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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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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19>

맑음과 흐림, 대한민국 라디오 클래식 음악 방송의, 하느님의 어린 양-양동복 CBS 위성 TV 편성제작부장

어이구, 제가요. TV개국을 앞둬 나서요... 아, 그럼 정말 바쁘겠구나. 개국이 언젠데요?... 예예. 3월1일 개국이거든요. 예. 예예. 새벽2-3시에 퇴근을 하니까요.... 그럼 어쨌든 3월은 지나야겠네?... 예. 예예. 근데, 그, 거기 <프레시안>에 쓰실려는 거죠?... 그렇지, 핑계 낌에 보고도 싶고... 어유, 저는 거기 나갈 사람 못되는데... 아, 양동복 출연시킬라고 만든 코널쎄, 이 사람아... <할 말 안 할 말> 연재 중 `출연자 섭외`가 이렇게 힘든 적이 없었다. 두 달 가량 전화로, 잊어먹을 만 할 때 전화로 청탁을 한 게 여섯번이니까. 그런데, 청탁 능력에서는 절대로 남한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내가 여섯 번이나 거절을 당했는데, 서운한 감정은 물론이고 무슨 실갱이를 한 기억도 전혀 없다. 그냥 선하디 선한 그의 얼굴과, 눈망울 속으로 젖어들었던 느낌 뿐이다. 그의 얼굴에는 나이가 묻어나지 않는다. 동안(童顔)이라는 소린가? 아니다. 동안은 어린 `나이`의 얼굴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나이를 먹는 얼굴인가? 아니다. 거꾸로 먹는 `나이`도 엄연한 `나이`다. 그의 얼굴은 세파가 험할수록 더욱 착해져온 듯한, 그래서 뭔가 휑 뚫린 듯 하지만 그 뚫림이 얼굴의 `탈(脫)시간성`을 끊임없이 세상에 대한 순정으로 고이게 할 뿐 황량함과는 정반대인, 그런 얼굴이다. 나는 현신을 물론 영화에서도 그리고 문학적인 묘사에서도, 심지어 아기 예수나 성인 예수의 초상화에서도 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내가 붙힌 별명이 `하느님의 어린 양`. 어이구, 그건 예수님을 뜻하는 말인데요, 신도들에게 혼납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주장이 묻어나지 않는다. 발언 내용이 `그래야죠. ` `그렇잖습니까. ` 그런 식의, 결의를 담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아주 여리고 순정한 목소리의 결, 혹시 눈물을 닮은, 그리고 눈물의 생애를 닮은 그 결이 (내용의) 주장 훨씬 전에 상대방을 한없이 겸손하게 또 너그럽게 감싸기 때문이다. 그런 그와 난 5년 전 클래식 음악을 매개로, 생방송 클래식 프로그램의 MC와 PD 신분으로 1년 동안 만났다.

애당초 이런 만남은 엄청난 친밀감을 키워나가기 마련이다. 방송 준비하는데 최소 한 시간, 그리고 두 시간 동안 내내 방음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귀와 눈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며 상대방의 의사를 간파해야 한다. 방음벽이 있기에 그 소통(노력)은 더더욱, 오래된 부부 사이를 능가하는 숙련도와 섹스를 마악 알아가는 연인 사이를 능가하는 민감도를 동시에 요구하고 또 제공하는 만남인 것. 더군다나 매개는, 나신(裸身)보다 순결한 채로 `육체보다 육체적`인 클래식 음악 아닌가. 누구나,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처음 들을 경우 당황하고 또 실망한다. 내면의 귀에서 내면의 귀로 전달되던 익숙하고 편안했던 마음의 소리가 기계를 통해 바깥 귀를 때리는데, 저런 저런, 저게 내 목소린가, 저게 내 평소 억양이라니, 이럴 수가. 나는, 양동복과 클래식 사이에 섞여드는 내 목소리의 시건방 끼가 한없이 참담했고 흐린 하이톤이 마구 슬펐다. 방송이 끝나면 여러 피디와 작가들을 꼬셔서 폭탄주 파티를 벌이는 게 예사였고 곧 관계로 되었는데, 그건 첫째, 양동복이 윗사람들을 어떻게 겁주었는지 출연료를 최고수준으로 책정, 생계비를 빼고도 돈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고(간혹 수입 많은 일자리 혹은 일거리가 생길 경우 생계비 이상은 꼭 원인발생지에서 술값으로 써 버리는 게 내 버릇이다. 왜냐면, 안 그러면 수입에 맞추어 생활수준 높아지고 그렇게 되면 수입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직장에 매달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치사해지니까. MC 같은 경우는, 6개월마다 잘릴 걱정을 해야 되니 특히 그렇다. ), 점심을 먹고 나면 역삼동 한국문학학교로 향해야 하는데 맨정신으로 가자니 하루에 출근을 두 번 하는 셈이라 어색하고 또 피곤한 반면 완전히 혼미한 상태로 목동에서 택시를 타고 곧장 골아 떨어져 1시간 정도를 자면 역삼동에 닿는데 그러면 제대로 출근한 듯한 기분이 되니 좋다, 는 것이 각 부서 부장급들한테 밉보여가면서까지(3-4개월이 지나면서 `우리 부서는 좀 빼달라. `고 내게 `로비`를 하는 부장들이 많았다. 당연하지. 생방송 진행할 피디들한테 폭탄주를 먹여 놓으니) 관례를 강행한 나의 변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근본적인 이유는 양동복의 맑음에 비해 너무도 흐린 나의, 흐림의 위악(僞惡)이었을 게다. 왜냐면, 어렵사리 그를 만나기로 한 날 나는 한 30시간 잠을 못자고 밥을 안 먹은데다 낮에 아쉬운 소리 하느라 출판사엘 들렀다가 크게 한 잔, 번역거리 옮겨주느라 또 다른 출판사에 들렀다가 가볍게 한 잔, 그리고 8시에 친구 만날 약속해놓고는 가는 도중에 잠들었다가 기사 아저씨가 깨워 일어났지만 잠시 기억상실, 그곳에 왜 왔는지도 모르고 어리둥절하다가, `아까 내 핸드폰으로 누구와 약속하더라. ` 소리 듣고 겨우 기억을 되살려 약속시간에 한 시간이나 늦고, 양동복과의 약속에도 한 30분 늦었는데, 그것 또한 흐림의 위악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 30분 동안 양동복은 벌써 전홍기혜를 `포섭`, 두 사람이 오누이처럼 나를 맞는다. `30분만 만나다오. ` 간청을 한 주제에 30분씩이나 늦었지만 그는 `착하게 풀이 죽은` 모습이고(어차피 만난 거 술 한 잔은 해야지. 피곤해서 내일 반쯤 죽겠지만.) 나는 그게 너무 감격스러워 맑음을 향해 정신이 퍼뜩 들지만 동시에 입은 흐림을 행해 횡설수설이다. 권호경 사장은 어떻게 되었나?.... 예. 그게, 임기는 끝났는데요. 다시 연임을 할까봐 이사회 소집을 미루고 있는 가봐요... CBS 라디오는 70년대와 80년대 초 민주화운동의 한 상징이었다.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로서, 민주화 열기로 살아 꿈틀거리는, 그렇게 민주화의 시간이 되려는 공간이었다면 CBS 방송 `시간`은 하느님의 역사(役事) 자체를 닮으려는 그것이었다. 권호경은 누군가? 김동완과 함께 70년대 기독교계의 민주화운동을 이끈 상징적인 인물이다. 아니 그런 딱딱한 명명 이전에, 특히 구속자 당사자나 가족들에게는 무엇보다 반갑고 다정스럽고 따듯한 이름이었다. 국제 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의 지원이 두 이름(당시 KNCC[한국기독교협의회]총무)을 통해 재소자들에게 전달된 까닭이다. 매달 약간씩의 영치금과 연말 담요, 그리고 손글씨 영어로 쓰여진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는 일은 구속자에게 뿌듯하고 가족들에게 고마운, 그리고 교도관들까지 `합세`하여 아름다운 시간이자 풍경이었다. 하여, 방송사의 파업은 86년 6월 국민항쟁 이후 드믄 일이 아니다. 그리고 대외투쟁, 즉 대정부투쟁의 경우 CBS노조는 왕년의 전통을 되살려 민주언론운동의 선구 역을 자임하고 있다. 문제는 내부. 각 방송들이 어느 정도 민주화의 혜택을 누리면서, 신생 SBS가 상업성을 굳히고, KBS가 공영성을 천명하고 MBC가 그 둘의 결합을 모색하고 교육방송이 교양방송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숱한 케이블-위성 방송국들이 방송문화 자체를 혁명하는 와중에, 경영진의 독단과 무능, (교단 쪽)선교와 (방송실무자 쪽)일반 방송의 확실한 구분/결합 실패에 IMF까지 겪으면서 구조적으로 고질화한 CBS의 내부 파업은, 민주화운동의 선대와 후대가, 현장파와 방송파가, 게다가 교단과 방송실무자가 뒤섞이고 마주치느라 유독 잦고 지지부진하고 일상적이면서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 작년에 CBS노조는 노조원들이 장장 265일 동안 월급 한 푼 받지 못하는 파업을 전개했지만 사장 퇴진 문제에서 별 결말을 보지 못했다. 경영도 호전되지 않았다.

나와 함께 방송을 할 때, 그러니까 김영삼 정권 당시 전국 총파업 때 참석을 한 것이 마지막이니 그가 `사용자 쪽`이 된 것은 줄잡아 5년 정도 되지만, 그는 늘 `노동자 쪽`의 기대를 한몸에 받아왔다. 그가 늘 `노동자쪽`을 지지했다는 게 아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그는 늘 `CBS의 고통`을 몸 고생으로, 또 예의 그 `순정이 고이는` 얼굴 표정으로 `대신 짊어`져왔다. 평소에도 그는 다른 사람보다 2-3배는 양이 많은 일거리를 택한다. 파업이 나면 그의 작업량은 다시 그것의 두 세배가 된다. 그건 다분히 `기독교`적이고 `기독교방송`적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노동자쪽은 그의 순정을 의심하지 않고 `잘 되겠지. `라는 그의 말에 안심한다. 사용자쪽은?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자들은 그를 `난해해` 하고 좀 나은 자들은 그를 어려워하거나 두려워하고 좀더 나은 자들은 껄끄러워 한다. 그러나 어느 쪽도 그를 무턱대고 미워할 `여유`가 없다. 노동의 위엄과 순결을 형상화하는 것만큼 `노동운동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은 노동하는 하느님인가, 사용하는 하느님인가, 역사는 경영인가, 경영은 노동인가, 아닌가, 이런 질문을 예리하고 감동적인 아픔으로 전화시키는 까닭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기독교'적이고 기독교`방송`적이다. 사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고 CCM 분야 선구자이자 권위자다. CCM은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의 약자로 ‘현대의 기독교 음악, 즉 기독교적 가치관을 내용으로 담은 대중음악’, 좁게는 ‘미국에서 흑인음악인 가스펠과 대비되고 팝과 락 계열을 포함한 현대 대중음악 스타일을 띤 크리스천 음악’이라 하겠고 본질적으로는 ‘주님의 말씀이 육화된 내용을 지니면서 요즘 시대의 음악 흐름을 따라가는 음악’. 인용을 따온 책은 그가 쓴 <새로운 대중음악 CCM>(예영커뮤니케이션 간). 이 책은 혹독한 IMF 시절을 버틸 만큼의 인세를 그에게 안긴 스테디셀러일 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사례를 찾기 힘든 독보적인 명저다. 어쨌거나, 그 권위도 `주장`과는 관계가 없다. 그의 눈은 늘 프랑스의 테제Taizet 공동체의 수도생활을 동경하지만 그에게는 종교적인 주장이 없다. 종교는 다만 진선미로써 악을 견디는 것이라는 현현이 있을 뿐.

만만한 전기구이통닭집에 자리를 잡고 술을 한 순배 돌리고 그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양승관(CBS 피디) 생각이 나서 안부를 물으니, `회사에 있을 걸요. 부르시면 나올 걸요. ` 하는데 또 횡재하는 기분이다. 어 불러, 불러... 양승관은 전화를 받고 한 걸음에 달려왔는지 채 10분이 안되어 도착했다. 그래. 역시 양동복 옆에 양승관이 있어야 그림이 되는 군... 마음씨는 비단결이고 궂은 일 도맡아 하는 데는 머슴이 따로 없지만(그는 `촌지` 문제가 잦아들 날 없는 방송계에서 `보도자료용` `CD 2장`도 직접 챙기러 음반사를 순회하는 희귀한 PD중 하나였는데, 이것은 방송의 질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원시적이지만, `새롭고 좋은` 클래식을 찾아 제공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유일한 첩경이다. ) 생긴 것은 영판 산적인 그가 옆에 있으면 이상적인 `예수와 베드로` 초상이 완성된다. 나는 신이 나서 더 횡설수설한다. 지웅 피디(당시 영화 담당. 유일하게 대낮 폭탄주를 견디던, 아내를 징그러울 정도로, 공식석상에서 조차 육체적[?]으로 아끼던 흔쾌한 신세대였다)는 잘 있나? 그 뭐시냐, 영화 좋아해서 직접 피디도 하고 엠씨도 하던 그 여자 아나운서 분은?... 지금도 하고 있습죠.... 에 또 그 뭐시냐, 술 잘 먹고 화끈하게 잘 놀던 그 여자 진행자... 이효연 씨요?... 그래. 맞아... 지금은 아침 프로 합지요... 이쯤 되면 양승관은 말투가 돌쇠 풍이고 죽이 척척 맞아 떨어진다. 나는 그 파업 때 말야, 물론 권오경이 괘씸했지만, 나로서는 고마운 사람이라 말야, 운동권 후배들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는, 먹게 된, 비참한 꼴을 보는 게 괴로웠달까, 뭐 그랬어... 같이 운동하신 분들 다 그렇겠지요 뭐... 이건 양동복이다. 양동복은 나를 그렇게 보살핀다. 그리고 그 편집국장 하던 분, 누구지?... 조국장요?...아 맞아, 그 분, 무슨 운동 단체 기념식에선가 봤는데, 쟁쟁한 분이더라구. 나는 쫓겨난 셈이라(에이, 쫓겨나시긴요. 선생님이 그만두시고는. . 이건 양승관이다. 양승관은 그렇게 나를 보살핀다. 예수와 베드로 양쪽에 낑겨 내가 기분좋게 어린애가 되는 순간이다. ), 그저 그렇게 봤는데. 그러고 나니까, 아 맞아 CBS 방송국 출신에 그 나이면 민주화운동 선구자겠고, 더군다나 정계에 발 안 딛고 방송을 계속했으니 당연히 그런 분일꺼라고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반성이 되더라구... 뭐, 그렇죠...그리고 그 누구냐, 지방 같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선배 분... 이영선 국장요?... 아니 그 분 말고, 거 왜 술 먹으면 갑자기 등짝을 후려치는 그 분 말야, 지웅 피디 주례를 섰다는... 아 그 분이요, 지금 스카이라이프 실권잔데요. 아참. 거기 오디오 채널이 몇 십개라는데, 선생님 한번 추천해 볼까요?... 마라, 마. 내 할 때는 재밌었지만 지나놓고 생각하니 1년으로 끝난게 천만 다행이다. 방송과 글쓰기는 천적인 면이 있어. 그래도, 이건 좀 다른데 아, 참. 강경미(당시 방송작가) 연락해봐라. 양승관 착한 사람이라고 만날 때마다 입에 침을 흘리던데...

양동복이 `방송 진행 문제로` 좀 보자 했을 때 나는 맨발에 슬리퍼 보행을 꽤나 즐기고 있던 때였고 목동 방송국 건물이 당산동의 내 집에서 먼데도 아니라서 그냥 그 차림으로 갔다. 양동복은 그 차림을 괘념키는커녕, 훗날 말하기를, 그게 `예술가 다워서` 맘에 들었다고 했다. 아, 애들은 절대 따라하지 말 것. 양동복은 원래 범인과 다르거니와, 나쁘게 말하면 제정신이라 하기 힘들거니와, 설사 양동복 같은 이가 몇 몇 더 있다 한들, 지금은 엄연한 IMF (`이후`가 아니라) `그 후` 구직난 시대다. 어쨌거나. 그래. 그런 양동복의 선도와 그런 양승관의 뒤받침으로, 사실 나는 행복한, 드물게 행복한, 그리고 독특한 방송(경험)을 할 수 있었다. 10분 이상 넘는 곡이 많으면 안 된다. 레퀴엠을 틀면 안 된다. 실내악이 끝나면 그 다음은. 우리나라 아침 클래식 방송에서 지켜야할 원칙은 수없이 많지만 양동복은 그런 상투를 일거에 깨부술 수 있게 배려를 해주었다. 사실 `가벼운 곡`이 좋다지만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심지어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일주일에 서너번씩, 다른 프로그램까지 합하여 십 수번씩 튼다는 것은 정말로 클래식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문이다. 진정한 클래식, 그리고 오래 들을 수 있는 클래식을 틀되, 설명을 재밌게 부쳐주자. 레퀴엠이 장송곡인 것은 사실이고 아침 시간에 장송곡을 틀면 기분 나빠한다는 소리는 그럴 법 하지만 클래식의 `레퀴엠`은 결코 `기분 나쁜 장송곡`이 아니라, 음악의 본질, 시간의 본질, 그리고 삶의 본질을 `음악=죽음의 아름다움`으로 심화-활성화하는, 그러므로 `아침 명상`에 가장 적합한 장이다. 그렇게 하죠, 좋겠네요... 보수 기독교단 일각의, `왜 천주교 음악을 트냐`는 항의도 예상 못했을 리 없건만, 양동복은 눈을 반짝였다. 헌데, 무경험자가 와락 2시간 생방송을 하자니 겁이 덜컥 나서, 첫 회 때는 멘트를 영화 시나리오 쓰듯 써갔는데, 그냥 읽는 꼴이 되고 말았다. MC가 갖추어야 첫 째 능력은 남이 써준 원고를 읽되, 자연스레 자기가 말하는 것처럼 하는 `연기력`인데, 나는 그것이 꽝이다. 내가 쓴 글을 책 읽듯 읽는 내가 지겨운데, 듣는 이는 얼마나 지겹겠는가. 하여, 첫 방송이 끝나고 나는 다시 만용을 부린다. 원고없이 하겠다. 그냥 머리에 메모해두었다가 생각나면 말하고 아니면 손짓으로 그냥 음악 때리고. 그렇게 하시죠, 뭐... 양동복은 그런 나를 다소 걱정스러워 했지만, 그것도 받아들였다. 반응은? 엄청났다. 특히 아줌마들이 매일 전화를 걸어 그 사람 말투가 영 맘에 안 든다, 음악에 대해 뭘 그리 잘 난체 하냐, 목소리는 왜 그리 느끼하냐, 혀도 짧은 것 같고, 가 이어지더니 급기야, `그 사람 정말 그만 두게 안 할 꺼에요?` 식의 협박성 전화가 터를 잡았다. 그냥 허허, 하고 착하게 웃고 넘기던(이제 고백하지만 나는 명백한 실수를 했을 때는 물론 쥐구멍에 숨고 싶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혹 잘못한 거 없나, 늘 주눅 들고 그러다보니 그의 웃음이 더 무섭고 두려웠다. 이쯤 되면 내가 양동복교 신자쯤 되는 건가? ) 양동복이 한 2주일 지나더니 읍소를 한다. (그건 딱 두번이고 읍소의 내용은 한결 같은데, 이제 고백하지만, 나는 두 번 다 혼비백산할 것을 겨우 버텼다). 아이구, 선생님. 이러면 청취율이 너무 떨어지고. 저 선생님하고 방송 오래 하고 싶어요. 저도 인력관리자로 되니까 마지막 제작일지도 모르는데요, 선생님하고 오래 하고 싶어요... 그런데, 클래식 방송이란 게 그렇다. 어차피 대중음악 방송과 경쟁이 될 리는 없고 그나마, 특히 아침 방송의 경우 청취자들은 천 명 남짓 될까한 숫자가 이 방송 저 방송 `클래식 프로`를 채널 순회하면서 선물 준다는데 팩스 사연 보내고 `사랑의 인사` 신청하고 그러는 게, 꼭 요즘 인터넷에서 아이디를 수십개 사용하며 인터넷 여론을 `조작` 혹은 `주도` 혹은 `천박화`하는 사태와 비슷하다. 하여, 나는 `며칠 만 더 견뎌보고` 정 안되면 예술가 천 명에게 청취를 부탁하는 엽서를 보내보마`라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래서 어떻게? 반응이 괜찮았다. 당연하다. 특히 `레퀴엠`에 대한 호응이 상당했다. 오전 9시-11시면 주부들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좀 덜 바쁜, 대기업의 안정보다 불안한 자유를 선호하는 자들, 그리고 학자-지식인-문화예술인들의 소형차 자가용 출근시간이기도 하다. 그들 중 CBS `전곡` 방송을 택한 숫자가 천을 넘어섰던 것.

또 한번의 읍소는, 피디들이 총파업 나간 틈을 타서 내가, MC 주제에, 사전 원고없다는 점을 잇점 삼아, 총파업 지지 방송을 14일 내내 하던 와중에서다. 내용은 똑같다. 어이구 선생님, 선생님과 오래방송하고 싶어요... 그런데 주문 방향이 좀 달랐다. 좀, 시적으로 해주시면... 그래? 그거 괜찮네. `산문적`인 지지는 깡다구 만으로 되지만, `시적`인 지지는 훨씬 더 복잡한 문학-현실주의 훈련을 요하는 것 아닌가. 어쨌거나, 그게 방송 5개월 때 였는데, 이제, 벌써, 마지막 이야기 밖에 남지 않았다. 사실 그런 방송을 즉각 중단시키고 MC를 교체하지 않은 것은 그나마 CBS의 전통 때문에 가능했을 뿐, 1개월 후 프로그램 개편 때 내가 잘릴 것은 불문가지였다. 기세등등하던 노조도 그걸 미안해하는 채로 당연시했고, 모종의 통보도 받은 터였다. 평생 처음 고정급을, 그것도 거금으로 받으며 내내 신기해하던 마누라한테는 정말 죄송해서 내 `만용`을 미리 사과해둔 터이기도 하고 양동복과 모처럼 `달팽이 요리`(비싼 데는 아니고 그냥 시늉만 낸)로 작별 식고 해둔 터였다. 그런데 이 양동복이란 자, 거동 좀 봐라. 매일 매일 일 끝나면 국장실로 가서 그냥 그 선한 눈망울을 꿈벅이며 미소만 환할 뿐 아무 얘기도 없이 그냥 죽치고 앉아 있는 거다. 할 얘기 뻔하고 해봤자 피차 딱한 일이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모른 척 일어서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게 마냥 계속될 듯 한 지라, 국장이 먼저 답답해한다. 자네 도대체 왜 그러는가?... 그제서야 양동복이 입을 연다. 저 분은 방송인도 아니고 그냥 글 잘 쓰고 잇는 분을 내가 좋아 모셔왔는데 한 텀(term, 6개월)만 하고 교체한다면 `방송 능력 부족`이란 뜻이 되는 게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건 우리가 실례죠. 애꿎은 피해를 입히게 되는 거죠. 한 텀은 더 해야 서로 명분에도 맞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렇게 하여 양동복은 나와 찢어진 다는 조건으로 한 텀을 더 마련해주고 양승관에게 나를 넘겼다. 양승관은 그 6개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마련해주었다. 이런 행복한 방송 경험이 어디 있겠는가. 텔레비전과 인터넷 대중 문화가 번창할수록 라디오 문화의 핵심은 `귀의` 클래식이다. 양동복은 그 `귀의` 클래식이 바로 `하느님의 어린 양`임을 형상화한다. 텔레비전에서는? 텔레비전에서도 그럴 것이다. IMF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광고 수주` 위주로 프로그램 개편을 할 때 `사용자 쪽`이었던 그는 `클래식` 프로그램을 줄이는 것에 우려를 표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방송을 하는 게 아닙니다. 먹고 살라고 발버둥치고 있는 거지요... 그 말은, 절규임에도, 어느 클래식보다 감동적으로 들린다. 더군다나, 그 즈음 나는 앙증맞은 필기도구와 단아한 독서대를 선물로 받았으니.

ps. 방송을 그만 두고 나는 오랫동안 귀씻이를 했다. 음악이 너무 `직업적`으로(이건 오프닝으로 좋겠군, 이것 브릿지로 넣고. 따위) 들렸던 것. 양승관이 구해준 전집류 몇 권을 계속해서 몇 번씩, 무념무상으로 듣고나서야 겨우 음악에서 `직업`을 지울 수 있었다. 음악에 `직업`이 묻은 것은 양동복 덕이거나 탓이지만, 귀씻이를 하고 싶은 생각도 양동복 때문에 들었으니 참 신기하다. 엠씨의 말을 귀담아 듣는 직업병은 아직 고치지 못했는데, 그 유구한 반복과 문장 미숙이 괴롭다. 참, 이 참에, 괴로웠던 고백 하나. 내가 평생 단 한번 남에게 돈을 꿔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을 때, 양동복이 평생 단 한번, 마누라 옷가게 차려주는 일 때문에 돈을 꿔야할 위치에 처했으나, 나는 내 마누라 얼굴이 떠올라 돈을 꿔주지 못했다. 그게 내내 미안하고 가슴 아프다. 물론 내 아내는 그 사실을 모른다. 양동복은 서강대 언어학과 출신, 그래서 나는 아들에게 서강대 입학을 권했다. 그 사실은 아내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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