교수가 자신이 북한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고 불린 것, 북한 방문 과정에서 노동당에 가입과 북한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은 사실 등의 혐의에 대해 인정했으나 노동당원으로서 활동한 바는 없다고 주장했다.
***"노동당원으로 활동한 적 없다"**
송 교수는 2일 서울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남북을 동시에 사랑하고, 또 동시에 비판하려는 저의 삶과 철학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게 비친 저의 행동에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있는 데 대해 저는 심각히 자성한다”며 “한편 제 스스로가 국정원에서 진솔하게 이야기한 것들이 일부 왜곡보도 되고 있기에 오늘 여러분들 앞에 이렇게 섰다”고 밝혔다.
송 교수는 노동당 가입 사실,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로 불렸던 사실, 북한으로부터 돈을 지원 받은 것 등의 혐의에 대해 인정했다. 그러나 노동당 가입은 1973년 당시 방북 과정의 통과의례와 같았던 것이고, 김철수로 불린 것에 대해 항의표시를 했으며, 정치국 후보위원을 수락한 적도 활동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특히 오길남씨 입북 권유에 대해서도 이번 국정원의 조사 과정에서 오씨와의 대질심문 과정에서 “오길남 스스로 작성한 탄원서에서 입북 권유를 한 사람은 야채상 모씨라는 점을 그 스스로 분명히 한 바 있다”고 밝히며 그 어떤 사람에게도 입북을 권유한 적이 없다라고 해명했다.
또한 북한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하는 ‘공작금’에 대해서도 송교수는 학술적 목적의 자금으로 개인적 활동비가 아니었으며 7~8차례 방북 과정에서의 왕복 교통항공비를 합하면 언론의 보도와 달리 7-8만불 정도 이고, 그 자금은 모두 연구를 위해서만 사용됐다고 밝혔다.
***“남북 모두 끌어안는 화해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송 교수는 “화해자로 살고자 하는 저의 신념과 지향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치우친 점이 있었다고 인정한다”라며 “노동당 입당 같은 문제들에 대해 저에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아준 많은 분들, 민주화 운동에 애쓴 분들, 그리고 나아가 국민들께 깊이 사죄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또 “사죄할 것은 사죄하고, 해명할 것은 해명하고, 실정법적인 처벌을 받을 사항이 있으면 감당함으로써 한국사회의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 민족에의 참여자가 되어 남북 모두를 끌어안는 화해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송 교수는 특히 “상상하기 싫은 상황은 추방이다. 37년만에 고국땅을 밟아 이 땅의 한 부분이 되고자 하는데 추방된다는 것은 감당하기 힘들다”며 “차라리 설정법에 의해 상응한 처벌을 받겠다고 해명서에도 썼다”고 밝혀 고국에 정착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여줬다.
송 교수는 “대학강단에 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구상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날 기자회견장에 함께 들어선 서울대 김세균 교수도 "송두율 교수 문제를 과거의 맹종적 잣대로 판단하지 말고 사회가 포용할 수 있는 사항에 대해 받아들이냐가 문제인 것 같다"라며 "송 교수가 실정법을 위반한 사실은 있지만 그의 학문적 업적까지 폄하돼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송두율 교수의 기자회견문 전문이다.
***그간의 활동에 대한 자성적 성찰**
가족들과 함께 37년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국땅을 밟은 벅찬 기쁨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양심적인 학자”에서부터 “거물간첩”으로까지 추락하는 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남과 북을 함께 안고 남북의 화해를 향한 디딤돌이 되어 보려 했던 노력이 오늘의 상황 속에서 참으로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북을 동시에 사랑하고, 또 동시에 비판하려는 저의 삶과 철학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게 비친 저의 행동에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있는 데 대해 저는 심각히 자성하며 한편 제 스스로가 국정원에서 진솔하게 이야기한 것들이 일부 왜곡보도 되고 있기에 오늘 여러분들 앞에 이렇게 섰습니다.
저는 양심을 걸고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1. 1973년 여름, 저는 처음 북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때는 아시다시피 남한에는 유신체제가 선포되어 매우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살고 있던 독일과 서구의 학계에서 당시 북은 지속적인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는 나라로서 평가받고 있었고 제 평가도 마찬가지였기에 조국의 하나인 북을 직접 보고 학문적 탐구를 위해 북을 방문하였습니다. 이러한 관심은 계속적인 연구를 통해서 70년대 말 완성된 저의 교수자격 논문인 ‘소련과 중국의 사회주의 비교연구’(이후 1990년 한국 한길사에서 출간)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2. 저는 노동당원으로 의식하고 활동해온 바 없습니다.**
남한에서도 외국 출국시 소정의 소양교육을 하고, 북한 방문 시 관계기관으로부터 소정의 소양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의 첫 북한 방문 때 받았다는 “주체사상교육”과 “노동당 입당”은 1970년대 북한을 방문한 방문자들이 거치는 일종의 불가피한 통과의례였습니다. 그 당시 행한 행동들은 3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거의 저의 뇌리에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저의 삶에서 아무런 의미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국정원에서도 이렇게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리라는 생각도 없이 제가 먼저 자발적으로 언급하게 된 것입니다.
***3. 저는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통고받거나 활동한 바 없습니다.**
일부에서 저를 북한 권력서열 23위의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엄청난 북한 실세로서 주체적 활동을 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후보위원을 수락한 바도 없고, 후보위원으로 활동한 바도 없고, 북이 저에게 후보위원으로 활동할 것을 요구한 적도 없었습니다.
저는 북으로부터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저를 지칭한다는 어떠한 공식적인 문건이나 구두발언을 들은 바가 없습니다.
1994년 7월, 김 주석 사망 시 장례식에 꼭 참석해 달라는 연락을 구두로 받았습니다. 강의일정으로 바빴지만, 북 영사관 직원의 간곡한 부탁으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도 행사장 명패에는 송두율이라는 이름이었으며 그 뒤 김철수가 노동당 서열 23위 후보위원이라는 기사는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통보받은 바도, 수락한 바도 없었습니다.
그 후 학술대회 준비 차 방북하여 몸이 아파 북에 약을 신청했을 때 한 약봉지는 김철수로, 또 한 약봉지는 송두율의 이름으로 되어 있어 내가 왜 김철수냐고 북에 항의한 바 있습니다.
국정원이 제시한 문건 속에도 본인은 북의 “상층 통일전선 대산”인 포섭대상으로 묘사만 되어 있었지, 정치국원으로 규정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통고받은 바도 없이 그냥 사후 인지만 하고 있었던 상황, 북에서 나에게 정치국원으로 일방적으로 모자를 씌웠던 상황, 아무런 권한을 행사해 보지 않은 조건에서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는 명칭에 저는 의미를 둘 수도 없고, 동의할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저는 1994년 7월에는 이미 독일국적 취득자였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4. 제가 거액의 “공작금”을 북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저는 92년부터 94년간의 3년간 매년 2-3만불 정도, 총 6-7만불, 그리고 73년, 79년, 84년, 88년, 91년까지 7-8차례의 왕복 교통항공비 2만불 정도해서 도합 7-8만불을 받았습니다. 92년부터 94년에 받은 6-7만불은 공작금이나 개인적 활동비로 사용된 것이 아니고, 원래 80년대 중반까지 독일 오펜바하 시에 있었던 “한국학술연구원”-원장 김길순(뷔르쯔부르그대학 정치학 박사, 건강상 이유로 80년대 말 귀국, 90년대 초 사망)-을 되살리기 위한 경비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를 위한 운영자금이 필요했던 차에 제가 북측에 제의해서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훔볼트 대학에 초빙교수로 임명된 1994년 여름학기부터는 너무나 시간에 쫓겨 이 계획을 포기하고, 모든 자료를 지금 독일 에센 시에 있는 재단법인 “아시아 재단”의 한국연구소에 기증했습니다. 이 연구소는 남과 북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인 연구에 힘을 쏟는 곳으로서, 독일 노드라인 베스트팔렌 주정부의 재정지원으로 운영되는 아시아재단으로 기증된 자료들은 모두 전산화되어 한국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독일, 한국학자들에게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15만불이나, 20만불을 공작금으로 받았다는 보도는 제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5. 저는 언론에 보도된 이른바 “충성 서약문”을 쓴 적이 없습니다.**
북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날, 공화국창건일 등 특별한 날에 “축하문”을 많은 해외인사들에게 요구합니다. 이러한 관행에 항상 따른 것도 아니었고, 우리 남한사회에서 축전이나 조의문을 보내듯, 1년에 한 두 차례 극히 형식적인 내용을 담아 보낸 축전이었습니다.
“충성 서약문”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내용은 사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국으로 치면 국가경축일을 축하하는 내용 정도였습니다.
***6. 이번 조사과정에서 이루어진 오길남씨와의 대질심문도 사실과 다르게 보도되고 있습니다.**
오씨의 처음 입북에서 제가 그의 입북을 권유한 적이 없을 뿐더러, 그의 탈북 후 재입북을 강요 또는 협박한 적도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오길남 스스로 작성한 탄원서에서 자신에게 입북 권유를 한 사람은 야채상 모씨라는 점을 그 스스로 분명히 한 바 있습니다. 또한 오씨와의 대질 심문은 녹취되어 있으니 이를 들으면 누가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저는 이 순간까지 어느 누구 한 명에게도 입북을 권유한 적이 없습니다.
***7. 1995년부터 해마다 5차에 걸쳐 북경, 그리고 금년 봄에 평양에서 열린 6차 “남북해외통일학술회의”가 북의 공작에 의해서 성사된 것처럼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 행사는 처음부터 남쪽의 연구단체(1차: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소장-길승흠 전 서울대 교수/ 2~6차: 통일포럼 대표: 백영철-건국대 정치학과 교수)가 제안하고, 본인이 중간에 서서 북에 제안, 북쪽의 “사회정치학회”가 받아들여 남.북 학자가 사전 협의를 거쳐 만든 남북학문공동체의 형성 가능성을 보여준 모범적 사례였습니다. 이 학술행사를 위해 저는 가교역할을 했습니다. 이 학술대회는 한국일보, 한겨레신문, 동아일보가 각각 1번씩, 중앙일보가 3번씩 보도를 위해 후원하고 재정지원은 선경 및 대우그룹이 담당을 하여 성사된 것입니다. 북쪽에서는 재정난을 이유로 전혀 재정 지원을 받은 바 없습니다. 통일포럼의 성사를 위한 제반 경비는 전적으로 남쪽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이 회의를 북측에 제안하고 준비하고 사전 조율하고 성사시키기 위해서만도 저는 10차례 이상 평양을 방문하고 엄청난 시간들과 노력을 기울여야만 해야 했습니다. 이 사실은 통일포럼 측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남북간 통일학술 회의를 통해서 남북관계의 개선에 기여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의 저의 행적이 한국의 시각으로 보면 북한에 치우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때는 북한 사람을 만나거나 손만 잡아도 ‘접선’으로 인식되던 시기라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북 간의 만남과 2000년 6.15정상회담 같은 남북 간의 화해조치는 과거의 시각에 많은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이제 과거의 양분법적 시각만으로 세상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북한사회를 보는 시각, 북한사회와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 개방적이고 보다 성숙한 방향으로 변화해 왔습니다.
화해자로 살고자 하는 저의 신념과 지향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치우친 점이 있었다고 인정합니다. 예컨대 노동당 입당 같은 문제들에 대해 저에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아준 많은 분들, 민주화 운동에 애쓴 분들, 그리고 나아가 국민들께 깊이 사죄하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 의혹이 난무하는 속에서 그리고 처벌받을 수도 있는 상태에서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이룬 남한 사회로의 귀국을 가족과 함께 선택한 진의를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사죄할 것은 사죄하고 해명할 것은 해명하고 실정법적인 처벌을 받을 사항이 있으면 감당함으로써, 한국사회의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 민족에의 참여자가 되어 남북 모두를 끌어안는 화해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남북 모두를 끌어안는 화해자가 되고 싶은 저의 소망을 국민여러분들께서 받아들여주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2003년 10월 2일 송두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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