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거리로 나선 그의 외모와 행동거지는 희한했다. 키가 겅충한 것에 비하면 상체의 검은 외투가 좀, 너무 묵직한가? 그렇게 훑어 내려오다 보면 다시 검은 색의 쫄티가 앙상한 역삼각형을 맵시 있는 주름으로 휘둘러 감는 듯 하지만, 바닥에 이르면서, 거의 부츠를 닮은 신발로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는데도, 어딘가에서 가봉(假縫)만 대충한 듯 느슨하다. 안경 쓴 얼굴은 감각의 각도가 섬세하고 예리하지만, 입을 열면 '상식 이하'의 선량한 촌놈 기질이 훌렁훌렁 배어나온다.
발목이 시리겠군…. 그런 생각이 나는 들었는데, 그건 좀 안쓰럽다는 느낌이었을까? 왜? 어쨌거나, 전혀 아니었다. 그는 물론 예리했지만, 예리한 바로 그만큼 따스하고, 말투가 거의, 오래됐지만 여전히 상큼한 애인처럼 깨끗하고 자상했다. 정작 내 발목이 시렸던 게 아닐까, 나는 얼마 안 되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를 전에 한번인가 두번 만났을 뿐이다. 그것도 족히 2년은 되었다. 그리고 사흘 만에야 연결이 되어 급히 만나자고 다소 우격다짐을 한 터였다. 그것만 해도 나는 이래저래 불안하고 난감했을 밖에 없는데 게다가 시각이 오후 2-3시, 만날 장소가 KBS 별관 로비로 엉겁결에 정해졌다. 오늘은 특히나 술로 풀어야 할 것 같은데, 술 먹자기에는 너무 대낮 아닌가. 그리고 KBS 별관이, 어디지? 어렴풋이 별관 뒷골목에서 술을 먹은 적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건 꽤나 전근대적인 개차반의 기억이라 오히려 낮의 KBS 별관과 연결짓기가 생소하고, 아니 그것 아니라도, 뭔가 새로운, 번듯한, '뒷골목'이라는 어감과 전혀 무관한 근사한 건물이 생긴 것 같다. 표민수(가 만든 드라마)의 기억은 내게 늘 새롭고 근사했으니까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이런 잡생각을 표민수는 일거에 지워주었다. 그는 '아, 하하. 저는 오늘 술은 못 합니다. '그러면서도 , '아, 술 드시게요?' '아, 생맥주 하신다고요?' '아, 굴보쌈 먹으러 갈까요?' 이렇게 제 혼자 애써 노래하듯 신을 내면서 경쾌한 사슴 걸음으로 꽤 스산한 여의도 겨울 거리를 몇 발짝 활보하더니 이내 우리를 굴보쌈 집으로 안내했고 '전 한 잔만 하지요. ' 그렇게 말은 해놓고는 김빠진 나를 앞에 두고 유유자작, 술과 얘기를 즐겼던 것이다.
한 달쯤 전인가. 대중문화 잡지 <위클리 엔터테이너>('주간 연예인')에서 평론가 및 전문기자들의 항목별 평가를 통해 뽑았다는 각 분야 '최강' 엔터테이너 명단이 신문(중앙일보 11월 9일자)에 보도된 적이 있다. 영화배우는 송강호-전도연-한석규 순, 영화감독은 강제규-임권택-홍상수, 영화제작자는 강우석-심재명-차승재 순으로 특히 강우석과 강제규는 감독과 영화제작자 두 부문에 이름이 올랐고, 가수는 서태지-김건모-조용필, 방송연기자는 고두심-차인표-유동근 순이었다.
현재 우리나라 정치 분야 '대중' 여론 조사는 '여당 야당 둘 다 마음에 안 든다'는, 전국에 만연된 내용을 확인하는 것 말고는 대체로 할 게 못되고 믿을게 못된다. 한편으로 일반 국민들이 여론조사기관의 질문에 답할 만큼 한가하거나 정치적 참여의식이 높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목적을 가진 경우 여론은 능동-피동을 막론하고 조사보다는 조작된 것에 가깝다. 소위 '순수' 문학-예술분야는 어떤가. 더욱 할 게 못된다. 내용도 모른 채 교양목록에 오르는 이름과 최근 베스트셀러의 저자 혹은 화제인물을 적절히 뒤섞인 결과가 나오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대중문화 분야를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는 어떤가? 더더욱 믿을게 못된다. 한 마디로 20세기 인물로 남으려면, 1999년에 사고를 치는 게 절대 유리하다. '평론가 및 전문기자들'이 뽑았다는 '위클리 엔터테이너' 명단이 내심 나의 관심을 끌었지만 결과는 대중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이것을 대중성과 전문성의 바람직한 조화라고 생각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최강이란 단어는 아직까지도 '복잡한' 질을 도외시하고 '단순 비교 가능한' 양만 신경 쓰라고 강제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군사문화를 크게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양만을 따진다면 영화 <친구>가 700만명을 돌파했다 한들 일주일에 2회씩 꼬박꼬박 시청률을 40% 이상 기록하는 사극 <여인천하>에 어떻게, 얻다대고 비길 것인가.
그랬는데, 희한한 대목이 딱 하나 있다. 드라마 PD 부문에서 표민수가 MBC 로맨스 시트콤 <연인들> 등 '성인'시트콤 연출자 송창의는 물론, 대통령 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되는 <용의 눈물>의 김재형, 방송드라마를 사회사적 혹은 사회학적 연구 대상으로까지 밀어 올렸던 <모래시계>의 김종학, 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국민드라마 <허준>의 이병훈 등을 제치고 선두에 뽑힌 것.
표민수가 누군가? 그는 84학번이고 현재 38세다. 91년 KBS에 입사하여 1997년 단막극 드라마게임 <깊은 바다>로 '입봉'을 했으니 빠르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이듬 해 그가 연출한 미니시리즈 <거짓말>은 표민수 매니아들을 형성시켰지만 시청률은 평균치(20%)였다. 99년 공동 연출한 연속극 <사람의 집>은 25%. 그리고 특집극 2부작 <슬픈 유혹>에 이어 2000년에 연출한 미니시리즈 <바보 같은 사랑>은 같은 시간대 MBC의 <허준>과 맞붙어 참패, 첫회 시청률 1. 6%(참고로 이때 <허준> 시청률은 62. 5%)라는, 방송극 사상 최저 수치를 기록했다. 2001년 최근작은 주말 연속극 <푸른 안개>. 이 작품도 화제는 불러 일으켰지만, 이미 대하-사극의 시대가 온 터. 그런데 그가 왜 '최강 중의 최강' PD에 뽑혔을까? 그는, 그가 혹시, 희망의 미스테리를 품고 있는 것 아닐까?
연출가 표민수를 총체적으로 또 전면적으로 알린 <거짓말>은 (소수)매니아들에게 기쁨 혹은 목표를 주었겠지만, 무엇보다 방송 드라마의 타성에 젖은 사람들(작가든 시청자든)에게 뼈아픈 일격이었다. 방송 드라마란 이런 거야. 그럴 수밖에 없는 거야. 넌 대중을 몰라, 방송도 모르고. 까불지 마라, 건방진 놈. 왕년에 예술 안 해본 놈 있나. 너도 나이 먹어 봐라… 뭐 그렇게, 정말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욱 완고해지는, 심지어 주장으로 되어가는 타성. <거짓말>은 사회의 폐부를 가장 과감하게, 솔직하게, 민감하게, 또 실험적으로 파고들면서 동시에 드라마 예술을 대사와 화면 그리고 연기와 음악 모든 면에서 한 차원 높였다.
아니 더 중요한 것은, 불가능하거나 여러 단계를 거쳐야만 가능하다고 치부되었던 그 과정이 어느날 문득, 일거에 혹은 졸지에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드러나 버렸다는 점이다. 다르게 말하면 <거짓말>이라는 '작품'을 통해 '불륜'이 남새스럽기는 커녕 가장 아름다운 드라마 소재 중 하나로 드러나는데,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결론이 어느날 문득,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되더라는 점이다. 그 문득 자연스러움 혹은 문득 당연함은 잘못 살아온, 최소한 잘못 생각해온 세월 수십 년을 일거에 씻어내 준다. 그게 예술의 존재의미고 '윤리'다.
불륜을 주로 다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뭇 기자들이 수백번 해댔을 상투적인 질문을 던지니 그가 말한다. 여관 가고 그러는 게 꼭 묻지마 중년 섹스나 원조교제 그런 게 아니고 간절한 경우도 있잖아요. 불륜이 더 간절할 때가 있잖아요. 그리고 사랑이 없는 게 불륜이지. 간절한 게 불륜은 아니죠….
확실히 그는 그런 질문에 지친 상태다. 나는 '간절하지 않으면 불륜을 뭐하러 해. 불륜은 다 간절한거지. 오죽하면 불륜하겠나.' 그렇게 얼버무렸지만 그런, 파격적이든 아니든 어쨌거나 사회적인 윤리에 속하는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다. 소설가 박완서는 불륜이야말로 아름답다 했고 또 이인성은 소설을 두고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의 유괴'라 표현했지만 내가 보기에 <거짓말>의 예술적 자연스러움은 예술의 본질 자체가 아름다운 불륜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차원의 것이다. 그 뒤의 표민수 드라마에서도 예술=불륜이라는 명제가 가장 중요한 미학원리다….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어쨌거나 그는 회사에서 시청률 때문에 쪼인 적이 없다. 그리고 <바보 같은 사랑>에 대한 애착에, 상처받은 흔적이 전혀 없다. 박영한 원작 <우묵배미…>를 다시 각색한 것으로 장선우 감독 영화에서 최명길이 맡았던 역을 배종옥이 맡았는데, 남자의 사탕발림에 넘어가는 바보라기보다는 순수한 사랑을 믿고 실천하는 이미지로 해보았지요…. 배종옥은 내가 특히 좋아하는 배우라서 어떠냐고 물어 보았더니, 처음엔 좀 안 맞았는데 그 뒤로는 95%가 맞았고 계속 호흡이 잘 맞더란다.
그리고는, 다소 난데없이, 자기 취향을 다소 길게 얘기하는데 아마도 나의 '불륜=예술' 질문에 뒤늦게, 그의 방식으로, 답한 게 아닌가 싶다.
전 남자보다는 여자 쪽 감정이 좋아요. 그 복잡미묘한 심정.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데도 거꾸로 말하고 표현할까 말까 망설이고, 그런 섬세하게 흔들리는 감정. 그런 게 나는 좋아요…. 남들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랑, 그런 걸 솔직하고 당당하게 사랑이라고 그리고 드라마를 할 때 이성적 계산을 아주 싫어하고 자연스러운 감정 감성을 조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회사를 그만두려는 것도, 계산이 몸에 배는 것 같아서, 작품 몇 개 했더니 이젠 이렇게 하면 이쯤 되겠군, 그런 게 나도 모르게 계산이 되거든요. 그런 답습이 싫고 새로운 환경에 자극 받고도 싶고, 그래서요. 회사에서 배려를 많이 해주지만…. 어떤 후배가 어느날 '형 요새 어떤 소설가 좋아해요?'하고 묻는데 내가 읽은 게 없으니 답을 할 수가 있어야죠. 음악도 그렇고. 재충전을 해야되요….
맞아. 그는 한 달 전에 사표를 냈고, 그 사실이 여러군데 신문에 날 정도로 화제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퇴사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한 작품을 더 하고 놔주겠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참 신기하다. 그는 KBS내에서도 '희망의 미스테리'인가?
KBS 개혁이 시작되고 달라진 점은 사람을 들들 볶지 않고 조기종영이란 게 없고 그냥 놔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간섭 안해서 편하지만 한편으로는 신경을 너무 안 쓴다는 불평도 고개를 든단다. 질은? 단막극은 좀 좋아졌나? 다양해진 건 분명하지만 질은 아직 모르겠고, 그것보다 시청률주의 프로그램(대하사극과 뉴스)과 비주류 프로그램으로의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방송드라마는 편재적이다, 즉 동시에 여러군데 존재하는 신(神)의 능력을 구사한다. 영화야 관객들이 선택을 해서 가는 거니까 선택의 권한 만큼 책임도 어느정도 진다고 하겠지만 방송, 특히 방송드라마는 알게 모르게 보게 되고 욕을 하느라 혹은 욕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보게 되므로 거의 강제사항이 된다. 그리고 영화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매일매일 본다고 생각하면 사실 영화 한 편 제작비보다 드라마 하루 분 제작비가 더 많이 들어가야 마땅하다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시청자들에게 좋은 드라마를 보여주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는 얘긴데, 그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제약이 뭐냐…. 내가 또 내 버릇을 참지 못하고 그렇게 애국풍 장광설로 질문을 퍼부어댔더니 그는 정말 놀라운 발상을 내놓았다.
내가 보기에는 TV방송 3사간의 경쟁이 제일 큰 문제다. 사극이다 트렌디다 뭐 인기가 좀 있다 싶으면 우루루 몰려서 복작대고 서로 경쟁하고 그게 문젠데, 무엇보다 KBS가, 시청료로 운영하는 공영방송이니까, 먼저 시청률 경쟁 포기 선언을 하는 거다. 그리고 연출자들이 자유로이 방송사를 오가면서 시청률 관계없이 예술작품 만들고 싶으면 KBS에서 만들고 시청률 누리고 싶으면 다른 방송가서 만들어보고 이렇게 역할 분담을 하고 시청자들에게도 서로 권장해주고, 그렇게 힘을 합해서 일본이나 미국 프로그램과 경쟁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서는 세 방송사 모두 망한다. ….
자, 이쯤되면, 자기 일에 프로인 사람이 세상 이치에도 프로라는 말이 증명되는 셈 아닐까? 이쯤되면 표민수 드라마의 예술=사회적 의미망 속으로 나태의 의미망을 해소시켜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이 방송사의 타성이든 수구파의 타성이든, 심지어 개혁파의 타성이든 간에? 왜냐면 그 말 또한 문득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럽지 않은가!
자신의 중요한 콤비 작가 노희경에 대해 그는 이렇게 평했다. 좋아하죠. 솔직하고 글도 잘 쓰고 약간은 공격적인 성향이랄까, 그게 좋아요…. 공격적?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갈 데까지 가보겠다는, 가보자는 그런 거요. 박진숙이나 김정수 같은 작가는 노희경한테 '너 그러다 죽어. ' 그렇게 겁을 주신다는 데 그 말이 이해될 것 같기도 하고…. 나라면 (김수현과는 방향이 다른) 예술적인 적나라(赤裸裸)라고 표현하겠네…. 어쨌거나 연출자야 1년에도 몇십명씩 쏟아져 나오고 연기자도 몇 명 나오는데 좋은 작가는 2-3년에 1명 나오죠….
연기자론은 이렇다. 정형화되지 않고 마치 백지 같아서 이것저것 그려보고 싶은 배우가 좋죠. '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배우보다는 '해보자 ' 이렇게 나오는 배우. 일찍이 문성근은 로버트 드 니로보다 잭 니콜슨을 더 친다고 했다. 전자는 등장인물에 너무 함몰되는 반면, 후자는 언제나 니콜슨의 카리스마를 지닌 채로 등장인물을 연기한다는 이유에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짓을 하게 된 그 순간부터 스키조프레니아(정신분열증)를 겪는다는데, 예술이야 말로 스키조프레니아 자체의 미화일지도 모르겠구나.
좀 불안하기는 해요. 독립을 하는 PD들이 대개 경력 10년 이상인데 저는 5년 밖에 안 되니까요. 집사람도 말리고. 회사 선배들도 걱정을 많이 해주십니다. 독립을 하고 나면 시청률 경쟁에 오히려 더 매몰된다. 시청률 1. 6% 뒤에도 네가 존재할 것 같으냐….
그는 혹시, 영화를 하기 위해 퇴사를 하려는 걸까? 해보고는 싶지만 너무 늦었죠. 저보다 젊은 세대들이 이미 주축을 이뤘으니. CF도 가능하겠지만, 어쨌거나 흥행에 몰켜 다니는 건 싫고 아무도 모르는 비주류 영화라면 모를까….
PD라는 게 사실 3D업종 뺨치게 힘든 직업이다. 집을 비는 시간이 많은데다 '염문설'도 심심찮아서 이혼율이, 내가 아는 바로는, 가장 높다. 그런데 그가 내용은 받아들이면서도 답변의 방향이 좀 다르다. 노가다나 다름없죠. 일단 미니시리즈 같은 거 들어갔다 하면 주 120시간(!)을 일해야 하니까. 집에서 밥 먹는 게 소원이구요.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PD가 인기있는 신랑감 후보 1순윈데, 그 이유는 일일이 밥상 안 차려도 되고 벽장에 애인 하나 숨겨 놓고 지내도 신랑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는 거죠….
정작 아내에 대한 그의 배려는 다소 밝은 것에서 계산적인(?) 것을 거쳐 짓궂은 것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그의 아내는 그를 표'주부'라 부르는데 요리를 즐기고 쇼핑을 가도 주방용품에 특히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노른자를 안 먹는 아내 때문에 그의 노른자/흰자 분리 솜씨는 탁월하다. 그는 쓸데없는 의심을 없애기 위해 '눈 코 뜰 새 없이 우왕좌왕하는' 촬영장을 구경시키거나 쫑파티 때 나오라고 초대를 한다. 그리고 그런 '대증요법' 외에 예방 혹은 장기치료 요법으로 5000-6000피스짜리 퍼즐을 사주면 그 복잡한 것을 껴 맞추느라고 6개월 정도가 걸린다는 거다.
아내는 '불륜' 드라마 한다고 뭐라 안 그래요?… 부부 짝짜꿍이 너무 잘 들어맞는다 싶어 내가 또 그렇게 상투적인 질문을 던져 버렸다. 뭐 그런 건 아니고, 다만 젊고 생기있는 이야기를 한번 써보라고 그러더군요….
군대 갔다 와서 연극을 했어요. 연출을 한 게 아니고 극단 조연출 겸 기획을 했는데 쫄딱 망했죠. 그래서 돈 벌러 방송극에 들어와 드라마 PD가 되었어요. 영화는 겁나서 못하고…. 그랬지만, 여기저기 찔러보고 쑤셔본 결과 그가 '안전한 직장'을 그만두는 가장 큰 이유는 '드라마를 좀더 잘 하기 위해서'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좀더 오래 하기 위해, 그러다 보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너무 당연한가? 그러나 이 확인 또한, 표민수로 하여 문득 당연하다. 표민수 만한 예술감각과, 불륜의 탐미주의와, 희망의 미스테리를 지닌 자의 소원이 그렇다면 그야말로 드라마 분야의 놀라운, 당연함의 경사 아니겠는가.
조금 지나고 간부가 되면 드라마에서 손을 놔야 하거든요. 인력관리 그리고 점차 방송국은 보도 위주로 가야하고 드라마 같은 것은 외부 제작업체로 가고 그게 맞지요. 방송국이 비대조직이 되면 안되니까. 하긴 MBC의 장수봉 PD도 드라마를 계속하기 위해 퇴사까지 불사하면서 승진을 거부했다니까…. 그런 생각을 대충 하고 있는데 그가, 막판에, 모처럼 얼굴색까지 무거워지면서, 말을 토한다.
왜 그 뒷골목에 술 취하고 떠들고 그러는 사람들, 3류 인생들, 버러지 같다고 하는 인생들, (방충망을 아무리 쳐도 벌레를 막을 수는 없다고 저는 확신해요), 그런 사람들도 표현을 못할 뿐이지 누구나 그 안에 세익스피어의 문학과 베토벤의 음악을 품고 있는 거잖아요. 그걸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드라마의 의무라는 생각. 그러면서 목적주의랄까 계몽 혹은 교훈이랄까 그런 것에 대해 많이 고민을 해요.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일 뿐이다, 그런 얘기도 있지만요. 어떤 선배는 엔터테인먼트를 강조하고 어떤 선배는 ….
어허, 더군다나 표민수가, 왠 2분법 고민? 그게 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지 원래 하나인 것을 둘로 갈라놓고 이거다 저거다 논쟁하는데 관심 가질 것 뭐있나? …. 나는 뭔가 불길해서 황급히 그렇게 답변 아닌 땜질을 했다. 신세대, 더군다나 고전적 예술성을 아는 신세대 표민수가 80년대의 논쟁을 되밟는, 불필요한 자격지심에 빠질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서둘러 그런 나를 후회했다. 기우야, 기우. 2중으로 기우다. 첫째, 내가 스스로 이론의 힘을 맹신한다면 모를까, 나도 감각의 언어로 사고한다면, 표민수의 감각은 그러기에는 그 자연적 총체성이 너무 완벽하다는 점.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2분법에 빠진다면, 그건 80년대 식 2분법이 아니고 좀더 발전한 미래지향적인 2분법, 그의 감각의, 총체성의 질을 한층 더 높여줄 거라는 점. 드라마는 드라마 그 자체다. 드라마의 권한에 맞는 의무, 혹은 권한의 동전-양면인 의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굉장한 권한이고 의미인가!…. 나는 그렇게 되뇌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ps. 표민수 연출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 몇몇이 '나이 40대 중반 혹은 50대, 머리가 조금 벗겨지고 성격은 괴팍함' 정도로 그를 추정했다가 실상 만나보니 그렇지 않아서 놀랐다는 사람들의 중언에 오히려 나는 놀라는 편이다. 진지한 소재를 진지하게 다루는 나이, 경박하지 않은 나이일 거라는 추정이겠고, 물론 험담은 아니겠지만, 사실 40대 중반 혹은 50대가 이토록 (무겁다기보다는) 예민한 주제를 표민수처럼 부드럽게, 부드러움의 총체성으로 아우르는 감성의 열림을 여전히 간직하기가, 연륜으로 발전시키기는 더더욱, 힘든 것 아닐까. 이것도 표민수의, '놀라운 당연함'일까?
어쨌거나 2년 만에 그를 만나고 다시 헤어지면서 나는 그가, 앞서 말했듯, '상식 이하로' 착한 것에 놀랐다. 공금도 물리치고 우겨 지가 술값을 내길래 나 원 참, 그러구러 걸어가다가 '담배 뭐 피우세요?' 소리를 나는 '담배 못 피우세요?'로 들었다. 아니, 피지?…그가 담뱃가게에 들어가고 조금 지나 사태를 파악했지만 때는 늦었다. 어안이 벙벙하다가 넋을 잃고 엉겁결에 나는 담배를 한 갑 받아들었다. 그가 회사로 들어가고 나는 동석한 전홍기혜 기자와 건널목까지 걸었는데 그녀도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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