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이인제 고문이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과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이 고문은 18일 오후 CBS 라디오 방송 주최 대선주자 토론회에 출연,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에 대해 "북한이 중동에 미사일을 수출한 증거를 잡고 테러집단을 지원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으로, 전투기 판매 등 작은 이익을 위해 한반도 정책을 전술적으로 이용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이 고문은 또 "미국의 정권이 바뀜에 따라 대북 인식이 바뀔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여 한미 공조를 적극적으로 해야 했는데 정부의 발이 느렸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 부시정부의 강경자세에 대해서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다는 해석이며, 현 정부의 대미정책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이다. 한나라당의 입장과 거의 같다.
이 고문의 이 같은 발언은 당내 여타 대선주자들의 입장과도 명백한 차별성을 보여준 것으로 향후 선거 국면에서 보여줄 이 고문의 대선 전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이처럼 보수적 입장을 견지한 이 고문의 발언을 두고 당내 경선은 물론,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의 대권 경쟁을 염두에 둔 포석으로 보는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 이회창 대 이인제 구도로 대권 경쟁이 압축될 경우 이 총재의 지지기반인 보수층을 끌어안기 위한 전략이 아니냐는 것.
한편으로는 현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국민적 실망감을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여권 주자로서 햇볕정책의 성과는 성과대로 챙기면서 반대 여론의 화살은 피해가겠다는 의도로 보는 시각이다.
***현 정부 대북정책 두고 줄타기**
이인제 고문의 정부 대북 정책에 대한 문제제기는 지난 9일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밝힌 바 있다.
이 고문은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상황이 진전되면서 국민들은 북한이 현실을 인정하고 우리 요구 수준에 맞는 성의를 보여주지 않아 실망하게 됐다'며 '이런 상황변화에 맞춰 발빠르게 국민들을 설득시키고 이해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은 인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고문은 '포용정책의 기본적인 목표나 수단은 아주 적절했다'며 정부의 대북정책을 보는 국민의 양분된 시각 사이에서 발언의 수위를 조절했다.
이 고문의 이 같은 표현은 이회창 총재와의 대권 경쟁을 기정사실화한 가운데 나온 전략으로 보인다.
현 정부의 햇볕정책 기조를 유지함으로써 여권 후보 프리미엄은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사업을 중심으로 대북정책을 발전시켜 나가겠다'며 현 정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한나라당 측의 '퍼주기식 정책'이라는 비판을 피해 가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보수층에 밉보일 필요있나...**
지난 15일에도 이 고문은 SBS TV 민주당 대선주자 초청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 "이제는 인권이나 민주주의에 대해 북한도 현실을 인정하고 단계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청해야 한다"면서 보수세력의 단골메뉴인 북한 인권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또한 18일 '북한의 미사일 수출 증거'를 제기한 것은 최근 북미 관계 악화의 일차적인 원인이 북한에 있다는 인식을 보여준 것이다.
'북한의 무기수출 중단', '미국의 지속적인 대화 노력'을 요구하며 개혁 세력의 입장과 뚜렷한 거리를 두고 있는 이회창 총재와 거의 차이가 없는 주장이다.
이 고문 측은 막상 이 총재와의 대권 경쟁이 가시화 될 경우 개혁세력은 어차피 이 고문의 손을 들어 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따라서 부시 대통령의 방한과 북미 관계를 보는 시각에서 보수층을 염두에 둔 입장을 표명한다고 해서 이 고문에게 불리할 것은 없다는 판단이다.
반대로 보수층에게는 이 총재와의 차별화를 희석시켜 이 총재의 지지기반을 잠식할 수 있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권주자 체면치레는 한 셈**
이 고문이 최근 잇따라 밝힌 북미 관계와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입장 표명은 당내 대권경쟁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관측된다.
그간 '악의 축' 발언 파문과 부시 대통령의 방한을 둘러싸고 여야간, 보수 진보간 첨예한 대립 국면 속에서도 이 고문은 '평화'와 '안정'이라는 원론적인 입장만을 밝히며 거리를 유지해 왔다.
이와 달리 민주당 대선주자들 중에서 유종근 지사, 정동영·김근태·김중권 고문 등은 앞다퉈 부시 대통령의 강경발언에 반대하는 성명서와 기자회견문을 발표했다.
이러한 민주당 대선주자들의 선명한 입장 표명을 두고 부시 대통령의 방한과 맞물려 자신의 '인기몰이'를 위한 언론플레이라는 비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로 북미 갈등에 대한 입장표명을 유보해 온 이인제·노무현·한화갑 고문 등 선두그룹에 속한 주자들에게는 정국현안에 탄력있는 대응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쏟아진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전히 원칙론만을 앞세우고 있는 한화갑·노무현 고문에 비해 최근의 간헐적 입장 표명으로 이 고문은 일단 '면피'는 한 셈이 됐다.
부시 대통령의 방한과 북미, 한미관계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지금, 각 언론에서 밝힌 이 고문의 발언은 따라서 제한된 수준이기는 하지만 시기적으로는 절묘했다.
***이인제의 노림수?**
결국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과 한미정상회담을 둘러싸고 정계의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이 고문이 던진 발언에는 노림수가 있어 보인다.
당내 경선에서의 주도권 확보, '이회창 견제', 현 정부와의 일정한 '거리 유지'라는 여러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겠다는 것이며, 이를 위한 방법론은 '보수층 끌어안기'로 해석된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방한이 남기고 갈 여파는 아직 예측하기 힘들다. 정치권 내부에서 보이는 보수-진보세력 간의 치열한 공방도 쉽게 누그러들지 않을 조짐이다.
이 고문이 두들긴 손익계산이 그대로 들어맞을 지는 그래서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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