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자매지인 <월간 에머지>가 특정 후보 공개 지지를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에머지>는 12월호 권두 '편집인의 글-우리가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를 통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강위석 <에머지> 대표이사 겸 편집인은 이 글을 통해 "<에머지>의 창간 정신과 현재 시대정신의 핵심은 자유주의"라며 "자유주의 원칙에 가장 먼 후보를 하나씩 제외한 결과 미흡한 점은 많으나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강 편집인은 특정 후보 공개 지지 배경에 대해 "결코 특정 후보자의 당선을 위한 선거 운동에 있지 않고,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우리 에머지 자신에게 회귀한다"며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강 편집인은 "한국어를 읽는, 한국의 자유주의 지식인들을 독자로 소구(訴求)하는 이념(理念)과 지식(知識)의 월간지로서, 우리는 한국 역사가 걸어가고 있는 자유의 길이 또 한번 만난 중요한 갈림점을 눈을 감고 지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강 편집인은 "남북 관계 정책의 '햇볕' 착오, 대중인기영합과 결과적 평등 정책, 정권의 독단적 술수와 부패, 민영화와 글로벌화의 지체(遲滯), 이 네 가지 중점에 관하여 유권자가 현 김대중 정부의 공과(功過)를 심판하고 새로운 갈 길을 결정하는 것이 이번 선거가 가진 의미"라고 이번 대선을 바라보는 관점을 밝혔다.
***중앙일보 "사전협의 없었다. 문책하겠다", 선관위 "법적 검토 중"**
이같은 <에머지>의 특정후보 공개 지지는 중앙일보 측과 사전에 협의를 거치치 않은 것이어서 중앙일보 측의 대응이 주목된다. <에머지>는 99년 9월 창간된 월간 교양지로, 주식의 50%를 중앙일보가 소유하고 있다.
강 편집인은 이 사실을 가장 먼저 보도한 <기자협회보>와의 인터뷰에서 "특정 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이 아니고 잡지 이념을 밝히는 문제인 만큼 법에 걸리더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후보 지지 문제는 <중앙> 등 누구에게도 상의하지 않고 단독으로 결정했다"며 "대표이사 발행인으로서 책임을 지겠다. 문제가 생겨 주주가 나가라면 나가면 된다"고 말했다.
이제훈 중앙일보 사장은 <기자협회보>를 통해 "사전이든 사후든 전혀 협의가 없었다. 홍석현 회장이 대선에서 엄정 중립을 지킬 것을 수 차례 강조했는데 이를 어긴 것은 묵과할 수 없다"며 "다른 주주와 협의해 (강 편집인을) 문책하겠다"고 밝혔다.
또 <에머지>는 정간법에 등록된 매체이기 때문에 선거법 위반 여부를 둘러싸고 법적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현재 관련 법조문을 검토 중이며, 과거 선례 등을 면밀히 검토해 조만간 입장을 밝힐 계획"이라고 말했다.
***오마이뉴스 "금주중 공개 지지 여부 결정"**
<에머지>가 국내 언론사상 처음으로 특정 후보 지지 의사를 밝힘에 따라 언론사의 특정 후보 공개 지지에 대한 논란도 더욱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는 올해 초 이번 대선에서 특정 후보 지지를 공개 표명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 <오마이뉴스> 정운현 편집국장은 "현재까지 연초에 밝힌 입장에서 변한 것은 없지만 고민중"이라고 밝혔다.
정 국장은 "기자회원 2만5천명 및 일부 독자회원, 상근 임직원, 언론계 종사자, 저명인사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했다"면서 "선관위에 유권해석을 의뢰해 오늘(11일) 중으로 결과가 나오기로 했는데 결과가 도착하면 간부회의를 거쳐 이번주 중으로 특정 후보 공개 지지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 국장은 "공개 지지를 결정했을 경우 선거 3일전 지지 후보를 칼럼 등을 통해 밝힐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강 편집인의 글 전문이다.
***우리가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
월간 에머지는 이 글을 통하여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가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를 밝히려고 한다. 우리가 지지하는 후보자를 굳이 발표하는 이유는 결코 특정 후보자의 당선을 위한 선거 운동에 있지 않다.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우리 에머지 자신에게 回歸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누구를 대통령으로 지지하느냐를 가지고 오히려 우리 자신의 이념과 현실 판단을 밝히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한국어를 읽는, 한국의 자유주의 지식인들을 독자로 訴求하는 理念과 知識의 월간지로서, 우리는 한국 역사가 걸어가고 있는 자유의 길이 또 한번 만난 중요한 갈림 점을 눈을 감고 지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에머지는 1999년 9월의 창간호에서 생존, 자유, 창조, 이 세 가지를 기치로 내걸었다. 자유는 에머지의 體다. 그 당면한 用은 질서와 평화의 安保, 경제적 성취, 지식과 문화의 創發, 청렴한 민주적 법치다. 다른 말로 하면 자유주의적 생존과 창조를 향한 실천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대통령 후보로서 지지한다면 이 體와 用에 부합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은 당연하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생존, 자유, 창조의 갈림 점이다. 남북 관계 정책의 '햇볕' 착오, 대중인기영합과 결과적 평등 정책, 정권의 독단적 술수와 부패, 민영화와 글로벌화의 지체(遲滯), 이 네 가지 중점에 관하여 유권자가 현 김대중 정부의 功過를 심판하고 새로운 갈 길을 결정하는 것이 이번 선거가 가진 의미다.
현재라는 것은 功을 기르고 過를 정정(訂正)함으로써 미래와 연결된다. 이 정정에는 어떤 하나의 단순하고 지배적인 원리가 대두(擡頭)해 있을 때가 많다. 그런 원리를 우리는 시대 정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보기로 한국의 현재는 '자유'가 그 시대정신이다. 앞에 말한 네 가지에 관련된 과오는 모두 '자유'라는 하나의 단순한 원리로 복귀함으로써 정정될 수 있다.
이 네 가지 가운데서도 현재의 한국이 당면한 가장 긴급하고 긴요하며 나머지 다른 문제를 대표하는 문제가 남북 관계라고 생각한다. 자유는 자유를 내외의 파괴적 反자유세력의 침범으로부터 지키는 것, 자유를 신장시키는 것, 그리고 자유가 제공하는 시공(時空) 속에서 개인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생명으로 삼는다. 이 가운데서 남북문제는 남한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그 초점이다. 통일은 말할 것도 없고 평화마저도 남한의 자유를 지키는 일에 비하면 그 우선 순위가 밀려난다.
한국의 개화기 이후 역사는 자유화라는 큰 물줄기를 타고 흐르고 있다. 그것은 5천년 동안 동아시아적 농업의 정체된 생산 방식이 만들어 낸 억압적 제도로부터의 해방 운동이다.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순탄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혼돈과 치욕의 부정적 물살과 동반하여 흘러 왔다. 조선왕조의 패망과 한일 합방, 남북 분단과 6·25 전쟁, 북한의 스탈린주의 정치, 남한의 이승만, 박정희 독재 정치 등이 부정적 물살의 현실적 모습이다. 그러나 적어도 남한에서는 자유의 물줄기가 이 부정적 물살을 중요한 고비마다 극복하는 변증법적 과정을 이룩해 냈다.
이승만 정부는 그것이 심혈을 기울였던 교육 발전과 거기서 양성된 젊은 자유 지성인들의 4·19 혁명에 의하여 무너졌다. 역설적이지만 4·19 혁명은 남북간 대결에서 이승만이 지도한 자유주의의 승리였다. 이승만은 패퇴함으로써 승리한 그런 사람이 되었다. 발전이란 것은 스스로를 파괴하면서 스스로를 창조하는 것 아니던가. 이승만은 이 논리의 상징으로 삼을 만하다.
그가 남한 단독 정부를 선택한 것은 통일보다는 자유를 선택한 것이었다. 패배한 것은 과거가 그에게 남겼던 유산으로서의 나라 형편과 시대 상황이었다. 이 점에서 이승만의 功을 過보다 더 높여야 할 수 있을 만큼 역사의 전모(全貌)가 보이는 시간의 거리에 우리는 지금 와 있다. 박정희의 5·16 군사 정권은 그것이 성취한 경제 개발에 의하여 무너졌다. 그는 수출주도형 경제개발 전략을 택했는데 이것은 수입대체형 전략과 대조를 이룬다.
수입대체형이 국가주도적이고 대외폐쇄적인 데 반하여 수출주도형은 불가피하게 민간기업의 자유로운 창조력과 대외 개방을 결국 기본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한 가지 점은 2차대전 후 수입대체형으로 경제 개발에 성공한 경제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유와 개방 대신에 간섭과 폐쇄에 의한 경제 개발은 불가능했다는 뜻이다. 박정희는 군사 독재자였으나 적어도 경제에서는 크게 보아 자유주의 정책을 폈고 자유 시장 경제로 향해 갈 정책을 폈다.
그는 이승만의 경우와 닮은꼴로 자신의 독재가 자신의 자유에 의하여 살해당한 사람이라고 은유(隱喩)할 수 있다. 박정희의 공과(功過)를 따질 때도 이승만의 경우와 같이 실패한 독재와 성공한 자유를 저울에 달아야 할 것이다. 한국 경제 개발의 성공은 그를 냉혹한 독재자로서보다 김일성 체제와의 경제 발전 경쟁에서 이긴 자유의 리더로서 더 저울 눈금이 기울어지게 한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는 자유로 가는 미래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그것과 머나먼 격차가 있다.
그러나 모든 사회에서의 자유의 역사가 그렇듯 한국에서도 자유가 싹이 트고 자라고 열매를 맺은 것은 지도자의 노선이 아니라 인민人民의 저항 덕분이었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4·19혁명이나 부마(釜馬)사태가 없었던들 독재자로서만 남게 되었을 것이다.
人民이라는 말은 自由人으로서의 個人과 이런 자유인들이 이루는 共同體의 共同體民, 이 두 개념의 합성(合成)이다. 공동체민은 洞民, 區民, 邑民, 郡民, 市民, 道民, 國民으로 그 멤버십이 중층적(重層的)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유인으로서 개인이며 이런 개인은 자유인들이 모인 공동체를, 그런 공동체민이 되기를 소원한다. 이 소원이 독재를 무너뜨리고 자유의 역사를 만드는 원동력이다.
자유의 역사 속에서 가장 고귀한 지혜는 자유가 자신의 중용(中庸)을 발견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자유에도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지혜, 자유가 '남에게 危害를 가해서는 안 된다'라는 이른바 밀Mill의 '위해원칙'이 바로 자유의 中庸이다. 뒤집어 말하면 남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 개인의 자유를 공동체나 다른 개인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밀의 주장이기도 했다.
'남이 나에게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는 것은 나도 남에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孔子는 仁이라고 정의했다. 이것을 '仁의 원칙'이라고 부르기로 한다면, 인의 원칙과 위해원칙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유교 최고의 덕목인 인과 자유는 같은 것이다. 다만 위해원칙이 공동체가 개인에게 가하는 금지에 착안하고 있다면 인의 원칙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발(自發)에 착안하고 있다. 仁의 원칙은 위해원칙보다 이 점에서 그 목소리가 더욱 진실하다 할 것이다.
이와 대조되는 개념인 적극적 자유는 루소에서 마르크스로 그 맥이 이어져 왔다고 하이에크는 보고 있다. 일할 자유는 있어도 일자리가 없다든지, 부자가 될 자유는 있어도 평생 빈곤에 헤맨다고 해서야 그런 자유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적극적 자유를 옹호하는 배경이다. 적극적 자유는 근본적으로 결과적 평등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런 적극적 자유는 홉스가 말한 '萬人의 萬人과의 투쟁'을 불러일으키거나 스탈린 식의 중앙명령 체제식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홉스의 진단은 공동체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 리바이어던 독재를 만들었고, 사회주의적 명령 경제 처방은 빈곤의 평등화만을 만들었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눈으로 최근의 역사를 통하여 확인한 바 있다.
남한 체제는 길게 보면 확실하고 꾸준하게 이 소극적 자유를 진전시켜 왔다. 자유주의자는 이 소극적 자유를 이념으로 갖는다. 법치(法治)와 민주주의가 국내적으로 이런 소극적 자유주의를 보장하는 정치적 제도다. 법치의 목적은 개인의 소극적 자유를 보호하는 데 있다. 우리가 그냥 자유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소극적 자유다. 1989년 이후 소련 체제가 붕괴하면서 이런 소극적 자유에 맞서 적극적 자유인 결과적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가 세계에서 사라졌다. 우리는 이것을 냉전의 종식이라고 부른다.
反자유주의적 남한 지식인들 중에는 냉전이 종식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자유주의 이념을 주장하는 것은 공허한 논쟁, 또는 시비를 걸기 위한 분열적 도전이라고 비난하는 일파가 있다. 이들의 말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결코 냉전이 끝나지 않았다. 북한의 폐쇄적 민족주의 플러스 스탈린식 사회주의가 남한 인민의 평화와 자유를 위협하는 정도는 오히려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 미사일 개발은 소련의 해체 이후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재래식 무기인 장거리 고성능 대포는 서울을 향하여 전진 배치하였다. 북한 동포의 기아 참상은 세계적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유례없는 부자 세습이 이루어진 것도 미소 냉전이 종식된 이후의 일이다.
북한 인민은 굶기고 남한 인민은 위협하기를 일삼는 것을 보면 북한 정권의 민족주의는 민족의 번영과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을 자기네 독재 체제에 묶어 두려고 동원한 기만술(欺瞞術)로 보인다. 독재적 사회주의 체제의 운명은 동구 공산권이 자멸한 것, 중국이 살기 위하여 시장경제로 돌아서서 번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反자유주의적 남한 지식인 가운데는 앞에서 말한 냉전종식론 이외의 다른 이유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 자유주의는 서구의 사상이므로 우리 문화에는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아시아적 가치는 공동체주의에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서구에서도 불과 300년의 역사밖에 가지지 않았다.
자유주의는 과학의 발달,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발달, 특히 최근에는 소비자의 자유 때문에 확장되어 가고 있다. 자유주의는 서양에서 생겨났지만 자유는 모든 인간의 공통적이고 가장 절실한 소원이다. 또 한 가지 反자유주의는 현대성(modernity)의 효력 상실을 주장하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계열이다. 그들은 모더니티의 근거인 이성(理性)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한다. 자유주의는 합리주의 사상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이성 만능이 부정되면 자유주의도 부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 주장에 대하여는 우리도 공감하는 바 크다.
그러나 모든 사상은 새로운 사상의 출현을 맞아 수정되고 발전한다. 하이에크는 특히 이성의 오만에 대하여 비판하고 자생적 질서를 강조한 자유주의자다. 오히려 이성의 권위를 가장 신뢰하는 사상으로서는 마르크스주의만한 것이 없다. 그리고 사람에게 욕망이라는 것이 있는 한 자유는 사람의 천성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 점이 자유주의의 가장 소박하면서도 가장 단단한 기초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는 자유의 보편성을 믿는다. 서구와 아시아, 과거와 현재를 묻지 않는다.
남한의 자유주의자도 평화적 남북통일을 "꿈에도 소원"한다. 다만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자유를 희생하여 얻는 통일이 아니라 자유를 더 잘 보전하고 더 크게 기르는 통일, 그런 통일을 소원한다. 북한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실패한 사회주의 환상과 독재적 政權慾을 포기하고 자유와 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는 것은 가장 바람직한 통일의 길이다.
그렇지만 북한 정권은 이런 통일만은 한사코 배격하고 있다. 게다가 남북 통일은 남북한 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이것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이 네 강국의 이해가 걸려있는 일이다. 가정컨대 북한이 민주주의적 총선거에 의한 통일을 찬성하고 나오더라도 중국과 러시아가 이를 반대하면 이것을 해결하는 데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생길 것이다.
통일보다 한 단계 낮은 代案은 북한과 남한이 평화스럽게 공존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먼저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폐기하고 재래식 무기 배치를 후방으로 돌려야 한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위협을 일삼는다든지, 버마 랑군의 아웅산 사건과 여객기 공중 폭파 등의 테러, 남쪽 해군 함정에 대한 포화 공격을 거듭해서는 평화 공존은 불가능하다.
통일과 평화는 현재로서는 택일적 대안이다. 통일을 추구하면 평화가 깨어지고 평화를 유지하자면 통일은 당분간 제쳐 두어야 할 것이다. 평화가 오래 정착되면 그 평화가 통일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통일을 위해서라도 당장은 통일은 이야기하지 말고 오직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옳다.
평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반도에서 군사력의 상호 감축이 필요하다. 북한이 군사력 상호 감축에 응하지 않으면 평화유지를 위한 남한의 대안은 남한의 무력에 의한 북한의 도발 억지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의 남북 관계에서 우선 순위는 분명하게 자유가 첫째고, 그 다음에 평화와 통일이 뒤따른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북한 인민과 북한 정권을 구별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 정책'은 결코 북한 정권의 외투를 벗기지 못하는 것으로 판명났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번 선거의 대통령 후보들 가운데서 분명하게 자유주의를 최고의 이념으로 내 건 사람을 발견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 실패의 첫째 이유는 사상적으로 자유주의를 이념으로서 분명하게 가진 후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 사실처럼 실망스러운 것은 없다. 둘째 이유는 표를 얻기 위한 전략만 좇는 나머지 '스승도 따르고 사랑도 따르는' 두리뭉실한 실천 공약을 남발하고 있는 데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주의 원칙에 가장 가까운 후보를 한 사람 고르는 방식 대신에 자유주의 원칙과 가장 먼 주장을 가진 후보를 하나씩 제외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렇게 하여 남은 두 후보가 이회창 후보와 정몽준 후보였다. 이 두 후보 가운데서 하나를 제외하는 것은 그 주장의 불분명성을 기준으로 삼았다. 남북관계, 자유주의 기업, 법치적 민주주의, 부패척결, 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자유주의 원칙이 덜 분명한 한 사람을 제외하였다. 그 결과 우리는 미흡한 점은 많으나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강 위 석
월간 에머지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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