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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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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9>

세파를 다스리는 그리움의 춤사위-채희완과 탈춤운동단체 <한두레> 원조들을 만나다

오늘의 길잡이는 채희완이다. 경기고 출신 3수생 70학번. 문화운동가이자 부산대 무용과 교수, 그리고 무용평론가. 교수로서 춤꾼 지망생들에게 그만큼 혹독한 기초 체력, 특히 하체의 단련을 엄혹하게 시키는 경우가 드물다. 평론가로서 그만큼 치밀한 논리와 단아한 문장을 구사하는 경우를 나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훨씬 더 친숙하게 그는 우리 시대의 춤꾼이고 술꾼이다. 술이 육체와 정신 사이를 흐르며 언뜻 그 둘을 제멋대로 능가하는 것이듯, 춤 또한 그 둘 사이를 흐르면서 육체를 중력에 반하는 가벼움의 의상으로, 정신을 가장 진한, 음악보다 진한 존재악(存在樂)으로 전화시키고 그 둘을 뒤섞으면서 무언가를 능가하는 것이라는 말이 맞다면 그의 궁극적인 정체는 '술=춤'꾼일 터다.

내 몸은 술하고 친한 것 같애. 아직 술을 받거든…. 다행이야…. 고주망태를 지나 거의 선(仙)의 몰아지경에 빠져 그가 그렇게 말할 때도, 취흥이 무르익다가 바야흐로 필름이 끊어지기 직전에, 아니 그 끊어짐 속으로 펼쳐지는 생애능라(生涯綾羅)의 춤사위가 묻어나는 듯 펼쳐질 때는 물론, 축 늘어진 그를 업었는데도 무겁기는커녕(사실 술 취한 사람은 시체보다 무겁다. 악과 울화가 실려 있는 까닭이다. 실제로 소설가 김성동한테는 늘 '운구조'후배들이 따라 붙는다.) 오히려 나의 비만이 평소의 '건물유지비'를 삭감받는 듯 상쾌할 때는 물론이고, 아침 일찍 남이 깨기 전에 일어나 슬그머니 사라질 때도(어젯밤에 무슨 실수를 했을지 몰라서…. 왜 그렇게일찍 갔느냐고 물으면 그는 늘 피식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 조차 여의치 않아 기침이 늦은 아주 드믄 경우 머쓱하니 주위를 크게 게풀린 눈으로 둘러보다가, '취기가 다 날라가네. 우리 해장술 딱 한 잔만 할까?' 그렇게 미안한 강요와 애교(아주 유구한, 봉산탈춤 소무탈을 닮은)의 미소를 흘릴 때도 그는 '술=춤'꾼이다.

그는 실무 차원에서 주장이 단호하고 때로는 '민족적으로' 완고하다. 이를테면 1984년 민족예술인총연합(약칭 '민예총') 창립 당시 그는 전체 제목의 '민족'에 만족치 않고 각 장르 분과 앞에도 다시 '민족'자를 붙이는 안을 끝까지 관철시켰다. 나는, 시인의 입장에서, 동어 반복이라고 버텨봤지만, 특히 나같이 서양문학(영문과)물을 먹은 사람의 '민족문화론'에 대한 의심을 지우는데 역부족이었다.

동시에, 평상시 그는 자신의 의견 혹은 생각에 대해 무척, 술이 취해갈수록 점점 더, 과묵하다. 이를테면 1983년 <창비>도 <문지>도 폐간당한 상황에서 문화운동 동인지 <공동체 문화>를 소설가 황석영 주도로 준비할 때 편집장이었던 나는 가장 신을 내야할 그가 좀 시큰둥하달까, 그래서 도대체 뭐가, 혹은 (나를 포함해서) 누가 못 마땅해서 그러는지 궁금하여 속내를 알아채느라 약 48시간 동안 그와 술을 마시며 애원해야 했다. 그리고 그가 모종의 실토를 한 것은 술에 취해서가 아니라 몸이 지쳐서였다.

한마디로 그는 낮고 구체적인 실무 혹은 잡무에 과감하고 자신에 대해 겸손하다. 그런 그가, 왠 길잡이 혹은 얼굴 마담? 그는 대학 시절 함께 탈춤운동을 일궜던 동료들과 30년 만에, 술과 대화를 매개로 한바탕 그 옛날의 춤을 추고 싶은 것이다.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았던 30년 세월 그 자체를, 세파를 다스리는 그리움의 춤사위로 펼쳐보고 싶은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그는 다시 '술=춤'꾼 아니겠는가.

또하나 오늘의 사진 담당은 물경 pressian 편집국장 박인규다. 그가 나의 '보조'를 지원했을 리는 없겠다. 그는 75학번 탈춤반 출신. 서울대학교 문리대 탈춤반 현역 및 선배들이 반쯤 주동한 1975년 5. 22(세칭 '오둘둘') 시위 때 '말석'(본인 표현)을 차지했다가 훈방된 후 쑥대밭 상태의 탈춤반 시절을 겪으며 선배들의 '전설'에 취하고 '없음'에 굶주려했던 경험이 아직도 그립고 뼈아프다.

그리하여, 그가 너무 어린애처럼 들떠 신을 내는 바람에 나는 졸지에 원고료 때문에 글을 쓰는 '생업종사자' 신세가 되었지만(참고로 나는 72학번이고 5. 22 때 실제로는 '단순가담자'였으나 일이 잘못 풀려 '주동자 대우'를 받았다. 그게 대학시절 내가 '탈춤'과 맺었던 인연의 전부다), 또한 그러하므로, 모임장소인 전주한정식 집, 훈민정음 페이지를 복사한 한지풍 벽지의 방에 들어서기 훨씬 전, 박인규와 함께 인사동 입구에 들어서면서 나는 인사동의 '신세대 물결'이 초겨울 날씨로 약간 빛바래며 급기야 유현(幽玄)까지 머금는 그 광경이 언뜻 아주 오래된, 거대한, 그러나 박제되거나 완고하지 않고 낯익은, 일상적인, 아픈 아름다움 혹은 저절로 아무는 상처 같은, 살아있는 전통 자체의 춤사위 같았다.

많이 왔어, 원조 중 80%는 왔을 거야. 니가 아는 사람 중에는 장선우(영화감독) 말고는 다왔어….'이런 데를 놀러와야지. 취재차 오면 미안해서 어떡해. 쓸게 뭐 있다구. '뭐 그렇게 안쓰러운 손사레 표정과 말투를 유지하면서도 채희완이 드물게 열심히, 앉은 순서대로 소개해 준 20명 가까운 원조들의 간단한 이력은 이렇다(학교는 모두 교수직).

강남성심병원 이사장 윤대인, 이대 사학과 강철구, 방통대 중어중문과 박성주, 울산 사는 '장돌뱅이'(본인 표현) 박정국, KBS보도본부 주간 진홍순, 서울대 체육교육과 이애주, 서울시 북부여성 발전센터 소장 박현경, 풀빛 출판사 편집주간 김순진, 여성문화예술기획 대표 이혜경, 민주화운동권의 고마운 맏형이자 신사이자 사업가인 안부근의 아내인, 전업주부 백귀순(말은 그랬지만 정말 그럴까? 이 일 저 일 많을 것이다), 고전무용 출신 김남수, MBC 아나운서 출신 김기연, 이대 문리대 연극반 반장 출신 박미혜…그리고 후에 국립극장 공연과장 정희섭이 합세했다.

남자는 대개 서울대 출신에 70학번, 여자는 대개 이대 출신에 71학번이다. 예외는 이애주와 김순진. 한국의 탈춤 뿐 아니라 무용사에 한 획을 그은 이애주는 65학번인데 대학원까지 마친 71년 서울대학교 국문과에 학사 편입했다. 김순진은 68학번. <한두레> 초창기 때 주된 자금원은 이 두 '누나'(이애주의 강사료와 김순진의 이대학보사 '거마비')가 주로 충당했다. 이애주가 아직 서슬푸른 '엄혹과 통한의 미학'을 외모와 목소리 그리고 춤사위에 두루 간직한 '누님'이라면 김순진은 자애와 똘똘함, 그리고 음전을 고루 섞은 '누나'라는 호칭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사실 이 두 사람으로 하여 문화운동권에서 후배 남녀 모두 여자선배를 나이 차이에 관계없이 (언니나 누나라 하지 않고) '형'이라 부르는 전통이 생겨나게 된다. 여자 후배도 남자 선배를 '형'이라고 부르게 된 효시는 물론 김지하다.

글 모두 채희완 이력에 '경기고 출신 3수생'이라 굳이 밝힌 것은 웃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한두레> 창립의 주역 중 무려 세 사람이 경기고 64회 출신 3수생이다(딱히 누군지는 굳이 밝힐 필요 없겠다). 그 외에 김민기(작곡가)와 임진택(판소리꾼)이 경기고 출신인데 채희완의 경기고 후배지만 둘 다 서울대학교 학번이 같다. 그리고 대학시절 놀던 곳은 모두 '좁은 딴따라 동네'(문화운동권, 그들 표현)였다. 거 잘 하면 고약한 일일세….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김민기는 초지일관 고등학교 서열을 존중하는데, 임진택은 이따금씩, 대학교 학번 서열이 더 중요한 거 아냐? 그렇게 '농담 한번 해보는' 식이다. 이것은 김민기 음악의 순결한, 심지어 순결주의적인 비극적 서정성, 그리고 임진택 판소리의 엉너리치는 웃음의 미학과 관계가, 있을까, 없을까?

어쨌거나, 70년대 문화운동에서 경기고 출신들이 이룬 업적은 대한민국 정치-경제사에서 경기고 출신이 이룬 업적보다 밝고 유쾌하며 순정적이다. 학연은 그렇게, 학연보다 질 높은 전망을 매개로 극복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땐 좀 취했어요….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죽으니 황당해서 술도 빨리 취하더라고…. 문호근 장례식 때 나도 취해서 혹시 실례했던 것 아닐까 싶어 아는 체 겸 물었더니 이혜경이 먼저 털어놓는다. 사실 나는 이혜경이 나보다 꽤 아랠 거라고 생각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분명 연륜이 느껴지는데 그 '앳됨’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물론 일 때문이겠다. 기획 특히 예술기획은 사람을 연륜 속으로 젊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밉지 않은 반상회 반장(사실 반상회 반장이 밉지 않기란 얼마나 힘든가!) 인상에, 모임 내내 휴대폰 전화가 분주한데다(무슨 '결재' 관계였다) 자칫 목청도 높아질 뻔 하곤 했던 박현경이 대뜸 '나 본 적 없어요?' 하면서 그렇잖아도 불청객 비슷하게 주눅 든 나를 더 주눅들게 한다. 예?…. 어디 살았어요? 그녀도, 탈춤반 출신답게 세월의 자세한 년표를 춤사위로 휘감으면서 묻는다. 어디 사시는데요? …. 지금은 돈암동 사는데, 삼선교 살지 않았어요?… 삼선교요? 예, 살았죠.… 난, 그 제과점 뒤에 살았어요. 자주 봤을 텐데…. 아, 그녀는 그 바쁜 와중에도, 시점을 오로지 대학-탈춤반 시절에만 고정시켜놓고 있는가 보았다.

나는 세월감이 크게 흔들리면서 고1 때의 창피한 기억에 파묻혔다. 내가 살던 집은 큰 길에 가까웠는데도 꺾어지는 골목 어귀가 매우 어두웠다. 그곳에서 여고생 깡패 둘이, 지들끼리 패싸움을 했는지 아니면 남자깡패들한테 줘 맞았는지 크게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수습하고 있었다. 그냥 별 생각없이, 멍하니(구체적으로 무언가를 궁금해 하기에는 내 정신연령이 턱없이 낮았었다. 키도 몸무게도 왜소했고) 보고 있는데 그 중 한 여고생이, '야, 이 씹새꺄, 뭘 봐!' 그러는 거라. 나는, 정말 줘 맞을 까봐, 화들짝 겁이 나서 안절부절 종종걸음으로 도망쳐 온 적이 있는데, 심정이 그렇게 다방면으로 참담할 수가 없었다. 설마 그때 그 여고생 깡패는 아니겠지….

30년 만에 만나서, 아직 어색해서들 그래…. 채희완은 연신 '볼거리 놀거리'가 없어 내게 미안한 시늉이지만, 사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자녀들 대학교 얘기, 장선우가 일산에 대저택을 '또' 지었더라는 얘기조차 김기수(당시 30대 중후반으로 전통탈춤계를 휘어잡는 동시에 <한두레>의 '기능 향상'을 위해 헌신했던 봉산탈춤 기능보유자), 정병욱(국문과. 당시 탈반 지도교수. '국문학과생들에게는 엄했지만 우리한테는 그렇게 자상할 수 없었다'고 채희완은 귀뜸해주었다. ), 이두현(탈춤운동의 이론적 지침서였던 <한국가면극>의 저자), 정희성(시인. 당시 정병욱 교수 연구실의 조교) 등에 대한 추모 및 감사, 그리고 애정 어린 기억과 한데 어울려 춤 폭풍 전야의 고요, 아니 더 고요한 눈을 이루는 듯 했던 것.

무엇보다 모두의 얼굴에서 탈이 묻어났다. 탈이 얼굴을 닮아가고 얼굴이 탈을 닮아간다. 엽기가 아니다. 서러움이 해탈을 해탈이 눈물을 눈물이 웃음을 닮아간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의 얼굴에서 그 두 과정이 겹쳐가는 과정과 겹침의 일순을 읽어낸다면 우리는 청각장애 상태로 연주를 강행, 관객들을 괴롭혔던 베토벤이 실제 제 마음의 귀로 들었을 이상적인 연주의 탈춤판(版)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최소한 10년에 한번은 공연키로 하고 30년 동안 한번도 못했잖아…. 그때 말야 그냥 택시에서 콱 뛰어내리고 싶을 때…. 왜 갑자기 택시에서?…. 아니, 그, 나는 좋은데 그 여자가 나를 안 좋아하니까…. 허헛 참. 별소리네…박성주는 잘 나가던 엑스타신가 뭔가, 레이니 폰(Rainy Four, '비에 젖은 네 사람')가 뭔가, 잘 나가는 밴드 드러머였는데 괜히 내가 꼬셔 갖구서…그때 선데이서울에 사진 크게 났잖아. 고맙게도 총천연색으로. 제목이 '대학가의 낭만'이었던가? 그때 대학 등록금이 2만원이었는데 우리가, 초짜 주제에, 공연료를 5만원 받은 적도 있다구….

아, 그 여자애들이, 남자한테 업혀야 하는게 네 명인데, 아무도 안 나간다는 거야, (이건 분명 이애주 목소리다. 다소 느리고 차분하고 생각을 담아가는 맥락을 억양에 뚜렷이 드러내면서도 백기완 표현대로 '쇳소리'와, '여인의 한'이 쩌렁쩌렁 빛을 발하는). 하하. 그래 그런 얘기도 '고요한 눈'의 일부를 이룬다.

박성주의 얼굴은 점잖기 그지없지만 70년대 타 풍경에 비해 다소 날카로웠을 감수성이 남아있는 듯 하다. 그러나 드럼소리가 꽹과리-징소리에 흡수되는 아니 짓뭉개지는 현장감이 더 표정에 짙다.

강철구는 더 점잖고 지긋하지만 광기로 발전하다 만 탈춤끼가 얼굴 전체에 심지어 안경테에까지 흥건하다.

김남수는 그지 없이 정숙하지만 얼굴과 탈 사이 닮아가는 과정의 구분-결합이 보다 분명하고 역동적이다. 최고의 몸매였지…. 채희완이 그렇게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오해 마시길. 춤꾼으로 최고의 몸매였다는 거니까.

백귀순은 그 옛날의 표정 그대로 일 듯. 그렇다면 이것은 고생을 많이 했다는 뜻, 아니면 운동권 주변 잡사를 탈춤 추듯 풀어냈다는 뜻?

박정국은 본인이 '장돌뱅이'라 했지만 사태수습형으로생겼다. 노련한 사무국장 스타일.

활달하고 여전히 탄력 만점인 라틴풍의 박미혜, 그리고 젊을수록 최은희를 (복고적이 아니라) 당대적으로 닮았을 법한 김기연. 대단해, 늠름해, 포토제닉이야. 정말 대단해…채희완이 그 나름으로는 최고의 찬사를 연발 동원하며 칭찬을 소곤대던 이 둘이 1973년 이대 민속극 연구회 창립과 창립공연 <봉산탈춤>을 '강행'한 여성전사(女性戰士) 다. 왠 '강행'과 '전사'? 딱히 데모 서클 얘기가 아니다. <봉산탈춤>의 대사와 몸짓은 '야한' 면으로만 보자면 오늘날의 에로영화 뺨치게 노골적이고 냄새 지향적이고 남새스럽다.

어디, 한 대목 읊어볼까. <양주 별산대놀이> 제3경 취발이춤 중 취발이가 소무의 가랭이 속을 들여다보며 하는 대사다. 얘 이것 봐라 이것이 무슨 냄새냐. 이년이 어찌나 뒷물을 안 했는지 五, 六월 三伏지경에 조기젓 썩는 내가 나구나. 요것 봐라. 무엇을 씹는지 짝짝하니 줄쌈지 뛰떠는 소리가 나는구나. (小巫의 털을 뽑아 가지고) 이년의 거웃이 이렇게 기냐. 이 말총은 깡끼쟁이나 주자. 자 깡끼쟁이야! 이 말총 가져가거라! 깡끼쟁이야!….

취발이 전공은 진홍순이었다. 취발이는 환속한, 술취한 중. 얼굴이 불그죽죽하고 넓은 이마 위로 머리털이 흘러내리는 탈이다. 진홍순의 얼굴에 그런 면이, 있는가? 설마. 하지만, 취발이가 '풍자적인' 말뚝이와 정반대로 모든 것을 감내하고 받아들이는 인물형이고, '모든 것의 파탄이며 모든 것이 긍정'이라는 점과 그의 현재 직함(KBS 보도본부 주간)을 보태보자. 그의 춤 생애와 직업 생애의 합이 조선 민중사를 모종의 현대사로 역전시켜내는 춤사위가 언뜻 보이지 않는가?

채희완은 미얄 전공이란다. 미얄을 대상으로 한 영감의 대사는 더 지독하게 음탕과 해학, 그리고 (죽음의)해탈을 중첩시킨다. 한 대목 또 인용해보자. 미얄은 令監의 前下部에 매여달려 매우 露骨的인 淫行動을 한다…. 미얄 : (苦痛스런 소리로) 아이고 허리야 年晩 八十에 生男子 보았드니 무리 공알이 시원하다. 令監 :…. 어허어 이년 나를 첫 아들로 망신 주었지. 이년을 만나면 씹 중발을 꺾어놓겠다. 웃중방은 우툴두툴하니 본대머리에 風簪 파주고 아랫중방은 미끈미끈하니 골패짝 만들 밖에 없구나. (<봉산탈춤> 제7장 중)

나는 미얄할미에 대해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조강지처로서 얼굴이 못생기고 외양이 꾀죄죄하다. 그녀는 첩질하는 남편에게 얻어맞아 죽지만 죽음조차 비극적이지 않고 매우, 아니 지독하게 희극적이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빠른 장단에 맞추어 추는 미얄의 일품 엉덩이춤에서 모든 원한이 씻겨지고 죽음조차 냄새나는 섹스와 혼동된다….

어쨌거나, 곱게 자란 딸 '화려한' 이대에 보내어 좋은 신랑 만나 시집 잘 가 잘 살기를 기대했던 부모들, 특히나 이 두 여인 정도 미모를 갖춘 딸의 '보통 부모'라면 족히 까무라칠 정도다. 그리고 특히 민속운동권의, '양놈들 분내 풍기는' 이대생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 경원시와 무시의 복합감정은 권양 성고문을 비롯한 지난한 운동권 여성 수난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악명이 높다.

말뚝이는? 중후한 중절모 신사. 소위 '스카팽 사건'의 주모자. 병원이사장이지만 남들이 왕년의 춤-소리 실력과 놀자판 행각 혹은 실력을 제일 아까워하는 남자. 윤대인은 단연 이 날의 히어로였다. 미팅을 하기로 했는데 그 전날 술이 너무 과해서 '원기를 회복'한답시고 이대 운동장을 웃통 벗고 구보하다가 수위한테 쫓겨난 얘기며 74년 졸업생들로 <한두레>를 구성한 얘기, 그리고 75년 5. 22사건 후 뒷수습 얘기, 그리고 후배들의 춤이 점점 사납고 전투적으로 되어간다는 춤 세대-미학론 외에 모처럼 다함께 이야기를 보탠 '스카팽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몰리에르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작품 <스카팽의 간계>가 당대의 연출가 오태석에 의해 드라마센터 무대에 올려졌는데 캐치프레이즈가 '관객과의 교감'인 거라, 윤대인은 그 크고 좋은 목청으로 공연 중에 '얼쑤, 좋다. ' 추임새를 계속 선도했고 마침내 경찰서에 끌려가게 되었다. 이때 이들 의자 밑에는 소주병이 무수히 널려 있었다. 연행자들은 '연출자와 얘기하겠다. 그는 이해할 거다. ' 그렇게 내내 고집을 부렸다. 이 사건은 훗날 청년문화논쟁으로 비화한다.

어쨌거나 윤대인은 '키스 없는 섹스가 뭐게? 관계접속사.' 뭐 그런 아리송한 농담과 '애주 형? 내가 좋아했지. 하지만 그때는 연상의 여자 좋아하면 세상 큰일 나는 줄 알았을 때 아냐? 거 뭐야 패륜이냐, 패가망신이냐….' 뭐 그런 아리송한 사랑고백 등으로 '분위기 유지'에 신경을 쓰다가, 우람하고 성대 굵직한 '어잇' 추임새에 이은 '돈타령'으로 분위기를 일거에 반전시키고 2차를 선언하고 '호프파'와 '노래방파'로 편이 갈리자 '그럼 호프집+노래방으로 가면 되잖아.' 그렇게 명답까지 내리더니 목적지에 이르러 이사장다운 고급 양주 까지 한 병 풀어놓고는 '30년 후 말뚝이'의 진면목을 보이기 시작했다.

30년 만입니다.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에, 우리는 없음에 비루하지 말고 있음에 근사하고…. 뭐 그런 문장이 될까 말까한 마이크 인사로 좌중을 웃기더니 <빗속의 여인>으로 좌석의 분위기와 좌중의 배꼽을 휘어잡았다. 가사 속도는 영 맞을 것 같지 않은데(참고로 그가 받은 노래점수는 60점 미만이었다) 전체 흐름은 희한하게 맞아 떨어지고 무엇보다 해학적으로 된 그의 표정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허리 아래 간드러진 엉덩이춤과 쿵쾅 발길질의 조화. 그 안에는 세계의 모든 춤이 버무러져 있는 듯 했다….

그는 그 춤으로 이 날 거의 모든 여자와 춤을 추었다. 이애주 한테는, 이애주가 동작을 맞흉내내는 식으로 응하는데도 힘이 약간 달렸다. 아니면, 봐준 것일까? '켄세라'에 맞추어 박미혜와 춘 룸바는, 그가 룸바 박자에 익숙치 않은 듯 다소 쩔쩔 맸지만 예의 쿵쾅 발길질을 강화시키더니 끝나고 나서 명언을 남긴다.

원래 스페인계 춤이란 게 발자국 소리로 상대방을 죽이는 거야…. 그 소리에 각계 인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장대소한다. 아, 30년 후 말뚝이. 그는 '치고 빠지는' 풍자형이 아니라 웃음으로 좌중을 폭발시키고 폭발로 다시 좌중을 한데 어우르는 'WTO 테러 그 너머'다.

이애주는 <부초>를 불렀는데 역시 한이 서슬 푸르렀고, 채희완은 <강남달>을 부르는데 그 노래가, 노래의 처량함이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또 '술=춤'처럼 묻어나는 듯 사라질 듯 했는지 앵콜곡 <찔레꽃>은 여럿이 가세했다. 박정국은, 예상대로, 그 모든 난장판을 사무국장처럼 챙겼다.

12시를 훨씬 넘겨 뿔뿔히 찢어진 후 채희완, 정희섭, 박인규와 함께 인사동길을 주척주척 걷노라니 이상하다, 인사동 길이 그 옛날 가난한 낭만의 동숭동 문리대 앞 같으면서도 여전히 오늘의 인사동처럼 느껴지는 게, 그 시간과 광경과 풍경의 착시공간(錯時空間)이, 이상하지 않다. 30년 만에 그들은 도대체 무슨 춤을 추었던 것일까? 나는 무슨 춤의 집 속에서, 아직도 출렁대고 있는 것일까?

ps. 제일 먼저 취하고 제일 신나게 놀았지만, 착하고 불쌍한 박인규. 그는 그날 온갖 시다와 노래방 리모콘과 막간 가수 역할까지 도맡아 했지만 '제가 프레시안 2인자'라는 어리광과 신고정신이 뒤섞인 그의 말을, 내가 보기에는 아무도 거들떠 듣지 않았다.

그리고 측은한 정희섭. 74학번에 '엄밀히 말하자면 탈반은 아니고 연극반'이었던 그는, 새벽 6시로 예정된 채희완 '부산행 운구'를 맡았다.

그리고, 너무 아름다워서 가여운 채희완. <솟대>에 들러 한 잔 더하고 드디어 잠이 든, 술=춤=노래가 잠과 겹치고 겹침이 묻어나고 묻어남이 순정하게 응축된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손바닥을 한번 폈다. 아주 조심스럽게. 혹시 내가 정교할수록 얇은 예술의 처녀막을 손아귀로 해코지하고 있는 중일까봐. 그가 사라질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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