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이명박정부와 분명한 선긋기를 하면서 진보적 아젠다를 발 빠르게 선점했고, 그것이 승리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 핵심은 국내에선 경제민주화를 통한 국민복지 향상이고, 대외적으로는 이명박정부의 대북강경책과 친미일변도 외교로부터의 변화였다. 전자는 아직도 제대로 된 그림조차 나오지 않은 상태인 데다가, 대선 당시의 확고한 입장에서 상당 부분 후퇴한 인상을 주며 비판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대북 및 외교수행은 어떤가?
▲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폐쇄위기에 몰렸던 개성공단이 7차례의 회담 끝에 극적으로 회생했다. 개성공단이 향후 남북관계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된다는 측면에서 개성공단의 존폐여부는 국내외적 관심을 끌었다. 사진은 지난 8월 14일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남북 당국 간 실무회담에서 합의서 채택 후 악수하고 있는 남측 김기웅(오른쪽) 수석대표와 북측 박철수 수석대표 ⓒ개성공동취재단 |
먼저 남북관계에 관해 살펴보면, 박근혜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이명박정부의 대북강경책을 변화시키겠다고 선언하며 신뢰프로세스를 내세웠다. 하지만 신뢰프로세스가 기본적으로 북한의 행동변화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북한이 로켓 발사와 3차 핵실험에 성공하고, 연이어 도발에 나서면서 난관에 봉착했다. 더욱이 구체적 내용이 부재하고, 연초 위기국면에서 미국의 강경한 무력시위에 절대적으로 편승하면서 전임 정부의 대북정책을 그대로 승계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대화 제의 노력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안보우선주의와 강경 기조를 유지했다.
하지만 북한에 대한 국민들의 인내가 한계치에 이르면서 국내 여론은 이런 기조에 호의적이었다. 국민들은 강경일변도로 남북관계 자체를 소멸시켜버린 이명박정부와 차별화되면서도, 북한에 포용적 자세만 견지했다고 간주되는 김대중·노무현정부와 구별되는 정책으로 인식하고 지지했다. 여기에는 보수언론의 지대한(?) 역할이 있었지만, 아무튼 북한에 끌려다니지 않으면서도 대화의 끈은 완전히 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북한이 그동안 무리수와 생떼를 부린 결과에 대한 자체적 반작용이기도 하다는 점은 간과될 수 없는 부분이다. 즉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이 성과를 보인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북한의 입장이 대내외적으로 불리하고 궁색해진 측면이 있기 때문이지, 신뢰프로세스의 결과로 보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대북정책이 줄곧 강경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확실해진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대북정책은 상반된 평가가 가능하고, 일종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긍정적인 전망이 가능한 이유는 강한 이념성을 보였던 전임 정부에 비해 미약하나마 실용적 접근을 모색해왔다는 부분이다. 향후에도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냉정하게 실용주의를 견지한다면 남북관계가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할 수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간의 경험을 고려하면 보수정부가 남북관계를 진전시킨다면 오히려 이념논쟁에 매몰되지 않고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반면에 적어도 아직까지는 박근혜정부가 전임 정부의 정책을 수정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우려 섞인 전망도 함께할 수밖에 없다. 개성공단 재개과정에서 북한이 보인 타협적 행보를 굴복으로 간주하면서 압박일변도로 나갈 경우 상황은 얼마든지 반전될 수 있다. 특히 위기상황에서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까지 언급하며 강경자세를 유지했던 것이 국내 여론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 앞으로의 남북관계에 걸림돌로 작용할 여지가 크다. 개성공단이 재가동 되고, 이산가족 상봉도 재개되는 등 다행스런 결과로 이어졌으나, 과정은 상당히 위태로웠다. 협상에서 북한에 대한 책임 전가를 대화 타결보다 더 우선순위에 둔 듯한 행보를 보인 점도 앞으로의 전망을 어둡게 한다.
무엇보다 남한사회 전체에 안보 담론이 지배하고, 이에 편승한 군부 중심의 정책 결정이 지난 6개월의 특징이었다. 북한의 무리한 도발이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 정부가 이를 국내 정치에 적극 이용하고 있는 것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NLL 대화록 공개와 전시작전권 환수 재연기 시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국민들의 안보불안 심리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안보 포퓰리즘이 전면에 대두되었다. 이런 안보 포퓰리즘을 지속한다면 겨우 복원되기 시작한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국익이나 민주주의를 훼손시키는 심각한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충분히 숙고해야 할 것이다.
친미, 반북 일변도에서 벗어난 박근혜정부
한편 지난 6개월간의 외교수행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일단 이명박정부가 친미일변도의 외교만 고집함으로써 대(對)중국관계가 악화된 점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눈에 띈다. 당선자 시절 전례를 깨고 미국에 앞서 중국에 특사를 파견함으로써 사전 정지작업을 했던 것과 취임 후 한중 정상회담을 통해 새로운 협력관계에 시동을 건 점은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또한 중국의 자체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이기는 하지만 친북 일변도에서 벗어나 한중협력 기조의 가능성을 시사한 것도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한일관계 역시 친일과 반일을 오가며 일관성을 결여했던 이명박정부에 비해 일본 우경화에 대해 단호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것도 긍정적이다.
반면에 대미외교는 아쉬움과 우려를 낳게 한다. 한미정상회담이 취임 후 첫 만남인 점을 감안하면 우려가 성급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환갑을 맞이한 한미동맹을 기념하고, 동맹의 확고한 미래비전의 기초를 확립한 것까지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반도 위기국면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방안은 발견할 수 없었다. 미국이 한국의 제안을 수용했다지만 실제로는 상당 부분 미국의 노선에 우리가 맞췄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이 부분은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이를테면 앞으로는 벌고 뒤로는 밑지는 있는 장사였을 수 있다.
예를 들면 한미동맹을 대북억지동맹에서 범세계적 파트너십까지 확장할 계기를 마련했다고 주장하지만, 한반도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 없이 글로벌협력만 우선함으로써 한국이 미국의 군사 전략적 필요에 따라 움직일 개연성을 증대시켰다. 특히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에서 양국이 미사일방어체제(MD)에 투자하고 있으며, 양국 군대의 공동운용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오바마의 언급은 한국의 MD 참여를 기정사실화 하는 듯한 발언이었다. 이와 함께 최근 미국의 공식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전작권 재연기는 주한미군 주둔부담금 협상, 한미원자력협상, 그리고 차세대전투기(FX)사업을 포함한 무기구입 등에서 한국의 대미협상력 약화를 가져올 큰 변수가 되고 있다.
오바마정부가 재정위기 속에서도 현재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복안으로 추진 중인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 전략의 성패는 한국과 일본의 참여와 분담 여부에 달려있다. 지금 당장은 아베(安倍晋三)정권의 우경화 드라이브와 미중 협력관계의 조성이라는 두 변수로 인해 미국의 구상이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원래 이 전략의 중심에 내포된 대중봉쇄의 근간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미·중 갈등이 다시 불거질 경우 한국은 일본과 함께 대중봉쇄의 첨병 역할을 담당할 여지가 남아있다. 어쩌면 현재의 소강 또는 과도적 국면이 한국이 서둘러 한반도 평화체제를 이끌어냄으로써 강대국의 권력재편에 휘말리지 않을 마지막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근혜정부가 그런 의지와 전략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원래부터 대통령 자신이 대미의존성향을 가진데다 육사 출신의 친미엘리트들이 핵심에 포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가지고 미국을 설득해서 평화체제로 전환할 가능성은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지난 6개월만 놓고 볼 때 내치와는 달리 외교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는 세간의 평가가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적한 것처럼 심각하게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 이명박정부의 대북 및 외교 실패가 너무도 깊어서 상당한 반사이익을 많이 받고 있지만, 그것은 임기 초의 착시현상일 수 있다. 보수정부임에도 진보정권 10년과 이명박정부의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데, 진보 아젠다의 선점이 단순히 대선 승리를 위한 선거 전략에 그치지 않고 국정 철학이며 실천적 아젠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또한 균형이나 중도라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설득력이 있지만, 국내외적으로 극히 유동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미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는 균형유지에 대한 동력을 우리가 행사할 수 있을지 의심하게 만든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거의 동시적으로 새 정권들이 출범한 동북아 6개국은 권력 공고화를 위해 국내 정치에 거의 전력투구하고 있으며 외교가 국내 정치에 종속되고 있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이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내치와 외교가 깊이 연결되어있다는 점에서 국내 정치와 외교를 분리해서 평가하기 힘든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군 장성출신이 국방-외교-정보라인을 독점한 채, 안보 담론을 전면에 내걸고 강경한 입장을 견지해온 소위 '남한판 선군정치'가 지속될 경우 결코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 최근 청와대 비서진의 전격 교체와 새로 등장한 인물의 면면이 대내적으로 공안정국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의심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최근 미국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 스테판 월트가 외교전문잡지 <폴린 폴리시>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가장 성공한 대외정책 6가지를 꼽았다. 브레튼우즈 시스템, 마샬 플랜, 핵확산금지조약(NPT), 미·중관계 정상화,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 그리고 독일 통일이다. 이들 업적의 공통점은 무력이 아닌 외교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그는 외교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강한 군사력이 뒷받침해야 한다는 조지 케난의 주장에 동의를 표하면서도 좀 다른 부분을 주목했다.
그는 케난의 언급 중에 힘이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조용한 힘(quiet force)'일 때 위력이 배가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외교에 채찍과 사탕을 적절히 섞어야 한다는 것은 맞다. 그런데 채찍은 가능하면 낮게 드는 것이 좋다. 채찍을 높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든다는 것은 그 외교가 실패로 가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박근혜정부의 원칙과 신뢰외교가 이런 노련함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과거의 독재자들이 그랬듯이 안보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는 안보 포퓰리즘의 욕심을 버리고, 미·중이 소극적일 때, 한국이 주도적으로 한반도 평화체제 건설에 앞장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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