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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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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17>

기찻길 옆에 여인, 여자, 여성, 몸, 쾌속(快速)-가수 심수봉을 배경으로, 소설가 전경린을 만나다

전경린요? 와아...미국대통령 부시가 내한, NGO경력이 풍부한 전홍기혜 기자가 취재차 졸지에 백방으로 `날뛰게`(이 표현은 순전히 부시 때문이다. 미국이 미국답게 질도 양도 충격적인 9. 11 테러를 당한 후 말로는 기독교=미국의 정의와 평화를 구현한다지만 행동이 마치 화살 빗맞은 골리앗과도 같이 길길이 뛰는 거라서, 소년 다윗을 명분 삼았던 기독교도 정의와 평화의 개념이 또한 길길이 날뛰고, `악의 축`으로 지목받은 나라를 북녘 형제로 둔 약소국 대한민국의 약소한 인터넷 신문 기자도 종교 관계없이, 너나 없이 정체 애매한 다윗으로 어쩔 수 없이 날뛰고, 약소한 글쟁이인 나도 `저걸 정말 어떻게 하며 좋을까. ` 뭐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성격불명의 시비글 쓰느라 날뛰며 <할 말 안 할말> 연재분을 한번 떼어먹게 되었다. <이 보슈, 부시>는 <할 말 안 할 말> 번외편 정도로 읽어주시기를. 아, 정말, 정신 사나운 놈야)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역시 졸지에 사진담당 대타로 나선 인턴 기자 현시원(이화여대 4학년, 학보사 출신)이 그렇게 제 혼자 감탄 또 찬탄한다. 제가 그 분 팬이거든요...횡재했다는 얘긴가?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이다. 신촌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기사 아저씨와 나, 그리고 그녀 사이의 거리가 너무도 은밀한데, 평소 명랑-쾌활하기는 하지만 부잣집 맏며느리감으로 알맞을 만큼 풍성하고 조신한 그녀가 난데없이 성기(性器)에 대해, 아뭏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그 소설, <열정의 습관> 첫 부분에 말예요, 남자의 성기를 묘사하는 대목이 나와요... 얘기는 삽시간에 `천연덕`을 지나 매우 진지한, 아니 학구적인 분위기까지 풍기니 더욱 요상한데, 아니, 이상하게 당연하다. 학교 선생님이 책을 소개해주셔서, 서로 돌려봤는데요, 아주 좋더라고요... `말문과 그 문`이 동시에 열리는 듯한데, 그게 남새스럽지 않고, 무슨 `원초적` 그런 기분도 안 나고, 그냥 편안하다. 100년 묵은 체증이 요란도 안 떨고 넌지시 씻겨나간 것처럼. 어허, 이럴 수가... 일간지 문학면을 참으로 화려하게 두루 장식한 <열정의 습관>의 `성기 묘사` 대목, 정확히 여주인공 미홍의 첫 `페니스(를 만진) 경험` 묘사는 이렇다.

뜨거운 주전자에 처음 손바닥을 데었을 때 보다, 처음으로 손이 빨갛게 얼도록 얼음 조각을 쥐고 있었을 때 보다, 손바닥의 생명선을 찔렀던 푸른 병 조각의 예리한 기억보다... `보다`는 `낮 꿈에서 깨어난 초저녁 눈을 가린 두 손안에 천천히 눈물이 고여 들던 기억보다`까지 장장 13개가 이어진다. 또, 못지 않게 문화면 신간소개란을 장식한 이 소설의, `섹스에 대한 정의`는 이렇다. 2시와 10시로 벌린 다리와 3시와 8시로 벌어진 다리가 더 깊이, 더 완전히 한 점에서 포개지기 위해 서로의 가랑이를 향해 밀어붙이는 감미롭고 격정적이고 절실하게 안타까운 곡예. 이 문장은 `충격적` `도발적` `귀기` `불온한`이라는 말을 기왕에 동원시켰지만 내 말을 보태자면, 보기와 달리(얼마나 시각적인가, 특히 두 번째 문장은 시각 그 자체 아닌가!) 이 장면을 영화화하려는 영화감독을 대부분 절망시킬 것이다. 영화의 과도한 시각성이 이 `문학` 장면의 절묘한 균형을 `우스꽝스러운 그림`으로 전락시킬 가능성이, 아니 운명이 너무도 거대한 것이다. 그렇게 전경린의 `성애`문학은, 대중적인 줄거리-틀에서 시작, 영화는 물론 육체-그림의 운명까지 넘어서려 한다. 문학평론과 대체로 무관한 이 란에서 그녀를 만나고자 했던 이유다. 그녀는 대중성의 감각의 깊이를 위해 문학력을 동원한다. 적당히 `문학적`인 것도 추구하고 적당히 `대중적`인 것도 추구하는 절충주의자가 아니다.

제가 아는 데가 별로 없어서요... 일산에 사는 그녀와 그렇게 통화를 하고 정한 만날 장소는 신촌 기차역. 역구내는 한산했지만 부시 방한 때라 미군 병사 한 명이 유독 눈에 띄었고 을씨년스런 날씨까지 겹쳐 한산함이 좀 살벌하게 느껴졌다. 1시간에 한번 도착하는 기차 손님 뒤치닥거리가 끝나니 구내는 교교하고 적막하고 가운뎃 기둥 4면을 장식한 거울 속은 모든 것이 정지한 가운데 나른한 절망처럼 내 얼굴 표정만 누추하고 누추가 볼썽사납다. 그녀가 오면 거울 속으로 불러 들여 기념사진을 한 장 찍어야 겠구만...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녀가 꼭 기차를 타고 오겠다고 한 것도 아니라서 역 구내와 그 앞의 넓은 주차장터를 오락가락하는데 철도원 아저씨가 `문을 닫아주세요`하니 꼭 `나가라`는 소리처럼 들려 밖으로 나오니 기다리는 일이 좀 춥고 궁상맞다. 어허 오늘 이거 좀 난감하겠구만. 얘기도 어영부영해서 그냥 인터뷰 정도로 생각하고 기껏 1시간 정도 시간 내갖고 왔을 텐데. 그걸 어떻게 꼬셔서 술도 먹고 그래야 할 텐데. 벌써부터 힘이 팽기니... 좀 따스했으면 좋겠구만... 그렇게 궁상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는데, 또 이상하다. `비릿한 따스함`을 갈구했는가, 전경린이 저 만치서 다가오는데, 마치 만난 적도 없는 가수 심수봉을 오래 전부터 만나는 듯, 만난 듯 하다. 말을 할수록, 그런 느낌은 더 진해졌다. 특히 그녀의 `나이 들며 섹시`해지는 듯한, 지워지듯 묻어나는 경상도 억양이.

그러니까, 제가 소설가 중 딴따라로 뽑힌 거군요... 역시 지워지듯 묻어나는 웃음을 내비치며 말했다. 맞아요. 그런데 나는 `딴따라`라는 말을 굉장히 좋은 의미로 쓰죠. `쟁이`(우리나라에는 `쟁이`가 드물다... 이건 작곡-연출가 김민기의 한탄이다. )나 `프로`라는 뜻으로. 나도 문학을 하지만, 아니 특히 내가 그런데, 있는 생각 없는 생각으로 원고지를 깨알같이 메꿔나가다 보면 참 쪼잔해지고 졸렬해지고 비열해지고 심지어 야비해지는, 아니 그러고 싶어지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그럴 때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딴따라`죠. 무대예술가처럼 생각이 화끈하거나 아니면 자기 일에 몰두하느라, 잡생각이 일체 없는 사람들을 만나면 스트레스가 좀 풀리는 거죠... 그래도 전경린이 긴가민가한다. 술 위주로 할래요, 밥 위주로 할래요?... 밥은 먹었고요, 그런데 몸살이 나서. 1시간쯤 잡고 약속한 사람도 있고. 그래요, 차라리 소주를 좀 먹는 게 낫겠네요... 나는 예상대로군, 하며 한풀 꺾이다가, 꺾이는 목덜미를 철렁하니 한방 가격당한, 아니 이미 기요틴 처형을 당한 `덜컥, 그 후`의 꼴이 되었다. 내가 아무리 두주불사지만 남자로서 지은 죄 또한 숱하게 많기 때문에 요렇게 말하는 여자 만나면 정말 겁난다. 세상에, 여자치고도 가녀려 보이는 여자가 `몸살`의 간당간당한 체력을 `소주`로 버틴다는 건, 정말 이조 5백년 여성수난사를 이 악물고 견디는 것처럼 지독하고 기나긴, 심지어 열흘 밤 열흘 낮을 밥도 안 먹고 소주로만 버틴다는(`끼니`를 대신했던 막걸리는 그게 불가능한 반면 `화학주`에 불과한 소주가 그런 경지를 가능케 하는 게 또 우리네 역사의 한 풍속이자 기적이지만) 인생 신산(辛酸)의 무게를 예리한 심장 통증으로 안기는 까닭이다. 하여, 나는 그렇게 주눅들고, 그녀는 그녀대로 성(性)에 대한 이야기는 재밌지만 성(性)에 대한 인터뷰는 정말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앉아, 현시원만 간간이 감탄-찬탄하면서, 이응준(소설가)이 며칠 전 소개해준 생고기집 <이름 없는 집>에서, `이응준`은 물론 정말 `김정환`도 `전경린`도 없이 술과 소주만 하릴없이 소비되는 상황이 한참 이어졌다. `주최측` 전홍기혜도 없는데...

하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는 터. 현시원이 `성기 묘사` 이야기를 다시 꺼내니, 전경린은, 놀랍게도 나처럼 `학구적`이라는 표현을 썼다. 전경린씨는 참 운이 좋은 사람 같아요... 제가 상을 많이 받아서 그렇단 말인가요?... 아뇨, 그것도 그런 반증 중 하나겠지만, 전경린씨는 주로 무슨 일을 저지르는 편이고 그게 곧 여러 사람들에게 문제의식으로 공유되잖아요. 그건 대단한 운이죠... 그렇긴 하죠. 그래서 매번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게 되는데, 정말 새로운 것일까, 그런 걱정을 많이 하죠. 아직까지는, 잘 해온 것 같기는 한데. 그게 행운이라면 행운이죠... 확실히, 그녀의 문장 억양은, 마침표와 의문부호의 경계가 흐려지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는 겸손함, 의 치열함. 또 하나는 웃음 속으로 엉크러드는 울음 혹은 울음 속으로 엉크러드는 웃음의, 치열함. 그래, 그래서 다시 심수봉? 90년대 페미니즘의 전사(戰士)로까지 평가되는 그녀한테 웬 심수봉? 그것을 확인하기 전에, 징검다리 질문을 던져 보자. 난, 전경린씨 보면, 문학이든 외모에서 풍기는 거든, `귀기`나 `독기`보다는 어떤 운명이 느껴져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운명... 그렇죠. 그런 운명이 있지요.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 운명. 그 운명과 끝까지 부닥쳐 보는 거죠. 그런데, 그 질문 참 슬프네요... 그때, 그녀가 뱉은 `슬픔`이란 말에 묻어난 표정은, 놀라웠다. 우선 내가 읽은 그녀의 문장 하나. 나는 그를 사랑한다. 사랑이, 그 순간순간의 섬광으로, 다가오는 미래를 염탐하는 두 눈을 감기고 두려움까지 지워버리는, 거칠고 열광적이고, 아무것도 바랄 게 없는 허무한 것이라면 말이다. 나는 무엇엔가 부딪쳐 부서지듯이 그를 사랑했다... (<바닷가 마지막 집>)

육체는 슬프다, 라고 말한 것은 랭보였다. 어느 날 아침 불안한 잠에서 깨어보니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의 몸이 거대한 벌레로 변해있는 걸 알았다, 는 카프카 소설 <변신>의 첫 대목이다. 예수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오비디우스가 쓴, 최초의 본격 (신화-역사)소설 제목 또한 <변형(들)>이다. 카프카의 <변신>은 그렇게 소설의 최초와 직결된다. 오비디우스 이래 (몸의)변형은 소설-상상력의 근간이었다. 그렇다면, 카프카에게는 기존-상상력 자체가 저주였을까? 전경린에게는? 그런 생각과 질문들을 전경린의 `슬픔`은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중고등생 때 카프카 <변신> 첫 문장을 읽고 문학(의 충격과 감동)을 알았다, 라고 전경린은 밝힌 바 있다.

근래에 `몸의 문학`이라는 화두가 유행했다. 나는 이것이, 다소 남성적이었던 사회주의 총체성 이론의 `거세 상황`을 메꾸기 위한, 다소 여성적인 문학의, (`느낌의`) 총체성 지향 현상이라고, 바람직하게 보았다. 그러나 그 총체성 지향은, 특히 남성작가들의 경우, 대체로 `귀의 문학` `손의 문학` `발의 문학` 등 신체 각 부위의 문학으로 지방자치화하더니, 그것을 매개로 총체성에 닿지 못하고 한 부위의 감각영역에 갇혀 결국 지리멸렬해졌다고 본다. 반면 전경린의 문학은, 성기(性器, 여성기든 남성기든)의 문학이, 처음부터,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가해자인 남성`으로서` 카프카가 직면했던 저주를 여성의 사랑`으로써` 극복하려는 현대적이면서 대중적인, 아니 대중성의 깊이로써 현대에 달하는, 몸=총체성의 문학이다.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여성 학대가 유독 심한 `이조 6백년`(여러 면에서 이조시대는 임진왜란 때 끝나야 했지만, 불행하게도 여러 면에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시대에 모종의, `멸망의 절망`이 운동권을 강타한 와중에 여성작가들이 문학-예술계를 `집단 점거`하는 현상의 근거가 그 언저리 쯤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쯤에서 나는 전경린 문학을 규정짓는 말 중 `독기`와 `불온`이란 말이 못마땅해진다. 무너진 체제의, 실패한 경험담의 뒤늦은 항변 혹은 안간힘 같은 까닭이다. 치열이 `독기`를, 혁명이 `불온`을 낳을게 자명하다는 것은 치열과 혁명을 남성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만 그렇다. 물론 크룹스카야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거쳐 연극배우 출신 강청에 이르기까지 `독한` 여성혁명가들은 많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그것은 혁명이 여성을 남성화했다는, 그만큼 미진한 혁명이었다는 반증에 다름 아니다. 약한 여자론? 아니다. 문학은 상처를 가장 강한 힘으로 만들고, 그러므로 `치열`이 `독기`를 낳기는커녕 포섭을 낳는다. 여성의 가장 거대한 상처는 성기 그 자체다. 그 상처-성기의 치열함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여성`(`치명적인 여자`. 이것은 또 얼마나 남성적인 표현인가)을 낳지, 않는다. 가령, 이런 표현. 연못의 밑바닥이 고요한 물의 무게를 느끼듯 내 몸의 깊은 바닥이 그의 무게를 받아 안기 시작했다...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그렇게, 전경린 소설이 지향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의 의사소통이자 대화다. 사랑한다는 게 그렇죠. 전쟁보다 더 복잡해요. 너무 탐하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게 자아도 잃게 되고, 너무 서먹해지면 영영 잃을까 겁나고... 그녀는 `여인`과 `여자` 사이 `여성`이다. 그리고 몸이 쾌속한다. 육체의 탐닉이 아니라 문학과 감성과 지식의 오르가즘 속으로.

심수봉요?... 항변이 담겨있지만, 너무도 착한, 혹시 어리숙하게도 느껴지는, 그래서 `억양의 눈`이 휘둥그래지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더니, 그녀가 말을 잊는다. 선배님. 심수봉보다야 제가 좀 지적, 아네요?... 그런데 그게 몹시 경쾌하다. 내가, 용기를 내 볼 만큼. 징역을 살다보면 말예요, (그녀의 남편은 유명한 운동권이다) , 요샌 어떤가 모르겠는데, 그때는 일과가 다섯 시 전에 끝나거든요. 간수들이 빨리 쉬려면 빵잽이들을 자게 해야 되는데, 감방에서 잡범들이 5시에 자줄 리가 있나. 그러니까 자라, 제발 좀 자라, 그러면서 온갖 유행가들을 다 틀어주는거라. 하지만, 그러면 더 안 자지. 더 흥분이 되거든. 이미자 <동백아가씨>도 흥분이 될 정도니까, 들고양이니, 주현미니, 더군다나 반반하고 섹시한 얼굴에 댄스풍이면 환장하죠. 이게 자라는 건지 딸딸이 치라는 건지 모를 정도란 말예요. 하긴 딸딸이 치면 잠이 잘 오긴 하지요, 그래서 그랬나 몰라. 헌데, 심수봉 노래 나오면 어떤 줄 알아요?...(...?) 그냥 한없이 편안해지는 거라. 딸딸이를 치려는 손까지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정말, 착하지, 얘야, 착하지, 이제 자야지... 그러면 정말 잠이 솔솔 오는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을 아끼므로 <열정의 습관>을 인용해보자.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섹스는, 처음으로 내 취향의 진실을 알게 된 섹스였어요. 나보다 체구가 작은 남자였는데... 그전까지 난 섹스는 나보다 큰 남자하고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거든요. 왠지는 모르지만... 나보다 작은 남자와 섹스를 하면서 처음으로 남자의 몸이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느꼈어요. 내 속의 욕망이 정말로 소란거리기 시작했어요. 구석구석 살펴보고 키스하고 만지고 깨물고 핥고 장난치고 느낄 수 있었어요. 남자의 몸이 전혀 나를 억누르지 않았죠. 그 섹스 이후에야 난 알게 되었어요. 전엔 내가 늘 75퍼센트쯤 강간당하는 섹스를 했었다는 걸요.`

심수봉의 여자내음은, 그 생애가 정말 얼마나 치열하고 생생하고 싱싱한가. 그런데도, 한탄의 감성(感聲)을 닮은 채, 끝없이 자애롭다. 여성의 충만이 성욕을 극복하는 순간이다. 전경린의 소설 미학 또한 한탄의 감성을 닮았지만, 심수봉과 달리, 지적이다. 그녀 소설의 성기는 한편으로 중국의 파란만장을, 다른 한편으로 일본 감각의 깊이를 거느리고 발산한다. 성기의 충만이 (또한) 성욕을 극복하는 순간이다. 아니 더 나아간다. 여성의 충만이 충만의 아름다움으로, 그 아름다움이 역사의 상처 혹은 역사적 콤플렉스를 치유, 여성해방이 곧 남성해방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는 순간이다. 아 그래서 백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구나. 그녀 소설을 읽으면, 고통을 받고있는 것도 운명적인 것도 필사적인 것도 분명 여자들인데, 나는 괜히 남자란 불쌍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책은 잘, 나가죠? 뭐, 요란한 만큼은 아니고요. 제 소설 문장이 좀 복잡한 편이라서 그렇게 아주 많이 나가는 편은 아니지요...

약속시간을 몇 번이나 미루게 하고 일산까지 쫓아가 카페 <산타페>에 자리 잡고 다른 `여성작가들` 부르네 마네 그러는 와중에 전경린이 훨씬 편한 자세를 잡는데, 현시원이 `남자 친구 상담`을 청하니 대답이 술술 튀어나오는데, 전경린은 정말 신세대다. 정말 좋아하는데요, 그게, 감정이, 몸이... 스무 살 차이 나는 두 여자가 야한 이야기를 야하지 않게 하는데 나는 그걸 기분좋아하는 나의 한 부분이 기분 좋고, 기분 나빠 하는 부분이 기분 나쁘고 찜찜해 하는 부분이 영 찜찜하고, 당혹해하는 부분이 당혹스러우니, 남녀 문제에 관한 한, 혹은 남녀평등 혹은 해방에 관한 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 차원까지는 간 것 혹은 온 것 같아서 대체로 흔쾌하다. 전경린씨는 모종의 질료 덩어리 같아, 디오니소스적인. 그래서 아주 좋아요... 이 말에 그녀가 모처럼 반색하고 또 놀란다. 질료 덩어리, 그 말 맘에 드네요. 그런 것도 같아요. 그런데 선배님이 디오니소스적인 걸 좋아하는 줄은 미처 몰랐네요. 아폴론적인 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녜요, 내가 원래 미친 놈이죠... 그렇게는 안 보이던데... 이런이런. 역시 문학은 잘난 척, `리론` 아는 척을 한번 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니까. 평생 간다니까. 근데, 정말 야단 맞는 것도 편안하네... 만날 약속한 자(여잔지 남잔지 모르겠지만) 한테서 계속 전화는 오고 전경린은 그때마다, 열면 보라색 뚜껑과 노란 듯 푸르스름한, 투명한 번호판의 내외(內外) 관계가 그렇게 성(해방)적으로 조화로울 수 없는 최신 핸드폰을 들고 종종 걸음으로 나갔다 오고, 나는 뚜겅을 따고 병 채,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야금야금 마시는, 나로서는 별로 믿음(?)이 안 가는 신세대풍 음주습관을 별로 불편해하지도 않고 다섯병 째 시켜 먹으면서, 그렇게 은근히 취해들면서 그런 생각이 엄습했다.

그런데, 지적이고 디오니소스적이라, 아폴론적이라... 전경린이, 전경린도 디오니소스-아폴론의 2분법을 쓰기는 했지만, 젊은 날 니체한테도 한 방 먹이는군. 사실, 아폴론도 디오니소스 못지 않은 '또라이'다. 디오니소스는 자신의 상태, 즉 광란의 상태를 벌로 내렸고 그 만큼, 아무리 대규모적이고 끔찍하단들, 복수적이 아니라 운명적이다. 아폴론의 '또라이' 짓은, 다르고 더 경악스럽다. 아들 딸 각각 일곱을 두었던 니오베가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만을 둔 레다보다 더 행복하다고 한 것에 격분, 누이 아르테미스와 함께 니오베의 자식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것. 젊은 날 니체의 주장과 달리, 그리스 연극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변증법에 의해 탄생하지 않았다. 광란과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자체 정화, 인간 야만성의 자체 정화 과정 속에 과정`으로써`, 그리고 과정`으로서` 생겨났다. `지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충돌은, (아폴론과의) 외적인 그것이 아니라 디오니소스 내부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전경린은, 더 나아가 그 둘을 일원적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열정의 습관>. `열정`은 디오니소스적이고 `습관`은 운명의 습관 혹은 습관의 운명을 통해 이론화한다. 이 과정을 전경린 소설의 `몸의 사랑`이 공간-감각-등식화한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아직도 안 가면 평생 날 안 볼 것 같으네요... 전경린이 그렇게 말하며 일어선다. 좀 취한 것 같은데, 그래도 바래다 준다면, 실례 아닐까, 누구일까?... 하지만, 그녀는, 무슨 눈치를 보기는커녕 이런저런 내색이 없다. 눈치를 보다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그렇게 잔머리를 굴리는 내 자신만 한심하다. 어쨌거나, 독자들도, 추정은 금물.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이고 그녀는 `디오니소스=지적`이다. 그녀를 내려 주고 현시원과 함께 서울로 돌아오려니 기분 좋은 피로가 밀려온다. 이것도 추정은 금물. 그녀와, 또 그녀의 소설과 섹스 얘기를 많이 한 건 사실이지만, 뭐를 했다는, 혹은 안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게 아니라, 기분 좋게, 평화롭게 슬펐다는 거다. 그래. 평화는, 전쟁보다 깊고 깊은 슬픔이라는 것. 심수봉이 전경린 소설 화자의 입을 빌어 노래한다. 남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요. 권태와 불감증과 절망적인 무료함과 생의 공백을 소독하고 싶은 것. 그래서 극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일탈을 시도하는 거예요. 낯선 여자와 색다른 섹스를 하는 것처럼... 아, 슬프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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