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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토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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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토월 <2>

" 삼십 년을 모시면서 보기를 츰 보겄다. 아마 평생 츰이실걸‥‥‥‥ "
어머니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 지년만 츰인 중 알었더니 아씨두유?"
옹점이 대꾸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나중 안 일이지만, 어머니에게 평생 처음으로 보인 일이란 그날 밤에 아버지가 손수 행한 바의 모두를 말함이었다. 귀로에 한쪽 발을 헛디뎠던 일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양말 한 짝이 마당가 우물 도랑물에 젖어 있었다던 것이다. 어쨌든 그날 밤에 있었던 아버지의 거동은 오랫동안 여러 동네의 큰 화젯거리였은 줄 안다. 모두들 처
음이며 아울러 마지막일 터임을 미루어볼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그 후부터 더욱더 신서방은 아버지 보기를 조심 스러워한 것 같았고, 석공의 얼굴에선 어쩌면 자기 부모보다 우리 아버지가 훨씬 더 어려우면서도 가까이 뵙고 싶은 마음이 역연함 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이튿날 해돋이 어름이 되자마자 석공은 우리집에 인사를 왔었다. 그 틈에 나는 질척한 이부자리를 가동쳐 개어 얹고 빠져나올 수 있었고. 할아버지께 석공이 큰절로 인사드릴 때, 그의 물색 공단조끼 등허리 한복판에서 무늬 널따란 모란꽃잎이 문창호 엷은 빗살에 윤기를 내뿜으며 빛나는 것도 보았다.

지게 멜빵밖엔 걸어본 적이 없던 그의 두 어깨였지만 생전 처음 걸쳐진 비단조끼였음에도 조금치의 어색함이 없음을 나는 아울러 발견했던 것이다. 석공은 명색이 자기 이름도 모를 만큼 무심했던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했으나 그것은 한갓 구실이었을 뿐, 대취하여 귀가했던 아버지에게 문안드림이 목적이었든 줄을 우리 가족으로서는 모른 이가 없었다.

석공이 우리 울안 마루에 올라앉아 보기도 그날이 처음 아니었을까 한다. 어머니는 석공의 인사에 거의 맞절이나 다름없이 정중하게 대우하였고 "첫아들버텀 보아야지. 부디 부모 효도허구 부부 유정허게."
각근한 덕담을 잊지 않았으며 아녀자의 속성도 곁들여 불쑥
"장가들러 슴까지 신행갔다 왔으니 첫날밤 재미야 어련했겄나마는, 색시 잘 얻었다니 소문턱두 내게나" 했다.

" 구멍새나 크막크막허지 이뿔 것두 움구 암스렁투 않게 생겼는 디, 재밀랑사리 고상만 잔뜩 했슈. 시방두 걸을라면 다리가 뻑쩍 지근헌걸유."
석공은 겸연쩍고 스스럼 타는 기색도 없이 수월하게 대답했다.
" 무슨 싐인디 배루 가구서두 그렇게 걸었다나, 개펄에 빠져가메 갔던가뵈 ‥‥“
" 그랬간디유, 워떤 늠하구 한구재비 멱살걸이를 해버린걸유."
그제서야 석공의 낮에 민망한 빛이 벌그레하게 번지는 듯했다.
" 다투다니?"
어머니가 다시 재촉해서야,
" 예, 그게 이렇게 됐다닝께유‥‥‥‥“
하고 석공은 설명을 달기 시작했다.

초례(醮禮)를 치르고 나니 곧 날이 저물었다. 용궁에서 살다 금방 빠져나와 그런지 바닷물결을 노 저어 다가온 달은 관촌에 왔던 중추만월보다도 훨씬 더 크고 밝은 것 같았다. 석공은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할 병풍 속에서 그 달밤을 모르기가 너무 아까워서 한동안 시간 지체를 했고, 그러다가 끼여든 잔치 자리였다. 놀이는 섬것이나 뱃놈들이 더 푸짐하다고 느끼며 연방 술을 마셨다.

열대엿이나 되는 섬 사내들은 춤을 곧잘 추었다. 석공도 그네들 틈에 어울려 함께 춤을 추어주지 않으면 아니 될 판에 이르렀다. 석공은 일어서서 어깨춤을 추게 되었고,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가 어울려 놀기엔 무척 어색한 자리임을 깨우치게 되었다. 차라리 신랑 달아먹기에 말려들어 그 청년들 손찌검에 발바닥을 난타당했더라면 몰랐다.

그러나 장소는 밀짚방석이 여러 닢 갈린 너른 마당이었다.
" 그런디 워떤 늠다 대이구 발등허리를 짓발어 잇깨더랑께유. "
석공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 뒤를 이었다. 그래 그는 일삼고 눈여겨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떤 녀석 혼자만 하는 짓이었다. 달보기가 부끄러을 만큼 거무추레한 상판에 허우대가 바라진 덩치 큰 녀석이었다. 녀석은 코빼기만한 섬에 웬 문명(文明)인가 싶게 번들거리는 구두를 신고 있었으며 춤을 추느라고 그러는 척하며 그 구두 뒤축으로 고무신 신은 석공의 발등을, 혜아려보진 않았어도 스무남은 번 가량이나 짓이겨 밟아댄 거였다. 발로 그러지 않으면 팔굼치로라도 석공의 어깨와 가슴팍을 짓찧곤 하던 거였다.

시비거리를 만들고자 부러 집적거리는 게 분명했다. 아프기도 아팠지만 첫째로 기분이 상해 견딜 수 없었다.

" 형씨, 나헌티 뭔 유감 있슈? 팔굼셍이루 치구 굿수발루 짓밤게‥‥‥ 나두 내 승질 근디리면 바뻐지는 인품이니께, 참어보슈."
했더니, 석공 나이 또래나 췄지 싶은 그 청년은 대뜸,
" 요것 싹바가지 웁이 까부는 것 보장께, 얼레 요 작것이 삿대질할래 헌다요."
하면서 멱살을 잡자고 덤볐다.

석공은 천성이 바탕 고르고 유한 편이었지만 이번만은 경우가 달랐다. 그 거리에서 놀던 청년들은 모두가 녀석의 졸개들 같았고, 자기가 떠나고 나면 기세에 눌려 무지렁이처럼 빈말 한마디 못 해보고 갔다더라는 너절한 소문만 파다해질 것 같았다. 그리된다면 처갓집 체면에도 '인사가 아닐 것' 같았다.

" 귓싸대기를 쌔려번질까 허다가 확 집어 저리 내던져버렸슈. 봬가 여간 안나더랑께유. 뒈지는 시늉 허길래 살려줬이유."

사과는 나중 신방에서 신부한테 대신 받았노라며 석공은 웃었다. 신부 말에 따르면 오랫동안 그녀를 몹시 짝사랑해온 그 동네 이웃 녀석이었다. 물론 아무 일도 없었지만 원한 맺어봤자 좋을 일 없으니 참아달라며 신부가 애원했던 눈치였다. 어제 저녁까지도 문간을 기웃거리며 지분댔다고 실토하던 신부에게는 숨김이 없을 것 같더라며,
"무슨 큰 조이(죄)나 진 사람매루 빌어쌌는디, 그거 워칙헌데유"
석공은 싱긋벙긋 웃어가며 물러가고 있었다.
"신서방두 훌륭허구먼그려. 저런 씩씩한 아들을 뒀으니 신수가 안 피겄남. 빈 산에 달이 뜨기루 저런 아들을 뒀단 말여 ‥‥‥‥”
어머니는 물러가는 석공의 뒷모습을 이윽히 바래주며 상찬을 마지않았다.

그 이듬해 봄이었는지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아버지가 어떤 혐의로 두어 파수 동안 경찰에 구금됐다 풀려나온 적이 있는데, 거의 한 장(場) 도막이나 석공은 자기 아내를 시켜 정성들여 차린 음식으로 하루 세 번씩 사식(私食) 차입을 하였고 석공 자신이 직접 찬합을 싸들고 경찰서 출입을 하기도 하였다. 그가 그러고 갈 때는 한눈 한번 팔지 않고 계속 뛰어간다는 거였으며, 고마워 고마워하던 어머니가 직접 석공을 불러 사의를 말씀하고 다녀도 장가든 사람답게 의젓스레 다니도록 하라 하니,
"진지가 식을깨미 그러지유. 장(늘) 찬 웂이 해다드려 죄송스럽기만 허유‥‥‥”
무슨 큰 보람 있는 사업이라도 벌인 듯한 어조로, 그러나 겸손하게 말하더라고 했다.
그 일이 빌미 되어 아버지에게 무슨 혐의가 씌워지고 연행 조사를 받게 될 때면 석공도 일쑤 경찰의 부름으로 나가 죄인 다스림을 받았으며 때로는 고문을 당했다고도 하였다. 물론 지하 조직이니 전단(傳單)살포니 하는 아버지의 사업엔 얼씬도 한 적이 없었다. 다만 그가 바로 이웃하고 살며 아버지를 무조건 경외(敬畏) 한다는 소문 때문에 가당찮은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어떤 때는 석공이 스스로 와서 대문간에서 어머니와 만났으며 여기는 이러이러하게 당하고, 이쪽을 이만큼 두들겨 맞아 간신히 굴신한다며 고문당한 설명을 하기도 했는데, 그럴 겸해서 거듭 강조하던 것은 '선생님께 부끄럽잖은 사내가 되고자' 마음에 없는 말은 한마디도 입 밖에 내본 적이 없었음을 해명함이 목적인 것 같았다.
"볼수록 아깝더라. 핵교 글만 죄금 더 배웠더라면 여북 똑똑허까나. 숫제 아여 눈이 웂는 생일꾼이던지 ‥‥‥‥”
하며, 어머니는 그런 심성의 그가 보통학교나 겨우 마치고 만 것을 안타까워하였는데, 그러나 그에게 학벌을 물음처럼 부질없는 짓도 드물 것이란 느낌이다. 됨됨이며 천품이 워낙 그런 사람인 이상 학교 공부는 더 했어도 그만이요 생판 불학이었대도 마찬가지였으리란 느낌인 것이다. 하긴 어머니의 의견대로 차라리 판무식꾼이었거나 아주 약게 잘 배운 사람이었더라면 자기 한평생쯤 자기 편의대로 요리했지, 그렇게 운명의 농간 같기만한 일생을 마치지는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일생의 애석함을 어찌 몇 줄의 작문으로 그칠 수 있을 것이랴. 하나 그는 그 나름의 주견과 소신대로 자기 인생을 경영(經營)했음이 분명하며 또한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실패를 본 것도 사실이었다.

황소바위 가장자리에 다래가 여물고, 터져 눈송이로 핀 목화대 틈으로 해설피 반짝이는 서릿바람 그림자가 얼룩질 때, 반지르르 살찐 검은 염소는 개랑둑 실버들가지 밑에서 잠들고, 구름 아래에 머문 솔개 한 마리가 온 마을을 깃 끝으로 재어보며 솔푸데기 틈의 장끼 우는 소리를 엿들을 때, 범바위 앞의 찔레덩굴 속에서 핏빛 짙은 옻나무 잎을 비켜가며 까치밥을 따먹던 나는 언젠가도 한 번 들은 바 있는 신서방의 울부짖음에 소스라쳐 놀라고 말았다.
"이 가이(개)색긔들아- 나, 이 신 아무개 아즉 안 죽구 여기있다‥‥‥ 두구 봐라, 이 드런 늠으 색긔들‥‥‥ 누가 더 잘되나 야중에 두구 대보잔 말여, 이 웬수 같은 늠덜아‥‥‥‥”
신서방은 고래고래 악을 쓰다 말고 엉엉 울어 퍼대는 거였다. 원래가 고주였고 주사가 있었던 만큼 모두들 면역이 되어 그의 주정에 귀를 기울일 사람은 마을에 없었지만, 그는 술이 취하면 일쑤 그런 험담을 해댔던 것이며 그 험담이 가는 곳도 고정이 되어 있었다. 물론 자기가 어려서부터 행랑붙이로 얽어매어져 있었던 이가네더러 그러던 거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켜켜로 쌓였던 불만과 짓눌렸던 주눅을 피워 체증기 내리는 약으로 삼아온 거였다.

그러나 그날은 다소 색다른 데가 있었음을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며느리에게 산기(産氣)가 있은 거였다. 그는 손자를 보게 된 기대와 흥분에 술잔깨나 비운 거였고, 따라서 떳떳이 노인 대접받기에 충분한 근거가 마련이 된 거였다. 그러니 한평생 하대(下待)와 멸시로 시종해온 무리들아, 이젠 나를 달리 대해다오. 신서방의 주장은 대략 그런 것이라고 했다. 그날 신서방은 어느 때보다도 큰 목소리로 오랫동안이나 발악하듯 떠들었다. 때문에 듣다못해 어머니는 석공을 불러 무슨 사연인가를 알아보게 되었다. 어찌 생각하면 신서방으로서는 한번쯤 그렇게 해봄직한 사유가 없지 않기도 했다. 어머니가 듣고 온 내막만 해도 적잖은 이야깃감이었으니까.

석공의 보통학교 동창 하나가 무슨 신문 지국을 운영하고 있는데, 면장하고는 동서지간이었다. 그 동창이 석공을 면사무소 고용원으로 천거하였다. 그러나 이야기가 잘되어가다 까탈이 생겨 뒤틀리고 말았다.
"면소(面所) 꼬스까이래두 월급은 있으니 괜찮었을 텐디‥‥‥싀(署:경찰서)에 댕겨온 게 무슨 허물이라구‥‥‥‥”
하며 어머니도 무척 아쉬워하고 있었다. 신서방의 소원이 관청의 월급쟁이 아들을 두는 것이었음은 마을에서 모를 사람이 없게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자기가 설움받았던 집 자식들이 모두 고장의 관공리나 은행원이었기에 더욱 그랬을 터이지만, 석공이 면사무소의 잡역 고용원이 되려 한 것에서도 신서방의 기대와 보람은 적잖았던 모양이었다. 무슨 발신(發身)이라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긴 임시 고원(雇員)으로 있다가 면서기로 특채되는 예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신서방의 그 부풀었던 꿈은 여지없이 깨졌다. 그것도 평소 원수처럼 별러왔던 이가네 떨거지의 훼방에 의한 것이었다. 작으나 크나 관청인데 한지붕 밑에 같이 출입할 수 없다 하여 면서기로 다니던 이 아무개란 자가 중간에 뛰어들어 모략을 했다는 거였으며, 그자는 석공의 관공서 고용원 됨이 부당하다는 사유로서 석공이 불온한 사상에 감염되어 있다고 무고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자는 또 석공이 아버지의 사식 차입을 계기로 몇 차례 서(署)에 연행되었던 사실을 과장하여 그 증거로 하려 한 모양이었다. 석공은 아무런 불만도 내색하지 않았고, 그나마도 분수에 넘친 일에 한눈 팔았다는 듯 무렴해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신서방은 주정을 하던 날 밤 손녀를 보았다. 손자가 아니라서 적잖이 섭섭했겠지만 홧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신서방이 일생의 그 소원을 잠시나마 풀어볼 수 있었던 해가 왔다. 그것은 1950년이었으며 8월 그리고 9월이었다. 석공이 무엇을 했던 것이다. 면소의 고용원이 아니라 군청 서기가 되어 나갔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아버지에 대한 흠모와 사식 차입, 그로 인해 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연행, 고문 등등 지난날 그에게 가해졌던 몇 가지 고통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직책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이미 사전에 타계한 후였으므로 누구의 배려로 그런 대우를 받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석공은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석공네 집은 비로소 이렇게 살 때가 왔다는 듯 밤낮없이 식객이 드나들었고 석공은 모처럼 고무신 대신으로 하얀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널빤지 사립짝에 매달았던 깡통도 마침내 본래의 임무였던 초인종 구실을 제대로 해볼 기회를 만나고, 석공 새댁도 뭍사내에게 시집온 보람을 느껴본다는 기색이 역연하였다. 피체된 경찰관 가족들이 벌건 장닭을 구럭에 담아 메고 깡통 매단 철사줄이 끊어질 만큼 자주 드나들었고, 의용군에 자식 내보낼 수 없다는 노파들은 인절미와 흰무리 혹은 풋능금 따위를 보퉁이에 꾸려 이고 문턱을 닳리었다. 나중엔 대복 어메와 조패랭이도 그 중에서 한몫 하며 순심이를 욕보이려다가 갇혔던 대복이 석방을 위해 조석으로 들락거리던 꼴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석공은 그네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던가보았다. 힘이 될 만한 자리에 앉지 못한 탓이었다. 사변 전에 이렇다하게 한 일이 없고 워낙 순수한 동기로서 얻어걸린 직책이었으므로 무슨 실권이랄 것이 있을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한 일 같았다. 그는 평범하여 소문 없는 덤덤한 사무원이었다.

신서방은 그러나 아들의 그러한 '출세'를 이상하리만큼이나 달갑지 않다는 기색을 하고 있었다. 날마다 미군기의 폭격이 요란하고 민심이 겉돌며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아 불안을 느낀 거였을까. 그런 것도 아니었을 줄 믿는다. 본디부터 그는 우익 사람들을 애써 옹호해왔고 그만큼 공산주의자들을 증오해온 터였다. 우리 아버지가 하던 일에 대해서 조금도 호감을 보인 적이 없었음이 그러한 증거였다. 물론 무슨 주의 주장이 따로 있어 그랬던 것은 분명 아니었다. 다만 땅을 거르고 가축 거둬 먹이기와 논밭에 거름 한 지게라도 더 얹고 싶어 안달하며, 있는 농사 짓기에도 힘이 부친 근근한 농민 분수임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어떠한 번거로움도 마다했고, 전에 없었던 일은 여하한 것도 꺼려했음이 분명했다. 이는 그 당시 나이 어린 내 눈에 보인 바가 그와 같았음을 근거하여 하는 말이다.

월급쟁이나 관공리 자식 두기를 소망했던 어버이를 위해 석공은 대체 몇 푼이나 벌어다 바쳤던 것일까. 모르면 몰라도 대강 미루어보건대 그는 아마 한두 가마의 곡식을 타다가 들여놓은 것으로 그쳤을 것이었다. 그럴 만큼 그 무렵의 석공에 대한 인상이 기억에 남아 있지 않기도 하다. 석공은 해 뜨기 전에 출근하여 밤이나 되어야 귀가했고, 우리들은 우리들대로 밤낮 여성동맹 마을 책임자였던 순심의 인솔로 후미진 산기슭과 숲속으로 골라 다니며 놀되 단체 놀음을 하고 있은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은 잠깐이었다. 추석 지나고 며칠 안 되어 국군이 들어오고, 이내 경찰이 뒤를 이어 치안을 맡기 시작했던 것이다. 석공이 언제 어디로 피신했는지 당초에는 집안 식구들마저 종적을 몰라했었다. 깊이 처박혀서 잘 숨어 있는지, 혹은 월북을 했는지, 아니면 길이 막혀 잡혀 죽어 여우밥이 되었는지, 알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석공 새댁은 울며 날을 지새워 눈두덩이가 부얼거리며 밤톨처럼 솟아 있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녀는 첫돌이 가까워진 어린 딸 정희를 업은 채로 석공이 했어야 옳을 일에 매달려 오나가나 갈팡질팡 정신이 없어하고 있었다. 신서방은 화병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신서방댁은 석공의 내가, 외가, 처가 할 것 없이 두루 뒤져가며 아들의 생사 여부를 수소문하기에 볼일 볼새가 없다고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 가지 이상한 것은 피의자가 잠적해버렸음에도 그 가족들의 신변이 무사하던 일이었다. 신서방이 불리어가 다리가 부러졌거나 새댁이 닦달을 당해 어디가 어찌 되었다거나, 하여간 석공이 검거될 때까지는 남은 사람이 못살아 했어야 그 무렵의 상황에 걸맞을 일이련만, 그 흔한 가택 수색 한번 나온 것을 구경하지 못하겠던 것이다. 그런대로 석공 새댁은 머슴도 상머슴이 다 되어 손에 연장 놓을 때가 없었고, 논밭 걷이와 씨앗뿌리기에 벗은 발 신발 찾을 새가 없었다. 두엄 져나르기와 돼지꼴 베어들이기는 지게로 했고, 가물 타 오갈든 김장밭에 물지게를 져나른 밤에도 보리쌀 대끼는 절구 소리로 이웃의 잠을 설쳐놓곤 했다.

시월도 다 가던 어느 날 해설픈 새참 때나 되어서 있은 일이다. 조무래기들로 시끌덤벙한 소리와 사나운 울부짖음 소리가 귀에 들어와 밖을 내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석공네 마당 오동나무 밑에서 보통 아닌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대뜸 드디어 흉악한 일을 보게 됐다고 넘겨짚었다. 언뜻 푸줏간에 너리너리 걸렸던 고깃덩어리들이 떠오르고, 언젠가 돼지 잡을 때 자배기 속에서 솔고 엉겨붙던 검붉은 선지피가 눈앞이 아찔하며 떠올랐다. 두 다리가 후루루 떨렸다. 석공의 시체! 참으로 방정맞은 연상이었다. 석공네 마당으로 달음박질하는데도 벌집 다 된 총알 자국, 도끼와 쇠스랑에 찍혀 빠개진 뒤통수, 작살이나 대창(竹槍)에 난 탕질당한 가슴과 뱃구레‥‥‥ 그렇게 되었을 석공의 몸뚱이가 두 겹 세 겹으로 떠오르던 거였다. 그 마당은 역시 내 예감과 엇비슷하게 걸맞은 현장이었다. 오동나무 아래에 뒹굴려진 것은 석공이 아니라 그의 아내였다. 그녀가 농즙을 내며 짓이겨지고 걷어차여 온몸이 붉게 반죽이 되어 있던 것이다. 곁에서는 나이 어린 시뉘가 몸부림을 치며 울고, 겨우 걸음발을 타기 시작한 정희는 마당가를 두꺼비처럼 기어 다니며 보인 대로 집어넣어 입 언저리가 흙투성이에 검불 범벅인 채 혼자 놀고 있었다. 운신을 못 하게 쇠약해진 신서방은 토방에 주저앉은 채 부레가 끓어 죽는 시늉이었고, 구경꾼들은 어른 아이 없이 벙어리 시늉을 하며 그저 구경이나 할 뿐이었다. 누가 이 끔찍스런 일을 저지른 것일까.

그때 "에이" 하며 송곳니 사이로 침을 내갈기는 사내가 있었다. 낯선 청년이었고 분풀이가 덜 되어 씨근벌떡거리는 눈치였다. "씨발년" 하고 그 청년은 또 침을 뱉았다. 나는 얼핏 그 사내가 신고 있는 반드르한 구두를 보았다.
"과부 노릇 허는 꼴 좀 보장께, 이 쐉년."
낯선 청년은 계속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집 사내늠헌티 시집오먼 호강 요강 헐 중 알었지? 좋겄다! 고 콧빼기 높은 값 허느라구, 쐉년, 제우 새끼 한 마리 까구 서방 잡아 처먹구, 좋겄어 이년아."
그 사내는 돌아나가면서도 입으로 옮길 수 없는 욕설 한마디를 더 내뱉았다.
"너 같은 년버러 뭣이라구 허는 중 아네? 그게 바루 벌려주구 뺨맞구, 국 쏟구 투가리 깨치구, 밑구녕까지 데였다구 허는 것이여, 쐉년‥‥‥‥”
그 사내가 석공이 배섬으로 장가가 첫날밤을 치르기 직전, 신부네 잔치 마당에서 춤추는 척하며 시비를 걸었던, 석공의 발등을 짓밟고 팔꿈치로 쳤다가 석공한테 태질을 당했다던 작자라고 했다. 못 이룬 짝사랑이 곪으면 그렇게도 터지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 그늠이 사내 지집 죄다 밟어 조졌다구 원 풀어 허더라는디 ‥‥‥ 내 암제구 돈 벌먼 뺏쪽구두 한 커리 사 신구 슴으로 근너가, 내 그늠의 자슥 대갈빼기를 부숴주구 말 티여‥‥‥‥”
모진 풍파가 다소 끔해지고 한숨을 돌릴 만하자 석공댁이 농담처럼 하던 말이었다. 그날 그 사내가 찾아와 들이단짝 정신 못 차리게 치고 패며 밟을 때는 그녀도 이젠 다 살은 줄로 알았다고 하였다. 그 같잖은 풍신에 언제 그리 됐으랴는 생각을 해볼 겨를만 있었더라도 그렇게 당하진 않았으련만, 서슬이 워낙 시퍼렇고 살기가 뻗쳐 있어 대뜸 치안 계통의 무엇이 돼가지고 앙갚음을 하러 온 줄로만 여겼다는 거였다. 더구나 그자는 보자마자 대뜸,
“내가 금방 늬 서방 뒈지느라구 용쓰는 거 보구 나왔니라. 초상 치를 채비허여 이년‥‥‥ 싸게 싀(署)에 가 송장 떼며오라니께‥‥‥ 통 큰 년, 공산(共産)질헌 즤 서방이 살어나기를 바랬던가뵈‥‥‥”
하더라는 것이다. 그때 속은 것이 그렇게도 분하다고 그녀는 못 잊어했다.
“공산질은 즤 늠두 했데. 저두 잽혀가서 늑신 처맞구 풀려나온 질이더랑께."
하며 그녀는 어처구니 없어하였다. 그 사내도 적치하에서 부역을 했던 것이다. 물론 목숨을 붙이자니 마지못해 그랬겠지만, 하고 그녀는 말했는데, 그 사내의 죄목이 무엇이었는지는 길래 알 수 없었다. 며칠 묶여 있다가 풀려나온 것으로 미루어보아 대단치는 않았으리라 싶을 따름이었다.

석공은 그 섬사내가 전한 대로 그때 이미 검속되어 있었으나 집에 연락이 안 닿아 가족과 마을 사람들만 모르고 있은 거였다. 석공이 갇혀 있던 곳은 농업조합 미곡창고 속이었다. 혹독한 고문을 당해 거의 빈사 상태였더라고 했다. 실지 보고 온 사람들이 전해준 말이었다. 고춧가루 탄 물 한 주전자를 코로 다 마시더라던 사람, 방망이로 맞을 때 세어 봤는데 예순두 대째 맞고 까무라치더라는 사람‥‥‥ 다만 아주 죽었다고 전한 사람만이 없었을 뿐이었다. 석공의 고문당한 기별이 전달된 날부터 새댁은 핫옷 바느질로 잠 없는 밤을 견뎌냈다고 했고, 무심코 솔기를 호다가도 출입복이 될지 수의(壽衣)가 될지 용도를 의문하게 되면 으레 그때마다 바늘을 부러뜨렸노라고 했다. 정말 안타까웠고 아까운 일이었다. 스물다섯이란 석공의 한창나이가 그지없이 아깝던 것이었다. 그 무렵만 해도 그녀의 그 같은 의문에 누구라고 시원한 대답으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석공의 새댁을 정희 엄마라고 불렀다. 정희는 재롱둥이였다. 신서방네 집안의 유일한 웃음거리였다.
"저것이라두 웂으면 무슨 건지루 살겄어유."
정희 엄마도 늘 그런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석공은 언도받은 대로 대전 형무소에 이감되어 있었다. 5년 징역이었다. 5년이란 형기가 굳어지자, 늘펀히 누워 시름거리던 신서방은 기신기신 일어나 일꾼 없는 농사를 지어냈고, 정희 엄마도 안팎 두루치기로 상머슴 몫을 해내고 있었다. 그녀가 억척스레 일하는 것을 볼 때면 어쩐지 자학적으로 부러 고된 일로만 골라서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그 지악스러움과 억척스러움은 멀쩡한 사내도 감히 흉내낼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까.

모두들 비명에 세상을 뜨고, 어른이라곤 오로지 어머니 한 분 뿐이었던 우리집도 적잖이 변모된 채 겨우 하루살이를 하고 있었다. 명질날 무시날 따로 없이 주야장천 내방객의 신발들이 즐비하던 사랑 뜰과 댓돌에는 퍼렇게 이끼가 끼어 시절이 아님을 말하고, 문짝마다 안으로 굳게 잠겨진 사랑마루엔 여름 먼지 겨울 티끌만이 자리를 만난 듯 쌓여 지는 해 붉은 노을에 퇴락만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울안엔 언제나 사람들이 들벅거렸음을 무슨 조화 속이라 이를 것인가. 밤낮으로 마을 아낙들이 모여들었으니 안사랑이라 이름할 것인가. 그네들은 낮잠을 자러 오기가 예사였고 어린아이를 맡기러 오기도 했다. 어렴성 모르고 무시로 드나들어 거의 마을방이나 다름이 없었다. 덕택에 어머니는 적적한 줄을 몰랐고 마당일 부엌일 거들어주는 손이 많아 자자분한 집안일로 허리를 앓지 않아도 되었다. 정희 엄마도 마을꾼 중의 하나였다.
"저는 아마 이 코 점이 팔자가 이런 것 같튜."
그녀는 일쑤 그런 말을 했고,
"츠녀 쩍에 넘덜이 보구 반주그레허니 괜찮게 빠졌다구 허면 철웂이 좋아했더니, 게 다 무슨 살(煞)이던개뷰. 후제 자슥 두구 메누리 읃으면, 저처럼 콧날 오똑허구 얼굴 걀상허니 해금헌 시약씨는 절대 마다헐래유."
자기 코를 가리키며 그런 말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의 미모와 몸매를 나무라기 위해 모질고 거친 일만 도맡아 했던 것이다. 그녀는 말했다.
"접때 면회 가니께 쟤 아배가 전처럼 낭자에다 댕기두 드리구, 끝동 달린 소매두 입으라구 해쌌길래 저는 싫다구 했이유. 자기가 나오면 쪽 풀구 빠마두 허구, 베루벳도 치마두 해입을란다구 했더니‥‥‥ 허연이 웃으면서 눈물을 주루루 흘리데유."
곁에서 듣고 있던 나는 문득 그녀가 시집오던 날을 기억해내고 코가 너무 반듯하여 어떨지 모르겠다던 옹점이 말도 곁들여 되새겨보곤 했다. 그녀는 면회 가는 날을 기다림으로써 그 인고의 세월을 잊으며 살고 있었다.

시작에서 끝이 없으되 결국은 잠깐이기에 세월이라 이름했거니 한다. 석공의 복역 기간이 그와 같았기로 더욱 그런 느낌이려니 한다. 석공이 형기를 반 년 앞두고 모범수로 특사받아 풀려나오게 됐던 것이다. 그해 8월 15일 광복절. 아침부터 마을은 온통 무슨 명절을 맞은 기색으로 술렁거리며 기꺼운 표정이었다. 방학 중이어서 그 집 마당이 가득하게 들어차 놀던 아이들 틈에서 나도 일찍부터 뒤섞이어 초조한 마음으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 앞 신작로로 지나갈 버스는 오후 4시경이었으므로, 나는 무려 6시간 이상을 그 마당 귀퉁이에 서 있었고 거의 하루 해를 에우다시피 한 셈이었다. 점심때쯤부터는 성깃하게 빗방울이 듣어 개오동 잎새마다 얼룩무늬를 두었고, 그것은 차츰 여려지면서 촘초롬한 부슬비로 변했으며 실금실금 뿌려지는 대로 거미줄마다 부슬비가 꿰어지자 거미줄은 잘 닦인 은쟁반처럼 우아한 모습으로 보였다. 어느 때였나, 문득 버스 멎는 소리가 들리자 마당 안의 시선들이 개랑 건너 과수원의 탱자나무 울타리를 끼고 신작로 쪽으로 쏠려 갔다.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그렇게 팔짱끼고 서서 구경이나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가 우리 아버지에게 보였던 정리에 대한 조그마한 답례라도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는 아마 무슨 일이라도 주저하지 않았을 터이었다. 나는 무얼 어떻게 해야 될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인사라도 남보다 먼저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나는 뛰어갔다. 정희 엄마와 정희 그리고 신서방 내외, 또한 신작로 송방 앞에 있었던 마을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석공은 싱글벙글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장가갈 때 도리깨자루와 새끼타래를 사려 쥐고 달아먹기로 별러댔던 그 사람들, 쌍례 아배 조패랭이 복산 아배도 그 틈에 뒤섞여 있었다. 상상했던 바와는 딴판으로 석공은 건강하고 늠름해 보였다. 나는 마을 아이들의 맨 앞에 서서 건강한 생환을 진정으로 고마워하며 고개만 깊이 숙였다. 그가 먼저 말할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몰라보겄네, 되게 컸어."
그는 내 손을 잡고 여러 차례나 힘지게 흔들었다. 그래도 내 입에서는 아무 말도 새어나오지 않고 있었다. 요즘도 나는 하루 열댓 번 이상 헛손질하듯 하며 형식적인 악수를 자주 하고 살지만, 또 앞으로도 매양 그러기가 쉽지만, 그때 해봤던 그 석공과의 악수만은 언제까지라도 못 잊어할 것임을 스스로 믿는다. 그것은 내가 생전 처음 처자를 거느린 어른하고 악수를 해본 최초의 경험이라는 한 가지 뜻만으로도 그렇다. 그는 얼굴이 허옇게 쇠었다는 겉보매 외에 조금도 달라진 데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결에 그는 내 손을 뿌리치듯 물리고는 불쑥 내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두 손이 발등에 닿도록 허리를 굽혀 절하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가 석공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웃어 보이고 있었다. 어쩌면 울고 있었는지도 모를 표정이었지만‥‥‥ 석공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마치 자기가 그처럼 살아 돌아왔음이 무슨 큰 허물이라도 되는 듯한 표정으로. 어머니가 앞서 걷기 시작해서야 늘어놓은 두름처럼 정지됐던 행렬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개랑을 건너고 마당에 발을 디뎠다. 그는 그리던 집에 들어선 것이었다. 석공은 성급하게 울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여러 사람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어느새 먼저 들어왔던가, 신서방 댁은 하얀 대접에 두부를 가득 담아 들고 서 있었다.
"엄니는 쓸디웂이 두부를 먹으래유."
석공이 그것을 마다하고 그냥 울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신서방은 정색을 하며 나무라듯 말했다.
"얘, 이 두부 저 으르신께서 쒀오신 게여."
석공이 신서방 눈길을 따라 돌아본 곳엔 우리 어머니의 미소가 있었다. 석공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신서방댁이 입에 물려주는 대로 목을 쩔룩거려가면서 자기 얼굴만큼이나 하얀 두붓덩이를 허발하고 먹어치웠다.

이튿날. 아마 동네에서 동트며 일변 일어나 맨 먼저 연장자루를 쥐고 나선 사람은 석공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희 엄마 말에 의하면 그날 밤을 온통 뜬눈으로 새우더라는 거였다.
"사 년 반이나 굶은 사랑 벌충헐랑께‥‥‥‥”

입이 걸었던 상술 어머니는 웃느라고 말끝을 못 맺었지만, 정희 엄마는 정색을 하며 '일이 하고 싶어 잠 못 자던' 석공에 대해 자세하게 풀이를 달았었다. 형무소에 들앉아 있는 동안 처자 다음으로 그립고 잡아보고 싶어 못 견딘 것이 낫 호미 쇠스랑이며, 밤마다 귓전에 들려온 것이 도리깨 소리 탈곡기 소리였다고 실토하더라는 것이다.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정희 엄마 말을 그대로 곧이듣고 싶었다. 석공은 가장 모범적인 일꾼이 되어갔다. 그처럼 건실한 농군도 다시는 없을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석공하고만 품앗이하기를 원하고, 같은 값이면 석공의 품을 사고 싶어 서로 다툼질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는 누가 시키기 전에 먼저 알아서 일을 추어내고 남의 늑장과 꾀부림도 앉아서는 못 보던 성미였다. 그러나 사철 내내 그럴 순 없는 것 같았다. 날이 거푸 궂거나 장마 기운이 몰린다 싶으면 그 스스로가 된 일을 삼가면서 몸조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곤 하였다. 고문으로 골병이 든 데다가 형무소 독까지 몸에 배고 뿌리를 박았던 것이다. 워낙 되게 당한 탓일 것이라며 석공 자신도 응어리가 박이고 어혈이 들었었음을 시인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몸을 보하고 조섭하기 위해 어떤 대책을 꾸미는 것 같지는 않았다. 쇠꼬리 한 대 안 들여가고 개 한 마리 잡지 않았던 것은 무슨 자신이 있었던 걸까. 그보다는 연장 쥐고 움직임을 만병통치로 알았음이 분명하다. 그는 자기 집 농삿일에만 부지런을 피운 것이 아니었다. 이웃 동네 크고 작은 일에도 부러 빠진 적이 없었다. 아니 그가 없으면 되는 일이 별로 없을 지경이었다. 추렴이나 울력으로 마을의 곳집을 고친다거나 봇둑 보수가 있게 되면 으레 석공이 앞장서 나서야만 버그러지고 뒤틀림이 없었다. 구장, 반장이 엄연하게 따로 있었건만 석공 말이라야 설복을 했고, 어련하랴 하며 믿거라 했던 것이다. 사변통에 어떻게 없어진지 모른 마을 상례 기구가 마련되기까지 상여계와 상포계(喪布契)를 일으켜 마무리 지은 것도 석공의 힘이었고, 이중계(里中契)가 해를 더해갈수록 번창을 본 것도 순전 그의 적공이던 것이다. 그의 심덕은 정평이 나 있어, 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아이들까지도 은연중 어려운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심어가는 것 같았다. 석공의 손발이 아쉬워질 때는 그러니 안 그러니 해도 역시 아침을 끓이며 저녁 걱정하는 집일수록 절실하며 반드시 있어야만 제격일 것 같았다. 갑갑하고 궂은 일일수록 그것은 더욱 그런 듯 했다. 그는 꿋꿋이 그리고 성심껏 일을 치러내었다. 7월 삼복 땡볕 아래서 남의 무덤을 파고, 8월 장마 궂은 밤비 속에서는 갓난애 무덤을 꾸려냈다. 동네에서 죽은 어린애 관은 거의 석공 혼자서 지고 올라가 매장해주기 일쑤였던 것이다. 들으나마나한 공치사 몇 마디 외엔 아무런 보수도 없던 일들, 마치 그런 일에 봉사함 만이 자기의 직분이며 도리인 것처럼, 수술하다 목숨을 거둔 피투성이 이웃 송장도 혼자 업어 나르고, 술 취해 장바닥에 자빠진 사람은 도맡아 구완해주기를 일삼고 있었다. 상한 시체 염을 해주고, 묵은 산소 면례가 있어 파분(破墳)이 되면, 썩은 관을 먼저 뜯어내던 이도 맡아 놓고 석공이었다.

누가 그를 그런 사람이도록 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천성이 그런 위인이라기로, 천성을 모개로 셈해 말하기엔 너무 무모하다는 각성을 스스로 하게 되었다. 인고(忍苦)의 형무소 세월에서 무엇인가 터득한 게 있었을까. 모르는 문제를 되다 만 소리로 둘러칠 수는 없다.

출옥 이듬해에 석공은 아들을 낳았다. 정희 엄마는 낭자를 자르고 다복다복하게 신식으로 지졌고, 까만 벨벳치마를 해입은 것도 두 번인가 보았다. 벼르던 것 가운데서 뾰족구두만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점차 셈평이 펴이고 일상의 형편도 느는 것이 눈으로 보였으며, 살게 되느라고, 여름내 곱삶이를 면할 수 있도록 농사도 해마다 대풍이었다. 형무소에서 그토록 몸서리나게 참아야 했던 그의 소망, 그렇다, 그 일을 그는 원이 없을 만큼 해댔던 것이다. 밤에 지나다 들으면 석공 내외가 거처하는 문간방 쪽에서는 으레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오곤 했다. 라디오 한 대 장만하기가 송아지 한 마리 사들이기보다 갑절은 어렵던 시절이었다. 그는 신문을 구독하고, 쉬운 잡지도 열심히 사다 읽는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시집와서 츰으루 사는 재미에 살어유‥‥‥‥”

동네 사람 중에서 맨 먼저 나일론 것을 해 입고 자랑삼아왔던 정희 엄마는 천식으로 몸져누운 어머니 다리에 부채질을 해주며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일론이 사치품이다 아니다 하며 그 수입 여부를 놓고 사회부와 상공부가 자루를 찢던 시절이었다.
"자긔 징역살이헐 때 고상했다구 예전 고렷적 얘기 해싸메, 그 보상 허느라구 한 감 끊어왔대유‥‥‥ 눈 딱 감구 해 입었슈."
그녀는 숨을 돌린 다음.
"재봉집이다 맽긴께 공전이 껏보리 한 가마 금새나 들더먼유. 미두계(米頭契) 장변을 댕겨다 쓰더래두 재봉침 한 틀은 살라구 그류.”
" 그럴 테지 ‥‥‥ 그러야 쓰구‥‥‥‥”
어머니는 고대 넘어가는 숨을 붙들며 석공의 기특함을 되뇌곤 했다. 석공은 매일처럼 어머니 병문안을 왔다. 용태가 걱정되어 밤잠을 설친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어머니의 수의도 석공 손으로 입혀졌다. 유택(幽宅) 역시 석공 손에 이루어졌다. 그 어느 무덤보다도 정성으로 물매 잡힌 봉분이 돋우어지고, 지심(至心)으로 뗏장을 입혔다. 일이 그에 이르도록 석공이 자원한 고초가 어느 만큼인 줄도 나는 모르지 않았다. 어디 좋다더라는 약이 있으면 자기네 곡식자루를 메고 가서라도 그는 구해왔었다. 용하다는 의원 한 번 보이기 위해 밤길 새벽길을 가리지 않고 뛰었었다.
그 무렵의 나는 겨우 중학 2년생의 어리보기였지만, 도대체 어찌하여야만 그의 성의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는지 궁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참고서와 사서(辭書)가 있을 수 없는 오랜 세월의 숙제이기도 했다. 나의 마음은 언제나 신세 갚음이었지만, 그러나 그것도 그런 것이 아니었다. 관촌에서 노박이로 살고 있는 한은 내가 되려 폐를 끼치며 도움을 받아야 될 것 같았고, 실지 그리 됐음이 사실이던 것이다.

우리는 헤어지던 마지막 날 그 시각까지 그의 신세를 졌다. 따로 쉰 막걸리 한 종발 대접해보지 못한 채 우리는 고향을 떠나면서 석공과 헤어졌다. 그는 말문이 막힐 정도로 섭섭함을 참지 못 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땀만 쏟으면서 이삿짐 건사를 거들어주었다. 우리집 세간은 원래가 번다하고 잡동사니 투성이였다. 개화 이전에서 3대를 물림해온 것들이니 오죽이나 잡다했겠는가. 농사로 거둔 세전(歲前) 곡식 스무남은 가마를 제외하면 화물 트럭 한 대분이 모두 그런 쓰잘머리 없는 것들이었다. 그날, 온 동네 사람은 총동원되어 우리 이삿짐을 정거장까지 운반하고 실어주었다. 머리로 여나르고 등짐으로 져날랐으며 지게 지는 사람치고 한두 행보 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때도 석공은 열두서너 행보 이상이나 힘겨운 것들로만 골라서 져나르는 것 같았다. 중간에 점심 들 새도 없이 부살같이 왕복하던 거였다.

기차가 떠난 시간은 오후 4시경이었다. 화차간의 짐들이 대강 자리를 잡자 석공은 파랑새 한 대를 피워 물며 지게 멜빵을 벗어 뉘었다.
"이것, 원체 섭섭헝께 말두 안 나오는디‥‥‥ 워칙헌댜, 이냥 이렇게 떠버리니 워칙허여 ‥‥‥‥”
그는 아쉬움을 못 이겨 부쩌지 못하고 있었다. 기적 소리가 길게 울려퍼지자 석공은 내 어깨를 자기 품으로 얼싸안듯 당겨가며 약간 더듬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부디 성공해서 옛말 허며 살으야 되여. 원제던지 편지허구, 한번이나 내려오게 되면 내 집버텀 들르야 허네‥‥‥ 기별 자주 허구, 몸 성이 잘 올러가게‥‥‥‥”
나는 가슴이 미어졌으므로 무슨 말 한 마디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서울 살면서 과연 나는 그에게 가장 많은 편지를 보냈다. 누구보다도 서슴없이 자주 기별을 하였다. 편지 많이 받고 자주 답장 내보기는 석공 역시 나와 같았을 것이다. 나는 정말 누구보다도 복잡한 내용을 주저 않고 써보냈다. 안부를 묻고 전하는 의례적인 편지를 그처럼 자주 쓴 게 아니라 때마다 내가 아쉬워 성가신 부탁만을 그에게 도급 주듯이 떠맡기곤 했던 것이다. 전적(轉籍) 절차가 간소화되어 본적을 서울 주소로 떼어 옮기며 마지막 호적 등본을 보내주기까지 온 가족의 호적 초본이며 졸업 증명서, 그 까다로운 병사 관계 서류 따위를 석공 혼자서 처리해준 거였다. 성묘차 내려가면 맨 먼저 들러 앉았다 일어나곤 한 집도 물론 석공네였다.

4월 혁명이 일었던 해 봄, 할아버지 산소를 면봉하러 갔을 때만 해도 석공의 살림 형편은 그저 그만하면 되리 싶게 부쩍 일어나 있었다. 봉당 안에는 사서 얼마 안 탄 신품 자전거가 있었고, 미처 겉칠도 안 벗겨진 새 풍구(風具)도 한 틀 비료부대로 덮인 채 추녀 밑에 놓여져 있었다. 국민학교에 다니는 정희 신주머니가 마루 끝에서 뒹구는가 하면, 출옥 1주년 기념품처럼 태어났던 머스매도 돈을 주면 뒤도 안 돌아보고 가게로 내달을 만큼 자라 있었다. 바야흐로 석공은 옛말을 하며 살아가는 중이었다.

달라진 것은 석공네 살림 규모만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한테 얻어들은 말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많이 달라진 것이라면 신서방의 건주정이었다. 그의 주정 아닌 시비를 안 듣게 된 지도 어언 이태나 되나보라면서, 일가댁 어느 아주머니는 신통해 마지않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가네 문중을 향해 퍼부어쌌던 그 욕설과 삿대질 버릇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뜻이었다. 신서방으로선 당연한 일이리라 싶었다. 귀밑머리가 옥수수 수염 다 된 만큼 늙기도 했지만 답답하여 울화 끊일 일이 없어졌으매 그러고 싶더라도 건더기가 마땅찮아 못 할 것 같았다. 칠성바위 둘레에는 양옥집이 서너 채 들어서고 대복이네 살던 집 지붕도 함석으로 개비되어 있었다.

그뿐만도 아니었다. 범바위 이쪽은 두엄자리인지 돼지우리를 지었다가 헐은 자리인지 쉬파리가 끓는 속에서 거름 냄새가 물씬거리고, 황소바위 곁에서는 들깻모 붓고 요강부신 뒤 비가 안온 탓에 지린 냄새로 가득차 코가 헐고 있었다. 때문에 칠성바위 안쪽 할아버지 산소를 달리 모실 수밖에 없음을 알린 이가 석공이었고, 내가 몸뚱이만 내려가도 아무 차질 없이 모든 게 마련돼 있던 것 역시 석공의 분별이었다. 그는 모든 부수적인 잔일까지 혼자 시작하여 마무리 짓고자 했다. 구기(舊基) 파봉(破封)에서 새 유택의 성분(成墳)까지, 석공은 남의 손 빌리지 않고 혼자 힘으로 마쳐주었다. 도대체 무슨 인연이었을까. 설명도 되지 않고, 실감 없는 공허한 글자로만 끄적거리며 되잖게 서툰 수작을 할 수도 없다. 헤아려보면 석공은 삼대(三代)에 걸쳐 우리 집안의 불행들을 뒤치다꺼리한 셈이었다. 할아버지로부터 나의 동기까지, 그는 비명(非命) 및 천수(天壽)에 의한 별세(別世)를 지켜보았고 아울러 신후(身後)의 휴게처마저 자기 손으로 치장해주지 않았던가.

석공이 처음 서울에 왔던 것은, 날이날마다 엔간히도 찌고 삶아대던 5.16나던 해의 한여름이었다. 나는 명색 대학 1년생으로 어디 가서 단돈 십 원 한 장을 못 만들던 숙맥으로서, 그만큼 궁기에 찌들던 시절이었다. 석공은 미리 편지에 일러둔 말이나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 그는 카키색 작업바지에 백모시 반소매를 시원하게 받쳐 입고 흰 운동화를 빨아 신고 있었다. 우리는 일찍이 그 어느 손님도 그처럼 반겨한 적이 없었다. 누구여 누구, 이게 누구여, 하며 누나는 그들 목소리만 귓결에 듣고도 대문 앞까지 맨발로 뛰쳐나갔을 정도였다. 거짓말 보태 말하자면 우리들의 그런 영접이 석공은 다소 의외란 듯 감격스러운 빛까지 서리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무턱대고 반가워할 만한 상경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어리기 시작하던 것이다. 한창 바쁜 철에 부부 동반으로 상경했음이 첫째요, 우중충하게 꾸려 들고 온 헌것 보따리 꼴이 그 둘째였다. 게다가 정희 엄마는 수시로 젖을 물려야 되는 젖먹이를 들쳐업고 있었다. 그 더위나 하고 무슨 일로 이 먼 길에 이르렀을까. 예사로운 곡절이 아닐 것 같았다. 석공은 얼굴이 수척하게 빠져 있었고 눈은 또 어떻게 그리 커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젖먹이에 매달려 부대낀 탓일까. 정희 엄마도 몹시 지치고 하염없는 얼굴로 늘어져 하고 있었다. 이 부부가 어찌하여 이토록 궁상스럽고 청승맞아 뵈는가 싶어 불안해 못 견딜 노릇이었다.

"첨이지요, 서울‥‥‥”
번연히 알면서 묻고 나는 그들의 기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럼, 생전 츰이지."
석공은 무엇에 쫓기는 사람 같았다. 어딘지 군시럽고 오금탱이가 저린 표정 같기도 했다.
"며칠 푹 쉬면서 구경도 하고 놀다 가시야지요."
본디 말주변이 없기도 했지만 마음이 불안해 혀가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럼, 그럼‥‥‥‥”
점심 짓느라고 부엌을 드나들던 누나는, 마치 기다리던 친정 오라비라도 맞은 듯, 이리 닫고 저리 내달으며 여간 부산스럽지가 않았다.
“아니여, 니열 아침 차루 띄야 되여. 아 시방에 월매나 바뿐 땐디‥‥‥‥”
석공은 건설 담배를 피워 물고 멀리 트인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 일년 열두 달 허는 일, 넌더리도 안 난대요?"
누나는 그렇게 물색없이 반박을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석공의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 눈치가 역연해졌던 것이다. 더부룩하게 자란 머리, 오갈든 푸성귀처럼 윤기 없는 입술‥‥‥ 초췌해진 외모부터가 그런 증상임을 말하고 있었다.
"그저 그늠의 일‥‥‥ 저이는 일허다 병 샀다니께‥‥‥”

정희 엄마는 석공의 눈자위를 살펴보며 오가는 말 매동그리듯 힘들어하며 말했다. 그녀도 몹시 피곤한 기색이었다. 역시 우환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녀 말처럼 일에 매두몰신(埋頭沒身) 하다가 체력이 달려 얻어걸린 병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석공은 차근차근 말했다. 이렇다 할 증상도 없는 채 몸이 노상 어렵고 개운찮더니 어느 날 갑자기 졸도를 했다. 그 후로 현기증이 자주 일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때도 가끔 있었다. 혼절(昏絶)이 거듭되긴 했지만 처음에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었다. 일은 되고 먹는 게 션찮아 빈혈 기운이려니 하고 말았다. 나중엔 병원을 찾아가고 약국에 가서 진맥도 해보았다. 어느 쪽에서도 병 이름을 뒤져내지 못했다. 옛적에 고문당한 어혈이 도진 것인가 싶었다. 아무래도 그 후유증 같아 몸 조신을 하려고 작정했다. 그러나 현기증 증상은 날이 더해갈수록 잦아지고도 심했다. 그곳 의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큰 병원 진찰을 받기로 했다.

"암만 해두 대학 병원을 챚어가보야 될 양인디, 이왕 이런 몸뜅이, 숫제 족보 있이 유명헌 병이라먼 좋겄네. 유명헌 병은 약도 쌨을 텡께 ‥‥‥‥”
하고 석공은 자기 말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거푸 담배를 붙여 물었다. 나는 세브란스병원으로 석공 내외를 안내해주었다. 신축 공사가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개원한 터라 병원 구내 여기저기에서는 중기(重機)의 소음이 시끄럽고 시뻘건 황토더미가 무더기무더기 쌓여 있어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리집에서 그 병원까지는 한눈 팔며 걷더라도 5분이면 너끈히 닿는 지척지간이었다. 나는 석공 명의의 '평생 진찰권'을 끊어주면서 그것이 평생 필요 없을 건강한 몸이기만 마음으로 빌었다. 두어 시간이나 지나서야 석공은 진찰실에서 나왔다. 간단히 진찰해본 모양이었다.
"암시렁치두 않은개비데. 이렇게 봐서는 뭐라구 말을 못 허겄디야‥‥‥‥”

석공은 손등으로 일그러진 이맛살의 땀방울을 훔쳐내었다. 우리는 와우산 너머로 저물던 하늘이 마포강에 내려앉아 흘러가는 것을 보았고, 이슬슬 이슬슬 엉기는 비안개 속을 걸으면서 어디선가 혼자 우는 개구리 울음 소리도 들었다. 저녁 식사 후 여름 과일로 후식을 마치자 석공 내외는 부스럭부스럭 일어났다.
"여관이 워느 쪽에 더러 있다?"
석공은 나더러 묻고 말했다.
"더웁구 물컷 있구 허니, 잠은 여관에 가 널찍허게 잘라네야‥‥‥‥”
듣던 중 별소리라며 온 가족이 말렸지만 그네들도 고집을 누그릴 기색이 아니었다. 나는 그네들을 저만큼 큰길 앞까지 따라나가 안내했다. 여관이 정해진 것을 보고 돌아서는 내 귀를 불러 석공은 이렇게 속닥거렸다.
"자네 서운히 생각 마소. 우리는 연태까장 객지 나와 여관잠 한 번을 못 자봤거던‥‥‥ 실은 오늘 저 여편네 원 풀어 줄라구 영업집에서 잘라구 허는 게여 ‥‥‥”

서울 시간이 촌 같지 않아 차시간에 몰려 다시 못 들르고 내려갔다는 석공의 편지를 받았던 것은 그 나흘 뒤였던가 한다. 특별한 손님을 평범하게 대접하여 길래 서운하던 나에게는, 그 동안 별탈이 없었다 하매 우선 한시름이 놓이고 무엇보다도 큰 부조로만 여겨졌다. 그 무렵의 내 신변이나 심중으로는 그보다 다행한 일이 없던 때였다. 그러고 겨우 달포나 보냈는지 모르겠다, 정희 엄마가 갑자기 나타났던 것은‥‥‥ 그녀는 들이단짝 대청마루 장귀틀에 허리 한 도막을 걸치고 엎드리며, 북받쳐 오른 설움을 한꺼번에 쏟아놓듯 울음 속에서 외쳤다.
"나 저이를 영영 잃는개벼‥‥‥ 사람 되기는 다 틀린 것 같다닝께‥‥‥‥”
나는 영문을 몰랐음에도 대번 짚이는 것이 있었고,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설 힘조차 없었다.
"어째야 좋우, 어째야 좋아‥‥‥ 나는 몰러, 나는 몰러‥‥‥가련허구 불쌍한 저이‥‥‥‥”

그녀는 사설 떨어댈 기력마저 없는지 잠시 후에는 정신을 가다듬어 옷매무시도 매만질 만큼 침착할 수 있었는데, 이미 한 고비를 시골에서 넘기고 왔기에 그럴 수 있었던가 보았다. 아침 먹고 일어서다 까무라쳐 쓰러지고 종내 의식이 돌아오지 않기에 그참 덮어놓고 택시를 대절하여 치달아왔다는 거였다.

나는 앞질러 입원실로 뛰어가 보았다. 위급 중환자실에 사지를 뻗고 누운 석공은 인공 호흡기를 물고 있었다. 의사들도 서로 몸을 부딪쳐가면서 이리 집고 저리 재며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석공을 함께 싣고 왔었다는 석공 아우는 입원비 마련이 더 다급하여 타고 온 택시를 되돌아 몰고 내려가, 병실은 순전 병원 사람들로만 메워져 있는 셈이었다. 석공은 의식 회복이 불가능할 것 같았고, 마지못해 억지로 산소 호흡을 하는 모양이었다.

반달이 창문으로 넘어 들어오고 자정 사이렌이 울린 뒤에야 병명이 밝혀졌다는 간호원의 귀띔이 왔다. 나는 정희 엄마 대리 자격으로 의사에게 불려갔다.
"환자하곤 어떻게 되지? 가족인가?"

촌에서 온 사람에겐 말투가 그래야 위신이 서는 줄 아는지 젊은 의사는 내게 반말로 물었다. 어디서 더러 본 듯한 이름이 흰 가운 위에 매달려 있었다. 『사상계』니 『새벽』이니 하는 잡지에 가끔 수필을 쓰던 이름이었다.
"친척 언니입니다."
나는 무슨 취조 받으러 온 혐의자처럼 주눅 든 음성으로 대답했다.
"어려워."
의사가 썩은 나뭇가지 부러뜨리듯 잘라말했을 때 나는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백혈병이라는 것은 말야‥‥‥‥”
의사는 혼자 지껄였고, 들리고 보이는 게 없던 나는 임자 잃은 말뚝마냥 서 있기만 했다. 아니 한 가닥 의식이 있긴 했다. 매몰스럽고 얄밉게 지껄이는 의사의 턱주가리를 주먹으로 쳐돌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아야 했으니까.
"아직 특효약이 없는 병이라서 말야‥‥‥‥”
녀석은 흰 목 젖혀가며 자신 있게 말하고 있었다. 저런 개자식의 수필을 다 읽다니.

나는 속이 캄캄해 헛둥헛둥 오리걸음을 걸어 병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정희 엄마는 성화같이 병명을 다잡아 물었지만 바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애타는 심정에 견뎌낼 수도 없었다.
"백혈병이랍디다."
나는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백혈병‥‥‥ 그게 워떤 병이래유?"
"내가 워치기 안다구 물어요?"
할말이 없어 나는 핀잔하듯 반문함으로써 그녀의 질문을 막아 버렸고,
"자세한 건 낼 아침에 들으세요. 저 작자는 의사 데모도고 시로도라서 믿을 수 없으니까는‥‥‥‥”

자정이 넘자 교대로 불침번을 서기로 하고 정희 엄마부터 자도록 했다. 추석을 마중가는 길이라서 반달은 물색없이 밝기만 했다. 마치 석공이 장가들던 날 밤, 온 하늘에 가득하던 그 예전 달같이‥‥‥ 아, 별들은 또 어찌 그리도 고대 숨넘어가듯 가물거려댔던 걸까. 별빛은 보면 볼수록 불안스럽기만 했다. 정말 요망스러운 망상이니라 하면서도 자꾸 불안해지던 가슴, 그 중의 어느 별이라도 깜뭇 꺼져버린다면 석공의 숨소리 또한 그와 동시에 멎어버릴지도 모른다 싶던 그 두려움, 그 이겨낼 수 없던 시시각각의 공포와 초조로움. 어느 병실의 잠 못 이루는 환자가 그리 바치는지 라디오의 노랫소리가 마지막 비명처럼 날카롭게 들려오고 있었다. 찾아가 라디오를 빼앗아 박살을 냈으면 살 것 같은 심정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환자들의 신음소리도 잦아들고, 창 너머 신촌역의 시그널 불빛만이 허공의 등대처럼 밑동 없이 떠 있었다.

밤은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석공에 관한 자잘한 기억들이 쉴새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그린 수채화처럼 짙은 원색으로 떠오르곤 하였다. 라디오 소리가 다하여 정말 적막한 시간에 이르자, 이렇듯 대지가 모두 잠들어 휴식하되 하늘만이 살아 있는 밤의 신비로움에 대해서 몹시 감상적(感傷的)인 잡념에 접어들었고, 그러자 이 밤에도 이 대지 위엔 얼마나 많은 괴롭고 슬픈 일들이 남모르게 벌어지고 있는가가 생각되고, 사람 한평생의 무거리가 말짱 덧없고 부질없는 헛된 놀이판의 작은 자취에 불과하다는, 처음으로 깊고 어두운 허무 속에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정적이 음울하고 건습한 공기로 변해 병실 가득히 감돌고 있음이 느껴졌을 때, 나는 몹시 소스라침과 동시에 온몸이 공포감에 싸여 떨리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것, 무슨 그런 것이 있던 것이다. 딱, 둠벅, 딱, 둠벅‥‥‥ 들려오는 음향은 매우 규칙적이면서 무거운 음량이었다. 나는 아무 까닭 없이 처음부터 패악하고 흉측한 예감에 얽혀들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앗으러 오는 소리였다. 그렇다. 그것은 석공의 숨통을 가지러 오던 저승사자의 발자국 소리였다. 어쩌다가 생각 없이 그렇게 단정했던 것일까. 서슴거릴 것 없이 자신에 넘치는 음량을 그 기나긴 복도 가득히 거느리고 다가왔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진땀에 멱감듯 하며 나는 이를 악물면서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아마도 나는 그런 순간 무슨 비장한 각오를 했었음이 틀림없다. 나는 저승으로부터 찾아온 발자국을 만나보러 도어를 벌컥 열어버렸던 것이다. 아- 나는 입 밖으로 가녀린 동물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허옇던 발자국이 멈칫하는 듯 했던 것이다. 그것은 역시 다리가 넷이나 달린 괴물 형상이었다. 한쪽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아올리고, 두 겨드랑이로 목발을 짚은 노인이었다.
"화장실은 저쪽이오."
나는 조용하고 엄숙해진 음성으로 타이르듯이 말했다. 나는 문을 얼른 메어 닫았고, 그래도 혹시나 하며 석공 턱밑의 숨통을 살펴보았다. 모를 일이 있었다. 석공이 두 눈을 뜨고 있었다. 정신도 조금 돌아온 기색이었다. 내가 성급히 다가가자 그는 한동안이나 어리둥절해 하더니 겨우 무엇이 분별되는 눈치였다. 아무개가 웬일이냐, 예가 서울인가,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묻는 시늉이었다. 나는 대뜸 정희 엄마를 꼬집어 떼었다. 그녀는 석공의 눈망울을 보자 거의 울부짖음으로 반가워했다.
"정신 좀 드슈? 내가 누구여, 누구여 내가‥‥‥ 알어보겄느냐먼?"
그녀가 거듭 몰아세우자 석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띠기까지 했다. 그러고도 얼마가 지나서야
" 나는‥‥‥‥”
하고 혀끝을 움직여보는 거였다.
"나는 살으야 되여 ‥‥‥‥”
하고 석공이 첫마디를 떼었다. 그는 우선 자기 코에 장치된 산소 호흡기가 엄청난 기계 같고 놀라운 것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나는 살으야 헌당께‥‥‥‥”
발음이 한결 부드럽고 분명했다. 그런 뒤 다시 한참 만에 내 손을 더듬어 쥐더니 좀더 기운이 나는 듯 또렷하게 말했다.
"나는 이게 아마 영 가는 질일 거여. 도루 사람 노릇 허게 되기는 틀린 모양인디 ‥‥‥ 나 오래 살구 가네‥‥‥ 융니오(6.25) 때 죽을 뻔 보구 살었지‥‥‥ 9.28에 죽을라다 살었지‥‥‥ 감옥소서 다 죽다 살었지‥‥‥ 이래두 내 명 다 살구 가는 것일쎄‥‥‥‥”
"왜 그런 약한 말씀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석공이 다시 의식을 놓았기 때문이다.
"아이구 분해, 분해서 워칙허여. 근근이 살 만허니께 간다구 허네. 분해서 나는 못살어유."

정희 엄마는 털썩 주저앉아 넋두리를 엮으며 느껴 울었다. 석공은 쉽게 말해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열두 번은 깨어나고 스무 번도 더 혼수상태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 상태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내리 1주일이나 계속되었다. 곁에서 지켜보는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을 지경이게 아무런 차도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무슨 일을 당하려면 이렇대유. 이게 못된 징조지, 세상 졸리워 못살겄이유. 낮이나 밤이나 앉어두 졸리고 서 있어도 잠이 쏟어지구, 왜 이러는지 모르겄이유‥‥‥‥”

정희 엄마는 하루에도 두서너 차례나 그런 호소를 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야로 안절부절 서성대며 먹지도 쉬지도 못한 채 신경만 곤두세웠으니 그럴밖에 없을 일이었다. 낮에는 누나가 가사를 전폐하고 병실을 돌보았고, 밤이면 밤마다 내가 불침번을 섰다. 그것은 무척이나 고된 노릇이었지만 석공이 재생하는 데 도움만 된다면 무엇이 어찌 되든 못 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낮에는 온종일 서울 바닥을 쓸다시피 약국 뒤지기로 해를 저물리었다. 도매 산매, 약국이라고 생긴 곳은 빠뜨릴 수가 없었다. 제약 회사, 제약 공장을 찾아 안양, 시흥, 태릉, 의정부‥‥‥서울 근접의 공장까지도 알 수 있는 곳이면 멀다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약인지, 그 의사 녀석이 영어로 길쭉하게 끄적거려준 명함을 곱게 들고, 지정된 약을 찾아 하루 백 리씩은 걸어다녔던 것이다.

발바닥은 부르트고 물집이 잡히면 터지고 하여 아리고 쓰라려 보행조차 불편했지만, 시간을 다투는 약이어서 노상 뛰어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의사가 적어준 약은 그러나 아무데서도 구해볼 수가 없었다. 아직 국내에는 없으리라는 거였고, 주문은 했으나 아직 도착되지 않았다는 곳도 몇 군데 있었다. 설령 그 약이 얻어진다더라도 석공이 다시 일어날 사람이 아님을 모른 것도 아니었다.

그 약은 다만 환자의 고통을 약간 덜어주면서 겸하여 며칠분의 생명을 이어줄 수도 있을는지 모르나 한갓 진통제 효과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 내가 기대하고 찾아가서 내민 명함을 본 약사마다 한결같이 내뱉던 말이었다. 정희 엄마도 각오는 단단히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진땀에 후질러진 채 빈손으로 들어오는 나를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는 듯 예사로운 눈망울로 쳐다보던 것이다. 국내에는 그 약이 없다는 것, 있다 해도 신통한 것이 아니란 것을, 그리하여 모든 것을 단념하고 난 그런 눈치였다. 나는 석공의 병상을 지킬 적이면 하루 한 번꼴로 찾아오는 끔찍스런 생각에 몸서리를 치곤했다.

그것은 어쩌면 내 자신에 대한 혐오요 자괴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곁들여서 내 자신이 자꾸만 무슨 요물(妖物)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때때로 나는 자신이 가증스러웠으며 증오를 하기도 했다. 어쩐지 내가 징그러웠고 재수 없는 놈이란 생각이었다. 그것은 망령된 착각이라든가 환상 따위와 비스름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현실적인 관심을 근거하여 우러난 것이었음에도 정체는 드러나지 않던 것이다. 그것은 석공의 헐떡거리는 숨결을 보다가도 불쑥, 이미 잊혀진 지 오래인 10여 년 전의 어느 날 한때가 눈앞에 펼쳐지면서 곧 현실화하는 것이었다.

석공네 마당에 웅성대는 사람들, 명주 가로지를 찢는 듯한 비명 소리, 석공 몸뚱이에 벌집을 만든 총알 자국, 도끼 또는 쇠스랑에 찍혀 빠개져 버린 두개골, 작살과 죽창에 난탕질 당한 뱃구레와 앞가슴의 선혈‥‥‥ 그렇다, 그 돼지 잡을 때마다 자배기 안에서 솔고 엉겨붙던 검붉은 선지피 ‥‥‥ 나는 몸부림 쳐도 시원찮게 후회스러웠다. 어찌하여 10여 년 전에 벌써 그런 망상을 했던 것인지, 내 자신이 그토록 저주스러울 수가 없었다.

10여 년 전에 그런 망상을 했던 까닭으로 드디어 석공의 몸이 이렇게 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무엇으로 물리칠 수 있었을까. 목숨이 경각에 이른 석공의 참혹한 꼴을 지켜보게 됐음도 그 요망스런 망상에 대한 당연한 업보 같기만 했다. 석공이 누워 있는 침대 밑에는 널찍한 세숫대야가 받쳐지곤 그 대야 속에는 석공 몸에서 계속 호스로 뽑아낸, 죽어 검붉어진 피가 그들먹하게 담겨져 있었다. 그 반투명체의 호스는 마치 수백 년 묵은 거머리로 보이기도 하며, 코에서 죽은 피를 뽑아내고, 양옆구리와 두 허벅지를 뚫고 들어가서도 같은 짓을 계속하는 거였다. 죽은 피를 뽑아내기 위해 여기저기로 그어진 메스 자국마다에는 붉은 약물과 검은 피가 뒤엉긴 채 더뎅이져 있었다. 한쪽 팔뚝으로는 쉬지 않고 새로운 피가 수혈되고 있었지만, 죽어 나오는 분량에 비하면 너무도 빈약한 공급이었다. 그런데도 석공의 목숨은 기적적으로 붙어 있었다. 마지막 심지를 태우는 등잔불처럼 이제나저제나 하며 시간을 벌고 있던 것이다.

해가 뉘엿뉘엿하는 저녁나절, 드디어 의사의 마지막 선고가 내려졌다. 의사는 정희 엄마 어깨에 손을 얹으며 점잖고 냉엄한 어조로 말하던 것이다.
"아주머니, 퇴원하시죠. 얼마 안 남았습니다."
넋이 나가 장승처럼 서 있는 우리를 비슥 돌아보며 의사는 다시 중얼거렸다.
"이왕이면 집에 가서 종신을 해야 될 거 아닙니까."

나는 정희 엄마를 돌아보았다. 숫제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내게 눈으로 말했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의견에 따랐다. 우체국으로 뛰어가서 전보를 쳤다. '퇴원 준비 초급 상경 요망' 그날 밤 석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신의 혼명이 잦았지만 한번 맑아지면 멀쩡한 사람보다 훨씬 더 분명했다.
"나는 살구 싶은디, 살구 싶은디 그여 데려가네‥‥‥ 늙으신 부모를 두구 먼저 가다니, 어린 새끼들은 워칙허라구 나를 데려가까‥‥‥‥”
그러다가도 그는 사지를 버둥거리고 눈을 뒤집으며 발악하듯 울부짖는 거였다.
"안되여, 나는 살으야 되여, 나는 살구 싶어, 내가 죽으면 안 되여‥‥‥‥”
말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하면 숨돌릴 겨를도 없었다.
"여게, 줘매, 얼릉 대천 가서 논 팔어와‥‥‥ 밭두 팔구 집두 팔구‥‥‥ 싸게 가서 돈 맹글어 오란 말여‥‥‥ 나버텀 살구 봐야겄어‥‥‥ 이대루는 억울해서 죽을 수 웂당께‥‥‥‥”

그는 내 손을 더듬어 잡고 애원하듯 말했다.
"자네 나를 이러긴가, 나 좀 살려주게, 더 살구싶어‥‥‥‥”
하며 안면에 경련을 일으키고, 내 손목에 진저리를 치듯 손가락이 바르르 떨리곤 했다. 그는 살고 싶다고 거듭거듭 되풀이하며 다짐 했지만, 그러다가도 한번 눈을 흡뜨기 시작하면 거의 광란이나 다름없이 시트를 움켜쥐며 처절하게 외치는 것이었다.

"놔둬라, 놔둬. 여게, 이늠으 여편네, 집에 가지 마. 절대루 가면 안 되여‥‥‥ 내 한 몸 살자구 논 팔구 밭 팔면 새끼들은 뭣 먹구사네, 새끼들 멕이구‥‥‥ 그것들 가르치야지‥‥‥팔지 마, 팔먼 안 되여‥‥‥ 차라리 내가 이냥 죽을텨. 나 하나 죽구 여러 목숨 살으야지‥‥‥‥”
내 소맷자락을 뜯어먹을 듯이 거머쥐며 그는 울부짖었다.
"정히‥‥‥ 훗년이면 그년두 중학 들어갈 텐디, 자네 후제라두 우리 정희 잊지 마소. 부디 그년 좀 배우게 해주야여. 자네 장가가 살림나먼 자네 집에 데리다가 식모루 쓰소. 식모 시키면서 야간 핵교라두 보내주야 허여‥‥‥ 자네가 책임지구 고등과까지만 가리쳐주어‥‥‥ 애븨 웂이 큰 새끼들, 글이나 넘들 반만침이라두 배우야지‥‥‥‥”

그는 그것으로써 유언을 한 셈이었다. 나에게 남긴 유언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 뒤로도, 날이 허옇게 샐 때까지 혼명을 거듭하며 상반된 말을 수도 없이 되풀이했던 것이지만, 대개가 자기 바른 정신으로 한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밤을 지새우며 그는 내내 같은 말을 뒤섞어 울부짖었다. 살아야 한다, 아니 죽어야 한다, 내가 살면 여러 식구를 죽인다, 아니 내가 살아야 여러 식구 먹여 살린다, 논밭 죄 팔아서라도 나를 고쳐다오, 그러지 말라, 더 이상 빚지지 말고 나를 버려다오, 헌데 꼭 1년만 더 살고 싶다, 아니다, 지금 죽어야 자식들이 중학교라도 다닐 수 있다, 나는 포기했으니 마지막 소원을 들어 제발 물이나 한 모금 마시게 해다오‥‥‥ 새벽 4시 반까지 그의 아우성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5시가 가까워지자 완전히 탈진하고 눈뜬 송장이나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상태였다. 뒤미처 뛰어든 자기 아우와 매부 된다는 청년이 벽을 치며 흐느끼고, 아내가 시멘트바닥에 머리를 짓찧으며 통곡하건만, 그는 아무런 표정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네들을 대신하여 퇴원 수속도 하고 떠나보낼 채비를 챙겨주는 동안, 그렇다, 눈시울 한번 적셔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나는 역시 독종이었고 냉정하고 잔혹한 성격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퇴원 수속이며 입원비, 치료비 등을 대리로 계산해주는 데에도 단돈 십 원 한 장 틀림이 없을 정도로 침착할 수 있었으며, 나중 막가는 길로 떠나는 판에 이르러 석공에게 하게 될 마지막 인사말까지도 미리 머릿속에 준비를 해두고 있은 정도였다.
"다시 뵈울 수 있도록 행운이 있으시길 빕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이번만은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하리차고 작정하고 있었다.

내가 이리저리 분별하여 떠나보낼 채비를 두루 챙겨놓았을 때는 이화대학 뒤 산등성이 마루로 붉은 햇덩이가 떠오르고 있었다. 석공은 들것에 실린 채 엘리베이터로 해서 병원 뒤켠 광장까지 운반되었다. 택시 안에 끼어앉을 틈이라도 있으면 동행하여 따라가 보겠지만 그럴 구석도 없고, 나는 이제 택시 옆에 우두커니 서 있을밖에 없었다. 이젠 거들어주고 돌보아줄 일도 모두가 끝나버린 거였다. 차에 시동이 걸리니 아우와 매부 품에 안긴 채 동자 없는 눈을 했던 석공이, 택시 유리문 너머로 내가 어릿거리자 뜻밖에 턱으로 나를 부르는 시늉을 했다. 나는 다시 택시 문을 열었다. 이젠 준비해두었던 말로 고별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로 영결(永訣)해야 될 차례였다. 내가 고개를 차 안으로 디밀며 입을 열려 하자, 석공이 먼저 꺼져가는 음성으로,
"잘들 사는 걸 보구 죽으야 옳을 텐디, 이대루 죽어서 미안하네‥‥‥ 부디 잘들 살어 ‥‥‥‥”
하며 움직여지지 않는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나는 울었다.

(『문학과지성』, 1973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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