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의 저자. 운동권내 전설적인, 오래도록 금단(禁斷)이자 분단(아직도 `빨갱이`를 연상시키는 `국가보안법`과, `청춘-열혈`이 묻어나는 `집시법`의 정서적 차이는 운동권 안팎에서 아직도 크다)의 상징적 이름이었던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에 가담한 전력 때문에 79년 박정희 정권의 `사건발표` 이후 30년 넘게 프랑스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남자.
그 화려한, 그러나 이회창과의 연루 때문에 DJ정권에서는 알게 모르게 푸대접을 받고 있는 KS(경기고서울대) 출신…이 어울리지 않는 3박자 때문에, 그리고 덧붙혀 언론 비판 특히 특정 신문에 대한 `안티운동`으로 더욱 유명해진 그를 나는 며칠 전에 비로소 처음 만났다. 내가 무슨 유명 인사 만나는 유명인사도 아닐 것이니 그게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의 또 하나, 잘 알려지지 않은 전력이 70년대 딴따라(그는 외교학과 69학번이고, 망명하지 않고 또 징역을 살지 않았다면 채희완-김민기-임진택 등 경기고 출신 문화 운동패 3인방을 4인방으로 늘릴만 했다)라서 뒷소문을 많이 들었기에 조금 새삼스럽기는 했다.
`말씀많이들었다`는 피차 인사가 나도 어색하지는 않을 정도로. 아니, 좀더 경위를 따져보자. 그가 왜 대중문화 `할말, 안할 말` 초대 손님이지? 예정에 없었는데… 미리 말하지만, 그는 아름다운 배경이다.
양관수. 그는, 그 또한 70년대 반체제 운동의 전설적인 인물인데, 운좋게 일본유학을 갔나 했더니 거기서 그당시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 기준으로는 `친북親北`에 해당되는 일을 무시자행(?)하는지라(이건, 또 `명성황후`의, 능력없어 난감한 신하들 말투군) 10년 넘게 귀국이 금지되었다가 DJ 정권 들어서면서 간신히 입국, `그거 하나는 확실히 나아졌네. `라는 평가를 현정권에 선사한 사람이다.
먼 옛날 그의 결혼식때 내가 축시를 써준 적이 있는데 그걸 아직 잊지 않고 그는 바쁜 중에도 심심치 않게 내게 연락을 한다. 나는 그때마다 고맙지만 특별한 경우(여자라거나)를 제외하고는 `단둘`이 만나는 게 뭔가 어색해서(이것도 `음모`를 기피하는 나의 민주화 운동 정신병일까?) 그냥 `감사`로 끝나곤 했는데 그날따라 홍세화라는 메뉴가 곁들여졌다. 뭐, 그렇단들, 꼭 갈생각은 없었다. 그렇담 더더욱 빠져도 되겠군….
그런 생각에다가 그날은서울대에서 전국교수노동조합 결성대회에서 축시를 읽어야할 날이니 술자리가 예약된 셈이었다. 나이가 위거나 같은 교수들과의 술자리는 언뜻 갑갑하지만 조금 견디다보면 때론 야단맞는 것 같고 때론 권위를 타파하는 것 같은, 마조사디스트적 쾌감이있다. 남자들만인 경우 동성애적인 쾌감도.
그런데 그날은 영 `술기대`에 어긋났다. 갑자기 쌀쌀해진 가을날 인문대 앞마당에서 기세를 올린 건 좋았는데 `교수`노조 출범 집행부는 미리 출발한, 그리고 계급신분이 `낮은`(?) 노조들을 일일이 낮은 순서대로, 민주노총에서 교원노조 그리고 강사노조까지 배려하느라 축사가 15명이상 이어졌다. 안되겠어. 열성도 좋고 겸손도 좋지만, 너무 전투적이라 술맛이나겠나….
술집 지리산은 인사동 꾸불 골목길을 여러차례 돌아 스스로 뱀이 된 듯한 심정으로 도달하는 곳이지만 인사동보다 안국동에 더 가깝고 실내장식도 멀쩡하다. 물론 음식도. 한식전문인데 빈대떡에 막걸리 따위 싼 쪽으로 나가도 일품 숭늉은 공짜고 두루 싸잡아 `궁짜`가 전혀 없다.
어쨌거나 , 일층마루에 떡하니 자리를 잡은, 양관수가 초대한 손님들은 많았다. 키가 큰, 앉은 키는 더 큰 손호철(서강대 교수, 어 저 사람이 나보다 먼저 도망쳐왔네?)이 허리휠 듯 휘영청 손을 한번 흔들더니 하던 얘기를 계속한다. 정치? 좋다 이거야. 민주당도 좋고 한나라당도 좋다 이거야. 하지만 운동은 팔아먹지 말라 이거야…. 나보다 더 고생 했으니 할말은 없지만…. 화제는 장기표인 듯 했다. 장기표는 80년대 나의 우상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가 `잘못한다`기보다는 `잘 안 풀리는` 편이고 한국 정치의 `추醜`를 그의 `순결성`이 아직도 감당하지 못하는 중이라 생각한다. 이건 `오류`와는 다른 얘기다. `오류`라는 말이, 그 형한테나 또한 이론을 알만한 운동가들한테나, 더 뼈아픈 것 이겠지만.
박승옥과 문국주가 정말 반갑다. 말 그대로, 고생만 지지리하는 놈들. 박승옥은 나와 같은<시와 경제>동인이었지만 일찌감치 문학을 버리고 노동운동계에 투신했다. 글을 다시 열심히 써보겠다더라, 그런 얘기를 들은 게 또한 5년 전이고. 문국주는 천주교 운동권에 20년 이상을 몸 담았는데, 그건 신분이 다소 명망과 신분이 보장된 운동가에서 운동권 뒤치다꺼리 잔심부름꾼으로의 몰락(?)을 감수하는 세월이었다. 그 세월이 눈에 한꺼번에 삼삼하기도하고 자칫 눈물이 핑돌기도 하여 나는 두사람 모두에게 `야, 민주화라는 말 이제 지겹지도 않냐?` 하니, 둘다 박장대소로 답했다.
또 한사람, 처음 보는데, 저 분이 박석률인가? 홍세화를 단연 미안하게 만드는 남민전 전사? 응, 역시 눈매가 날카롭군. 하지만 표정이 한없이 너그럽다. 주제가 고생이라면, 그만큼 고생한 사람이 좌중에 없다. 그리고, 주제가 전망이라면, 그만큼 너그러운 사람이 없다. 과연, 명불허전일세…. 그가 `그래, 고생한 사람이 중요하지. ` 하길래 내가 짐짓, 초면에, `고생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죠. 고생의 질이, 전망을 내는 고생의 질이 중요한 거죠. ` 라고 한번 엉겼더니 그가 흔쾌히 수긍한다. 그래…. 나는 속으로 가슴을 싸악 쓸어내렸다. 휴우….
그런데, 홍세화는? 그는 이 모든 것의 아름다운 배경이었다. 그가 남의 말을 점잖게 경청하고 있었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의 배경이 없으면 이 모든 얘기들은 `세월을 머금은`, 그만큼 느긋한 한담이 아니라 당시 체험에 너무 가까워서 피비린 주장과 울화와 억하심정이 어쩔수 없이 묻어나는 그런 배경. 은은한, 아주 오래된, 그리고 오래될수록 멀쩡해져온 시간의 공간같은. 그 공간 속으로 등장인물과 대사들이 빨려드는 듯한 착각 속으로 나는 다시 빨려 들었는데 그게, 경악이 마땅한데도, 이상하게 편안했다.
그는, 그의 프랑스 망명생활은, `국내파`인 우리가 도저히 체득할 수 없는, 그 불가능성 때문에 우리가 급기야 유토피아 혹은 아름다움의 차원으로 격상시킨 그 객관성을, 객관의 인격을 그에게 허락한 것일까? 아니, `나만 편하게 지내서 미안하다. ` 는 그의(그는 결코 편하게 지내지 않았지만) `무차별적 사과`가 암시하는, `해외파`(양관수는 국내파다. 일본이우리의 이웃 나라라서가 아니고 그가 문제를 꾸준히 `국내화` 했으므로. ) 그가 도저히 가 닿을 수 없었던, 그 불가능성 때문에 신화의 차원으로 격상시킨 그 주관적 체험의 인격에 대한 경의가, 모종의, `불가능과 불가능의 변증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역사적으로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는데 홍세화, 그 아름다움의 배경이 말한다. 나, 내년 1월에 영구 귀국할거요…. 한국에 바람직하고 질 높은 토론문화를 생성시키고 싶다. 모신문사와 얘기중인데, 신문 한면을 달래서 내가 사회를 보면서 꾸준히 문제를 심도 높게 토론을 이끌어 나가고 싶다… 그는 점점 더 아름다워지면서 그렇게 얘기했다. 그거 참 잘됐군요. 운동권에 여러 길이 있으니까. 의논을 두루두루 해보십시오….
뭐, 그렇게들 상담 혹은 덕담을 해주는데 나는 그 `아름다움`이 다소 겁나서, 또 변증법을 위하여 이렇게 딴지를 걸었다. 먹고 사는 걸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운동권 사내들은 정말 돈 한푼 안 벌고도 먹고 사는데 도사거든요. 형님은 제가 보기에 아주 모범적인 가장이고 식구들 먹여 살리는 문제를 생각 안하실 수가 없는데, 그 방면에는 운동권이 전혀 도움이 안되요….그거야 그렇지, 하고 누가 대단찮다는 듯 거들었고, 홍세화는 어떻게 안 되겠느냐고, 걱정 말라고 했지만 나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물론 운동권 일 많지요. 형님과 함께 일할 사람 참 많아요. 하지만 돈을 안주거든요. (하하. 그래. 맞아. 돈과 상관없지. 하하…) 그리고 신문도, 차라리 잘 나가실 때 논설위원자리를 달라는 게 낫지 처음엔 좋다좋다 하다가도 시청률(구독율)떨어지면 짤라 버린다니까요….
베스트셀러 작가 잡고 괜한 시비였을까? 어쨌거나 나는 이때쯤 그를 `할말 안할 말`에 등장시키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모레 출국인데…. 아니 어떻게 좀 안될까요? 내일 일요일이라도… 그랬더니 박석률이 호통을 친다. 아니 그런 실례가 어딨나. 약속 된 일이 많을 텐데. 시간을 좀 두고 부탁을 해야지. 그의 말투에 엄한 기색까지 묻어나서 나는, 당연히, 찔끔했지만, 스스로 고집을 꺾기가 힘들었다. 다행히도 홍세화 본인이 시간을 내주었다. 점심때. 딱 한시간 정도… 사무적이 아니라, 아주 부드러운 말투로.
그날 문국주-박승옥은(역시) 바빠서 먼저가고, 나머지는 양관수의 단골 주모집(제목이 `아무집`이다. 허허, 그것참)으로 자리를 옮겨 흥청망청 거나하게 취하고 오래간만에 노래도 부르고 급기야 꼭지가 돌아갔지만 나는 내내 홍세화와 대담하는 기분이었다. 그가, 여전히, 아직은, 아름다운 배경이었으므로. 내일은 배경이 아닐까? 나는 그게 자못 궁금했다. 내일도 다함께 만납시다…. 그렇게 얘기하고 우리는 뿔뿔이 헤어졌다.
푸코니 들뢰즈니 라캉이니, 요즘 철학계를 프랑스 철학이 주도한다고, 외려 한국문단에서 난리지만 난 기본적으로 프랑스 사람들은 문자(文字)로 사고하는 두뇌용량이 영미나 독일계보다 터무니없이 작다고 생각한다. 사전류를 사다보면 그림이 화려한 프랑스 책들에 손이 자주 가는데 사서 보면 대체로 (글) 내용이 부실하다. 다만, 그러므로, 프랑스인들은 `문자적 사고` 못지않게 `시각예술`적으로도 사고한다. 그 예술적 사고가 철학의 철옹성을 침범, 문예 비평인지 철학인지 모르는 그 이성과 비이성의 변증법으로써 프랑스 철학은, 정치가 해체된 21세기 `예술의 시대`에 부응하는 것 아니겠는가. 프랑스인들의 `언어`는 예술장르간 의사소통언어의 성격을 가장 많이 띄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니체는 그 대목을 (독일계라서) 좀 유난떨며 열었고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은, 그게 체질에 맞으니까, 좀더 자연스럽게, 개진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어제 술이 과했던데다 `대낮 인사동`은 대학시절 이후 30년만이라서, 그리고 그 30년이 홍세화의 30년과 무슨 연관이 있을 법도 하여 곰곰 생각까지 하다가 길을 잃는 바람에 더 늦게 도착했는데도 홍세화는, `나도 금방 왔어요. ` 하며 관대한데, 관대함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 없고, 된장찌개 정식이 차려진 밥상이 그렇게 단정할 수 없어서 나는 그렇게 프랑스 얘기를 깔았다.
그는, 다소 현학적으로 들렸는지, 이렇게 받았다. 맞아. 프랑스가 예술의 나라라는 건 맞아. 난, 그게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데, 68혁명때 말요.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사태가 급박해지자 내무-국방장관이 군을 동원해서 밀어붙이자고 했거든. 그런데 경찰국장이 반대를 했지. 좀 긴박했겠어. 그런데 그때 경찰국장이 틈틈이 시집을 읽고 있더라는거야… 굉장한 나라군요… 그렇지, 우리나라는 확실히 언론-종교 그런 것들이 너무 저질이야…. 68혁명 세대들이 오늘날의 주류/좌파 프랑스 철학을 이끄는 건데, 우리나라에서 그걸 좌파로 인식시키기는 매우 힘들다. 단순-소박하고 궁끼 들리고 머리에 띠두르고 그러는 게 좌판줄 아니까. 난 이렇게 다시 물었다. DJ를 보면 우리나라는 참 어렵다, 어려울수록 더 의미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가 지향하는 게 빌리 브란트류의 사회민주주의인 것, 혹은 였을 것 같은데, 브란트의 사회민주주의 동방정책(동서독통일정책)은 국민의 정치수준을 높여야만 성공가능한 거였던 반면에, DJ는 국민의 의식수준을 낮추어야만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는 입장 아니었던가, 의도적이 아니라 그런 운명에 빠져 있던 게 아닌가, 그 운명을 아직도 벗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 빌리 브란트는, 비서가 간첩 사건에 연루되는 등 정치 역정이 복잡했지만 갈수록 존경을 더 받고 있어요. 국민들 의식수준. 그것 참 부럽지.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여기다, 싶은 생각이 들었던 걸까? 내가 물었다. 프랑스의 높은 문화수준과 한국의 수준은 많은 차이가 있을 텐데, 왜, 그, 안티조선이다 뭐다 활동을 많이 하시잖아요. 무슨 어려움은 없읍디까? 어려움보다는, 내가 너무 몰라서, 미안하지. 이제 귀국하면 열심히 해야지…. 난 그거 안티조선 지식인 서명하라고 해서 안했는데, 그랬더니, 이 대목에서 그가 의외로 기민하다. 어, 안했어? 해야겠네. 허허…. 하하 그런가요? 몇 달전 서명을 받으러 온 문인한테 난 그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안티조선. 좋다 이거야. 하지만 (문인의 경우) 언론 버릇 고친다고 글 쓰다가 `언론 글`에 휘말려 자기 글 수준이 인터넷 익명 비방 수준으로 떨어지니 딱하고, 언론학자란 사람은 우리나라 언론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노선을 내야 하는데 한 신문만 주표적으로 삼고, 힘센 국회의원 정치가들은 빼버리고 힘없는, 먹고사는데도 빠듯한 문인-학자들만 모조리 줄 세우니, 전략상 오류고, 워낙 입심이 고래 심줄이라서 자기 체질대로 언론과 폭로-풍자전을 벌이는 경우는 별로 걱정할 것 없으니 됐고….
이 말에 홍세화가 조목조목 반박한다. 문학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사명에서 문인이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안티조선운동은 대중적이다, 문인-학자만 모여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런 말보다, 그의 `일반론`이 더 뼈아팠다. 하지만, 희망이 있다고 봐. 아니, 그것보다도, 절망은 사치스러운 거지. 대중의 수준에 절망한다는 게… 꾸준히, 열심히, 겸손하게 높여야 하는 거지…. 아, 그는 정말 영구귀국을 결심했구나. 그런데, 그는 30년 전 `귀국 못했던` 남민전 전사로 이제 귀국하려는 것일까?
나는 다소 주눅이 들어 계속 뇌까렸다. 파시즘이란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부분 아니냐, 그것이 숨어 있다가 한순간에 출몰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주기적인 자본주의 현상 아니냐, 조선일보에만 한정되는 현상이라고는 할 수 없고, 그리고 시대가 천박해지는 데는 모든 언론이 책임있는 것 아니겠느냐, 더 큰 문제는 방송 아니겠느냐, 신문이란 것은 여러 번 읽는 것을 전제로 하니까 반성의 여지를 쓴 놈 읽는 놈 모두에게 주는데 방송은 `생방송 신화`를 근거로 대사 내용없는 지문만 반복하고, 정부 비판도 정부 명령이 있어야 하는 판이고 그런 `공허`가 일상의, 사고의, 의미의 무의미화를 야기시키는 게 더 문제 아니냐….
그는 충분히 인정한다면서 그렇지만 그게 안티조선운동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못을 박았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외유내강이냐는 거지. 내유외유면 안 되는 거고…. 젠장.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단 하지 않는 사람이 일단 하는 사람의 논리를 이길 수 없다. 그 논리의 힘. 그게 한계고 희망이고 현실이다.
아니, 내가 나를 좀 식혀야 되겠군. 강준만 그 사람 글은 어때요? 최민(미술평론가이자 한국예술종합대학교 영상원 교수. 세면된 논리와 미색을 갖춘 평문으로 유명하다) 형은, 의외로, 꺼벅 죽은 편이고 다른 사람들, 특히 문인들은 아주 싫어하고 그러던데…. 그것도 절망의 사치 아닐까? 난 그 사람 한번도 본 적 없지만 글을 참 좋아하지. 필요한 논리에 글이라고 봐. 우리나라 전체를 감안한다면 꼭 있어야 할. 그렇기 때문에 균형 감각이 있다고 보지. 지금은 과도기니까…난 싫더만. 그렇게 덧붙이려다, 참았다. 칭찬하는 데만도 지면과 시간이 모자란다는 게 요즘 `문화사태`의 본질 중 하나라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식히려 해도 잘 안되네. 나도 투사기질이 되살아나는가? 께름직해…. 파리는, 대단하다면서요?… 뭐가?… 새벽에 돌아다녀도, 젊은 처녀가 돌아 다녀도 전혀 위협감을 느끼지 않는다면서요? …그렇지. 외곽에서는 가끔씩 그런 일이 있어도. 신기하지…. 그걸 신기하게 생각하는 우리가 사실 얼마나 불쌍한 건데요. 인간과 인간 사이 신뢰와 행복과 애정. 그건 인간 삶의 최소 조건이잖아요. 양놈들이야 지들 진 죄가 있으니 범죄가 우글우글 한다치고 우린 뭘 잘못했길래 그 최소한의 사회적 조건을 부러워해야 한다는 겁니까?
그런 항변 아닌 항변을, 나는 입밖에 내지 못했다. 다만, 그 어조로, 내가 간직하고 있는 가장 눈물겨운 경험 중 하나, 즉 몇년전 `남민전 망년회`에 참석했던 얘기를 했다. 임헌영(문학평론가인 이사람, 그리고 국회의원이자 한나라당 원내총무인 이재오, 그리고 작고한 시인 김남주 정도가 남민전 출신의 대중적인 유명인사다)을 따라간 2류 룸쌀롱 쯤 될까, 어쨌든 여자가 있고 실내가 넓지만 실내장식이 대단치는 않은 술집인데 여자를 한명씩 낀 대열과 그렇지 않은 대열이 양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래저래 좀 묘하다 싶었는데 그 생각도 잠시, 여자 없는 대열 사내들이 일제히 일어나 여자 있는 사내들 쪽으로 큰절을 올린다. 아하? 나는 그때 반쯤 미리 감동을 했는데, 어렴풋한 예상이 그대로 들어맞아 감동이 (삭감되기는커녕) 몇배로 불어나서 왈칵, 울 뻔했다. 다행하게도 취직이 되어 월급이나마 받는 남민전 전사들이 그렇지도 못한 처지의 전사들에게 일년동안 진 마음의 빚을 그렇게 갚는 거였다. 아, 그때 나는 투쟁하는 인간 영혼의 광휘가 행색의 누추를 찢어 발기는 광경을 보았다. 그것은 고난의 공동체가 이룬, 어떤 재보의 화려함보다 화려한, 아니 질 높은, 햇빛 그 자체의, 그리고 눈물색 그 자체의 광휘였다. 그후 나는, 뭇사람들의, `남민전 출신 출세자`에 대한, 운동을 빙자한 비난을 참지 못한다.
홍세화는, 미안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다, 는 표현이 잘못되었고, 미안함이 더 구체적인 표정이다. 내가 왜 이러지? 나는 혹시 그의 귀국을 반대, 혹은 걱정하는 건가? 그가 남민전 출신으로 프랑스 문화를 머금은, `똘레랑스`를 전파하는 아름다운 배경이기를 바라는 건가? 아니다. 나는 그가 귀국해서 정말 아름다운 배경의, 깊이를 더하고 보태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외파와 국내파의 오랜 역사적 갈등(한국사의 가장 치명적인 독소 중 하나였던)을 배경의, 세월의 변증법으로 전환시키기를. 그건 정말 얼마나 아름다운 배경일 것인가.
어쨌거나 그는 물경 34만부(<나는 파리의…>한권으로만)를 판 인세는 다 까먹고, 보증금 3천만원 월세 몇십만원짜리 `살림`으로 한국 생활을 시작할 예정이다. 좋은, 신나는 일거리 있는 사람들 어서어서 연락할 것.
PS. 대담이 끝날 때까지 김상도가 보이지 않는다. 사진 찍어야 하는데 큰일났구만. 일요일날 부른 게 무린가?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표 던지고 행방불명 중이란다. 이런. 일이 고됐나. 어쨌거나, 이 자리를 빌려서 (고된 일 시킨) 사과 겸 `사람을 찾습니다` 광고. 상도야 빨리 돌아와라. 형아들이 (내가보기에, 뭔일인지 잘 모르지만) 엄청 반성하고 기다린다…. 김상도는 안 오고, 끝날 무렵 박석률이 왔다. 어, 다들 안 왔어? 왜 아무도 없어? 홍세화는사람좋게 실실 웃고 나는 뭔소린가 하는데, 박석률이 다시 `어제 다 만나기로 안 했나?` 그렇게 다그쳤다. 아, 제가 만나자고는 그랬는데, 답을 받진 못했어요….그랬나? 그렇군. 정확한 말이군 맞아 답을 하진 않았지…. 박석률이 그렇게 곰곰 생각 곱씹으며 사태를 받아들였다. 왜 좀 더 같이 있지 그래? 아니, 뭐, 그럴 건 없지…. 박석률은 칼로 자르듯 가방을 챙기는데, 정말 훌훌 터는 듯 시원시원하다. 아, 남민전 사람들 정말, 너그럽고 정확하고, 무섭다, 정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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