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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꼬랑이가 겨울을 견디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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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꼬랑이가 겨울을 견디는 이유"

고 이문구 선생이 남긴 4편의 유작 동시

어려운 시절 흔들림없이 독재권력과 싸워온 문단의 거목 이문구(62) 선생이 25일 오후 10시40분 서울 을지로 백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관촌수필'의 작가로 유명한 고인은 지난 2년전 위암과 담낭 제거수술을 받은 뒤 지난해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중 최근 1~2개월 사이에 급작스레 병이 재발해 백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던 중 이날 별세했다. 장례는 28일 문인장으로 치러지며 유언에 따라 화장된다.

고인은 1941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며, 1966년 은사 고(故) 김동리씨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단편 '백결(百結)'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50년대 농촌 현실을 토속적인 문체로 그린 소설집 '관촌수필'을 비롯해 70년대 개발시대에 고향을 지키려는 아픔을 증언한 '우리동네' 90년대 농민 의식의 변화를 다룬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한국펜문학상, 만해문학상, 동인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고인은 또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 발기인, '실천문학' 발행인 등을 역임하며 역대 독재권력과의 싸움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후 1999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진보와 보수로 갈린 문단을 아우르는 데도 애썼다.

고인은 병을 얻으면서 본인의 표현을 빌면 "소설을 쓰기가 체력적으로 힘들어" 근자에는 동시 집필에 주력해왔고, 얼마 전에 펴낸 동시집 <개구장이 삼복이>(창작과 비평사 간)은 아동문학계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 병원으로부터 "신변을 정리하라"는 통고를 받자 고인은 지난 15일 가퇴원,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써놓은 동시 66편을 정리한 뒤 여기에 <산에는 산새 물에는 물새>라는 제목을 정해 이를 창작과 비평사에 전하기도 했다. 고인의 마지막 유고인 셈이다.

창작과 비평사의 양해를 얻어 고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고인의 정신과 숨결이 흠뿍 느껴지는 동시 4편을 소개하며, 험난한 한 시대를 '자유인'으로 굳건히 살아온 고인의 삶을 회고해 본다.

***씨도리 배추**

나를 모르시겠지요.
갈대나 속대나 싸잡아서
배추통만 싹둑 도려내어
겨우 밑동만 남은
씨도리 배추.
두었다가 씨앗을 받으려고
내버려 둔
배추꼬랑이예요.
내가 겨우내 꽁꽁 언 채
눈으로 목을 축이며
밭에서 견디는 것은
내년 봄에
노랑물감 같은
장다리꽃을 피우기 위해서지요.
왜라니요,
꽃을 피우지 못하면
살았다고 할 것이 없잖아요.


***길**

어렸을 때의 이름은
오솔길이었어.
엿장수는 좋다 하고 다녔지만
헝겊 조각 울긋불긋한
서낭당 모퉁이며
상여를 두어두는
곳집이며
아이들은 늘 떨떠름했지.
지금은 시간 시간에
시내 버스가 다니는
어엿한 포장도로.
누구는 고속도로가 좋다지만
난 아니야.
아무 때나 건너다녀도 되고
코스모스 화짝 필 때
벼도 널고 고추도 너는
지금이 난 최고야.


***새**

산에는 산새
들에는 들새
물에는 물새
들고 나는 새
하고많아도
울음소리 예쁜 새는
열에 하나가 드물지.
웬일이냐구?
이유는 간단해.
듣는 사람이
새가 아니란 거야.


***마당에서**

솔개가 하늘 높이
빙빙 돌고 있으면

솔개 떴다
병아리 감춰라!

먼저 본 아이가
목청껏 외쳤지.

꼬르륵!
마당의 어미 닭도
솔개 그림자에 놀라 외쳤지.

병아리는 눈 깜짝할 새
울타리 밑에 숨고
솔개는 한나절내
헛돌기만 했지.


***이문구씨 연보**

1941년 충남 보령 출생
1966년 '현대문학'에 단편 '백결'이 추천되어 등단
1970∼1972년 '창작과 비평'에 장편 '장한몽'연재
1970∼1972년 '월간문학' 편집장
1972년 제5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1973∼1975년 '한국문학' 편집장
1977∼1997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1978년 제5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2년 제1회 신동엽 창작기금 받음
1984∼1989년 '실천문학' 발행인
1987∼1988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1990년 제7회 요산문학상 수상
1991년 '장곡리 고욤나무'로 흙의 문예상 수상
1991년 펜문학상 수상
1992년 제2회 서라벌문학상 수상
1993년 제8회 만해문학상 수상
1995∼1996년 한국소설가협회 상임이사
1996년 96문학의 해 집행위원회 출판 홍보분과위원장
1996∼1998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강사
1998∼1999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
1999∼2001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2000년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로 동인문학상 수상

***대표작**

소설집 '이 풍진 세상을'(1972), '으악새 우는 사연'(1978), '우리 동네'(1981)
장편 '산너머 남촌'(1990), '매월당 김시습'(1992)
연작소설 '관촌수필'(1972∼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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