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객담이지만, 지난 9월 초순 어느 날이던가, 나는 어느 신문사 문화부의 전화를 받고 한참 동안이나 말다툼 비스름한 실랑이를 벌인 적이 있었으니, 까닭은 전화를 걸어온 그쪽 용건이 도무지 신통치 않은 데에 있었다.
그쪽의 용건은 그 무렵 가타부타 말썽이 들리던 영화 「대부」의 상영을 놓고, 찬성론자와 반대론자를 각각 한사람씩 골라 그 주장하는 바를 신문에 내놓고 견주어보기로 한바, 나는 그 영화를 상영해도 무방하다는 찬성론자가되어, 어서 영화를 보고 찬성하는 몇 마디를 간단하게 써달라는 거였다.
나하고도 안면이 두터운 편이던 그 담당 기자는, 여간 끈덕지지 않고 지멸이 있기로 정평이 나 있었으므로, 그 전화도 이쪽에서 두 손 들고 져주지 않으면 끝낼 수가 없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활동사진이라면 끼니를 잊고 쫓아다닐 지경으로 즐긴 편이었고, 영화라면 으레 외화를 치되 특히 서부 활극이라면 무턱대고 장땡인 줄로 알았었다. 요즘도 마카로니 웨스턴은 물론 황당무계한 외팔이 시리즈 끝물인 무협영화나 007 부류의 만화 같은 첩보극까지, 대량으로 죽이며 치고 받는 것이라면 놓치기 전에 애써 찾아가며 본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런 재미로 「대부」의 상영 찬성론을 쓰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영화 내용이나 됨됨이와는 아무 상관없이 순전 그 기자의 요청을 마다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리고 어쭙잖게도 그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무슨 상이라는 것이 우습게 얻어걸린 뒤부터는, 그 신문사에서 요청한 일은 거절하기가 어려웠음이 솔직한 고백이다.
나는 영화 구경을 무엇하는 만큼이나 즐기는 것이 사실이지만, 무슨 관람기나 영화 수상 따위를 글로 써본 일이 없음을 내세우며 다다 안 쓰고도 배길 수 있도록 버티었으나, 찬반양론을 모두 작가에게 씌우기로 결정했다면서 그 기자 또한 무가내였다. 그렇다면 더욱 그렇다고 나는 말했다.
이 나라에 천을 헤아리는 글쟁이 가운데 소설꾼만 해도 2백여명이 웃도는데 하필이면 나를 지목하는가. 인기와 네임 밸류라는 것이 전무한 무명초인 줄 알면서 평소 안면이 있다고 만만히 보았는가. 아니, 나를 이름난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갸륵한 정실로 그러는 줄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경우 오히려 나에게는 백해무익한 노릇이다.
" 그런데요, 그렇지만요‥‥‥‥ “
하고 기자는 말끝을 낚아채며 덮어씌우려 들었다.
" 찬성론자로 내세울 만한 작가로는 누가 적당할까 하는 의견이 부내(部內)에서도 분분했었어요. 평소 성질이 거칠고 냉정하다든가, 그리고 또‥‥‥ 냉혹하고 잔인한 일에도 놀라지 않고, 그리고 또‥‥‥ 그런 난폭한 일도 경험했을 듯하고, 그리고 또‥‥‥‥ 아무튼 이하 동문이니까 생략하죠. 하여간 그런 사람이어야 한대요. 히힛‥‥‥‥ .“
‘그리고, 또‥‥‥‥’를 거듭한 것은 그나마 점잖은 말로 가려서 하느라고 더듬거린 대목이었다.
" 그래서? 그런 사람이 바로 나라 이거요?"
내가 기막혀하다가 얼결에 언성을 높이자, 기자도 엉겁결에 민망스런 느낌이었는지 주변머리 없게도,
" 그렇지만 만장일치로 지명됐는걸요, 히힛‥‥‥‥" 했다.
" 이 거국적인 인격자를? 눈물 닦기 성가시려 국산 영화 안 본 지가 10년이 넘는 나를? 허헛‥‥‥‥ “
" 역시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즐거우신 모양이죠? 히히‥‥‥‥ "
" 이게 바로 웃음성 어쩔 수 없음증이라는 거요. 나 원‥‥‥‥ "
내가 해야 할 말을 몰라 우물쭈물한 사이에 기자는,
" 낼 오전중으로 곡 써주셔야 돼요. 원고지 다섯 장 정도로요."
하고는 전화를 거두었다.
" 허헛‥‥‥ 나 원 참‥‥‥‥ "
웃음은 나왔으나 우습지도 않은 일이었고, 한편으로는 허전하고 떫어서 심신이 개운하지 않았다. 악의 없고 순직한 기자의 농담으로만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석연치 않았으므로 나는 의자에 깊숙이 웅크리고 앉아서 나 자신을 반성해보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 무슨 짓을 어찌했길래 오늘날에 이르러 그런 소리를 듣게 됐는가.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깨칠 수가 없었다. 이렇다 할 어떤 큰 실수를 저질렀던가 하면 그런 그것도 아니었다. 만약 가까운 친구들이나 선배들도 그렇게 보았다면 어찌 될일인가. 그것은 상상을 해보기도 전에 소름부터 끼쳐지는 일이었다.
그것은 뒤집어서 생각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덤덤하되 서로 결례를 삼가고 체면과 위신을 지켜온 터의 사람들이, 난폭한 성질이므로 냉혹한 구경거리를 즐겨하리라고 어림하게 된 까닭은 무엇이며, 그런 인식에서 빚어질 결과는 얼마나 가증스러울 것인가.
실망과 낙담 그리고 열패감으로 오갈들기에 더없이 알맞은 말이었다. 어떤가 하고 새삼스럽게 거울을 들여다보기도 했지만, 미련하고 굼뜨게 생긴 텁텁한 상판일 뿐 그다지 추악해 보일 꼴도 아닐 듯했다. 일상의 말투가 거칠기는 하지만 그것은 스스럼없고 흉허물이 되지 않을 상대,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보다는 친근하고 정이 가며, 또한 뜻이 엇비슷하게 걸맞을 사람으로만 가려서 거의 우스개로 해본 거였다.
나는 또 나의 기호와 취미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걸고 수더분한 맛에 취해 채만식, 김유정, 김동리의 소설 읽기와 정지용의 시 암송하기, 문주란의 노래를 즐겨 듣는 것, 한 때는 포커판에 빠져 정신이 없은 적도 있으나, 역시 천성으로 승부욕이 없어 으레껀 가진 것 다 털리고 초장에 물러나버려 밤샘한 적이 없었음, 빌려준 돈 돌려달라는 말 한마디 하기가 돈 꾸어달라는 말 두서너 번 하기보다 더 어려워 빌려간 쪽에서 갚아주기도 전에 잊어버리고 말던 잔졸치 않았음, 제 몫도 못 찾아먹어온 게으름에 의한 물욕의 결여-간추려 한마디로 아무리자면 무력 무능함에 다름아니련만, 그런대로 가로왈 세로왈 늘어놓기로 하면 끝이 없을 것 같다.
아무리 무리한 형편이었더라도 남의 부탁을 건성으로 시늉만 내보이다 마는 적이 없고, 사생활이 유린당하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남의 일이나 공식적인 일에 발뺌할 줄 모른 소심함이며, 도리 염치 위신 체면 경위 따위 의로움만이 으뜸인 줄 알려고 한 촌스러움- 하지만 그런 상식적이고도 평범한 인간임을 밑천삼아 내리 발명만 해댈 수 없는 줄도 안다.
나는 도리어 덤덤한 속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되겠어서 내 나름으로 체질을 개선하기에 부단히 노력해왔음도 아울러 밝히고 싶다.우유부단한 성격을 뜯어고치고자 이해득실을 암산해보기 전에 육감과 즉흥적인 판단에 따라 일관성 있게 언동했고 천성이 늠름치 못해 외강내유의 졸망스러운 배포뿐이었으되 인품과 덕량이 있는, 어질고 슬기로운 선비를 닮고 싶어 늘 신경이 무디지 않도록 관리해왔음도 사실이었다.
어지간히 반성을 하고 보니 나는 결코 남들의 근거 없는 짐작처럼 냉혹 잔인 난폭한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했고, 그런 짓을 두둔하거나 감싸준 적도 없음이 뚜렷했다. 그러나 대인 관계만은 다소 별쭝스러웠으니, 냇자갈처럼 야무지고 매끄러운 알로 깐 자와, 말 많고 잔주접 잘 떠는 되다 만 인간, 단작스럽고 근천맞은 좀팽이 따위에게 박절하게 대해온 사실은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
는 일이다.
이해하기 거북할는지 모르나 나는 어쩐지 나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사뭇 불안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내가 좋아한 사람은 아무 이해관계 없이 자기 성격에 의해 나를 좋아하던 사람임에 두말할 필요가 없다.
더러 예외가 없을 수 없겠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아무 타산 없이 자기 천성으로 나를 좋아한 사람을 좋아한다. 애초 이렇다 할 인연도 없었고, 재산 권세 이해득실 따위를 개떡으로 알면서 그냥 그저 그렇게 명목 없이 좋아할 수 있던 사람.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런 사람을 많이 알고 있다.
멀리는 여러 백리를 상거하여 한 해에 고작 한두 번 만나볼 수 있던, 천리상봉 만리별(千里相逢萬里別)의 선배들을 비롯하여 하루가 멀다 하고 상종해온 서울의 그 사람들-, 구체적인 예를 들어도 무방하다면 대전의 두 시인,
박용래씨와 임강빈씨를 들먹일 수도 있다.
어엿한 인연이랄 것이 없는 두 시인이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과실에 빗대어 일컫기를 마치 홍시감과 같다고 하면 어떨는지 모르겠다. 홍시는 겉과 속이
한 가지 색깔이며 어루만지기 더없이 부드러운 피부를 가졌으되, 외부의 강압적인 폭력만 작용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물러터지거나 깨어짐이 없음에서이다.
그러께, 눈발이 희뜩거리던 겨울 어느 날 이른 아침, 갑자기 내가 보고 싶어져 무턱대고 새벽 첫차로 상경했노라며, 내가 출근하기 전부터 내 근무처 건물의 지하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박용래씨만 해도, 그가 정과 한에 어혈이 든 눈물의 시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실로 그날 아침의 일이었다.
아침 9시부터 백제 유민 박씨와 나는 난로가 후끈한 중국집 식탁에 늘어붙어 창밖에 쏟아지는 함박눈을 내다보며 고량주를 마셨다. 하늘의 선심 같은 푸짐한 눈발 때문이었겠지만, 씨는 불쑥 밑동 없는 말을 내놓았다.
" 왜정 때, 내가 조선은행(한국은행)에 댕길 적에 말여 ‥‥‥‥ “
씨는 전재민같이 야윈 손가락으로 고량주 잔을 삼키고 나서 말했다.
" 조선은행권 현찰을 곳간차에 가득 싣고 경원선을 달리는디, 블라디보스톡까지 논스톱으루 달리는디 말여 ‥‥‥‥ “
" 경비원으루 묻어갔었다- 그 말이라‥‥‥‥“
" 야, 너 웨 그러네? 웨 그려? 이래봬두 무장 경호원이 본인을 경호하던 시절이 있어야. 현찰 운송 책임을 내가 자원해서 했던 거여. 너 참 이상해졌다야. 웨 그려? 오- 그 눈‥‥‥ 그 눈송이‥‥‥ 그 두만강‥‥‥‥“
“‥‥‥‥ ”
" 이까짓 눈두 눈인 중 아네? 눈인 중 알어? 너두 한심허구나야‥‥‥ 원산역을 지날 때 눈발이 비치더니, 청진을 지나니께 정신웂이 쏟어지는디, 아- 그런 눈은 처음이었었어‥‥‥ 아- 그 눈‥‥‥ 그 눈‥‥‥‥ “
그는 이미 떨리는 응성이었고 두 눈시울에는 벌써 삼수갑산 저문 산자락에 붐비던 눈송이가 녹으며 모여 토담 부엌 두멍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 차가 두만강 철교를 근너가는디‥‥‥ 오! 두만강- 오, 두만강! 내 눈에는 무엇이 보였겄네?눈 ! 그저 그 눈! 쌓인 눈, 쌓이는 눈‥‥‥ 아무것두 안 보이구 눈 천지더라. 그 눈을 쳐다보는 내 마음은 워땠겄네? 이 내 심정이 워땠겄어?"
" 워땠는지 내가 봤으야 알지유."
" 그러냐, 야, 너두 되게 한심허구나야. 그래가지구 무슨 문학을 헌다구. 나는‥‥‥ 나는 울었다. 그냥 울었다. 두만강 눈송이를 바라보며 한없이 한없이 그냥 울었단 말여 ‥‥‥‥ “
어느덧 그의 양어깨에 두만강 물너울이 실리면서 두 볼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식민지 시대의 두만강이 흐르고 있었다.
" 오, 두만강‥‥‥ 오, 두만강 눈‥‥‥ 오‥‥‥ 오‥‥‥‥ “
그는 아침 9시 반부터 두만강을 부르며 울기 시작하여, 그날 밤 9 시 반이 넘어 여관방에 쓰러져 꿈결에 두만강 뱃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기까지 쉬지 않고 울었다.
박씨와 가장 자별한 사이면서도 판이 다른 임강빈씨를 처음 만난 것도 같은 해 겨울이었다. 해장에 막걸리 다섯 되를 거뜬히 해치우고도 천연스럽게 출근하는, 과묵하고 무표정하면서도 속으로 모닥불을 태우는 임씨 또한 백제 유민임에 분명했다.
씨를 처음 만났던 날, 무슨 일로인가 여럿이서 술판을 벌였으되, 글까지 흔쾌하게 대작하며 도갓집 바닥을 낸 것은 임씨와 나뿐이었다. 무슨 당내간의 아저씨뻘이라도 되는 사람처럼 나를 곱게 보아주던 씨는, 어느덧 자정이 다가오자 취해서 정신이 없는 내 귀에 대고 뜻밖의 밀어를 속삭이는 거였다.
" 야, 너 혼자 자구 싶지 않지?"
" 혼자 자야 편치유."
" 사내는 솔직허야 쓰는 겨."
" 싈- 여자는 필요욻당께유."
" 그러냐. 야 미안스런 말이지만 말여, 니가 필요허다구 해두 소용웂다. 왜 그런고 허니 말여, 오늘 말여 집에 기고가 기셔. 집이 가서 지사 모실 묌인디 그런 짓을 시키겄네? 상것들두 아니구 말여 ‥‥‥‥ “
가기(家忌)가 있으므로 아무리 남남이라고 해도 깨끗지 못한 짓을 주선해준다거나 알면서도 모른 척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그는 유생(儒生)이었다.
난파삼동(暖波三冬)이었던 금년 연초, 나는 두 분을 모시고 대전 역전 어느 4층 호텔 한 방에서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신 일이 있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쓰러져 잤는데, 창가에 찾아온 빗소리에 깬, 박시인의 고시랑거리는 소리에 일어난, 임시인의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내가 눈을 떴을 때, 부실거리는 빗방울에 유리창에는 조춘(早春)이 숨쉬고 있었고, 그 너머 하늘은 경칩 달무리 비낀
미나리꽝마냥 깊고 묽었다. 박시인이 먼저 한말 시골 나그네 핫바지 같은 내복 차림으로 창문을 척 열어붙이더니 금방 울음이 터질듯한 음성으로,
" 정월 초닷새 대전 추녀 밑에 비가 내리다‥‥‥ 역전 골목을 돌아가는 리어카의 파빛‥‥‥‥ “
하고 중얼거린다,
" 뭣 보구 또 시 한 수 짓는디야."
하며 임시인이 뒤를 이어 내다보고는,
" 저게 무슨 파여, 미나리구먼. 미나리빛으로 고쳐."
했다. 나도 덩달아 벗은 몸으로 내다보았다. 빗속의 리어카꾼이 무와 시금치를 가득 싣고 곱은탱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과 기질이 상통할 뿐 아니라 여러모로 닮은 서울 시인으로는, 나무 때어 눌린 무쇠솥 숭늉 같은 박재삼씨가 있다. 누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 한잔 헐까요?"
하고 물으면, 고은씨나 이호철씨 못잖은 반가운 미소를 보이며,
" 안 헐 수 있습니까."
하고 입술부터 핥는 이 낮술의 대가(大家)는, 설령 박성룡씨가 없는 자리더라도 반드시 한가락 뽑아야 배긴다.
"3 류 시인 난해시보다 열 배는 좋다 말이라‥‥‥‥“
그는 노래를 부르기 전에 으레 가사부터 한바탕 읊는 것을 바른 순서로 친다.
사공아 뱃사공아 울진 사람아
인사는 없다만 말 물어보자
울릉도 동백꽃이 피어 있더냐
정든 내 울타리에 새가 울더냐
어쩌다가 이야기가 이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이왕 꺼낸 말이매 매듭을 짓기로 한다. 다시 영화 관람기로 돌아가거니와, 「대부」는 1시간 어치 이상이나 가위질당한 채 상영되고 있음에도 잔인하고 냉혹스러운 스크린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만한 살육과 유혈이 흐른 영화가 진작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다른 어느 영화보다도 현장감이랄까 실감을 가슴에 짙게 그어주는 화면이었다. 유치한 대로 나는 대략 이렇게 써다주었다.
사회 구성원의 절대 다수로서, 역사를 이끌어가야 할 이 땅의 주역은 당연히 서민 대중이다. 그러나 오늘의 대중들은 자기의 위치를 앗긴 채 변두리로 밀려나가 구경꾼 노릇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 구경마저도 목숨의 보전 및 본능의 연장전(延長戰)이라는, 절등(切等)의 뜻을 품고 있을 정도로 외롭다. 이런 사람들이 제각기 가슴에 얹고 있는 체증을 잠시라도 내려줄 수 있는 오락이 있다면, 곧 이 비슷한 영화가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좋은 멜로디에는 가사가 거추장스럽고 무더운 여름날 목마를 때에는 위생 처리로 끓여 식힌 물 한 바가지보다 우물에서 갓 길어낸 찬물 한 모금이 더 시원하다. 그러므로 어차피 오락용일 바에는 나무라기만 할 것도 아닐 줄 안다.
이튿날 그 기자가 전화를 해왔다. 원고료를 어떻게 전해주는 것이 서로 편리하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오너라가너라 하기도 번거로울 터이므로 잠시 보관해두라고 말했다. 일이 있어 그 근처에 갈 계제가 되면 들를 셈도 없지 않았으나 실은 길게 대꾸하기가 성가시어 둘러댄 말이었으니, 그것은 한창 보다가 중동무이한 신문을 어서 마저 읽었으면 해서였다.
읽다가 접어왔던 기사는, 김모라는 16세 된 소년이, 서울과 성남시 사이에 있는 어느 길목에서 과도로 택시 운전사를 살해하고 피 묻은 돈 1천 8백 원을 빼앗아 달아나다가 붙잡혔다는 내용이었다. 형제 친척 고향 등을 모르며 일곱 살에 외톨이가 되어 10여 년을 서울의 처마 밑에서 되는 대로 하루하루를 살아왔다는 그 소년은, 서울 인심이 너무 박정하여 살아갈 수가 없어 시골로 가려고 했으며, 시골로 가기 전에 먹고 싶던 것이나 한번 먹어보고 가려고, 그 돈 마련을 위해 그런 짓을 했다는 거였다.
소년은 이어서 그토록 먹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쌀밥과 콜라와
포도였다고 대답한 모양이었다. 나는 가슴 어디쯤이 크게 응어리지면서 무거운 덩어리가 자리 잡는 느낌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오죽이나 주려 허기졌기에 한
그릇 쌀밥이 그토록 소원이었을까.
나는 느닷없이 어렸을 적, 대문 앞에 서서 바가지에 얻어가던 어린 거지와 추녀 밑에서 먹고 가던 늙은 비렁뱅이가 어릿거릴 적마다, 아무 말 없이 밥을 차려 내다주게 하던 어머니 얼굴이 불현듯 떠오르고, 그것이 무슨 적선이나 보시가 아닌데도, 반드시 소반에 받쳐서 내다주도록 신칙하던 그 음성이 다시금 귓결에 맴돌고 있음을 들었다.
일찍이 금년처럼 사람을 볶고 찐 여름도 없었을 줄 안다. 여름 내 갖은 청량음료를 냉장고에 가득 쟁여두고 냉수 마시듯 한 사람도 숱하련만 여북 목이 타는 조갈에 시달렸으면 그 흔해빠진 콜라 한 병 마셔보기를 그다지 소원했었을까. 이가 시린 냉장음료를 수 없이 들이켜고도 더워더워 하며 여름을 원수삼았던 내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나는 다시 거리 골목마다 가게 앞에 열두 가지 색깔을 자랑하며 땟물 좋게 무르익어 더미더미 쌓여 지천으로 흔한 햇과일들이 볼수록 먹음직스럽던 입맛을 새삼스럽게 되새겼다. 한 덩이 한 덩이가 저마다 봄 여름 가을이 영글어 요염한 자태로 구미를 희롱하던 것들, 미루어보건대 소년은 아마 그것들의 유혹을 뿌리치기에 몸서리를 텄으리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늦어 있었다. 각박하고 삭막한 서울 인심에 넌더리나고 지친 표정이었다고 그 기사는 결론하고 있었다. 마치 농촌이나 두메 산골로 진작 내려갔더라면 순박한 소년이 되었을 텐데 애석하다는 투로- 그러나 그 소년이 그런 끔찍한 짓을 하기 전에 시골로 내려갔더라도 차디차고 야박한 인심에 뼈끝마다 저렸을 줄 안다. 이 나라 어디를 가본들 은근하고 수더분한 인심이 남아 있을 것인가, 이미 한 세대 전부터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이 아니더라며 탄식한 시인이 있지 않았던가.
사흘 후였다. 추석날 아침, 햅쌀밥과 고깃국을 먹던 나는 문득 유치장에 갇혀 있을 그 16세 소년 살인강도를 생각했다. 그러자 내 머릿속은 이내 쌀밥과 콜라병과 포도송이들이 가득 들어차는 거였다. 입맛이 가셔 목이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상을 물리고 나와 뜨락 사철나무 곁 잔디 위에 늘펀히 주저앉았다. 볕이 눈부시게 쏟아진 뜰에는 조카아이들이 비순이 비돌이라 부르며 기르는 비둘기 한 쌍이 흩뿌려진 모이를 주워가며 아장거리고, 비둘기와 친구처럼 지내는 어린 고양이는 비둘기 물그릇 곁에 두 발을 들고 앉아 세수하기에 다른 겨를이 없었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자 자연 쌀밥 한 그릇을 금싸라기 한 사발보다 더 귀중한 것으로 여겼던, 어린 시절의 한때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6 · 25사변이 일어났던 해 겨울의 그 지긋지긋하던 기억이 떠오른 거였다. 약 석 달 가량 내가 아직 어떤 집이라고 밝히기가 거시기한 집에서 피난살이를 하고 있던 때의 일이었다. 나는 밥을 얻어먹는 대가로 애 보아주기를 하면서, 남의 말로만 들었던 구박과 눈칫밥이 어떤 것인지를 처음 겪음하며 깨달을 수 있은 거였다.
그곳은 바람만 조금 일어도 모래가 날려 눈을 뜨지 못한 궁벽한 어촌이었고, 내가 얹혀살았던 집은 중선과 발동선이 한척씩 있어 먹을 만큼 살던 선주(船主)네 집이었다. 일찍이 자식들이 모두 서울 유학을 하고 내처 서울에 눌러앉아 살림을 하고 있던 터라,1.4 후퇴를 맞은 그해 겨울은 서울에서 피난 나온 그 집 자녀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일가 푸네기들이 그 집으로 몰려들어 밤낮으로 북새판이었다.
이집 저집의 사돈네 식구까지 곁들여져 스무명 가까운 낮선 사람들이 들벅거리기 시작하자 초동부터 그 집에 머물고 있던 나는 자연 초상집에 부고 전하러 온 신세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어 눈 밖에 나야 했고, 양식과 김장 절약이라는 월동 대책이 세워지게 된 이후로는 먹성만 셀 뿐 쓰잘머리 없는 군식구로 치부되어 누구의 눈에나 걸리적거리는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내 밥값을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깨우쳐 내 깜냥으로 감당할 만한 일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이보기가 된 것도 그 까닭이었다. 그 집에는 겨우 첫돌을 본 아망이 몹시 사나운 외손자가 있었는데, 그리 될래서 그랬는지 아무리 극성스럽게 울부짖다가도 내 손이 가기만 하면 언제 어쨌더냐는 듯이 순동이가 되곤 했다. 내 등은 지린내가 가실 날이 없고 마를 겨를도 없었다.
내복이 없어 홑것으로 겨울을 나면서도 그다지 추운 줄을 몰랐음은, 아이 고뿔 들릴까봐 방구석 횃대 밑에서만 지내고, 잠자리에 들기까지는 늘 처네포대기가 몸에 둘려 있어 외투 구실을 한 까닭이었을 터이다. 그 전전해까지만 해도 대복이와 대복 어메, 그리고 옹점이 등을 안장삼아 허구한 날 말타기를 즐긴 터에 견주어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이었으나, 모든 것이 시국 탓이려니 여겨 근근이 연명하며 구차스런 목숨이나마 놓치지 않으려
고 끈덕지게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비슷한 고비는 성장하면서도 여러 번 넘긴 터이지만, 아무리 몸서리쳐지는 질곡 속에서도 자해(自害)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근질기게 때를 기다려온 참을성도, 바로 그때를 바탕하여 쌓고 다진 의지라고 믿는다. 그때는 점심이란 음식은 이름도 없었고, 조석으로 입가심하던 것은 불그누룸한 밀기울밥 한 보시기가 고작이었다. 밀을 맷돌에 삭갈이하여 어레미로 가루를 쳐낸 밀기울은 쌀이 눋지 않도록 밥밑을 했던 것인데, 그것은 그러나 부엌아이 판순이와 나, 그리고 북데기라는 이름의 개를 먹이기 위해 부러 그렇게 하던 거였다.
판순이는 제가 직접 퍼서 부뚜막에 앉아 먹었으니 요령껏 섞어 쌀낱 구경도 더러 해보았을 터이나, 내 밥그릇의 기울가루는 주먹손으로 여러 번 주무르고 뭉쳐야 겨우 덩이가 질 정도로 풀기라고는 없었다. 그렇게 뭉쳐 아랫목에 이틀만 놓아 띄우면 훌륭한 누룩이 될 지경으로 밥풀 한 낱 섞이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허기진 판이라 개마저 꺼려하던 것이었지만 허발대신하며 먹었고, 그러고도 양에 안 가 노상 입맛이 얌하여 껄떡거리기가 일쑤였다.
이렇게 쓰다보니 불현듯 그 시절이 다시 눈앞에 펼쳐지면서 그 사람들이 새삼스럽게 섭섭해진다. 이름이 밥이라면서도 개하고 나에게만 누룩을 먹인 것이 야속해서가 아니라, 매일같이 밤이 이슥하게 이을 무렵이면 자기네들끼리만 밤참을 먹던 것이 되살아 난 것이다. 그네들이 밤참먹는 낌새를 맡기만 하면, 나도 덩달아 속이 헛헛하고 굴품해서 얼마나 많은 군침을 삼켰는지 모른다.
그것이 어쩌면 그리도 먹고 싶었던가.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이제는 슬며시 미소로 그치고 말지만, 그네들이 밤마다 먹던 밤참이라는 것이 무슨 별식이라도 될 만한 것이었으면 오히려 그러지도 않았을 터이었다. 군식구 몰래 즐기던 그네들의 밤참은 으레 장독대 밑에 묻어두었던 김장 동치미였다. 살얼음 간 독에서 동치미를 꺼내다가 쪼란히 둘러앉하 길쭉길쭉 쪼개어 먹던 것이다.
쌀밥과 콜라와 포도가 먹고 싶어 살인 강도를 저지른 소년을 나는 끝내 증오하지 않을 것 같다.내가 양지바른 뜨락에 앉아, 누룩 부스러기를 시래기국에 말아 먹어가며 쌀밥 한 그릇 구경하기가 소원이었던 시절에 다녀온 동
안, 모이를 양껏 먹은 비둘기 한 쌍은 고무나무 화분 곁에 놓아준 옹배기만한 금붕어 어항 전두리에 올라앉아 물을 마시며 구루루 구루루 울고, 화장을 끝낸 어린 고양이는 꼬마들이 던져준 풋대추 알을 두 발로 번갈아 차고 굴리며 저 혼자 축구놀이를 신명나서 즐기고 있었다.
내 마음은 다시 평온해져 있었고, 이만큼이라도 살아온 것이 얼마나 대견한 노릇인가 하는 오죽잖고도 소갈머리 없는 안일 속에 포근하게 싸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앞으로도 결코 순탄하고 단란할 팔자를 타고난 인간이 아니라는 평소 지녀온 바의 기본 자세를 되찾았고, 흐트러진 정신을 챙겨 가다듬으면서, 아울러 그 16 세 살인강도처럼 불우한 소년들에게 식사 한번 선사할 수 없었던 내 주변머리를 거짓됨이란 전혀 없는 순진한 내 마음으로 개탄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너무 푸실거려 젓가락으로는 떠지지 않고 개도 고개를 외오 빼며 죽은 쥐나 주워먹으러 나가던 밀기울밥에 물리어, 옳은 밥과 동치미 밤참이 그리워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과거를 돌이켜본 뒤 글이라 그랬을까. 나는 문득 무슨 수를 내서라도 오랜 세월을 두고 스스로 죄과를 뉘우치며 몸부림치게 될 소년 죄수에게 밥이라도 한 번쯤 배불리 먹여줬으면 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던 끝에 이윽고 나는 꾀를 자아내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아직 받지 않은 몇 푼 안 될 그 영화 상영 찬성 원고료를 소년수에게 전달하면 어떨까 하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그 신문사의 경찰 출입 기자에게 부탁하면 간단히 전달될 터이었다. 또는 담당 수사관에게 부탁해도 무방하리라고 여겨졌다. 내일 출근하는 대로 문화부 기자에게 전화로 그러도록 부탁할 작정을 하고서야 나는 다
소 느긋한 하품과 함께 낮잠에 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튿날은 전화 한번 걸어볼 틈도 없이 바빠 하루가 미루어지고 그 다음날도 어지저지하며 겨를 없이 다시 하루를 저물리는 바람에 실현되지 않았다. 아니 그 일은 서너 달이 넘은 오늘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그것은 중간에 그 계획이 부러져버린 까닭이었다. 추석을 지낸 지 이틀 만에 가진 술자리에서 그 계획은 제동이 걸린 거였다.
술을 마시다보면 안주가 보잘것없더라도 술맛은 따로 있는 경우가 있고, 기름진 안주로 상다리가 휘어지더라도 술이 안 받던 경우를 수없이 겪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경우와 딴판으로 오로지 고기를 먹기 위
해서 안주삼아 술을 마신 계제도 흔히 있었다. 그것은 한달에 한 번꼴인데 그나마도 전부 얻어먹은 것이었고, 늘 돈을 쓰는 사람은 작가 한남철씨였다. 씨는 나하고 무슨 은밀하게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도 아니었고 또 술을 마시고 싶어 그러던 것도 아니었다.
나로 하여금 먹을 만큼 먹었다는 공치사를 하도록 할 겸 자기 몸 보신을 위하여 그러는 눈치였다. 그는 매번 여러 사람이 내 근무처 사무실에 모여 벅적거릴 때도 유독 나 한 사람만을 불러내었는데, 내가 워낙 남의 살을 좋아하는 동물성 식성인 줄을 씨가 일찍이 알아보았고, 원체 걸게 먹어주니까 자기도 덩달아 식욕이 일어 더
불어 먹게 되는 잇속이 있어 그러리라고 풀이된다. 그러므로 씨의 전화만 받으면 우선 입 안에 군침부터 괴고 소문 안 나게 단둘이 호젓하고 오붓하게 마주앉아 참숯불 풍로에 암소갈비라는 것을 걸쳐 포식하기가 일쑤였다. 가진 돈이 푼푼치 않을 경우에는 근으로 사서 굽는 등심구이집이었으니, 피차가 먹는 일에는 아끼지 않아온 성질이었으므로 일방적으로 얻어먹기만 하더라도 그리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그날도 한씨는 나를 해운대갈비라는 집으로 불러내었고 단둘이 그것을 먹기 위해 소주 한 병을 가운데에 모시고 마주앉게 되었다. 그렇게 먹는 자리이고 보니 자연 먹는 이야기일 수밖에. 나는 다시 그 소년 강도를 감싸주면서 그 소년에게 몇 푼의 촌지를 전할 셈이라 말하고, 소년이 저지른 범행 자체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자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면서, 촌지라는 명목의 보잘 것 없는 동정이 대단히 타당한 것처럼 강조했다.
한씨는 그렇지 않다면서 내 말이 질겨지지 않도록 젓가락을 내둘러 말리고는," 그렇지만 말야, 죽은 사람을 생각해보라구. 죽은 사람은 뭐야. 천등 없는 날벼락이지. 이건 도대체가 말야‥‥‥‥“ 하고 그는 열을 내었다.
그 소년은 근본적으로 본성이 그르쳐져 있었다. 그 소년처럼 오로지 나 하나뿐이라는 사고 방식을 가진 자는 어느 시대나 많았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잔인하고 냉혹한 자들이다. 이 나라 사람 모두가 호의호식한 것도 아닌데 자기 혼자만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잘못이다. 입때껏 돌봐준 사람 없이 몇 해나 서울바닥에서 살아왔다면 보통 아이로 볼 수 있는가. 남들이 잘들 참고 견딜 때 곁가지로 나갔으니 용납되지 않는다.
운전사는 무슨 죄인가. 이틀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스페어 운전사일 수도 있고, 처자가 우무루루 딸린, 팔순노모를 부양하는 가장일 수도 있으며, 누가 눈만 흘겨도 억울한 착한사람일 경우도 있는데, 단지 먹고 싶은 것을 해결하기 위해 남의 귀중한 목숨을 제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일인가, 그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자에게 주는 동정이라면, 그 동정의 성분은 무엇인가.
나는 즉시 응수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본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도대체 말야, 불갈비에 술을 걸치고 앉아서 말야, 무슨 새우젓 같은 소릴 허구 있는 거야." 하고 한씨는 말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문득 그 불우 소년을 두둔함이 곧 잔인함이며, 결국 내 본성을 드러내는 일이 아닌가 의문스러웠고, 그렇다면 남들이 말하는 그러한 나의 결함이란 것도 대단한 것이 아니구나 싶은 안도감에 빠져들고 있었다. 진실로 본성이 착하고 어질며 갸륵한 인간은 드물다는 데에 이르러 그날의 화제는 매듭지어졌다.
그러는 동안 16세 소년범을 위해 장만해놓았던 조그마한 동정주머니는 어디론가 달아나버리고 시간이 흘러 이에 이르도록 되돌아오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어렴풋이나마 짐작되는 바도 없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회생되더라도 이웃과 남을 위해 몸을 버릴 수 있었던, 진실로 어질고 갸륵한 하나의 구원한 인간상이 내 정신 속에 굳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던 것이다.
그 사람은 내가 일생을 살며 추모해도 다하지 못할 만큼 나이를 얻어 살수록 못내 그립기만 했다. 그의 이름은 신현석(申賢石), 향년 37세였고, 살아 있다면 올해 마흔여덟이 될 터였다. 이름에 돌 석자가 들어 그랬던지 그는 살아생전에 유난히 돌을 좋아했거니와, 돌이켜 따져보면 그 자신이 천생 돌과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모두들 그를 석공(石工)이란 별명으로 부르기를 즐겨했고 본인도 그런 명칭을 마다하지 않았던 줄 안다. 나는 돌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그런대로 석공을 추억하고 아쉬워하던 끝이면 흔히 돌의 됨됨이와 성질을 더불어 되새기게 되곤 했다. 그러므로 내가 아는 돌의 성질이란 곧 석공이란 별명을 가졌던 그 인간의 성질과 거의 같은 것임을 뜻하기도 한다.
돌은 천년을 값없이 내버려져 있다가도 문득 필요한 자에게 쓸모가 보이면서 비로소 석재(石材)라는 허울을 얻으며 가치가 주어 진다.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한 돌은 만년을 묵어도 골동이 될 리 없으며 어떤 품목(品目)에 끼여들 명분도 없다. 그렇듯 돌은 용모가 곧 쓸모이되 장중한 바위로부터 간지러운 자갈에 이르기까지 타고난 성질만은 매한가지로 같다. 더위에 늘어짐이 없고 장마에 젖으나 물러지지 않으며, 추위에 움츠러들지 않고 바람에 뒹굴지언정 가벼이 날아가지 않는다. 가벼워지거나 무거워지지 않고 망치로 얻어맞아 깨지긴 해도 일그러지거나 무름해지지 않는다.
옛 글에도 "丹可磨 而不可奪其赤 石可破 而不可奪其堅‥‥‥ 단사(丹砂)를 갈더라도 그 붉은 빛은 빼앗을 수 없곤 돌을 깨뜨려도 그 굳음은 빼앗을 수 없다"고 일렀음을 알고 있다. 석공이 그렇듯 돌과 같았던 줄로 생각하기를 나는 서슴지 않는다. 산이 높으면 달이 작게 보이듯, 워낙 거친 세상에 섞여 있기로 더러는 잊으며 살긴 했지마는.
범바위에서 해돋이하는 쪽으로 서너너덧 발쯤 떨어진 곳에는 막 걸음발 타기 시작한 어린것이라도 쉬이 기어오를 수 있게 황소 마냥 나붓이 엎드린 바위가 사철 아이들 신창에 닳아 번질거렸으니, 우리들은 그 바위를 모양대로 이름지어 황소바위라고 불렀다. 그 바위는 대복이네 집 뒷등성이 너럭바위를 두고 휘넘어가는 오솔길 가풀막 아래 길섶에 옆구리를 대고 누워 있고, 오가는 사람의 두런거림을 하 많이 엿들어온 탓일까, 칠성바위 가운데에서도 기중 능청스럽고 너볏하던 바위였다.
그 황소바위는 얼핏 보기로 마치 우리 밭의 체통을 지켜주는 장승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니, 그것은 길 건너 맞은편에 사는 신서방의 야짓잖은 짓으로, 밭이 점점 길바닥에 먹혀들어 이미 여러 평(坪)이나 줄어든 뒤였기 때문이었다. 황소바위가 누워 버티고 있지 않았더라면 우리 밭은 얼마를 더 길바닥으로 내버리게 됐을지 어림할 수도 없이 된 형편이었다. 원래가 산등성이를 휘넘어간 오솔길 초입이었기에, 황소바위를 거쳐 신작로로 타내려간 그 길바닥은 겨우 지게나 지나다닐만하게 좁으장한 거였었다.
그 길섶은 내가 늘 대복이를 따라 물총새 구멍을 뒤지고 다닌 산골짜기가 내려 흐른 것으로 너름한 개울이었고, 신서방네 집은 그 건너 고섶에 뙤똑하게 올라앉아 있었다. 어느 해부터였나, 신서방은 그 좁은 길 가장자리를 두어 발폭이나 되게 곡괭이로 일구어 쇠스랑으로 골을 타고는, 줄파와 부추 따위 푸성귀를 부쳐먹고 있었다. 봄에 강낭콩을 심었다가 거두면 열무를 뿌리든가 호박 구덩이를 몇 개씩 묻기도 하고, 가로 퍼지는 옥수수와 댑싸리를 울타리처럼 가꾸기도 하였다.
" 남는 땅 임자 읎이 뵈기두 아깝구, 뭐던지 묻은 씨는 건지리라 허구 심는 것인디 ‥‥‥ 사람은 다다(모름지기) 부지런허구 볼 것이랑께 ‥‥‥‥“
신서방은 곧잘 그런 말을 하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실은 뿌린 씨앗의 몇십 갑절이 소출되어, 내심 터앝으로 치부하고 재미를 들였음이 분명했다. 신서방은 호미 끝으로 야금야금 길바닥을 먹어 들며 터를 넓혔고, 차츰 들깨나 고추모 따위 열매가 열려도 더뎅이지게 매달리는 작물로만 가려 심기 버릇하였으니, 오가는 행인들은 자연 남이 심어 가군 것을 다치지 않으려고 비켜 가게 되고, 그것에 비례하여 다소 짓밟아도 자리가 뚜렷하게 나지 않는 넓은 밭 가장자리 쪽으로 발걸음이 몰리게 되니 우리 밭은 한 뼘 두 뼘 잠식을 당하게 되던 거였다. 그래서 우리는 밭에 쟁기를 댈 때마 다 행인들 발길에 길바닥으로 나가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돌덩이처럼 다져진 곳에 생땅 일구기보다 훨씬 많은 힘을 들여가며 땀깨나 뿌려야 했다.
그럴 경우 우리는 늘 황소바위 옆구리를 기준하여 금을 긋고, 잃어버린 경계선을 가늠으로 되찾아내곤 하였다.
때문에 신서방은 아마 황소바위가 여간 눈에 거슬리지 않았으리라고 여겨지거니와 그래도 그 바위를 가장 요긴하게 이용한 것은 바로 신서방 자신이었음도 사실이다. 바윗등은 매끄럽고 멍석 반닢 넓이나 되었으므로 신서방 마누라가 빨래를 널기도 하고 물고추나 호박고지를 펼쳐 말리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신서방이 술주정하는 장소로 이용할 때가 더 많았던 것이다.
관촌 사람들은 신서방네 집을 흔히 꽃패[花形]집이라고 불렀는데, 집 얼개가 口자 모양이었기에 꽃잎에 빗대어 이름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해마다 이엉을 새로 이어 언제나 아담하고 단란해 보이면서도 뒤꼍의 어수선한 찔레덤불 울타리와, 돌멩이가 들어 있어 누가 건드리면 소리가 요란하던 깡통이 매달려진 널빤지 사립문으로 해서 품위는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밭마당귀에는 아름드리 개오동 한 그루가 정자나무처럼 버티고 있었고, 그 곁엔 깔끔하게 손이 간 돼지우리와 퇴비장이 있어 규모 있는 집이란 인상을 주기에는 부족하지 않았었다.
" 두쨋년 여월 때 농짝이래두 해준다구 낳던 날 곶은 오동인디, 머릿장을 짜구두 반짇고리 한 감은 넉넉허겄당께. " 하고 신서방은 개오동을 올려다보며 일쑤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 무렵의 나는 어린 소견에도 개오동보다는 마당가로 줄줄이 늘어 섰던 돌에 더 시선이 갔었고, 괜찮다 싶은 돌만 열심히 주워다 늘어놓던 석공의 자상하고도 순박한 마음결이 늘 관심사였었다.
석공은 신서방의 4남 5녀 가운데에서 맏아들이었다. 그가 돌에 대한 관심을 언제부터 가졌던 것인지는 어림되지 않지만, 돌에 대해 유난히 깊은 애정을 품은 듯했고, 완상하는 여유도 지니고 있었던가 았다. 나는 석공의 그런 일면을 요즘 배부른 사람들의 수석(壽石) 취미에 견주어본 일은 없다. 자칭 탐석가(探石家)니 수석 연구가(壽石硏究家)니 하면서 체중 줄이기 운동삼아, 또는 신경성 소화불량 치료제로 돌아다니며 정원 장식용 정석(庭石) 장사에 뜻을 둔 그 사람들의 구차스러움에 비길 수는 없겠던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돌을 주워다 물형석(物形石)이니 산수경석(山水景石)이니 추상석(抽象石), 문양석(紋樣石) 하고 가르며, '창세기' '환호(幻湖)' '천녀(天女)' 어쩌고 하는 같잖은 제목으로 장난질을 하지만 석공은 그런 놀이 할 만큼 돈이나 여가가 없었고, 그런 제목을 꾸며낼 푼수로 유식하지도 않았었다. 그는 보통학교만을 겨우 마친 뒤 어려서부터 생일이 몸에 배었던 한갓 농투성이였으니까.
구태여 시체에 맞춰 석공에게 이름을 주자면 석재 수집가라고나 할는지. 그는 태깔과 크기가 저마다 다른, 일상에 쓸모 있는 돌들로만 모았던 것이며, 남의 집 아궁이 붓돌이나 방고래를 놓는 데에, 더러는 이웃에서 굴뚝이나 담장을 쌓든가 장독대를 늘리는 데에 기꺼이 나눠주곤 하였다. 지금 생각이지만 그는 쓸모 있을 성부른 돌은 무조건 모아왔다가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재미로 돌쟁이[石工]가 됐던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석공이 기려질 때마다 처마 밑에 늘어놓았던 돌들보다도 먼저 그네 집 마당이 머릿속에 펼쳐지던 게 사실이었다. 그와 함께 이윽고 나는 그 집 마당에서 벌어졌던 자자분한 여러가지 추억들을 맞이했고, 그 추억들을 순서가 뒤바뀌지 않게 만나고자 다시 한번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그 집의 마당 귀퉁이에 서보게 되곤 했다. 맨 첫번 순서는 으레 석공이 해마다 두 번씩 마당을 새로 맥질하던 모습의 재연이었다. 여름의 보리바심과 가을 벼바심을 하기 위해 석공은 매년 봄가을로 마당을 새로 하였다.
산사태진 벼랑의 황토를 여남은 발채씩 지게로 논에 져내린 다음, 대신 논바닥을 그만큼 마당에 퍼내어다 펴놓고 논흙으로 매흙을 삼던 것이다. 고령토처럼 차지고 보얀 빛깔을 내는 논흙덩이를 잘 반죽하여 한 켜 고루 덧입혀놓기만 하고 석공은 손발을 씻는다.
그 나머지 작업은 안팔 동네 조무래기들이 무료 봉사로 마무리를 해주기 때문이었다. 그 조무래기들 틈서리에 내가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말이 좋아 무료 봉사라고 둘러댔을 뿐 우리들은 순전히 뛰노는 재미로 그 일을 자청한 셈이다. 매흙이 질음하게 반죽되어 깔린 위에 아이들은 대오리로 엮은 발이나 헌 마니를 덮고는 자글자글 떠들어대며 가로세로 뛰고 짓밟아 다지는 거였다. 마당바닥의 매흙이 묵처럼 솔았다가 송편이나 수제비 모태마냥 되직해지면 아이들은 대오리발이나 가마니 위를 탑기보다도 맨발로 맨흙 밟기를 더 즐겨하였다. 마당을 댑싸리비로 쓸어 고운 먼지가 일 때까지 이틀 사흘을 아이들은 그 마당으로만 몰려들어 놀았다. 마당이 손톱자국만한 금 한 줄기 나지 않고 곱게 다져지던 것은 당연한 결과.
아이들 극성 덕에 곡식을 멍석 없이 그냥 쏟아 말려 당그래나 넉가래로 긁어모아 담더라도 흙부스러기와 돌이 섞이지 않던 것은 석공도 잘 알고 있었을 터이다. 비록 남의 집 마당이긴 했지만 우리들의 놀이터라면 둘째로 꼬느기가 아까울 지경이던 만큼의 그리움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나는 석공의 추억이 일기 시작하면, 내가 즐겨 놀았던 마당으로서보다도 나의 아버지가 평생에 단 한 번 객스럽게 놀아 보신 장소라는 데에 보다 소중함이 느껴져서 잊지 못해해온 사실을 밝혀두고 싶다. 그것은 내가 일곱 살 나던 해의 가을이었다.
그 무렵은 봄볕 든 양달보다도 더 눈부신 햇살이 온누리에 잦아 드는 것처럼 산과 들에 그리고 개펄에 매일같이 내리쏟아지고 있었다. 미처 못 떠난 제비들은 아침마다 전깃줄에 주렁주렁 열리고, 범바위 둘레 가시덤불에는 까치밥이 고추밭보다 더 짙은 색깔로 빨갛게 익어 어우러졌으며, 대복이네 집 뒤 너럭바위 아래 잔디밭에는 뽑아 넌 목화대의 목화다래가 한껏 벙그러지고 피어, 먼 논으로 메뚜기를 잡으러 가려면 반드시 스쳐가게 되던 충길이네 메밀밭의 흐드러진 메밀꽃보다도 훨씬 눈부시고 깨끗하게 널려 있기도 했다.
그날도 아침부터 눈에 뵈던 모든 것들은 꿈결에 들리던 말방울 소리처럼 맑고 환상적인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 밭머리 저쪽과과 수원 탱자나무 울타리엔 탱자가 볏모개보다도 더 샛노랗게 가시 틈틈으로 숨어 있었으며, 가녀리게 자라 무더기져 핀 보랏빛 들국화는, 여름내 패랭이꽃들로 불긋불긋 수놓였던 산등성이 푸새 틈틈이에서, 여름 내내 번성하다가 무서리에 오갈들어 꼴사납게 늘어진 호박덩굴더러 보라는 듯이 새들새들 쉴새없이 고갯짓을 하고 있었다.
뛰면 미끈거리는 고무신짝은 애당초 거추장스러운 것, 온 들판을 맨발로 뛰어다녀도 사금파리 한 조각 찔릴 것 같지 않게 보드랍고 넓어 보이기만 하던 아침이었다. 그날 나는 새벽부터 간사지 수문 앞 갈대밭으로 나가 참게잡이를 구경했었다.
" 긔막에 언니 진지 갖다드리고 올래? 그럴래?"
하며, 눈뜨며부터 옹점이가 나만 붙들고 다잡아댔기 때문이었다.
" 언니가 밤새 긔막에 있었나?"
무서리가 성에 앉듯 한 담 너머를 내다보며 묻자 옹점이는,
" 암, 아마 되린님이 젤 많이 잡었을 겨 ‥‥‥‥ "
하며 그녀는 나를 충동이질했다.
" 내가 갖다드리먼 아씨헌티 걱정 듣는단 말여, 말만헌 지집애가 버르쟁이 읎다구."
하는 핑계도 대었다.
나는 별수 없었다. 어머니는 철호처럼 한집 식구 된 어린 머슴이라도 논밭에 혼자 나가 일할 경우 옹점이조차
논밭에 내보내지 않을 만큼 철저한 내외를 시킨 터였으니 하물며 중학생이었던 언니 곁임에랴.
" 언니가 굶으먼 안 되지."
하며 내가 나서야 했다.
우리 집안 풍습이랄까, 친형제간이건 일가간이건 같은 항렬의 손위는 형이란 호칭 대신 언니로 부르도록되어 있었다. 약관에 요절한 그 형을 찾아 옹점이가 일러준 갈밭으로 가자 가마니와 거적대기로 엮은 원추형의 움막이 둘이나 세워져 있었다.
움막 속에 앉아 밤을 밝힌 모양인 형은 햇살이 퍼져 안온해진 덕인지 누비이불을 뒤집어 쓴 채 한창 코를 골고 있었다. 움막 앞에서 밤을 밝히고 기름이 다 되어 생심지를 태우며 가물거리는 남포등 아래 항아리 속에는, 갈색 털이 집게발가락마다 탐스럽게 돋은 참게들이 도무지 몇십 마리나 빠졌는지 어림도 해 볼 수 없게 바글거리고 있었다. 노상 물이 흘러 갈대가 배게 나고, 앙금이 곱게 갈앉은 개울 한가운데를 파고 운두가 내 키만이 나 한 김칫독을 묻은 다음 대오리로 엮은 발로 둘러막았으니 남폿불에 흘려 밤도와 괴어들었던 게들은 모조리 김칫독으로 빠지도록 되어 있던 것이다.
" 언니가 젤 많이 잡었지, 그지?"
흔들어 깨우고 나서 그렇게 물으니,
" 대복이는 더 많이 잡었을 텐디, 가서 대복이더러 와서 이 밥 하냥 먹자고 일러라. "
하며 형은 독 안에 든 게부터 내게 건져 보낼 채비를 했다. 대복이의 게막은 저만치 떨어져 같은 모양새로 지어져 있었는데 벌써 짚토매를 갈고 앉아 게두름을 엮어대고 있었다.
" 언니가 와서 아침먹으랴‥‥‥야, 너 무지무지허게 많이 잡었구나야. "
내가 말하자 대복은,
" 제우 아흡 두룸배끼 안 되겄는디, 늬 언니는 몇 마리데?"
대복은 묻고 나서,
" 오늘 신서방네 샥씨 들온다메? 돌쟁이 각씨‥‥‥‥" 하고
"이 긔를 돈사야 엄니가 부주헐 텐디‥‥‥‥"했다.
" 신서방네가 대사 지내여?"
내가 놀라워하자 대복은,
" 석공이 어제 장가간 줄 인저 아네?"
" 아 그래서 어제버텀 즌 부치는 냄새, 돼지 삶는 냄새가 진동했구나‥‥‥‥"
나는 갑자기 가슴이 설레면서 마음이 달뜨기 시작했다. 석공의 각시가 오는 구경을 놓칠라 싶어 한시 바삐 석공네 마당으로 내닫자니 나는 가빠진 숨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 대복이는 엮응께 아흠 두룸 나더랴. 언니는 몇 마리여?"
" 여든시 마리, 대복이가 한 뭇은 더 잡었구나, 일곱 마리 더 잡았어. "
하면서 게를 건져 담은 구럭을 가리킨 다음,
" 집에 얼른 가서 엄니더러, 대복이가 가걸랑 긔를 죄다 사시라구 해라. 아깝다. "
했다.
나는 그러리라고 대답하며 집을 향해 달렸지만 워낙 건성으로 들은 터라 이내 잊어버린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집에 들이닿자마자 식구들이 물린 아침상을 설거지하던 옹점이는 나를 부엌으로 불러들였다. 그녀는 내 손에 콩누룽지를 한 덩이 쥐어주며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 밥 먹구 신서방네 메누리 귀경 나허구 하냥 가자."
“……”
나는 대답을 안 하려다가 한참 만에야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나를 데리고 가 고루 구경시킨다는 핑계라도 대지 않으면 어른만 있는 집에서 그녀 흔자 대문을 나설 수 없음을 얼핏 깨달았던 것이다.
" 소리내지 말구 싸게 먹어."
옹점이는 밥과 국그릇만 목판에 올리고 반찬은 부뚜막에 늘어 놓아가며 쉬쉬했다. 나를 부엌에서 그것도 이맛돌 앞에 앉혀놓고 밥 먹이는 줄을 어머니가 안다면 그녀는 영락없이 크게 혼이 날 터였다. 그러나 무슨 청승이며 본데없는 짓이었을까. 나는 아궁이 앞에 똬리나 장작개비를 갈고 앉아 문전걸식 나온 거지처럼 밥 먹는 게 소꿉장난 같기만 하여 여간 재미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의 그런 심중을 옹점이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조심하며 어른이 어려운 앞에서 먹기보다 훨씬 밥맛이 좋던 것이다.
그날도 옹점이와 마주앉아서로 자기 밥을 떠서 상대방 입에 먹여가며 치륵치륵 소리 죽여 웃곤 했다. 한창 그러는데 안방에서 어머니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 얘, 신서방네 잔치 채비는 그럭저럭 돼간다데?"
옹점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엉겁결에 대답한 소리는,
" 아녀유, 지년이 원제유?"
였다.
동문서답치고는 너무 터무니가 없었다. 얼김에 내가 부엌에서 밥 먹느냐고 들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가 가만히 귀뜸해줘서야 알아차리고,
" 예, 지년이 닭을 가지구 가니께 웬 장닭을 두 마리씩이나 슨사 하시느냐구 해쌌던디, 그냥저냥 채릴 것은 채리는 모냥이데유."
그녀는 겨우 그렇게 둘러대고는 웃음을 못 참아 입 안에서 우물거리던 음식을 재채기하여 입과 코로 쏟아내었고, 코가 매워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 아이구 사레 들려 혼났네."
그녀는 연방 재채기를 하고, 허리를 쥐며 소리없이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그녀가 한참 만에 다시 말했다.
“넘덜은 밀가루 한 됫박, 묵 몇 모 그렇게 부주허던디, 아씨는 두부할래 한 말이나 쒀다주셨으니 여북 자랑삼겄시유."
그녀가 묻잖은 소리를 꺼내자, 어머니는 다시,
" 워디 츠녀라더냐?"
" 예, 슴 시약씨래유, 배슴(舟島 ) 츠년디, 어물전 들랑대던 워느 뱃늠이 중신했대유."
그녀는 이어서,
" 슴것슴것 허다가 막상 슨을 보니께 아주 갱긋찮게 생겼더라며, 궁합두 썩 좋다구 신서방 마누라는 자랑했쌌던디유."
" 슴츠녀라구 다 시커먼허구 볼상 숭허게 생긴다더냐?"
어머니가 나무라자, '
" 그러기 말유, 쬐끄만 뎀마두 있구 중선두 부린다더랑께 웬만츰
사는 집 딸인 모냥이데유. 오정때찜 각시가 오먼 폐백디리구 헐텐디, 뭔뭣 해오는지 이따 흔수 귀경 가보까유?"
" 또 오금이 저리나부다. 말만헌 지집애가 여러 사람 뫼여 굿허는디 워디를 간다네?"
하고 나무라자 옹점이는 으레 들을 말 들었다는 듯 혀를 낼름거리면서 다시 내 입에 먹던 밥을 떠넣어주었다.
내가 옹점이로부터 석공의 각시에 대해 예비 지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대충 그 정도였다. 우리집에서는 장자 두 마리에 한 말 콩이나 두부를 쑤어 부조했다는 것도 그제서야 알았다. 색시는 열여덟, 신랑인 석공 나이가 스물두 살이란 것도 그녀한테서 처음 들은 말이었 만‥‥‥ .
아침밥을 마치자 옹점이는 기회 보아 함께 나가자고 나를 붙들었지만 나는 매몰스럽게 그녀의 팔뚝을 뿌리쳤다. 그 대신 그녀도 색시 오는 구경을 할 수 있도록 한 가지 죄를 귀띔해주었다. 점심 때 나를 찾아 점심 먹인다는 핑계로 집에서 빠져나오도록 방법을 가르쳐준 것이다. 약 3백 미터 저쪽의 석공네 집은 우리 사랑마루에 앉아서도 훤히 내려다보이고 있으므로 서둘지 않더라도 신작로에 트럭이 서고 트럭에서 내린 각시가 가마에 올라타는 것까지 정확히 알 수 있었지만 나는 그참 차일이 높직이 드리워진 그 집 마당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 집 마당에는 횐 광목 두루마기를 받쳐입은 안팔 동네 어른들이 멍석과 밀짚방석 위에 앉아 국수상들을 받고 있었고, 석공의 일가 푸네기로 보이는 노랑 인조견 저고리의 남끝동을 걷어붙이고 자락치마를 두른 아낙네와 처녀들은 하얀 버선목을 내보이며 발바닥이 묻어나도록 들락날락 부산이었다.
먼 동네에서도 많은 사람이 일삼아 와 잔치일을 돌봐주고 있었는데, 그네들의 대부분은 너럭바위 앞이나 신작로 송방 앞에서 장보고 가다 충그릴 때 봐서 이미 익은 낯들이었다. 나는 부조일하러 온 대복 어메나 동네 아이들이 떡부스러기라든가 다식조각 같은 것을 손에 쥐어줄지 몰라 미리 그런 일이 없도록 한구석에 물러서서 그러저러한 모습들이나 건성으로 보고 서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시간이 다 돼간다면서 대빗자루를 들고 주위 청소를 한 다음, 개울 위에 가로질러 건너간 다리부터 신작로 쪽으로 뻗은 길을 쓸어나가기 시작했다. 신부가 도착할 어름이 가까워진 눈치였다. 이윽고 요까티 사는, 석공네와 무엇이 된다던 남춘 동춘이 형제가 산등성이 황토박이에서 금방 파온 듯싶은 삼태미의 황토를 다리 위에 좌우로 두 무더기, 널빤지 사립 문턱 양쪽에 두 무더기씩 소복소복 쏟아놓았다.
그러는 사이에 ' 뒷뛰-' 하고 자동차 닿은 소리가 신작로 송방께서 들려오고,
" 오메, 저 차루 왔나벼." "각씨 왔구나." "도라꾸 타구 왔디야‥‥‥‥."
다른 아이 없이 저마다 생긴 얼굴대로 한입 가득 괴었던 소리들을 쏟아내며 신작로 쪽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나도 횝쓸려 따라가 보고 싶었지만 선 채로 눌러 참아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가소롭기 그지없지만, 한창 동몽선습을 배우고 있던 터라 할아버지가 이르신 대로 글을 배우는 사람답게 체신을 지켜야 했던 것이다. 이윽고 쏠리어 내려간 조무래기들이 앞지르고 뒤따르며 되돌아오는 소리가 와글바글 들려왔다.
나는 그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마중나가듯 개울을 건너가 보게 되었다. 사모를 쓰고 가지색 단령( 團領)을 입은 수줍음에 움츠러든 석공의 얼굴이 조무래기들한테 에워싸인 채 떼밀려오듯 하고 있었다. 콧잔등엔 맑은 땀방울이 돋아 있었고 목화(木靴)를 신어 무척 뒤퉁스런 걸음을 걷고 있었다. 공의 두 어깨 너머로 훨씬 치켜 올려진 채 뒤따라오던 청사초롱도 나는 보았다. 이어 청사초롱 뒤로 가마지붕이 보이자 나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가마 곁에 달라붙으며 각시 구경을 하려했지만, 가마 앞에 오던 폐백물 든 사람과 감주단지를 든 부인네 그리고 함진아비 영감이 소리를 질러가며 말리고, 가마를 멘 두 교군꾼의 걸음이 가마 발을 제껴볼 틈도 없을 만큼 잽싸서 뜻을 이뤘던가는 기억이 없다.
가장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폐백 드리기를 끝낸 각시가 홍상(紅裳)에 활옷을 입고 족두리를 얹고, 안방 아랫목에 무릎 꿇고 앉아 고개를 못 들어하던 모습이며, 내가 얼마 동안인가를 각시 혼자 두었던 석공네 안방의 윗목에 턱살을 쳐들고 앉아서 각시의 얼굴을 뜯어본 일이었다. 어린 눈에도 각시는 여간 이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리 분으로 뒤발한다더라도 그토록 깨끗할 수 없으리라 여겨지던 해말금한 살결이며 달걀처럼 갸름한 얼굴에 오똑하게 서 있던 콧날‥‥‥ 누가 뜯어보더라도 섬색시라고 미루어 함부로 흠잡지 못할 것이 분명하였다.
나는 점심때가 겨웠건만 배고픈 줄도 모르고 각시만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동네 아이들은 물론 일가 푸네기 아이들도 기웃거리거나 드나들지 못하게 말리고 있었지만, 나더러 자리를 비키라든가 나가 주기를 눈치하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평소 대복이네 집 외엔 남의 집 울안에 들어가본 적이 없기로 소문이 났던 터에 방안까지 들온 것이 신기하고 기특했던 것인지, 아니면 차마 나가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그랬으리라고 짐작되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편치가 않았고 초조하고 불안해 시종 오금이 졸밋거림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것은 각시가 너무 고개를 숙이고 있어 금방 족두리가 굴러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었고, 음식 장만에 주야로 계속 불을 지펴 거의 쩔쩔 글다시피 하는 방안 아랫목에 방석 하나만 갈고 꿇어앉아,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던 땀방울에 연지와 곤지가 지워져 얼룩질 것만 같은 안타까움이었다. 연지나 곤지가 씻겨 달무리에 싸인 달처럼 흐려진다면, 각시 얼굴이 어찌 될 것인지 알 만한 노릇이었다.
안타까움에 속깨나 태우고 걱정스러워 발을 굴렀던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렇다. 신부한데 가졌던 동정과 근심스러움은 되려 아무것도 아닌 셈이었다. 그것은 내가 저녁을 먹고 다시 석공네 차일 걷힌 마당으로 뛰어오면서부터 달이 이울고 밤이 이슥해지도록 계속된, 두려움과 의협심 같은 것이 뒤범벅이 되었던 그리고 그 후로 이 평생 두번 다시 가져보지 못한 순결스런 추억이기도 하다.
석공네 마당의 앙상한 오동나무 가지에 달이 열리고, 그 아래에 닥불이 뜨물보다 더 짙은 연기를 올리며 지펴지자, 우리는 콩각지며 바심하고 뒷목들인 검불과 마른 참깻대 따위를 한 아름씩 안아다 불에 얹었다. 불이 이글거리며 화룽화룽 타오르자 온 동네는 콩낱과 벼이삭 그리고 덜 털린 참깨 타는 고소한 냄새로 가득해졌으리라 싶다. 아이들은 무슨 청승이며 근천을 떠느라고 그랬을까.
음식이 흔전만전한 잔칫집 마당임에도 불구하고 모닥불 재티속에서 굴러나오는 콩알과 하얗게 튀겨진 깡밥을 주워먹느라고,얼굴엔 온통 굴왕신 빰치게 검댕 천지 해서는, 달이 서쪽으로 바삐 내달은 줄도 모른 채 뛰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일에 정신을 앗겨 밤이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술 닷말은 나가 읃어놨네,이늠으로 신랑 볼기를 들입다 조져대면 각씨가 손구락에 찐 가락지라도 빼준다고 헐 겨....“
술에 잔뜩 취한 쌍례 아배가 헛간에서 도리깨자루 부러진 몽둥이 끝을 깎낫으로 도스르면서 중얼거린 말이 얼핏 귓결에 걸린 뒤부터 나는 석공이 걱정되어 조바심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 안주는 자네라 읃으소. 술은 내가 내니께.“
쌍례 아배가 홀쭉홀쭉 웃으며 말핮,
“암만, 주막집에 수 내준 도야지 멱을 따내던지, 저 닭을 여나문 마리 비틀게 허던지, 안주 장만은 내가 헐 텡께.“
서낭당 너머 사는 복산 아배도 어느새 장만해둔 나뭇가지에서 옹이 자국을 창칼로 다듬고 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그네들이 술이라도 덜 취해 있다면 오죽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그네들의 동태를 열심히 지키고 있었다.
" 옳유, 그려유, 그늠으루다 발바닥을 제기며 패슈, 나는 요 산내끼루 창창 묶어 대들보에 매달어놓을 텡께‥‥‥‥ ."
덕길이 형 덕산이도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고 있었다.
" 여게, 그럴 거 읎이 작대리구 주리를 트세, 주릿대를 질어야 벽장 찬장 과방 속에 감춰논 음석이 절루 나온당께.....도야지 잡어 원제 삶구 닭이 모가지 비틀면 원제 털 뜯는다나, 감춰논 음석 내놓게 허야 먹네‥‥‥‥“
검불더미 위에 늘어져 누워 있던 대복 아배 조패랭이가 텁석부리 구레나룻을 쓰다듬으며 비척비척 일어나다 주저앉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네들이 벼르는 말을 흘리지 않고 들었던 나는, 그러지 못하게 말려줄 사람이 없는지 사방을 희번득이며 둘러보았지만 부탁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이는 어리더라도 철호와 대복이라면 내 말을 들어줄 성싶긴 했지만 그런 기대도 이내 사위었으므로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등성이 너럭바위 쪽에서 「신라의 달밤」을 고래고래 불러제끼던 것이 술 얻어 마신 대복이와 철호 음성이란 걸 금방 깨달은 때문이었다. 별수 없이 나는 쌍례 아배와 복산 아배가 움직이면 움직인 대로, 옮겨가면 옮겨진 자리까지 뒤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며 지켜보는 수뿐임을 알았다. 그네들이 석공을 밧줄처럼 여물고 단단한 기계새끼줄로 옳아 들보에 매달거나 부러진 도리깨 자루와 삭정이도막으로 석공을 때린다면 나 혼자라도 덤벼들어 말려보리라고 결심했던 것이다. 나는 정말 그럴 작정이었다.
내 생각에도 내가중간에 뛰어들어 석공을 가로막고 나선다면, 내가 어느 어르신네 손자란 것만 알더라도 쥐어박거나 떠밀어내지 못하게 될 뿐더러, 그네들이 져주고 말 것 같았던 것이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다져먹고 그들만 줄곧 감시하고 있었으며, 어딜 가는가 싶어 따라가보면 됫간이라든가 한데 오줌독이곤 했지만 몽둥이와 새끼타래를 놓지 않는 한 그네들에 대한 경계는 게을리할 수가 없었다.
모닥불은 계속 지펴지는 데다 달빛은 또 그렇게 고와 동네는 밤새껏 매양 황혼녘이었고, 뒷산 등성이 솔수펑이 속에서는 어른들 코골음 같은 부엉이 울음이 마루 밑에서 강아지 꿈꾸는 소리처럼 정겹게 들려오고 있었다. 쇄쇗 쇄쇗‥‥‥ 머리 위에서는 이따금 기러기떼 지나가는 소리가 유독 컸으며, 낄륵- 하는 기러기 울음 소리가 들릴 즈음이면 마당 가장자리에는 가지런한 기러기떼 그림자가 달빛을 한 옴큼씩 훔치며 달아나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별 하나 주워볼 수 없고 구름 한 조각 묻어 있지 않았으며, 오직 우리 어머니 마음 같은 달덩이만이 가득해 있음을 나는 보았다. 달빛에 밀려 건듯건듯 볼따귀를 스치며 내리는 무서리 서슬에 옷깃을 여며가며, 개을 건너 과수원 울타리 안에서 남은 능금과 탱자 냄새가 맴돌아, 천지에 생긴다고 생긴 것이란 온통 영글고 농
익어가는 듯 촘촘히 깊어가던 밤을 지켜본 것이다.
어쩌면 술꾼들을 지켜본다기보다 늦가을 밤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신비로운 정경에 얼이 흘렸던 것인지도 몰랐다. 문득 내 이마에 보드라운 오뉴월 이슬이 맺히는 느낌이 있더니 늣늣한 아주까리 기름내가 코를 가리는 거였다.
" 서방님께서 알으시면 되게 혼나야......“
옹점이가 속닥거리고 있었다.
“……”
나는 고개를 저어 이마에 와 닿은 옹점이의 보드라운 앞머리칼을 귓등으로 치웠다.
" 나리만님께서 걱정허신다먼‥‥‥ 구만 가 자자닝께는."
밤새껏 그러고 서 있는다면 할아버지 걱정을 들음이 자명한 일이었다.
" 저이들이 석공을 몽둥이루 팬다는디 ‥‥‥ 산내끼루 천장에다 달
어맨디야. "
나는 근심스러워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연방 도래질을 하였다.
" 신랑 달어먹는 겨. 그런 건 노상 장난으루 허는 거랑께."
그녀는 히뜩히뜩 웃다 말고 나를 텁석 둘러업었다. 옹점이 등에 업혀 돌아오면서 나는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얼마나 드높고 가없으며 꿈속에서의 하늘처럼 이상하게만 보인 하늘이었던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달도 나만을 쳐다보고 있었고, 내 그림자를 쫓아 대문 앞까지 따라오던 것이 아직도 눈에 선하게 남아 있다.
옹점이는 나를 안방 윗목의 푹신한 새 요잇 위에 부리고 새물 내가 몸으로 배어드는 누비이불을 덮어주며 실픗실픗 웃었곤 어서 잠이 들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나는 사모 썼던 석공의 모습과 몽둥이와 새끼타래를 잔뜩 움켜쥐고 별러대던 쌍례 아배, 복산 아배와 덕산이, 그리고 조패랭이의 숨결 고르지 못하던 얼굴이 떠올라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 코가 너무 세서 팔자는 워떨지 몰라두, 농, 경대, 반짇고리‥‥‥ . 그러구유 지년이 보니께 명이불 두 채허구유 명지 뉘비이불‥‥‥‥."
옹점이는 어머니 앞에 앉아 석공네 각시가 해온 혼수들을 부러운 양 늘어놓으며 자리끼 숭늡 대접을 벌씬벌씬 들이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 놋요강, 놋대야, 오석다듸밋돌‥‥‥보선 열두 죽, 유똥치마 두짓, 모분단저구리허구 비나(비녀)둘, 은민잠허구 동백완두잠 하나씩 ‥‥‥ 또 신서방 마누라 다리속것허구 백모시적삼, 신서방 당목고의허구 시누 항라적삼 하나‥‥‥슴것치구는 제법 알구서 했던디유. 바누질두 괜찮구 품두 넉넉허니, 새약씨 손이 크겄다구들 해쌌던디, 지년 보기에두 메누리는 방짜루 온었더먼유. 코가 너무 오똑허구 해서 워떨런지 몰라두유‥‥‥‥ "
하고 침이 마르게 지껄이고 있었지만, 내 귀는 이미 담을 넘어 석공네 마당에 닿고 있었다.
" 당그랑그랑 당그랑그랑‥‥‥‥ "
나는 혀끝으로 장단을 흥내내고 있었다. 석공네 마당에서 꽹과리와 징이 없는 풍장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던 거였다. 그뿐 아니었다. 노랫소리도 곁들여서 들려오고 있었다. 마음놓고 목청껏 불러대는 소리였다.
" 어려, 옹젬아, 누가소리(노래)헌다야“
내가 못 참아하자,
" 의- 소리는 내 가락이 이건디, 의-" 하며 그녀도 들뜨는 마음인지 냉큼 대꾸하고 있었다.
대동강 부이벽루에 산뽀를 가는, 리수일과 심순애의 량인이로다, 악슈 론고하난 것도 오날뿐이요, 보보행진 산뽀험두 오날뿐이라‥‥‥. 나는 온몸이 그닐거리고 쑤겨 잠은커녕 진드근히 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무슨 핑계를 대고 빠져나갔던가는 기억해낼 수 없다. 내가 다시 석공네 마당으로 달려들었을 때, 밭마당의 모닥불은 거진 사위어버리고 사람 하나 얼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풍장 소리와 노래는 사립 울안에서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여전히 누군가가 '소리'를 부르고 있었다. 멍석 너덧 닢내기만한 안마당엔 어른들이 겹겹으로 둘러서서 모두가 엉덩이를 궁싯궁싯 들썩대며, 그러나 하나같이 군소리를 참고 눈과 얼굴로만 흥겨워하고 있었다. 누구 음성이었을까, 생전 처음 들어본 그 구성진 가락은. 석탄 백탄이 타는데, 연기만 펑펑 나는데에‥‥‥이 내 가슴 타는데, 연기가 하나도 안 나는데‥‥‥ 나는 키가 모자라 사람 다리만 빽빽한 쪽마루에 비비대고 올라가 넘어다보았다. 그리고 놀랐다. 놀라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한 손으로 주안상 가장자리를 두들겨가며 앉아서 노래하는 어른, 코와 눈이 그렇게 크고 음성 또한 굵직한 신사, 그이는 아버지였다. 나는 가슴이 벅차올라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황홀하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하여 얼마를 두고 뚫어지게 바라보았으나 분명 아버지였다. 당신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에 도취된 모습이기도 했다. 우선 석공네 울 안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현실 같지 않았고, 노래를 하는 것도 사실일 수가 없으련만, 모든 것은 눈에 보인 그대로였다.
아버지는 안팔 동네 어느 누구네 집도 울안은 들어가본 적이 없는 터였다. 일가간인 한산 이가네로서 노인을 모시는 집안이거나 당내간의 사랑이라면 더러 출입이 있었을 따름이요, 그것도 울안에 발을 들인 일이란 한번도 없던 터였으니, 하물며 전에 일갓집 행랑살이를 했던 사람네 집이겠던가. 신서방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아버지의 맞은편에 꿇어앉은 석공은 연방 싱글벙글 웃어가며 솟음솟음하는 신명을 어쩌지 못해 답답한 표정이었다. 아버지가 노래를 마치자 요란스런 박수 소리가 터져나오고, 신서방이 두 손에 술잔을 받쳐드니 석공은 주전자를 기울였다. 아버지가 술잔을 받아들자 신서방은 일어서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아, 나는 그때 또 한번 크게 놀라고 말았다. 다시 한번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음이니 그것은 아버지가 일어서서 어깨춤을 추기 시작한 거였다.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아버지는 그렇게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앞에서는 항상 무릎 꿇고 조아려 공손하기가 몸종과 다름없었지만, 처자 앞에서는 단란하고 즐거워 웃더라도 결코 치아를 내보인 일이 없게 근엄하되, 한내천 백사장에 강연장이 설치되면 뜨내기 장돌뱅이까지도 전을 걷어치을 정도로 수천 군민이 모여들게 마련이었으며, 산천이 들렸다 놓인다 싶게 불 뿜듯 웅변을 했는데, 그때마다 청중들로부터 천등보다 더 우렁찬 환호와 박수 갈채를 얻고 당신을 알던 모든 사람들한테 선생님이란 경칭을 받았던, 저만치 멀리로 건너다보이며 어렵기만 한 사람이었다.
어디 그럴 법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남의 집 울안 출입에 노랫가락과 어깨춤‥‥‥ 신기함과 경이로움을 주체하지 못해 나는 몹시 당황했지만 그러나 그런 거북스러움도 슬몃슬몃 가셔지고 있었다. 멍석 가장자리로 둘러서 있던 모든 사람들이 덩달아 함께 어울려 춤을 추기 시작했던 것이며, 그 속에는 작대기 막대기와 새끼타래를 내던진 쌍례 아배와 복산 아배, 덕산이와 조패랭이가 섞인 채 누구보다도 흥겨워 몸부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겨움에 감싸여 흐른 밤은 얼마나 되었을까. 모든 사람들의 배웅을 뒤에 두고 나는 아버지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버지 그림자를 밟지 않기 위해 나는 이만큼 뒤처져 걷고 있었는데, 그림자가 너무 길다고 느껴져 불현듯 하늘을 우러르니, 달은 어느덧 자리를 거의 다 내놓아 겨우 앞치마만한 하늘을 두른 채 왕소나무 가지 틈에 머물고 있었으며, 뒷동산 솔수펑이의 부엉이만이 잠 못 들어 투덜대고 있었다. 아버지는 사랑 앞에 이르도록 헛기침 한번 없이 여전 근엄하였고, 나는 버긋하게 지쳐놓은 대문을 돌쩌귀 소리 안 나도록 조용히 여닫으며 들어가 이내 곤한 잠에 떨어져버렸다. 이튿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요 위가 질펀하니 한강이었고 아랫도리가 걸레처럼 척척했으나 부끄러워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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