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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간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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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간의 전쟁

<익명 투고> 한 조선족 청년의 불법체류 자진신고기

한번 다함께 생각해 봅시다. 이 나라가 월드컵을 개최하는 나라 맞습니까?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해 도시마다 꽃단장을 하고, 온 국민이 친절운동을 벌이는 나라 맞습니까? 인권을 내세우며 중국내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데려와야 한다고 소리높여 외치는 나라 맞습니까?

프레시안이 처음으로 출처불명의 글을 게재합니다. 다음 글은 한 독자께서 지난 25일 본지 게시판에 올린 '[퍼옴] 2일간의 전쟁 - 불법체류자진신고' 전문입니다. 내용으로 보아 한 조선족 노동자가 불법체류 자진신고를 하면서 겪은 이틀 동안의 기록인 듯합니다. 하지만 필자가 누구인지, 어느 사이트에 올린 글인지, 어떤 독자분이 이 글을 본지 게시판에 옮겨 놓았는지 전혀 파악이 되지 않았습니다.

부득이 필자나 게시판에 글을 올리신 독자분의 양해를 얻지 못한 채 본지 기사로 다시 게재합니다. 그 어떤 기사보다도 훨씬 더 절절하게 외국인 노동자, 특히 조선족 노동자들의 실상을 기록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우리 국민들, 관공서에서 얼마나 그들을 홀대하는지 낱낱이 고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월드컵에 들뜨고, 외국 손님맞이에 분주한 우리 모두가 한번은 꼭 읽어 봐야할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시 한번 이 글의 필자와 게시판에 올려주신 독자분께 감사와 함께 공개적으로 양해를 구합니다. 편집자

***2일간의 전쟁 - 불법체류자진신고**

자진신고를 했다. 무슨 죄를 지었냐구? 한국에서 불법체류를 한 죄로. 출입국사무소에 찾아가서 일년 후면 돌아가겠다고 약속을 했고 그 대가로 내년 2월까지 한국에 머무를 수 있는 도장을 받아왔다.

한국에 온 지가 어제 같은데 벌써 5년이다. 산업연수생이라는 신분으로 2년 동안 일했고 기한이 찼지만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아 3년간 더 머물렀다. 무려 3년씩이나 불법체류를 하면서도 출입국사무소나 경찰의 단속을 용하게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한국물정에 대해 밝은 데다가 나이가 어린 탓이다.

한국에 와서 불법체류하는 사람들은 거의 아줌마, 아저씨들이라 단속은 그들을 상대로 주로 이뤄졌다. 땡볕에 그을려 얼굴이 새까맣게 타고 머리에는 야구 모자를 쓰고 어깨에는 헝겊가방을 멘 '노가다'는 두 명에 한명 꼴로 조선족이므로 단속에 가장 잘 걸려든다. (노가다차림이 비슷할 수밖에 없는 것은 건설현장의 시멘트 먼지를 막기 위해서 모자를 꼭 써야 하고 가방에는 항상 갈아입을 작업복을 넣고 다녀야 하므로 일반인들과 다른 차림새를 할 수밖에.)

젊은이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그동안 '위기의 순간'을 맞은 적도 몇 번 있지만 그때마다 용케 넘어갔다.

이제는 심지어 길을 모르면 경찰을 찾는 뻔뻔함과 여유마저 생겼으니, 불법체류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나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은 뒷전으로 한 지 오래됐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슨 불법체류 자진신고제도라는 것이 도입돼 자발적으로 신고를 하면 시한부나마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맨날 단속에 걸릴까봐 마음고생을 하던 수십만의 불법체류 외국인들은 구름같이 출입국사무소에 몰려들었고 드디어 꿈쩍 않고 버티던 나도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단속에 걸릴 염려는 별로 없지만 자진신고를 하면 귀국 시 벌금면제하고 재입국규제도 풀어준다는데 나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첫 번째 이야기 - 줄서기? 줄앉기?**

자진신고를 하는데 필요한 여권을 분실했으므로 일단 여권재발급신청을 하려고 나는 중국대사관으로 향했다. 새벽 6시도 안된 이른 시간이지만 일찍 나온 게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대사관 골목을 메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쭈그려 앉혀져 있었고(쭈그려 앉은 것이 아니라 앉혀졌다. 감히 일어서면 쫓겨나니까) 한국경찰 몇 명이 질서를 지휘하고 있었다. "번호표를 받고 싶은 사람은 모두 앉아!" "당신 왜 일어섰어? 당장 집으로 가!"

대사관 내부로 들어가려면 한국경찰의 번호표를 받아야 했는데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밀렸으므로 번호표 받기가 쉽지 않았다. 서로 줄을 서도 끼어들기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결국에는 모두 경찰에 의해 쭈그려 앉혀졌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유효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끼어들고 싶어도 쭈그려 앉은 채 오리걸음으로 끼어들 순 없으니까...

한쪽에서는 자원봉사를 나온 한국인들이 않아있는 사람들에게 김밥을 나눠주고 있었다. 아침을 거르고 나온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주먹 하나 나들지 못하게 빽빽하게 앉아있어서 김밥을 사람 손에 넘겨주기가 쉽지 않다.

결국에는 던져주기 시작했다.

"여기요!" "여기두요!"
수류탄을 투척하듯이 자원봉사자들은 사람들을 향하여 김밥을 던진다. 알루미늄 호일에 싸인 김밥이 머리위로 돌멩이처럼 날아다닌다. 그걸 잡으려고 허둥대는 손들, 참 가관이었다.

나도 쭈그리고 앉았다. 슬펐지만 나는 필경 자존심을 세우러 온 것이 아니었다. 내 자존심은 한국에 올 때 이미 접어두고 왔다.

무리의 뒤끝에 붙어 서서 인파의 움직임에 따라서 조금씩 오리걸음으로 앞으로 움직였다. 아차! 호주머니를 들춰보니 외국인등록증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집에 들려 외국인등록증을 갖고 부랴부랴 다시 대사관에 도착했을 때는 8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미 늦었다. 번호표는 이미 다 나눠줬고 큼직한 포스터가 대문에 붙었다.

"번호표를 받을 사람은 24일 오전 7시에 오십시오. 2002.05.20일 "

25일에 수속이 마감되는데 24일에야 번호표를 준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24일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릴게 뻔한데 전날부터 밤새워 줄을 선다 해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무거운 발길을 끌고 돌아가는 길에 오르는데...

"서류를 작성했어요?" 길가에서 웬 아줌마가 물어본다.

"무슨서류요?"

"아니, 모르다니? 대사관을 들어가기 전에 서류를 미리 작성해야 돼요, 저를 따라오세요."

"얼마 받는데요?"

"4만원에 해 드릴께요, 신문에 여권분실광고까지 대신 해주는데 이 정도면 싼 거예요."

왠지 미덥지 못한 느낌이 들어서 나중에 하겠다는 핑계로 아줌마를 보내고 나서 같이 수속을 하고 있는 형한테 전화했다.

"형님은 서류를 하는데 얼마를 줬소?"

"나는 3만원을 주고 했다."

"신문광고까지 해줍데?"

"응, 신문광고까지 포함해서 3만원 받더라."

곱게 따라갔더라면 그 자리에서 1만원을 날릴 뻔했다. 마침 3만원을 받는다는 아줌마가 있길래 따라 들어선 곳은 근처의 여행사였다. 여행사에서 수수료의 일정액을 떼어주기로 하고 아줌마들을 고용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갑자기 몰려든 인파 때문에 대사관 근처의 여행사들은 때 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필요한 서류를 작성한 뒤 대략적인 수속절차에 대해서 문의하고 여권분실신고를 하러 가까운 경찰서로 찾아갔다.

***두 번째 이야기 -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경찰서도 사람이 만만치 않게 붐빈다. '민원실'이라는 곳은 바깥에까지 사람들이 줄서 있었는데 죄다 여권분실신고를 하러온 사람들이다.

스포츠머리를 한 젊은이가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데 제복을 입지 않아서 경찰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아무런 증빙서류도 갖고 오지 않은 아줌마가 막무가내로 분실신고를 해달라고 하자 젊은이는 화를 냈다.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분실신고를 해줍니까? 경찰서에는 당신들 중국 사람들에 대한 아무런 기록도 없어요! "

"여행사에서는 경찰서로 가기만 하면 된다고 하던데..."

"아줌마, 아줌마는 여행사에서 하는 말은 왜 철석같이 믿으면서 경찰을 안 믿어요? 경찰이 우스워요?"
"당신들 중국 사람들은 경찰의 말은 왜 하나도 안 듣고 자꾸 대들어요? 당신들은 중국에서도 이런 식이예요? 중국에서도 이렇게 공안한테 빡빡 대듭니까?"
"요즘 당신들이 새벽부터 밀려들어서 경찰서는 업무가 마비상태에요. 게다가 줄도 서지 않고 자기네들끼리 싸움질을 하고 난동을 부리고, 한국 사람들과 싸우는 건 이해가 되는데 지들끼리 싸워요, 자기 자리를 빼앗았다고, 중국 사람들은 워낙 저들끼리 싸우기를 좋아해요?"
"내 동생이 중국으로 유학 갔는데 제가 당장 들어오라고 전화했어요. 중국 같은 나라에서 뭐 배울게 있겠어요?"

신청서 한 장 변변히 쓸 줄 모르는 데다가 질서의식하고는 담을 쌓고 살아서 줄을 설 줄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무척 힘들고 바쁜 건 사실이지만 말끝마다 중국, 중국하면서 뒤에다 욕을 붙이니 아무리 참아야 하는 상황이지만 화가 울컥 난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몇 사람을 제외하고 전부가 조선족이라 한국말 못 알아들을 리 없겠지만 모두 침묵이다.

"중국 사람이라고 다 그런 게 아니예요!" 항변하고 싶었지만 당장 보여줄게 없었다. 외국에 와서 불법으로 체류하는 신세에, 떳떳하고 잘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만 보여줄 수가 없었다.

여권분실 신고서를 작성하고 나왔지만 분해서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택시를 잡으려고 한참을 기다리다가 도로 경찰서를 찾아들어갔다. 안에서는 젊은이가 땀을 흘리면서 볼펜으로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수고하십니다! 목이나 축이세요."

나는 길옆매점에서 사갖고 들어간 음료수를 내밀었다.

젊은이는 깜짝 놀라더니 이내 사양했다. "나는 안 먹어요. 아저씨가 도로 중국으로 갖고 가세요."

"너무 수고가 많으십니다. 음료수를 드세요." 책상위에 음료수를 내려놓으며 나는 다시 말했다.

"안 먹어요. 다시 갖고 가세요." 실내가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수십 쌍의 눈이 나와 젊은이를 바라본다.

"그럼 계속 수고하십시오." 다소 어색해 하는 젊은이를 두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수고하는 경찰에게 감사의 인사 한마디, 음료수 한병 정도 건넬 줄 아는 중국 사람도 있다는 것,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세번째 이야기 - 다시 대사관 앞에서**

이튿날 나는 서류를 챙겨들고 다시 대사관 문 앞에 나타나 어슬렁거렸다. 25일이 자진신고 마감일이라서 태평스럽게 번호표를 나눠주는 24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번호표를 나눠주지 않아서 그런지 전날보다 사람이 훨씬 적었다. 어제 번호표를 탄 사람들이 줄을 서서 꾸역꾸역 대사관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대사관의 중국식 대문 앞에는 어제 붙여놓은 포스터가 그대로 있었다. 다만 24일이라고 쓴 날자가 23일로 고쳐져 있었다. 아무래도 마감일 전날에 번호표를 나눠준다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나 보다.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일루의 희망을 안고 지나가는 경찰관한테 물었다.

"오늘은 번호표를 탈 수 없나요?"

"번호표를 타려면 저기에 가서 줄을 서세요."

경찰관의 손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무척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뙤약볕에 오래 쬐여서 그런지 사람들은 지쳐있는 모습이었다. 다들 번호표가 23일에야 발급된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나처럼 일루의 희망을 안고 찾아온 사람들이리라.

나도 줄을 서려고 다가가는 순간 일대소동이 일어났다. 맨 앞에 섰던 사람들이 주먹을 쥐고 맨 뒤로 달려갔다. 알고보니 표를 앞이 아니라 뒤부터 준단다.

앞에 섰던 사람들은 화가 나서 따지고 들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당신들이 하도 밀치니까 사고가 날까 봐 그랬어."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경찰 아저씨가 대답했다.

앞에 서있던 사람들은 원성이 자자한 반면에 뒤에 서있던 사람들은 내색은 안 하지만 웬 떡이냐는 표정이다. (나도 좀 전에 줄 섰더라면 먼저 표를 받는 건데...) 속으로 아쉬움을 금치 못하며 나는 끝으로 변해버린 앞쪽에 섰다.

"모두 앉으세요!"

투덜거리며 모두 엉거주춤 쭈그려 앉는다. 몸집이 뚱뚱한 몇몇 아줌마들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앉느라고 허둥댄다. 앉지 않다가는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모두 길 쪽으로 돌아서요!"

앉은 채 모두 길 쪽으로 몸을 돌린다. 참으로 희한한 광경이 아닐수가... 중국대사관이 위치한 곳은 명동의 번화가라 지나가는 행인이 워낙 많아서 앉은 사람들 모두가 얼굴이 화끈거린다. 하지만 지나는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거나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걸어간다. 너무 감사했다.

"이번엔 모두 오른쪽으로 돌아서요!"
모두들 쭈그린 채 돌아앉느라고 난리다, 워낙 빽빽하게 모여 있은 터라 그게 쉽지가 않다.

"이거 뭐 똥개 훈련시키나?" 옆에 있는 아줌마가 얼굴이 붉어지며 원망한다.

"아주머니. 참으세요, 오죽이나 재미있으면 저분들도 저러겠습니까?"
아주머니도 한심한지 피씩 웃었다.

"우리야 어쩌겠소? 시키는 대로 해야지."

"서류를 안 갖고 온 새끼들은 당장 나와!"

나오는 사람이 안 보인다.
그러자 목소리가 더 높아진다.

"당신들 진짜 개새끼처럼 굴꺼야? 나오랄 때 얼른 나와!"
언제부터인가 말투는 반말로 변했고 "당신"이라는 말 대신 "새끼"라는 표현을 써가는 경찰. 사람들은 쭈그리고 앉은 채 무표정하다. 어차피 이런 말은 한국에 와서 처음 듣는 게 아니었다!

"당신들을 생각해서 임시로 번호표를 만들어주기까지 하는데 이런 식으로 나올꺼야? 내가 땡볕에서 이 고생 하는 게 안보여요?"

하지만 그분의 눈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땡볕에서 서고 쭈그리기를 반복하면서 기합을 받는 건 안 보이나 보다.

좀 지나자 손에 번호표를 든 경찰이 다가오더니 줄 앞에 선다.

"아니, 뒤쪽부터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나이든 경찰은 웃으면서 말했다.

"먼저 줄 선 사람부터 줘야지 뒤쪽부터 주는 법이 어디 있어요? 이런 방법을 쓴 건 뒤에서 자꾸 밀면 앞사람이 다칠까봐 그런 거예요. 당신들 의료보험도 안 되잖아, 병신되고 싶어? 한번 말해봐요, 당신들 의료보험 안 되는 거 맞지?"

나는 앞줄이 뒷줄로 변한 뒤에 줄을 섰는데 뒤가 다시 앞줄로 변하는 통에 생각지 않게 빨리 번호표를 받을 수 있었다. 쓴 웃음을 지으면서 그새 몇 번 속았는지를 계산해 보았다.

24일에 준다던 번호표를 23일에 준다고 하고, 실제로는 21일에도 번호표를 나눠줬다. 뒷줄부터 나눠 준다고 속이고 다시 앞줄부터 나눠줬다. 번호표 한번 발급하는데 자그마치 거짓말을 네 번이나 했다. 그들은 선수였다. 아무리 질서유지 차원이라지만 약속 어기는 걸 이 정도로 밥 먹듯 한다면 누가 이후에도 경찰을 믿겠는가?

번호표를 받은 뒤 대사관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실내에는 여권발급신청을 하러온 불법 체류자들로 꽉 차있었다. 밝고 화사한 길거리의 옷차림과는 달리 거개가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있고, 땡볕에 그슬려서 얼굴마저 새카매서 실내가 더욱 어두워 보인다. 여자들도 많지만 생머리는 보이지 않는다. 짧은 파마머리가 대부분...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중노동하는 여자에겐 생머리는 사치다. 먼지와 땀으로 얼룩진 일을 하는 사람에게 밝은 색의 옷이 사치이듯이...

창구에서는 대사관 직원들이 눈코 뜰새없이 바쁘다. 서류를 작성하고 질문에 답변하고, 질문은 항상 똑같았다.

"여권은 언제 나오나요?"

"여기서 수속을 마친 뒤에 어디로 가야 하죠?"

간단한 안내서라도 작성해서 나눠줬으면 편리할텐데 일일이 대답하느라고 창구의 아가씨는 목까지 쉬어 보는 사람이 안쓰럽다. 게다가 실내가 워낙 복잡해서 고함치듯이 말해야 하니 오죽하랴? 붉은 도장을 서류에 받은 뒤 나는 뛰듯이 대사관을 빠져나왔다. 아직 가야할 곳이 남았던 것이다.

***네번째 이야기 - 문래동 출입국사무소**

2호선 전철을 타고 문래역에서 내리니 삼삼오오 외국인들(물론 파란 눈에 금발인 백인들이 아니라 피부색이 검은 흑인이거나 방글라데시나 인도네시아 같은 갈색피부의 외국인들)이 모여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보나마나 그들도 자진출국신고를 하러 출입국사무소로 가는 길이라 따로 길을 물을 필요가 없이 슬렁슬렁 그들 뒤를 따라나섰다.

주변 광경은 그야말로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같았다. 길에는 온통 신문지며 담배꽁초, 음료수 캔 따위가 무더기로 널려져 있었다. 출입국 사무소와 전철역 사이의 수백미터가 되는 도로는 하나의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변해 있었다. 하루에 1만여명씩 모여들었다고 하니 오죽했으랴? 아마도 그들은 꼼짝달싹 못하고 도로 한가운데 갇혀서 몇 시간, 길게는 하루 종일 줄서야 했을 것이다. 실제로 아는 친구는 며칠 전에 새벽부터 나왔는데 저녁에야 차례가 돌아와서 수속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대사관 주변에서 상점을 하는 아저씨가 한숨을 지으며 문 앞에 수북이 널린 담배꽁초를 빗자루로 쓸어 담던 모습이 떠올랐다. 심지어 인파에 밀려서 넘어진듯 담벼락이 무너져 있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갔을 때에는 막바지라서 그런지 한산한 모습이고 그들이 남기고 떠난 흔적밖에 없었다. 올 때 택시에서 들은 방송에 의하면 이번에 무려 20여만명의 불법체류자가 자진신고를 했다고 한다.

출입국사무소에 들어선 뒤 여기에서도 어김없이 앉아서 줄을 서야(앉아야?) 했는데 그나마 대사관보다는 훨씬 나았다. 햇빛을 가리도록 머리 에는 텐트가 쳐져 고 교회나 시민단체에서 나온 자원봉사자들이 서류도 대신 작성해주고 음료수도 나눠주고 있었다. 수요는 공급을 낳는다고 즉석사진기로 증명사진 찍어주는 도 생겼고 서류 한장당 100원씩 받고 복사를 해주는 도 있다.

이제는 심지어 앉아 줄서는 익숙해져서 옆 사람하고 한담을 나누는 여유까지 생겼다. 옆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사내는 한쪽 귀퉁이에 세워져있는 경찰차를 가리키며 말한다.

"중국에서 죄를 짓고 밀항한 놈들이 멋모르고 같이 왔다가 경찰차에 실려가는 걸 봤소. 자진신고를 아무 사람이나 마구 해주는 같아도 중국에서 경찰이 다 와서 체크한다니까."

1시간 좀 넘게 기다리자 내 차례가 돌아와서 드디어 건물 안에 들어서게 됐다. 건물 안에는 수십명의 출입국사무소직원들이 수속을 해주고 있었다. 쉽지 않을까봐 걱정했지만 의외로 몇 마디의 간단한 질문 끝에 도장을 들더니 서류와 배표에 쾅쾅 찍어준다.

이틀내내 시달리고 지쳤지만 서류를 들고 출입국사무소를 나오는 내 마음은 홀가분하기만 했다. 어쨌든 불법체류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짧게나마 합법체류를 하게 됐으니까. 그럼 배표의 마감기일인 내년 2월에는 중국에 돌아가서 집식구들이랑 만날 수 있을까? 이건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전에 떠날지도 어쩌면 더 눌러 앉을지도 모르겠다. 내년까지 내다보며 산다는 것... 요즘같이 불확실한 삶을 사는 나에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2002.05.21 서울 가리봉에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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