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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전쟁도 시작하기 전, 미국은 이미 졌다"

홍기빈의 '현미경과 망원경' <2> "인간방패"가 뜻하는 것

엊그제 한국의 반전 평화 운동가들이 이라크로 떠났다. 곧 미국 중심의 몇 서방 국가들의 군사 작전에 노출될 이라크 민중들과 생사를 같이하기 위해서이다. 이들 뿐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평화 운동가들이 "인간 방패(human shield)"가 되어 서방 국가들의 무력을 몸으로 막기 위해 이라크로 속속 모여들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주류 매체에서 일방적으로 무시당하거나 일종의 "얼간이들(lunatics)"라는 식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동정적인 사람들도 이 사건에서 "뛰어난 개인들의 영웅적 헌신" 이상을 보고 있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현재 준비중인 미국의 이라크전의 중장기적 전망을 짚어보는 데에 중요한 지표가 된다는 점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국제정치적 사건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보인다.

<사진1>

어마어마한 무력이 동원될 이라크전의 예후에 기껏 몇 백 명도 되지 않는 사람들의 행동이 어떻게 그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인가? 미국의 이라크전이 이미 시작하기도 전에 "대의명분"의 차원에서 파산 선고를 넘어서서 공공연한 도전을 받기 시작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근대 서양 국가들은 전쟁에서 이 "대의 명분"의 차원이 갖는 중요성을 상당히 간과해온 듯하다. 전쟁의 인간적 사회적 측면의 요소를 풍부히 분석한 클라우제비쯔의 [전쟁론]같은 책도 그 요소들을 사실상 물리적 효율성의 계기로서만 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 서면 대의 명분이란 그저 "심리전"의 한 요소 이상의 중요성을 가지기 힘들다. 타임 워너나 루퍼트 머독 등을 통하여 지구적 차원의 매체를 거의 장악해버린, 그래서 무엇이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세계인들의 머리 속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미국의 지배 계층은 그래서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런데 [육도삼략] 등의 동양 병서에서는, 전쟁이란 하늘, 땅, 인간이 격렬하게 맞부딪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과정이라는 관점이 뚜렷하다. 이 경우 대의 명분은 가장 핵심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 전쟁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질서가 과연 하늘, 땅, 사람 모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 그 전쟁의 대국적인 방향, 승패, 가능성이 결정되기 마련이다.

물리적 병력의 우위나 나라의 크기 같은 요소들은 여기서 오히려 종속적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사실, 전쟁이라는 것이 이런 것들로 그냥 결정되어버리는 단순한 물리적 작용이라면 애초에 병법 따위는 필요도 없을 테니까. 오히려 그것들은 하늘, 땅, 사람이 그 마음과 뜻을 표출할 매개물로 쓰일 때 최상의 위력을 갖게 된다는 생각이 개진되고 있다.

분명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관찰되는 올망졸망한 규모의 싸움을 보면 후자의 관점은 터무니없는 '미신'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싸움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동네 뒷산에 모여 소주나 까던 양아치들이 조그만 번화가 하나를 '나와바리'로 먹어보려고 어느 추레한 단란주점에서 난투극을 벌였다고 하자.

이런 규모에서 "신림 사거리의 건전한 상거래 질서"라는 "대의 명분"은 아무 힘도 없다. 하지만 전국을 흔드는 정도의 조직 폭력 간에 '전쟁'이 벌어질 때에는 이야기가 사뭇 달라진다. 전쟁을 걸려는 쪽은 여타의 세력들이 우호적이거나 최소한 중립으로 남아있도록 설득할 최소한의 대의 명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규모가 좀 더 커져 근대 국가 정도의 규모가 되면, 설령 무지랭이 몇 놈 죽이는 정도의 '소소한' 폭력이라 해도 "국가 안보"니 "공산주의 이념"이니 하는 추상적 화두를 휘둘러야만 하는 법이다. 대의 명분과 맨몸만을 무기로 내세운 간디의 비폭력 운동이 결국 영국 제국주의를 압도하게 된 것도 인도라는 나라의 엄청난 지리적, 문화적 규모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면 세계 안보 질서 정도의 규모로 확장되면 어떨까? 여기에서 근대 서양인들과 동양인들의 전쟁관이 미묘한 차이를 가지게 된 역사적 조건이 보이게 된다. 주권 국가들 간의 분쟁이라는 규모에서 전쟁에 대한 사고를 발전시킨 근대 서양인들과 달리, 중국이나 일본의 전쟁은 항상 "천하" 즉 그들 나름의 세계 질서라는 규모에서 사고의 틀을 결정할 필요가 있었던 셈이다

세계적 규모에서 한번 판을 벌여보려는 이라면, 그 명분은 항상 "세계 평화" 이하의 것일 수가 없다. 결국 역사의 역설적 현상 하나는, 큰 규모의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일수록 더 크고 보편적인 이상을 제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증유의 화력이 소모된 2차 세계 대전과 핵무기라는 상황을 연출한 냉전에서 충돌했던 세력들은 "세계 평화"에서 한 발 나아가, "사회와 개인의 인생 모두를 총체적으로 구원할 유일한 이념"이라는 차원까지 건드려야 했다. 그래서 노스트라다무스가 인류를 파멸시킬 것으로 예언한 '앙고르모아의 대왕'과 용화세계 세우러 오실 은진 미륵은 어쩌면 동일 인물일지도 모른다.

<사진2>

그런데 지금 미국인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들이 '악의 축' 운운하며 세계 평화의 위협을 통해 자신들의 이라크전을 정당화하는 시도는 그 허술함이 실소를 자아낼 정도이다. 가장 두드러진 희극적 요소는, '미국의 안보'와 '세계 평화'를 끝없이 혼동하는 것이다. 만번을 양보하여 후세인이 그렇게 위험한 짓을 벌일 '시한폭탄'이라고 해두자.

그런데 미국 밖에 직접적인 안보 위협을 느끼는 나라는 몇 개나 되는가? 오히려 세계 시민들의 중론은 미국이 전쟁을 벌이는 진짜 이유가 석유를 독점하려는 자국의 이기주의라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괘씸하게도 자국의 이익을 정당화하기 위해 세계 평화를 참칭하는 파렴치범일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세계 평화를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진짜 악의 축이라는 엉뚱한 방향으로 사람들의 생각이 이르고 있지 않은가.

몇 주전 CNN의 웹 싸이트에서는 북한, 이라크, 미국 중 "세계 평화의 최대 위협"을 뽑는 투표가 행해졌는데, 여기에서 미국은 다른 두 나라를 세 배 네 배의 점수로 제치고 당당히 1위를 먹고 말았다. 이 웃지 못할 희극은 세계 시민들의 미국 증오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 그와 동시에 CNN의 미국인들은 그런 기획을 내걸 정도로 상황 파악에 무지하다는 모순적 상황을 모두 말해준다.

여기에서 "인간 방패" 사건이 그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어떤 질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게 된다. 걸프전 이래 세계 평화의 수호자를 자칭해온 미국의 "대의 명분"이 파산한 정도를 넘어서, 진정한 세계 평화의 깃발을 지켜내면서 오히려 미국을 평화 파괴의 주범으로 낙인찍는 경쟁적 집단이 명시적으로 출현하고 만 것이다.

사실 이 집단이 정치 조직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 않으며 어떤 폭력도 행사하지 않는다는 점만을 뺀다면, 이들이 취하고 있는 행동은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말할 수 있다. 화약과 금속이 지배하는 무력의 세계에서 물론 이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보편적 인륜과 실천 이성의 법칙이 게임의 룰이 되는 그래서 누구의 주장이 더 윤리적으로 우월하고 합당한가만으로 승패가 갈리는 "대의 명분"의 세계에서 보면, 미국은 이미 시작도 하기 전에 일패도지의 상황에 처하였음이 확연하다.

<사진3>

이들에 맞서 미국이 취할 수 있고 실제로 몇몇 매체가 벌써 채택하고 있는 전술로, 이들을 '정신병적 극렬주의, 터무니없는 낭만주의' 등등의 채색을 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이도 별로 승산이 없어 보인다. 이는 투옥 고문 수배를 각오해야 하는 학생 운동가들을 "공부하기 싫어서 데모에 맛들인 놈들"이라고 매도하는 것만큼의 대중적 설득력도 갖기 힘들다. 이 운동을 이끄는 이 중의 하나인 켄 니콜스(Ken Nichols) 같은 이는 91년 걸프 전에 미군으로 참전한 전쟁 영웅이다. 전쟁이라는 끔찍한 상황에 대해 낭만주의적 망상에 빠질 만한 인물이 아니다.

우리 나라의 대표단에는 40대의 어머니가 10대의 딸과 나란히 참여하고 있다. 이 모녀에게 대를 물려 목숨을 던지고자 하는 소중한 어떤 신념이 있음을 은폐하고자 한다면, 결국 "모녀가 나란히 미쳤다"고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신념"이 자살 테러를 서슴지 않는 일부 회교주의자들의 그것마냥 보편성을 결한 극단적인 것으로 몰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들의 한 웹 싸이트(www.uksociety.org) 에 정신적 지주로 표방되고 있는 인물들은, 간디, 아인슈타인, 촘스키 등 20세기 인류의 가장 위대한 정신과 이성의 스승들뿐이며, 그 흔한 모택동 체게바라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 다음 전술은 압도적인 매체의 힘으로 '무시'하고 눌러버리는 것이다. 이 방법이 단기적으로는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런데 대의 명분 영역에서의 전쟁에는 매체의 크기와 같은 물리적 우위가 결정적 요소가 못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진정한 관건은 윤리적 정당성의 논리로서, 이것이 결여되어 있으면 큰 소리로 지구 곳곳에 메아리치고 있는 CNN도 조만간 '소음' 이상의 힘을 가질 수 없게 된다. 반면 질적인 우위를 갖춘 논리와 입장은 의외로 순식간에 널리 확산되고 영향력으로 물질화될 수 있다. 중국 내전이 한참일 때, 장개석 진영은 비행기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현상금을 내건 삐라를 살포한 적이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모택동 진영은 그 종이를 주워 그 뒷면에 토지 개혁 등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공산당 강령을 잔뜩 적어 그대로 다시 뿌렸다고 한다. 대의 명분 전쟁에서 핵심이 무엇인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사진4>

이 글은 "인간 방패" 운동가들과 미국을 놓고 이런저런 윤리적 교훈적 주장을 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 그 운동가들에게 냉소적인 이들에게 굳이 그들의 윤리적 우월성을 역설하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다. 그저 이 사건이 이번에 벌어질 듯한 이라크 전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짚어보려는 이들이라면 금융 기관 종사자이건 군사 전략가이건 꼭 감안할 필요가 있는 중대한 요소라는 것이다.

미국의 대의 명분의 취약함 때문에 미국의 일방적 군사 행동은 아직도 중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의 반대에 직면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대의 명분전의 전선에서 또 하나의 결정타 그것도 좀 더 심오하고 근원적인 차원에서의 결정타가 가해진 것이 현 상황이다. 이러한 전쟁의 '연성(soft)' 측면의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이루어지던 국제 정치 분석으로는 현재의 세계를 충분히 이해하기 힘들 것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그 "인간 방패"들 모두가 몸 성히 돌아올 것을 간절히 기원한다. 인류에게 아직 진화의 희망이 남아 있다면,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필자 소개**

필자 홍기빈은 현재 캐나다 요크대학교 정치학과 박사과정에서 국제정치경제학을 공부하는 소장학자로, 외국에 체류중이면서도 국내외를 넘나드는 다양한 이슈에 관한 통찰력 있는 글을 여러 온/오프라인 매체에 보내며 많은 반향을 얻고 있다. 프레시안 연재글의 제목 '현미경과 망원경'은 정치와 경제, 국제와 국내의 이분법을 넘나드는 글을 쓰고자 하는 그의 의지의 표현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외교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저서로는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책세상)와 논문「칼 폴라니의 정치경제학-19세기 금본위제를 중심으로」등이 있으며 역서로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外>(책세상) <자본론을 넘어서>(백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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