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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은 정치논리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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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은 정치논리로 시작했다

박근형의 새만금 리포트 <3>

***정치논리로 시작했다**

지금도 갯벌이 왜 중요하고, 간척사업이 왜 나쁜지 모르는 한국인들이 많다. 80년대까지 극소수의 한국인을 제외하면, 갯벌은 그저 더럽고 아무 가치도 없으며 간척은 국토를 넓히는 애국사업이라는 것이 사람들 생각이었다.

1987년 5월 12일 황인성 농림수산부 장관은 새만금간척사업 추진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6일 뒤 5월 18일 황인성 장관은 농림수산부 장관에서 경질되었다. 1987년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 호헌선언이 6월 민주화항쟁으로 무산되고, 7ㆍ8ㆍ9월 노동자 대투쟁이 이어지던 시기다. 당시 집권 여당인 민정당은 노태우 후보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선거철만 되면 국토 균형개발은 여야 공통의 단골메뉴였다. 민정당은 전북에서 표를 모으기 위한 미끼가 필요했다. 그것이 새만금간척사업이었다. 전북은 서해안시대가 돌아왔다며 환영했다.

그러나 경제기획원은 반대했다. 경제기획원이 반대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경제성이 없다는 뜻이다. 경제성이 없다는 것은 비용보다 편익이 적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토끼골’이라는 마을이 있다고 치자. 이 마을에 골짜기가 있어 사람들이 오가는데 불편을 느끼고 있다. 정부가 이 골짜기에 다리를 놓으려 한다. 이 다리를 건설할 경우 필요한 인건비와 자재비와 설계비가 있을 것이다. 또 다리를 놓기 적합한 곳에 집이 한 채 있어 한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러면 그 가족에게 돈으로 보상한 뒤 그 집과 땅을 정부가 사들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공사비와 보상비를 합해 비용이라 한다.

편익은 그 다리를 완공했을 경우 마을과 국가가 장차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이익을 돈으로 환산한 것이다. 그 다리가 없을 때는 사람들이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차타고 먼 길을 돌아가는 만큼 기름값이 많이 든다. 또 시간허비도 있다. 만약 가뭄이 들어 바지가 좀 젖더라도 사람이 그냥 건널 수 있다면 그냥 건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면 바지를 빨기 위해 세탁기를 돌릴 것이고, 그 만큼 전기료와 수도세를 소비한다. 이러한 지출을 줄일 수 있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편익이라 한다.

이 다리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비용이 1백원이고, 편익이 99원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편익/비용’은 0.99이므로 경제성이 없다.

‘편익/비용’이 1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것은 경제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즉 다리를 건설할 값어치가 있는 공사라는 뜻이다. 이에 따라 경제성 수치가 2, 3, 4 높을수록 그 사업의 경제적 가치가 높아진다.

1988년 한국산업경제연구원은 새만금사업에 대한 경제적 타당성 분석을 내놓았다. 연구원은 갯벌상실로 인한 경제적 불이익이 없고 수질문제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전제를 깔고, 경제성을 분석했다. 여기에서 갯벌상실과 수질오염이 없다는 가정을 일단 주목하고 결론을 보자.

결론은 이렇다.

“간척한 땅을 농지로 개발하면 경제성 없다. 절반을 농지로, 절반을 공업용지로 개발하면 경제성 있다.”

새만금을 절반이나 공업용지로 개발하면 담수호 물이 썩는다. 즉 새만금사업은 경제성이 없는 것이고, 하면 안 되는 사업이라는 것이 이미 1988년 밝혀졌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1988년 한국산업경제연구원 원장이 한갑수씨라는 사실이다. 한갑수씨는 시민단체의 새만금사업 반대운동이 치열했던 2000년과 2001년 농림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새만금사업 강행을 줄기차게 추진했다.

인간의 이중성이 이렇게 무섭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자. 1987년 경제기획원은 한국산업경제연구원의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사업추진을 반대했다. 경제성 없는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새만금지구 바로 위에 붙어 있는 군장공단개발도 큰 규모의 사업이었다. 경제기획원은 1987년 11월 4일 경제부처 장관회의에서 새만금지구가 경제성이 없다며 군장공단개발을 건의했다. 하지만 노태우 후보는 선거에서 질 수 없었다. 12월 10일 군산유세에서 새만금사업을 완성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 약속은 사실 공약(公約)이 아닌 공약(空約)이었다. 이것은 노태우씨가 대통령에 당선한 뒤 보인 행각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새만금사업을 완성하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사업 착공을 지시하지 않고, 시간만 끌었다. 아마 할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바로 호남에 정치기반을 둔 김대중씨였다.

당시 김대중 신민당 총재는 1990년 여름 휴가기간 중 새만금방조제 공사 예정지를 찾았다. 김영진 농어촌진흥공사(2000년 1월 1일부터 농업기반공사로 이름을 바꿨음) 사장은 부안으로 출장 가는 것으로 행정처리 하고 몰래 현장으로 달려와 김총재에게 직접 브리핑했다. 김영진 사장이야 당연히 이 사업으로 전북 사람들이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 집중적으로 설명했을 것이 뻔하고, 김대중 총재는 자신의 정치기반에 선물을 주어야 한다는 심리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새만금사업이 얼마나 반환경적인 사업인지 몰랐던 김대중씨는 1991년 1월 19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영수회담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새만금사업 적극 추진을 요청했다.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도 1991년 6월 19일 전주를 방문, 새만금사업 적극 지원을 약속했다.

그래도 경제기획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갯벌의 가치, 수질문제, 이런 것은 몰랐다. 다만 오직 한 가지, 경제성이 없는 것은 분명했다. 당시 최각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검토중”이라 말했고, 기획원 예산실장은 “쌀이 남아도는 현실에서 타당성을 찾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김대중 총재는 마지막 결정타를 때렸다. 1991년 7월 16일, 영수회담 직후 김총재는 “새만금사업비 추경 반영 약속을 받아냈다”고 밝혔다. 하지만 경제기획원도 마지막 무기가 있었다. 7월, 전라북도에 추경예산 2백억원을 넘겨주고 연내에 다 쓰지 않으면 내년 추가예산은 없다고 협박했다. 전북은 눈앞이 캄캄했다. 이걸 어떻게 다 쓴단 말인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어업보상.’

새만금종합개발사업 기공식은 1991년 11월 28일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 서해바다 언저리였다.

새만금사업 주무부처는 농림부다. 농업기반공사는 설계와 공사를 책임지고, 여러 건설회사가 농업기반공사 감독 아래 공사를 진행한다. 전라북도는 주민보상업무를 책임진다. 여기에서 주민보상문제를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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