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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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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10>

이 풍진 세상에 무엇을 열꼬 하니

내가 명색 한국문학예술학교 `교장`이니 이 글은, 이를테면 전면광고다. 더군다나 `교장`이란 직함은 높다는 뜻이 아니라 `교무과장`의 준말이므로(10년 가까이 내가 운영하고 있는 한국문학학교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아주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전면광고다. 하지만, 바로 그러하므로, 어떻게 써야 광고효과도 높이고 동시에 `아주 잘 썼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새침 옹골찬 매력을 풍기는 미인풍에 예술적인 취미와 감(感)이 농후하지만, `실무방면`에서는 생각하는 게 너무 멀쩡하고 합리적인데다 가끔씩 성깔까지 있어서(물론 그것도 매력적이다) 구닥다리 민주화운동권의 `정에 굶주린` 습관성 반복-퇴행 행태에 정말 정나미가 떨어진다며 일침, 아니 거의 살인촌철을 놓으며 나를 쩔쩔 매게 만드는 여변호사 강금실은, 프레시안 대표이사 이근성을 보고는 그 까다로운 첫 눈매를 당장 거두면서 이렇게 내게 찬탄했다.

어머, 어쩜. 사람 인상이 어떻게 저렇게 좋을 수가 있지, 더군다나 운동권 사람(그는 중앙일보에 오래 있으면서 부국장 자리까지 올랐으나 저 유명한 민청학련 출신인데다, `좌파`선거운동이 벌어질 때마다 퇴사를 감행, 선거현장을 누빈 경력의 소유자다.)이….

그녀가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다. 대개의 `운동권 출신`들은, 정치권에 출세를 했든 안 했든, 정권을 잡은 쪽에 소속했든 아니든, `개혁파`든 아니든, 얼마간 표정에 울화와 모종의 정신 사나움, 뚜렷한 좌우(左右) 살핌증, 그리고 피로가 묻어있기 마련이다. 박정희 이래 40년 동안의 한국현대사가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채로 세월이 늘어나는 만큼 지지부진해왔던 까닭이다. 그런데, 이근성은 미남형 얼굴에 나이만큼 온화한 미소가 묻어난다. 그것은 중후한 만큼 온화한, 그리고 중후를 온화로 바꾸어낸 미소다.

뭔가 제대로 된 걸 하긴 해야지. 정치쪽은 안되겠어, 뭐 되는 일이 었어야지 말야…. 그렇게 다소 쭈볏거리며 그가 <프레시안> 창간 의사 및 계획을 밝혔을 때 내가 다짜고짜 `맞아요. 우리나라 정치란 게 정말 좋은 일 하나 할려고 쓸데없는 짓 아홉을 해야 하니`하고 받았더니 그는 `허허허. 그래. 맞아` 하며 그 고운 너털웃음(그의 너털웃음은 정말 곱다!)을 흘렸었다.

그런데 유료독자를 얼마 보는 거야? …. 너무, 터무니없이 또 무기력하게 낭만-낙관적인 운동권 풍토에서 자라 그런지 상대방의 원대한 포부에 `초를 치는` 자체단련형 악습이 몸에 배인 나는 그 질문에 곧이어 `한 만 명?` 그렇게 덧붙혔다. 그것도 선심께나 쓴다는 투로. 그런데, 그가 이렇게 대답한다. 만명이면 좋지…우리나라 고급독자라는 게 2, 3만명이니까….

그건 매우 놀라운 상황판단이고 전략이었다. 나는 다소 황홀해서 문학의 고급독자 수(언론의 고급독자보다 당연히 훨씬 적은)와, 천박화 일로를 걷는 대중문화 풍토에서 내가 학교를 운영하며 작가 및 고급독자를 키우는 독한 방법(공부 안 할 사람은 받지 않는다. 공부 안 하는 사람은 쫓아낸다. 선생 대 학생 비에서 최고수준을 유지한다. 선생은 [잡무와 요약형 교양강좌에서 해방시켜]아주 편하게 학생은[작품 창작으로] 아주 고생하게 만든다. 그렇게도 장사가 되나? 된다. 그래야 더 잘 된다. 선생이 고정되고 한 학생이 한 선생에게 몇 년씩 공부하니 분위기 진지해서 좋고 광고비 안 드니 좋고…. )에 대해 떠벌였다.

그의 `인터넷 언론`과 나의 `인터넷 학교`가 의기투합하게 된 계기는 그렇게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 후 5개월 동안, 나는 선생님들을 위해 `예술교양과정`을 건물 대신 지었고 그는 신문 창간기의 그 바쁜 와중에도 내가 들를 때마다 어김없이, 거의 의무 삼아 `술 한 잔`에 격려를 보태주었다.

<프레시안> 창간하고 나서는 얼굴이 더 좋아졌다는 말을 들어…사람은 정말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 해. 스트레스가 없거든…. 내게는 술보다도 그 말이 가장 큰 위로가 되었다.

으잉? 접수는 아직 안된다고? 저런…. `문학예술`과 `개학식`은 아무래도 서로 어색한 관계지만 이근성이 예의 그 미소와 너털웃음으로 `어. 학교여는 거 굉장한 일인데, 개학식 해야지…. 허허.` 그렇게 말하는 거라서 술자리 연락을 대충(부산사는 시인 강은교, 춘천사는 소설가 전상국은 멀어서 연락을 안 했고, 화가 임옥상은 전시회 준비 차 홍콩에 있다. 정호승은 선약이 있다 했고. 결국 `어른들`은 아름다운 배경으로 되었다. ) 했지만, 낭패군….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오픈 한 내용 중 부실한 데가 너무 많았던 것. 어허 윤정은(프로그래머), 토요일날 밤늦게 까지 짤짤 매더니, 일이 너무 많았구나. 그녀는 문학-예술을 안 해봤고 나는 프로그래밍을 안 해봤다. 허둥지둥 회사로 나가 그녀 옆에 당그마니 앉아서는 하나씩 수정을 시켜갈려니 나도, 내 몸무게에 안 어울리게, 짤짤 매게 된다. 미안해라….

아뇨, 제가 잘못한 건데요, 제가 죄송하죠…. 갈수록 또랑또랑 해지는 그녀 눈망울이 정말 대견스럽다. 다음엔 나의 무지로 그녀가 고생하는 일이 없어야 할텐데…. 어쨌거나 너무 고요하군…. 이런 날은 반드시….

아니나 다를까. 수정이 끝날 즈음 소설가 현기영으로부터 `급전`이 왔다. 너, 바쁘냐?…. 그렇게 다짜고짜 묻는 전화는 십상 당장 나오라는, 나와서 술 먹자는 전화다. 나, 원일이(소설가 김원일)하고 있다…. 그리고 내 평생 소원은 그때 절대로 `나 좀 바쁜데. ` 그런 따위 대답을, 설령 무의식적으로라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물론 불편한 사람은 며칠 전의 사전 약속조차 대충 얼버무려 피하겠지만.

저 말이야, 우리 무교동 낙지집으로 가니까…. . 잘 됐다, 겸두겸두 개학식 초청손님으로…. 참으로 마땅한 생각이었다. 김원일은 내가 10년 전 `문학학교`를 시작할 때 의논을 했던, 선생을 안 해주겠다면 학교 계획 자체를 포기하리라 마음먹었던 단 두 사람 중 한 명이다. 또 한 사람은 소설가 이문구. 이 둘은 진정한 스승에게 문학을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대표적인 소설가였다. (두 사람 모두 강의를 맡아주었고, 학교를 실질적으로 대표하게 된다. ) 그리고 현기영은, 참으로 모시고 싶은 선생이었으나 오히려 고등학교 선생 노릇마저 창작에 전념키 위해 그만두는 분위기라 어정쩡하게 기회를 놓쳤었다. 두 사람은, 무엇보다 환갑 나이를 맞으며 혹은 바라보며 나이만큼 무르익은, 우리 문학사에 희귀한 `만년작`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와 김원일의 <슬픈 시간의 기억>)에 달한 대표적인 사례다. 전문작가과정 개학식에 이보다 더 좋은 배경이 또 있겠는가. 그렇게 배경이 중첩된다. 술 취한, 다소 거치른 배경이겠지만, 어쨌거나.

무교동 서린 낙지집은 한산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혀끝을 태울 정도로 매운, 시뻘건 낙지 양념 맛이 자아내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랄까 악으로 버틴달까 그런 분위기가 완연 거세된 분위기였다. 등을 돌린 채 앉은 두 사람의 거동에서 묻어나는 허물어질 듯 하지만 그게 무지근 푸근하고, 비애를 비치지만 비애야 말로 비극적(예술용어로서의) 자애라는, 언명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신춘문예 심사 하느라고…. 작품이 좋던가요?…. 글쎄. 어쨌거나 뽑긴 뽑아야 하니까…. 안 좋아요? 아니 그런 거라기보다…. 내 질문에,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투적인` 이사장 현기영과, `순수문학파`(라고 하지만 그는 80년 초부터 운동권에 꾸준히, 솔찮은 액수의 `회비`를 내오던 `성심파`다. )로 현기영의 전투성에 가끔 불만을 터트리는 김원일이 그렁저렁 대답을 하는데, 구분이 되지 않는다. 요즘 `애들` 문학에 대한 걱정이 한결 같은 까닭이다. 당연하지. 문학하는 사람 마음은 풍성한 만큼 방법이 다르고 올곧은 만큼 `좋은 문학`에 대한 열망이 같다.

그러다가, 김원일이 다소 목청을 찢었다. 엽기, 엽기 하는데, 그거 다 1910년대에, 그보다 더 심하게 했던 거라고…. 표현주의 말야…. 현기영이 시치미를 뗀다. 표현주의? 익스프레셔니즘. 익스프레셔니즘. 난, 잘 모르겠는걸…. 내가 엉뚱한 쪽으로 아는 체를 했다. 요즘 무슨 조사를 해보았는데 희한한게요, 그 표현주의 예술가들, 그 난리를 치고는, 정작 자기들은 되게 오래 살았더라고요. 평균 80세는 족히 될 것 같애…. 맞아, 그 오스카 코코슈카. 그 자는 90너머 살았잖노. 그거 유명한 얘기라….

치아라. 니 개학식엘 내가 왜 가노…. 아이 난 젊은 것들 만나서 술 먹기가 좀 그렇더라…. 우우 몰려다니며 먹는 것도 그렇고… 맞아 좀 속닥한 맛이 있어야지…. 그렇게 손사레를 치면서도 두 사람은 인사동 <평화만들기>에 있겠노라는 말을 하며 나를 보내주었다. 다양하고 `유명한` 손님들 북적거리기로 소문난 `년말 평화만들기`라. 심상찮네…

저녁 6시 약속 시간에 늦은 것 같아 서둘러 경기빌딩 5층 <프레시안> 사무실로 올라갔더니 이근성이 오명가명 하는 중에 여자 셋, 소설가 김인숙, 소설가 조경란, 안무가 마혜일이 나란히 앉아 있는데 나는, 취가가 오르는 중에, 적어도 오늘 만큼은 여한이 없는 기분에 빠져 들었다. 내가 이 학교 선생으로 모시려고 기를 썼던 세 여자가 모두, 한꺼번에 모여있었기 때문이다(화가 임옥상, 연극연출가 안치운, 팝음악 평론가 신현준은, 남자다.).

왜 이 세 사람을, 그리고 `세여자`를 모시려 애를 썼던가. 셋다 미인이라는 것은 알 만 한 사람은 다 알지만, 그 이유도 있지만, 그 이유가 다는 아니고, 무엇보다 `이유의 방향`이 다르다.

나는 아름답지 않은 여자를 싫어하고, 아름답지 않은 여성작가를 더 싫어한다. 다만, 나의 아름다움은 `(머리 혹은 가슴에든)내용과 (눈에 보이는)형식`의 조화와 연관이 있다. 젊은 날에는 반반한 영화배우들이, TV탤런트들이 너무 예뻤다. 깜찍하면 그런대로 섹시하면 그런데로 지적이면 또 그런데로. 모든 것을 다 용서할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40이 넘으면서 내 눈이 좀 괴팍해졌다. 잠깐 뱉는 말투, 미소의 끝자락, 잠깐 비치는 행동, 화려한 옷차림의 마지막, 미세한 마무리, 그런 것들에서도 그들의 머리에 혹은 가슴에 담긴 것들의 `수준`이 보이고, 비치는 거다. 그 내용-수준 혹은 연기예술과 외적인 미모가 불균형을 이룰 때 그것은 괴롭고 추하기 짝이 없다. 정말, 추함보다 추한 것은 불균형이다. 그런데, 연기나 `잠깐`의 행동거지가 아니라 생애의 소설을 통해 자기 생각과 나이의 전모를 보여주면서도 그 (여자의)외모가 (남자에게)아름답게 보인다면, 그건 정말 외모가 아니라, 문학의, 삶의, 의미의 아름다움 아니겠는가.

김인숙은 단편모음집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에서 시난고난한 삶은 물론 죽음의 미학까지 문학-일상화하면서 더 너그럽게 아름다워졌다. 조경란은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에서 일상과 신비의 영역을 절묘하게 융합시키며 더 청초하게, 엄정하게 아름다워졌다.

마혜일은? 그녀는 80년대 노동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기에 온갖 대규모 농장을 돌아다니며 온갖 험한 공연 궂은 공연을 다 치러냈던 `강경파`지만, 그 모든 세월이 예술을 위한 길이었다는 듯 다소곳이 아름답고, 그게 이제서 그리 당연하고 그리 뿌듯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떻게? 2001. 6. 9일, 연세대 노천강당 만명이 넘는 관중 앞에서 그녀의 `춤패불림 동료` 김옥희와 단 둘이 공연한, 여는 춤 `문(門)`은 5분도 채 안되는 공연이었지만, 가장 웅장하면서도 가장 편안하고, 가장 사회주의적이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분위기를 공연 벽두에 형성시켰다. 마혜일은 가장 춤꾼다운 어깨선을 가졌다…. `운동권 춤`을 내내 못마땅해왔던 채희완(무용평론가)이 그날의 공연을 촌평한 내용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세 사람. 그러니, 여한이 있을 리가 없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세 사람은 이런저런 나의 질문에 샐금샐금 웃을 뿐, 향기를 낼 뿐 말이 없고, 다소 불편해질 때쯤 시인 고형렬이 도착, 그림을 완성시킨다.

클라크 게이블을 닮은 그는 불교적 예술-상상력(내가 보기에 불교에서는 상상력 그 자체가 예술이고, 교리가 예술론이다)으로 현대 도시의 가난한 삶을 어루만지며 혹은 어루눙치며 심지어 어루뺨치며 관통하는데 도사급 실력을 보여오다가, 최근 시집 <김포 운호가든집에서> 에서(제목 중 `에서`는 불만 스럽군. 겹치잖아. ) 성(性)의 해학을 통한 그 모든 것의 뒤섞기 혹은 일탈 혹은 침잠을 시도하고 있다. 이시영 시인은 그런 그를 두고 `모종의 경지`에 달했다고 평한다. 속세인이 아닌 듯 아니면 벌써 죽음에 한 발 딛은 듯 종적없이 살지만 가르치는 것은 그지없이 자상하다.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르침`에는 `자상`보다 `가혹`이란 단어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훈장세대다.

안치운의 연극평론은 문학인들 사이에도 그 미문(美文)의 섬세한 논리가 정평 나 있는 드믄 케이스다. 1년 전 우연히 만나 그냥 차 한잔을 나누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나는 그가 아직도 `강사-보따리 장사` 신분이라는 것에 비분강개했었다.

신현준도 마찬가지. 그는 경력이 특이하다. 서울대학교 노래패 <메아리> 출신의 기타쟁이였다가 당대의 정치경제학 이론가 윤소영(한신대 교수)에게 흠뻑 빠지더니 다시 때려 치우고 대중음악 평론에 새로운, 첨예하고 탄탄한 영역을 열기 시작했다. 지금은 대한민국 최고권위의 음악 웹진 www.weiv.co.kr를 운영하고 있다. 뭐, 원래 경제학과 출신이고 경제학박사학위까지 받았으니 부모 친척 실망시킬 일은 없겠다. 중요한 것은, 그가 `경제학자이자 대중음악평론가`가 되려 한다는 것. 그것은 한국현대사의 양극단을 한데 봉합하는 일에 해당하지만, 그는 그것을 해낼 만한 특이한 이력과, 더 중요하고 또 희귀하게, 특이한 능력의 소유자다.

컴퓨터가 다운되서요. 그거 고치고 <평화만들기>로 곧장 갈께요…. 때가 어느 땐데 `컴퓨터 다운`이냐…. 그러면서도 나는 80년대 어느 해 노래모임 <새벽> 지하사무실을 유린하며 음악장비 일체를 망가트렸던 장마비가 생각났고,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근성은 우리를 버섯 사브사브 집으로 데려갔는데, 조잘재잘대긴 했지만 별 흥이 나지 않는다. 최인석은, 온다고 했는데, 올지 안 올지. 아니 온 건지 안 온 건지 모르겠다. 워낙이 현실과 초현실 혹은 괴기-공상현실을, 참으로 눈물겹게, 역사적으로 왔다갔다하는 작가다. 그는 가르치는 게 자상하지만, 동시에 학생들 공부 안 한다고 반 자체를 해체해버린 경력의 소유자다.

윤정은은 일이 있다고 도망가고 편집국장 박인규가 학교 만드느라 고생한, 또한 너무 뚝심좋고 건장해서 나를 고생시킨(왜냐면 다시, 나는 프로그래밍을 잘 모르고, 그들은 문학-예술을 잘 모르니까. ) 남성 프로그래머 둘이 들어온다. 다소 분위기가 뜨지만 아직이다. 아니, 나만 그런가? 밥이 아니고 술을 달라, 그랬나? 아니, 내가 벌써 취했나?

<평화만들기>는 벌써 술폭풍이 한 차례 지나간 듯 했다. 이도윤이 이미 한탕 쳤어…. 주인 혜림씨가 말한다. 이도윤이 누군가. 시인이자 MBC 스포츠담당 피디. 시가 최고라 할 수 없지만, 술 먹고 상대방 진 빼는데는 단연 으뜸인, 거꾸로가 아닌 게 불만이라 더욱 술이 느는, 정 많고 상처 많고 시한(詩恨) 많은 사내.

임재경(경제평론가, 전 한겨례신문 부사장)과 여익구(환속 승려, 몽양 여운형 추모사업회 사무총장), 두 점잖은 양반이 낮부터 폭음은 그렇고 조용히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나누자고 왔다가 큰 일 치르셨겠다.

그런데, 저게 뭐람? 테이블 상석에는 한겨레 신문 문화부 사람들이, 마루상석에는 조선일보 문화부 사람들이 진을 치고 망년회를 하고 있다! 신기하네. 서로 으르렁대지도 않고…. 양쪽 다 점잖어. 문인들이 골치지…. 월간조선만 없으면 상관없어…. 혜림씨가 그렇게 쫑코-귀띔한다.

하긴, 벌써 그렇다. 그 쪽은 조용하고 `개학식팀`들이 목소리가 높아진다. 누구지? 방송작가 박진숙씨다. 언제 왔지? 화장실 간 사이보다 더 짧은 순간에 그녀가, 그녀의 농담과 음담 사이 절묘한 애교가 여자들을 달래는 듯 웃기다가 급기야 심중의 모든 저어함을 풀어헤치고 그 옆의, 후배 방송작가 최현경(그녀는 또 언제 왔지? 아, 같이 왔겠구나…)의 좀더 과격한 패설이 다시 통쾌하다.

나는 벌떡 일어나 노래를 부른다. 아름다움과 문학에 취해. 정환이 오빠. 좀 안 시끄러운 걸로 불러라…. 혜림씨가 그렇게 통사정이고 `김정환. 노래 좀 줄여!` 그러는데, 누구지? 아, 이성우. 쟨 또 언제왔지? 노동운동 경력의, 그리고 이도윤 못지 않은 술버릇의, 일빛출판사 사장. 쪽 팔리네. 전에 내가 술 취했다고 면박께나 준 것 같은데, 들켰네…. 그러나 나는 더욱 노래를 높혀 부른다. 아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노래 목청이 높아진다. 이 놈이…남의 아름다움과 남의 문학에 취해, 제멋대로….

야, 이, 씨발년아…. 프로그래머 한 명이 혜림씨에게 욕을 해댄다. 어허, 저놈 이제 죽었다. 그 욕 만큼은 혜림씨가 정말 안 참는데…. 내 노래 목청은 더욱 높아진다. 내가 노래를 부르는게 아니라 목청이 나를 부르는 것처럼.

아, 근성이 형이 낸다고 오빠는 내지 말래…그래? 내가 내야 하는데. 그 형이 일차 샀잖아…. 그래도 절대 받지 말라 그랬으니까…. `돈` 얘기에 갑자기 활짝 깨는 내 정신의 수준이 한심하다. 어쨌거나 노래, 더 큰 노래, 더 더 큰 노래….

박인규는 한겨레 신문과 조선일보사를 오가며 이놈 저년을 모두 끌어안는 사해동포주의를 발하더니 복도에 방뇨를 했다. 문제의 프로그래머는 내친 김에 한겨레신문기자에게 대놓고 시비를 건다. 이 새끼들 좆도 아닌 것들이 잘난 체 하기는…. 다른 프로그래머 한 명은 그를 달래느라 안절부절인데, 그 와중에도 이성우는 생애 절정기를 맞은 듯 제 혼자 신이 나서 짐승처럼 울부짖고….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개학식 아닐까? 나는 그런 착각이 들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사실은 운동권 뿐 아니라 모든 대학신입생들의, `상아탑 속에서 세상을 내다보는` 입학식`이듯, 우리의 입학식은 이렇게 세상의 축도, 최소한 문화계의 축도를 관통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 축도를 관통하는데 있어, (남이 되어버린)노래와 (남의)아름다움과 (남의) 문학만 가지고는 불충분했을까?

12시가 넘어 귀가를 서두르는 세 여자를 만류하는데 실패한 나는 머리로 벽을 들이 받았는데, 그게 벽이 아니라 대형유리창이었고, 와작 부서지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는 개학식 하루를 보냈다. 어허, 이거. 학교 잘 되겠나. 잘 되야지…잘 되게 만들어야지….

Ps. 내가 대형유리창을 깼다는 사실을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이틀이 지난 후에 혜림씨가 전화로 알려주었다. 오빠, 그날 굉장했던 것 몰라? 말도 마. 그날 파김치가 된데다, 그 다음 날은 황석영씨까지 와서 또 한바탕을 치르는 바람에 완전히 뻗어서 연락을 못했어…. 그녀는 그렇게 말했는데, 나는 다른 건 귀담아 듣지 않고 그냥 소설가 황석영씨도 `개학식`에 뒤늦게 참석한 걸로 간주하기로 했다.

근데 말야, 오빠. 유리창 값 8만원인데, 물어줘야 돼. …. 물론이지, 당연히…. 아니, 미안해…미리 설친 놈, 방뇨한 놈, 시비건 놈, 기고만장한 놈…. 별의별 놈이 다 있었는데 유독 아름다움과 문학에 취해 고성방가한 죄 밖에 없는 내가 정작 돈 8만월을 내자니 다소 억울했지만, 그날 집에 도착해서 잠을 자려니 머리 한쪽이 예리하게 아프길래 몇 달 전 뺀 이가 뒤늦게 말썽인가 걱정 중이다가, 원인을 알고 보니 안심은 된다.

맘이 안 좋네. 이따 와서 술 한 잔 하든지. 오빤들 내가 좋겠어? 그냥 미운정 고운정 쌓이는거지…. 그렇지 않단다. 너만큼 뭇 사내 손님들 술주정 잘 견뎌주는 여자도 드물지…어쨌거나, 사건 경위를 알고 새삼 걱정이 되서 네 여자에게 안부전화를 했더니 박진숙은 `재미있어서 고마워요.`했고 조경란은 감기몸살로 병원에 갔고, 김인숙은 `그랬어요? 아, 재밌다. 술 먹을 때는 우당탕 하는 것도 있어야지. 잘 했어요.` 하는데, 목소리가 사근사근하면서도 유치원생 다루는 투다. 마혜일은? 무덤덤하다. 그냥 잘 왔지요, 뭐…. 왜 아니겠는가. 그녀는, 단지 사소한 장난을 유쾌하게 즐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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