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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대통령, 전작권 환수는 아버지의 비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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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朴 대통령, 전작권 환수는 아버지의 비원이었다"

[정세현의 정세토크] 남북관계, 이대로 가면 15년 전으로 후퇴

개성공단 재개를 위한 남북 실무회담이 사실상 결렬된 가운데 전작권 환수 연기 문제까지 공론화됨으로써 앞으로 당분간 6자회담 개최 등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가동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정세현 원광대 총장(전 통일부 장관)이 전망했다.

전작권이 미국에 계속 남아 있는 한 평화협정 논의는 시작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며, 이 경우 북한이 6지회담 등에 응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의 공언대로 개성공단 재개가 무산돼 북한군이 다시 개성으로 내려올 경우 한반도의 긴장은 고조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한국의 대미 안보의존은 더욱 심화되고 일본의 우경화는 가속화돼 동북아 전체의 긴장도 높아질 것으로 그는 내다봤다.

그는 개성공단 문제와 관련해 협상 도중 회담 대표를 바꾸는 등 박근혜 정부가 북측에 대해 강경 자세로 일관하고, 여기에 전작권 환수 연기 문제까지 제기하고 있는 것은 다분히 국내정치에 대한 통제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분석하면서 한국정부의 현재와 같은 입장이 계속될 경우 남북관계는 1998년 이전의 대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고 우려했다.

특히 작전권 환수 문제는 현 박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추진된 것으로 4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1차 북핵위기 직후인 1994년 평시작전권이 환수됐고, 북한의 핵실험(2006년 10월) 이후 2007년 전작권 환수가 한미간에 합의됐다는 사실로 미루어 북한핵을 이유로 전작권 환수 연기를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지난 2일 진행된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지난 7월 17일, 한국 국방부가 미국에게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시기를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20012년 4월에서 2015년 12월로 한 번 연기 됐던 환수 시점을 한 번 더 미루자는 것이었습니다. 국내에서는 NLL 대화록 문제로 여야가 강경 대치하고. 남북 간에는 개성공단 재개 관련 실무 회담이 사실상 결렬된 가운데 느닷없이 전시작전권 환수 연기 문제까지 제기돼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정세현: 개성공단 재개 실무회담의 결렬과 전작권 환수 시점 연기는 사실상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국방부 장관이 전작권 환수 시점 연기 요구를 맨 먼저 제기한 것처럼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데, 박근혜 정부의 스타일로 봐서 '감히' 국방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독자적으로 그런 발언을 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이미 한미정상회담 때 그런 것에 대한 운을 띄웠을 것 같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 한반도 안보상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제대로 실천에 옮기지 못하게 된 데에는 북측의 책임도 있습니다. 남측 새 정부 출범을 전후해서 핵실험 등 요란한 무력시위를 하지 않았습니까? 박근혜 정부로선 대선 과정에서 남북관계를 MB정부 때보다는 잘 해보겠다고 공약을 했기 때문에 공약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을 텐데, 정권 초부터 북한이 판을 흔들어 대니 어떻게 해볼 재간이 없었던 거죠.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에 학자나 외교관 출신들이 많이 있었고 그분들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만들었다는데, 정부 출범 초기 북한의 태도를 보면서 군 출신 등 강경파 측에서 '이게 뭐하자는 거냐' 하는 반응들이 3~4월경 정권 내부에서 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즉 대북 강경파의 목소리가 커진 상황에서 남북대화도 '원칙'에 얽매어 진전을 못 보게 되었다고 봅니다. 남북관계의 경색이 기정 사실화되어가면서 MB정부가 2015년 12월 1일로 이미 한 차례 연기 해놓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시기를 더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됐고, 그런 분위기가 점점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박 대통령도 강경파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게 된 것 같습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가능성을 열어놨기 때문에 국방부 장관도 전작권 환수 시기 연기를 미국 측에 공개적으로 제안할 수 있었겠죠.

전작권 환수 연기론, 미국엔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격

지금 미국에서는 전작권 환수 시기에 대해 '원래 합의대로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게 본심은 절대 아닐 겁니다. 만약에 전작권 환수 시기 연기를 미국이 먼저 요구했다면, 우리는 대신 이러이러한 것들을 해결해달라고 미국에 요청할 수 있었겠죠. 그런데 거꾸로 우리가 연기를 요청하고 있으니, 미국으로서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셈입니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비율 협상이 올해 시작됩니다. 이런 시기에 한국 측에서 이런 요구가 먼저 나오니 미국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온 셈이죠.

미국은 일단 원래대로 반환한다는 식으로 연막을 피우다가, 못 이기는 척 연기 요구를 들어주면서 그 대가로 주한미군 방위비 증액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MD(미사일 방어망), 차세대 전투기 등 고가의 첨단무기를 판매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의정부나 동두천 주둔 미군의 평택 이전 비용까지도 거의 모두 우리한테 떠넘기려 할 겁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미 합참의장이나 주한미군사령관 지명자가 의회 인준청문회에서 한국군의 전작권 반환은 원래 일정대로 추진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한미 군사협상에서 미국의 몸값을 높이기 위한 협상전술의 일환이라고 봅니다.

전작권 환수 연기되면 평화협정 체결 불가능, 6자회담 개최도 어려워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전작권 환수 시기가 늦어지면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평화협정 체결 문제가 꼬이게 됩니다. 정전체제 하에서 주한 미군사령관에게 넘어간 작전통제권을 미국이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은 정전체제를 현재 상태로 유지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기왕에 2012년을으로 예정됐던 환수 시점이 2015년으로 연기했는데, 한 번 더 연기한다면 최소한 3년은 더 연기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북핵 문제 해결의 핵심 요소인 평화협정 체결 문제는 적어도 앞으로 4-5년간은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물론 그 틈새시간에 북핵능력이 더 커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연기 움직임은 국내정치의 보수화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국내정치의 보수화 추세 속에서 남북대화에서도 북한의 사실상 항복을 요구하다가 실무회담마저도 결렬되었다고 봅니다. 이처럼 남북관계가 경색되어가는 마당에 미북대화도 어려워졌다고 봅니다. 결과적으로 6자회담은 열리기 어렵게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일본도 이번 참의원 선거 압승으로 3년간 정권유지가 보장된 아베 정권하에서 헌법 개정을 하려 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북아 정세가 안정되기보다 불안해져야 한다는 점에서 일본은 6자회담 같은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겁니다. 즉 북한의 군사위협을 빌미로 헌법 개정 등을 밀어붙일 수 있을 테니까요.

북한은 그 동안 핵카드를 들고 미북 수교, 평화협정 체결, 경제지원 이 3가지를 요구해왔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가시권에 들어와야 회담에 나올 텐데, 지금 전작권 문제를 놓고 한미가 다시 군사협력을 강화해 나가다 보면, 현 정전체계가 그대로 간다는 얘기이기 때문에 북한도 지난 달까지와는 다른 방향에서 대책을 세우고 있으리라고 봅니다.

개성 실무회담 결렬과 전작권 연기가 부를 악순환의 끝은?

프레시안: 최근 NLL논란에서 보듯 국내 정치는 보수우경화되는 추세가 뚜렷합니다. 또한 보수우경화되는 국내정치 추세가 박근혜 정부의 정치적 통제력을 강화시켜나가는 상황과 맞물리면서 북한의 완전 항복을 요구하는 식으로 회담을 운영하다가 남북관계가 경색국면으로 넘어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앞으로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정세현: 개성관련 6차 남북실무회담이 사실상 결렬되자 북한이 개성공단을 군사지역화 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개성공단이 생기기 전 그 자리에 있던 6만여 명 규모의 군대가 다시 온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 일은 금강산 쪽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봐야 합니다. 남북 간 화해협력 진전 과정에서 금강산관광 지구와 개성공단이 생겨나면서 10~15km 북으로 후퇴했던 북한의 군대가 다시 1998년 이전 원위치로 내려오면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급격하게 고조되지 않겠어요?

그러면 북한의 군사 위협 핑계를 대면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연기가 국민여론 차원에서도 더욱 탄력을 받게 될 겁니다. 남북간의 긴장은 고조되고 이에 따라 한미동맹 강화라는 명분 아래 미국과 한국 군산복합체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겁니다. 우리는 미국의 비싼 무기를 사야 할 것이고, 무기 로비스트들은 많은 돈을 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국방비도 늘려야 할 겁니다. 지금은 우리 국방비가 국가예산의 10% 미만 9% 정도 되지만 20%까지 올라갈 수도 있겠죠. 매년 7%씩 증액해야 한다고 국방부가 주장하는데...그렇게 해서 국방예산이 증액되면 그만큼 국방부 위상도 높아지고 군 원로들, 현역 군인들의 존재감도 커지겠죠.

안보가 강조되는 가운데 남북화해협력이니 통일이니 하는 말도 꺼내기 어려워질지 모릅니다. Peace Keeping만 강조되고 Peace Making은 말도 못 꺼내는 상황에서 통일부는 존재감이 현저하게 떨어질 겁니다. MB정부 초 통일부를 없애느니 마느니 하더니, 결국 있어도 없는 것처럼 돼가는 군요. 통일부가. 통일부에서 잔뼈가 굵었던 사람으로서 가슴 아픕니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연기, 박정희 전 대통령이 통곡할 일

프레시안: 작전통제권 환수 문제는 1987년 대선에서도 공약으로 제시됐던 것인데 26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연원과 과정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시지요. 독자들을 위해서...

ⓒ프레시안(최형락)
정세현:
작전통제권 환수는 사실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하려고 했던 일입니다. 6.25가 난 뒤 한 달도 안 된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 군대의 운용에 관한 모든 권한을 클라크 주한 미군 사령관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이 작전통제권 환수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북한군 특수병력 31명의 청와대 습격사건입니다. 대통령을 살해하려 했으니 엄청난 사건이었죠. 당연히 우리는 보복을 하려 했지만.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분해도 어찌해 볼 방법이 없었던 거죠.

그런데 그 이틀 후인 1월 23일 미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근해에서 정보수집 활동을 하다 북한에 나포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곧바로 항공모합을 급파하고 전투기를 동원하는 등 무력시위를 하면서 북한을 위협했습니다. 물론 북한은 그 배를 돌려주지 않았습니다만, 한국 대통령이 죽을 뻔했던 사건에 대한 우리 측 군사행동에 대해서는 자제하라고 했던 미국이 자기네 첩보함이 나포되니까 요란하게 군사행동을 하는 걸 보면서 박정희 대통령과 당시 군 지도부가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에 대해선 여러 얘기를 할 수 있지만 미군 수중에 있던 우리 군의 작전통제권을 찾아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이후 자주국방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군사력을 강화해 나간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국민의 안보를 책임져야하는 군통수권자로서 책임감과 자주의식이 있었다고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군사주권이 없는데 무슨 국가주권을 똑바로 세울 수 있겠습니까? 국가주권의 핵심은 군사주권입니다. 그 다음이 경제주권이나 외교주권, 문화주권 정도 되겠죠. 나라가 주권을 잃어가는 순서도 그것 아닙니까? 조선조 말, 그 순서로 주권을 일본에 내주었지 않습니까?

그렇게 1960년대 말 70년대 초 한국이 군사주권을 찾아오기 위한 노력을 하게 만든 건 미국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1.21 사태 때는 미동도 않고 한국 정부에게 자제할 것을 요구하던 미국이 자기들 배가 나포되자 군사적 조치를 취하려고 하는 것을 보고 군사주권 회복을 결심하지 않는다면 정상이 아니죠. 그래서 박정희 정부는 1972년경부터 '자주국방'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국방 예산을 대폭 늘리고 박 대통령 친필로 쓴 '자주국방' 입간판을 국방부 옥상에 높이 세워 놓았었습니다. 서울역이나 남산에서 보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컸었어요. 한 때는 우리 국방비가 국가 예산의 20~30%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그때로부터 4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북한은 경제적으로 160위권 국가로 전락했고, 우리는 G15 반열에 올랐습니다. 북한 GDP총액이 우리 국방예산의 3분의 1 수준 쯤 될 겁니다. 우리 군사투자비는 지금 세계 10위권이고 병력도 그 수준은 되는데, 북한이 핵실험 3번 했다고 해서 사실상 핵을 가진 걸로 전제하고 주한미군 사령관이 계속 우리 군대를 지휘해야 한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군 지휘관을 지내고 국방부 고위직을 지낸 분들이 지금 와서 아직도 우리 힘만으로는 북한을 막을 수 없으니 미군이 계속 우리 군사주권을 행사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만약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 돌아온다면 통곡할 일입니다.


1987년 대선 때 노태우 후보 작전권 환수 공약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가 불편해진 면도 있었습니다만, 1987년 대선 때 노태우 후보가 작전통제권을 찾아오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던 것은 의미가 큽니다. 4성장군 출신인 노태우 후보가 작전통제권을 찾아오겠다고 한 것은 '찾아와도 되겠다. 찾아와도 별 일 안 난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즉 작전통제권을 한국군이 갖고 있어도 북한이 도발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본 것이죠. 현실적으로 작전통제권이 우리에게 넘어와 있다면 북한이 소규모 도발도 함부로 못 할 겁니다. 우리가 바로 반격을 가할 수 있으니까요. 예컨대 전작권이 우리에게 있었다면 지난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 없었을 겁니다.

1987년 대선 당시 노태우 후보로서는 1968년 1‧21 사태 때 미국이 우리의 군사행동을 제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요. 1983년 10월 랑군 폭파 사건(버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을 겨냥한 북한 공작원의 폭탄테러로 이범석 외무 장관 등 외교사절 17명이 사망) 때 전두환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군사적 보복 조치를 취하려 했지만 미국이 제지하는 것 또한 목격하지 않았겠어요? 북한의 도발과 군사적 위협을 막고 필요한 응징을 제때에 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작전통제권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니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겠죠.

그런데 막상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그 공약을 이행화지 못 했습니다. 그걸 추진할 수 있을 만한 힘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권 환수를 대선공약으로 내걸었다는 사실은 그때부터도 한반도 군사상황의 실체적 진실은 이미 작전권을 환수해 와도 별문제 없을 만큼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봐야 합니다.

김영삼 정부에서 반쪽만 환수하고도 '제2의 창군' 의미 부여

1994년 김영삼 정부 시절에 작전통제권 문제가 부분적으로 해결이 됩니다. 1994년 12월 1일부로 우리 합참의장이 우리 군에 대한 평시작전권을 환수했습니다. 전시작전통제권은 아직 주한미군사령관 수중에 있는 채 평시작전권만 환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 김영삼 대통령은 "44년 만에 작전권을 환수한 것은 우리 자주국방의 기틀을 확고히 하는 역사적 사실이며 제2의 창군(創軍)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기뻐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보수 정치인이지만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우리나라 주권과 관련해서 비원(悲願)처럼 내려왔고,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대선공약으로 내걸 만큼 중요한 과제였던 작전통제권 환수, 그것도 절반의 환수밖에 안되는 평시작전권 환수를 그렇게 높이 평가했었습니다.

지금 다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연기를 얘기하면서 북핵문제를 명분으로 내세우는데, 한미간에 평시작전권 환수 문제가 논의되던 시점에도 북핵문제는 있었습니다. 1993년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1차 북핵위기가 터졌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평시작전권을 한국에 반환한 것은 그렇게 해도 별일이 없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 아니겠어요? 미국이 평시작전권을 한국에 돌려줘도 북한이 전면전을 일으킬 가능성이 없다고 본 겁니다. 당시 북한은 경제적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을 때였고, 그 정도 경제력이라면 전쟁 지속 능력은 물론 전쟁 도발 능력도 없을 거라고 봤을 겁니다.

우리 국방부는 1994년 12월 1일 평시작전권을 환수해온 이듬해인 1995년에는 2000년까지 전시작전통제권까지 환수하겠다고 발표했었습니다. 막연한 기대감으로 그런 발표를 했을까요? 미국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있었고, 우리 국방부가 그걸 감지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한편, 미국으로서는 '한국의 군사력도 이제 커졌는데 우리(미국)가 평시 작전통제권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한반도에 발이 묶여서 되겠는가?' 하고 판단했을 겁니다. 그런 판단과 계산이 있었기에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부시 정부 시절 럼스펠드 장관 때, 주한미군을 아시아의 신속기동군으로 재편하기 위해 전시작전통제권 마저 한국에 돌려주자는 얘기가 나왔을 겁니다. 한국의 국력이 북한에 비해 월등히 커졌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또 국제 정세 상 러시아나 중국이 북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김영삼 정부를 지나고 김대중 정부 시기 남북 화해협력정책을 추진하면서 남북 간에는 화해무드가 조성됐지만, 1998년 8월에 소위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것은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미북간 화해분위기를 훼방 놓기 위해 언론에 정보를 흘린 공작의 일환이었다고 봅니다. 클린턴 정무와 김대중 정부의 대북 화해정책을 반전시키려는 일종의 음모였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다가 북한이 8월 말에는 일본열도 상공을 가로 질러 태평양 족으로 1600여 kM 중거리 로켓을 발사해 버렸습니다. 지하 핵시설 의혹으로 가뜩이나 국제여론과 대북정서가 악화되어 있는 마당에 북한이 참으로 물색없는 짓을 한 겁니다.

이 두 사건 때문에 미국의 대북정책을 전면 재검토하기 위해 페리 대북정책 조정관이 임명되었고, 그가 주도해서 판을 새로 짜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에서는 전작권 환수를 얘기하는 것이 적절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페리 프로세스'를 통해 한반도 냉전구조를 해체하는, 전시자전통제권 환수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했기 때문에 굳이 작전권 얘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북한 핵실험 후 최고 강경파 미 국방장관이 인정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부시 정부가 북핵포기를 유도하기 위해 대북압박을 강화해 나가던 2006년 10월, 북한은 1차 핵실험으로 미국의 대북압박에 대응했습니다. 그런데 북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북한이 1차 핵실험까지 한 이후인 2007년, 한미 국방 당국은 참으로 중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주한미군사령관이 1950년 7월 14일부터 가지고 있는 한국군에 대한 전시작전통제권을 2012년 4월 17일부로 한국이 환수한다는 데 합의했습니다. 7월 14일에 넘어갔기 때문에 그 숫자를 뒤집어 놓은 4월 17일에 환수하기로 한 겁니다.

2007년 그러한 결정을 한 미국의 국방장관은 럼스펠드였습니다. 럼스펠드가 누굽니까? 북핵문제에 대해서 가장 강경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동맹국의 요구도 미국의 국익에 맞지 않으면 가차 없이 내치는 강경파였습니다. 럼스펠드가 그런 결정을 할 때 시기적으로는 북한이 핵실험에 성공한 뒤 북한의 핵위협론이 고조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럼스펠드가 이끄는 미 국방부가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에 반환하기로 했던 건 북한의 군사능력에 대한 미국 측의 냉정한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겁니다. 지금 미국은 북한 군사력이, 핵과 미사일을 제외하면, 남한의 40% 정도 되는 걸로 보고 있습니다. 즉 남북이 단독으로 대치한다 해도 남의 재래식 군사능력으로 북한의 도발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북한의 실력이 그 정도 된다는 것을 미국도 알고 있는 데 북한 군사력을 핑계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연기를 주장하는 건 사실은 말이 안 되죠. 이제는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전시작전권을 찾아오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북의 핵위협에 대한 판단이 부시나 럼스펠드 같은 네오콘보다 강한 사람들이 미국에 또 있겠습니까? 그들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합의한 2007년 당시에 6년 후, 또는 10년 후의 상황을 예측 못 했겠습니까? 미국은 남의 나라 국력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전망하는 데 세계 최고의 정보력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들은 북한이 앞으로 도발하지 못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반면, 주한미군 사령관이 한국군에 대한 전시작전통제작권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는 미군의 신속기동군화가 어렵다고 판단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반도 외부에 미국이 개입해야할 사태가 발생하면 주한미군을 파견했다가 해결되면 돌아오고, 또 일이 생기면 내보내는 식으로 주한미군을 활용하려고 전략구상을 했겠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에 돌려주려고 했을 것입니다. 미국의 신속기동군이 중국 외곽에서 움직이면서 압박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프레시안: 그렇다면 현 정부에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연기를 추진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이라고 봐야 할까요

정세현: 국내정치라고 봅니다. 국내정치를 보수화시켜 나감으로써 앞으로 진보진영의 정권 장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큰 그림의 일환이 아닌가 싶습니다. NLL 문제를 터뜨려서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진보진영에게 국정을 맡기면 큰 일 난다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으려고 했던 것과도 맥이 닿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개성공단 실무회담이 사실상 결렬된 가운데 이달 하순에는 또 한미 합동 군사훈련이 시작됩니다. 앞으로 남북관계는 어떻게 될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정세현: 개성공단 관련 6차 남북실무회담이 사실상 결렬된 직후 북한이 개성공단의 군사지역화 가능성을 얘기 했는데, 북한의 그런 얘기가 엄포라고만 보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 정부도 개성공단에 대해서 어떤 조치건 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정부가 북한이 7차 남북실무회담에 안 나오면 '중대조치'를 취하겠다고 이미 통보를 했는데도 지금 1주일 이상 아무 대꾸도 안하고 있지 않습니까? 남쪽과 만날 생각 없으니 맘대로 하라는 거 같습니다. 정부도 개성공단 가업들에 대한 보상 준비를 한다는 보도가 나오더군요. 개성공단이 사실상 폐쇄 수순을 밟게 되는 것 같아 착잡합니다..

금강산 관광이 1998년 11월 18일 시작되었는데 만 10년이 채 못 되는 2008년 7월 12일부로 중단되었습니다. 개성공단은 2004년 3월 개발의 첫 삽을 뜬 뒤 만 9년이 좀 지나면서 풍전등화처럼 흔들려 왔습니다. 이번 가을이 오기 전에 문을 닫는 거 아니가 싶어 조마조마 합니다. 저는 두 곳에 대해 감회가 좀 남다릅니다. 금강산 관광 시작 때는 금강산 관광을 '햇볕정책의 옥동자'라고 이름 붙였다가 보수언론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금강산 관광을 다녀온 국민들이 만족해하는 걸 보면서 1977년부터 통일 분야에서 일해 온 보람을 느꼈었습니다. 개성공단을 어떤 전문가가 '6.15공동선언의 옥동자'라고 하던데, 제가 통일부 장관으로 일하고 있던 2004년 3월 개발의 첫 삽을 뜬 뒤 샘플로서 1만평 시범단지 공사를 마무리, 6월 30일 오전에 그 준공식을 하고 오후에 이·취임식을 하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개성공단이 9년여 만에 풍전등화가 되었으니 마음이 참으로 착잡합니다. 저 개인의 감회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민족은 이렇게 남북이 서로 화해협력으로 나가기 어려운 DNA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서독은 진보에서 보수로 정권이 교체되어도 진보정권의 통일정책을 보수정권이 그대로 이어받아 추진해 나간 끝에 분단 45년 만에 동서독 통일을 마무리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북정책이 10년을 못 넘기고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옛날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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