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이인제 대선 경선후보가 10일 오전 음모론 제기 및 이념 공세를 전면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인제 후보는 이날 SBS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이제는 노무현 후보 개인 문제는 얘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내 정책을 설명하겠다"고 밝혔다.
이인제 후보 대변인인 전용학 의원도 "앞으로 이인제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를 어떻게 이끌 것인지 밝히는데 주력하는 포지티브한 전략으로 나가겠다"고 말했다.
전 의원은 지금까지의 음모론· 이념공세 등 문제제기에 대해 "정책 이전 단계로 중요한 철학에 대한 문제제기였다"면서 "이제는 국민들이 이 후보의 철학에 대해 충분히 안다고 생각된다"며 입장 선회의 이유를 밝혔다.
전 의원은 "한나라당도 경선이 시작된 만큼 민주당 후보간의 이념 공세가 야당에 악용될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전 의원은 이제까지의 문제제기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즉 김대중 대통령의 경선개입 의혹을 포함한 음모론과 이념 공세 과정에서 던졌던 문제제기는 철회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 후보의 급작스런 입장선회는 9일 밤 자곡동 자택에 찾아온 김기재 이용삼 이희규 장성원 김효석 전용학 의원 등 측근 의원 6명으로부터 "김 대통령에게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시의 적절치 않고, 노 후보와 인신공격성 공방을 벌이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에 따라 당초 10일 이인제 후보가 이념 및 언론관 논란에 대한 자신의 입장, '음모론'의 방증 등을 구체적으로 밝히기로 했던 긴급 기자회견도 취소됐다.
***이인제 'DJ 정면 공격' 노림수는?**
이인제 후보는 하루 전인 9일만 해도 김대중 대통령에게 "내심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다면 이를 밝히라"며 이른바 '김심'개입 의혹을 공개적으로 제기하는 등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이 후보는 이날 충주와 제천 지구당을 방문하는 자리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노태우 대통령을 만들어 상왕 노릇을 하려고 일해재단을 만들었으나 물거품이 됐고, 노 전 대통령도 박철언씨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내각제 각서'로 김영삼 전 대통령을 견제하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이후에도 그런 일들이 벌어졌지만 다 실패했고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한나라당이 전열을 정비해 후보를 내세운 뒤 우리 당 영남 후보를 '호남사람들과 김대통령이 내세운 꼭두각시'라고 공격할 것'이라며 '반 DJ, 반 호남'이 실제 민심인 영남은 결국 한나라당 후보를 밀게 돼 우리 당은 실패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이 후보는 8일 오전 참모회의에서 "경선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는 김 대통령의 꼭두각시로 비쳐져 영남에서 득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후보 쪽의 김윤수 특보는 이날 "DJ의 친위대이자 당의 공식조직인 '연청(새시대 새정치 연합 청년회)'이 경선에 조직적으로 가담하고 있다"며 "청와대는 이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 이 후보는 지난 5일 대구지역경선 유세에서 대통령 친인척 비리 척결을 주장하며 "쓰레기가 있으면 다 청소하고 가야 한다. 나중에 쓰레기가 서해바다로 들어가면 꽃게가 서식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계속된 이 후보 측의 DJ 공격은 DJ와의 결별을 위한 수순으로 경선 이후 자신의 독자행보를 위한 명분쌓기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이인제 후보가 음모론을 재점화하면서 노무현 후보와 김 대통령을 연결시킨 뒤 준비된 '창·미사일·핵폭탄'을 터뜨려 노 후보와 DJ 모두를 침몰시키겠다는 전략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이 후보의 한 측근은 "이 후보는 DJ와의 차별화를 통해 경선 이후 행보에 대해 여러 가지를 고려 중이다. 지금은 나무칼이지만 창과 미사일, 핵폭탄까지 준비하고 있다"며 김 대통령에 대한 정면공격도 준비하고 있음을 시사해 이러한 심증을 더욱 굳혔다.
***'탈당'도 '잔류'도 아닌 '출당' 의도?**
그동안은 이 후보가 경선 패배 이후에도 당에 남아 노무현 후보가 실제 정계개편을 추진할 경우 노선투쟁을 통해 잔류세력을 규합하는 방안, 6월 지방선거 이후 정치권의 이합집산 또는 후보 교체론 등에 대비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나리오는 이 후보가 독자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노 후보가 정계개편을 추진할 것인지 여부, 지방선거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에 의해 이 후보는 수동적으로 끌려가게 된다. 게다가 당이 노무현 후보 체제로 급속히 재편되어 가면서 향후 이 후보와 행보를 함께 할 세력은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후보가 DJ에 대한 정면공격을 시작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탈당'도 '어정쩡한 잔류'도 아닌 '출당'을 당하는 쪽을 선택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경선 불복-탈당-독자 출마'라는 전력을 지닌 이 후보로서 또 한번 탈당하는 것은 향후 정치행보에 위험부담이 크다. 그렇다고 당에 잔류하자니 스스로 앞날을 설계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당으로부터 축출당하는 모양새를 취하려 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이 후보가 '핵폭탄'을 터뜨려 DJ와 노 후보를 공격하면서 당으로부터 출당 당해 독자행보를 감행할 정치적 명분을 얻으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지난 1995년 JP가 YS로부터 축출당한 이후 자민련을 창당한 사례를 거론하는 사람도 많다.
이 후보가 9일 예정된 전남지역 유세를 취소한 뒤 연고지인 충북을 방문한 것도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충청도를 확실하게 다져 놓으려는 움직임으로 읽힌다. 이 후보의 측근 의원들이 분포해 있는 충청권과 경기남부, 강원도 일부 등 중부권에 지역적 기반을 두고서 중도개혁노선을 표방하는 신당창당설도 나오고, 김종필 총재의 자민련과의 합당 관측도 나온다.
***입장 선회했으나 음모론 여전히 유효**
10일 이 후보가 입장을 급선회함에 따라 경선이 끝날 때까지 독자행보를 감행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일단 이 후보는 '치고 빠지기' 식으로 DJ에 대한 공세를 한풀 꺾었다. 여기에는 측근들의 반발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또 DJ와 계속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당내 여론 등을 감안할 때 더이상 이득이 안된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인제 후보는 입장을 선회하면서 동시에 '김심' 의혹 등 음모론에 대한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힘으로써 경선 이후 독자행보 가능성도 열어두었다.
향후 이 후보의 정치행보는 민주당과 대선정국의 앞날을 점칠 첫 번째 변수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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