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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KAL기 사건 재수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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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87년 KAL기 사건 재수사하라”

"김현희 진술 외 증거자료 없다"

지난 1987년 11월 미얀마 상공에서 공중폭발한 KAL858기 사건의 유족들과 천주교인권위원회는 23일 천주교 인권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 사건의 재수사를 촉구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정진호 신부는 “KAL858기 폭파사건이 발생한 지 14년이 지나는 동안 유족들과 지식인 사회에서 수많은 의혹을 제기했지만 이에 대한 재수사 등 제기된 의혹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며 기자회견 취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특히 “당시 폭파범으로 지목된 김현희(마유미)의 진술 외에는 죽음을 입증할 증거자료가 없는 상태”라며 “최근 검찰수사로 진실이 밝혀진 홍콩 여간첩 수지김 사건을 볼 때 대한항공 858기 사건도 당시 안기부 발표와 김현희의 진술 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다는 점에서 재수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주교 인권위원회 김형태 변호사도 “사건 발생 당시 비행기 블랙박스에 대한 수색작업을 비롯한 초동수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KAL858기 사건과 관련된 7가지 의혹을 제기했다.

또 KAL858기 박명규 기장의 부인 차옥정씨는 “국민의 정부 출범 이래 관계당국에 누차에 걸쳐 진실규명 청원을 냈지만 지난 정권 때와 별반 다름없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의례적인 답변만 들어야 했다”며 “정부의 특단의 배려와 조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천주교인권위원회가 사건 발생 14년만에 이 사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게된 것은 지난 8월 유족 20명이 탄원서를 들고 찾아왔기 때문. 그동안 유족들은 정부나 국회의원들에게 수차례 재수사를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집단으로 인권단체에 도움을 요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천주교인권위원회와 유족들은 약 3개월간 이 사건의 관련자료를 수집해 확인 과정을 거쳤으며 정부의 재수사를 촉구하는 활동을 계속해 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이날 기자회견을 마친 뒤 천주교 인권위원회와 유족들은 청와대에 재수사를 촉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KAL858기 폭파 사건은 1987년 대통령 선거 직전인 11월 29일 승무원과 승객 115명을 태운 바그다드발 서울행 KAL858편이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공중 폭발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을 수사한 국가안전기획부는 이듬해 1월 15일 북한의 김정일이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북한 공작원 김현희와 김승일에게 친필 지령을 내려 폭파시킨 것이라고 발표했다. 사고 발생 직후 김승일과 김현희는 바레인 공항에서 붙잡히자 극약이든 캡슐을 삼켰다. 김승일은 현장에서 사망하고 김현희는 자살에 실패, 한국으로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KAL858기 폭파 사건의 전말은 대부분 그녀의 자백에 의해 밝혀졌다.

***14년만에 다시 제기되는 의혹들**

유족 김호순씨는 14년이나 지나 다시 의혹을 제기하게 된 이유에 대해 “당시 KAL기에 탑승하고 있던 115명의 승객들은 대부분 중동지역에서 일하던 건설노동자들이며 외국인 2명도 아랍 출신으로 문제를 풀어갈 주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사건 발생 직후 유족들이 모임을 가지면 안기부 직원들이 나타나 노골적으로 방해하는 등 수많은 핍박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천주교 인권위와 유족들이 제기하는 KAL858기 사건 7대 의혹은 다음과 같다.

***1. 초동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 87년 11월 29일 오후 2시 미얀마의 벵골만 상공에서 방콕 공항에 “45분후 방콕에 도착하겠다. 비행중 이상없다”는 보고를 무선으로 보낸 것을 끝으로 소식이 끊어졌다. 이런 경우 기체의 결함에 의한 추락인지, 실종인지, 폭파인지 다양한 가능성을 놓고 조사했어야 한다. KAL858기는 같은 해 9월 2일 앞바퀴가 나오지 않아 비상동체착륙을 하는 등 과거에도 두 번씩이나 기체결함으로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러한 기체결함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또 KAL858기를 통해 아부다비 공항에 내린 15명 가운데 김현희 일행을 제외한 11명의 신원은 발표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충분한 조사가 이뤄졌는가?

***2. 비행기 사고 수사의 기본인 블랙박스에 대한 수색작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비행기의 블랙박스는 바닷속에서 1천도의 고온과 중력의 1백배에 이르는 고압에도 견디면서 30일동안 반경 2마일에 계속 발신음을 보낸다고 하는데 수색작업 초기에 블랙박스에 대한 수색을 소홀히 했다.

KAL858기 사건 발생 하루 전 인도양의 모리셔스 해역에서 추락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점보기는 수심 4천미터에서 항공기의 잔해가 발견됐고, 소련의 미사일에 요격된 KAL007기도 1년여가 지나도 계속 부유물이 발견됐는데 858기의 경우 사고 발생 단 10일만에 현지조사단을 철수시키고 기체나 탑승객의 유품이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색작업을 중단한 이유는 무엇인가?

또 잔해나 유품 등 증거물이 나타나지 않다가 12월 13일 미얀마 서쪽 바다에서 25인승 구명보트가 발견됐다. 13종 50여가지 물품이 나왔으나 이중 공기압축펌프의 파손을 이유로 이를 KAL기 잔해라고 주장했다. 구명보트가 멀쩡한 상태에서 50종의 물품 중 공기압축펌프만 파손되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게다가 발견된 구명보트는 펼쳐지지 않고 말려있는 상태였다.

***3.당시 안기부는 증거 확보 및 확인을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듬해 1월 15일 안기부의 수사발표에 따르면 비행기 동체를 포함한 잔해 및 승객의 유류품 등의 직접적인 증거물은 없고 오직 김현희의 진술에만 의존했다. 자백만으로는 증거효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수사기관에서 왜 물증의 수집이나 증거의 확보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는가?

김현희는 평양에서 모스크바와 헝가리를 거쳐 오스트리안 빈으로 들어갈때 빈의 남역에서 내렸다고 자술서에 밝혔다. 그러나 이 사건을 취재했던 프리랜서 작가 일본인 노다 미네오 씨는 김현희가 남역이 아닌 서역에서 내렸다고 주장했다. 빈의 남역은 공산권에서 오스트리아로 들어갈때, 서역은 서방권에서 들어갈때 이용한다. 김현희는 후에 자신의 수기에서 노다 씨의 주장대로 진술을 뒤집었다.

김현희가 빈에서 머물렀다는 암파크링 호텔의 방 호수도 잘못됐다. 김현희는 603호에 머물렀다고 자백했지만 603호는 그 호텔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또 안기부는 김현희의 아버지가 앙골라 주재 북한 무역대표부 수산대표 김원석이라고 발표했으나 당시 앙골라에는 북한 무역대표부가 없었으며 수산대표라는 직책도 없다고 북한이 공식발표했다. 유일한 증거가 될지도 모르는 자백의 최소한의 신빙성조차 안기부가 확인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한편 음독 후 김현희를 진찰한 바레인 살마나야 병원의 야코비안 응급부장은 김현희에게 위세척했는데도 독극물이 검출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안기부는 서울에 도착한 12월 15일까지 음독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돼 있었다고 발표했다.

***4. 김현희 일행은 왜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는가?**

김현희 일행은 아부다비에서 바레인에 도착한 11월 29일 오전 4시부터 12월 1일 로마로 가기 직전 음독할 때까지 이틀이라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탈출하지 않았다. 당시 바레인발 로마행 비행기는 하루에 4편이나 있었다.

또 당시 동유럽과 오스트리아에는 동양인이 드믈었는데도 한가롭게 쇼핑과 기념촬영을 하면서 자취를 남겼고 바레인의 호텔에는 소지품을 495점이나 남겼다. 이들을 과연 극비지령을 수행하는 공작원이라고 볼 수 있는가?


***5.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에 참가한 한국대표에게 꽃다발을 건네주는 사진 속의 화동은 김현희가 아니다.**

당시 안기부가 증거로 제시한 사진은 1972년 당시 11살이던 김현희가 평양을 방문한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장기영 대표에게 꽃다발을 전달하는 사진과 일본 공산당 잡지에 실린 꽃을 든 김현희 사진이었다.

그러나 안기부가 사진 속의 인물로 지목했던 김현희는 현재 북한에 살고 있는 정희선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정희선 자신이 당시 상황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또 화동의 귀모양이 김현희의 귀모양과 다르다. 사람의 얼굴에서는 귀는 성형수술을 하거나 레슬링 선수처럼 자극을 주는 경우를 제외하면 평생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지문처럼 사람마다 다르다. 이같은 사실은 법의학계의 통설로 되어 있으며 수사과정에서도 귀모양은 사건 해결의 주요단서가 되고 있다. 컴퓨터 분석 결과에서도 사진 속의 두 소녀는 정희선에 가깝다는 결과가 나왔다.

***6. 정부는 법으로 제시된 기간까지 어기며 서둘러 사망처리 했다.**

실종자들의 호적이 실종유예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재판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정부가 희생자 가족과 상의없이 일방적으로 일괄 사망처리했다. 법적으로 사체가 발견되지 않을 경우 항공사고는 1년 이상이 지나야 사망으로 간주하는데 서둘러 사망 처리한 이유는 무엇인가?

***7. 최근 진실이 밝혀진 1987년 ‘홍콩 여간첩 수지김 피살사건’처럼 이 사건 수사에도 당시 대통령 선거라는 정치적 변수가 작용한 것이 아닌가?**

수지김 피살 사건도 1987년에 발생했다. 살인(또는 폭행치사)을 한 윤씨가 범행사실을 안기부 직원에게 알렸음에도 윤씨에 대한 조사와 처벌은 제대로 하지 않고 북한 관련 간첩사건으로 둔갑시켰다. 다행히 유족들의 끈질긴 진상규명 노력으로 14년이 지난 최근에야 검찰 조사로 진실이 밝혀지게 됐다.

1987년은 ‘6월항쟁’으로 민주화의 열기가 드높았고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시기였다. 더구나 김현희는 대통령 선거 하루 전에 한국으로 돌아왔고 실제 대선결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4년간 이 사건을 추적해온 현준희씨도 의혹 제기**

한편 KAL858기 폭파 사건 조작 의혹은 최근 한 언론보도를 통해서도 제기된 바 있다. 월간 내외저널은 10월호에서 14년간 이 사건을 추적해온 현준희 씨의 주장을 실은 ‘김현희 KAL기 사건 조작 의혹’이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현씨는 “북한은 이 사건으로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됐으며 현재 김정일 답방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다”며 “이 사건의 진실 규명은 남북관계 개선에 매우 중요하다”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KAL기 폭파 사건 조작 의혹이 제기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사건 발생 직후 일본에서 나온 자료들을 통해 학생운동권에서 이러한 의혹을 제기했으며, 힘출판사에서「의혹 속의 KAL기 폭파사건」이라는 단행본이 출간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조작 의혹’은 ‘의혹’을 제기하는 수준에 그쳤다.

현준희 씨는 “지난 14년간 이 사건을 추적해 라면박스 2개 분량의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며 자신의 주장에 자신감을 보였다. 현씨는 6백여쪽 분량의 KAL기 의혹에 관한 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씨는 천주교 인권위원회에서 제기한 7가지 의혹이외에 ▲ 김현희가 김정일의 친필지령을 받았다는 물증이 없다 ▲ 일본 프리랜서 기자들의 추적결과 정부 수사발표문과 김현희의 자백, 김현희가 쓴 수기 등에서 80여 곳이 일치하지 않는다 ▲ KAL기 폭파 사건 공범으로 밝혀진 김승일 씨는 국제 테러리스트라고 보기에 힘든 키 171cm에 몸무게 45kg에 불과한 70대 노인이었다는 점 등의 의혹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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