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북녘에서 시작, 냉엄(冷嚴)을 머금고 휴전선 너머 남쪽으로 설악을 거쳐 다시 남하, 하강에 하강을 거듭하던 단풍이 내장산에서 절정을 이루었단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길에 자동차 까지 마구 주차시킨 탓에 인산인해의 단풍 관광객들이 거의 매표소 행렬로 순서를 기다리고 꾸역구역 올라갔던 사람들이 어두워진 후에도 미처 내려오지 못하고 곤욕을 치렀다는 얘기다.
지는 해의 황혼은 장엄하고 꽃은 유종의 미가 제일 화려하다. 그것에 비하면 인간의 일생은 너무 길다. 그리고 종말은 생애의 때와 노추의 냄새를 짙게 풍긴다. 그러하니, 말로야 만물 중 가장 사려 깊고 지혜롭다지만 오래 살다 보면 결국은 잔 걱정과 지은 죄만 많을 뿐인 인간들이 거대한 단풍의, 붉은 단말마의, 그 엄정한 아름다움 속에 자신의 생애를 물들여 보고 싶어 하는 욕망을 알 것도 같다. 하지만, 정작 단풍산 사정은 또 그러했다니, 고대 그리스 비극을 닮은 자연의, 원초적 비극의 아름다움에 동참하고자 했던 소망이 번잡한 일용의 양식과 고단한 다리품, 그리고 짜증나는 교통현실과 행정 불편의 확인으로 얼룩졌겠다.
하긴, 산을 온통 차디차게 불태우는 단풍의 거대한 붉음은, 사실 절대고독의 축제다. 그것은 `응집의 확산`이라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축제고, 처음부터 대충 한데 어울려 놀아 보자는 심정으로는 동참하기 불가능한 축제다. 죽음 앞에 홀로 선다는 마음가짐 없이는.
어쨌거나, 인간을 위해 단말마를 극한의 아름다움으로 애써 펼치고 있는 북한산, 또 설악산, 혹은 내장산에 떼로 몰려가 인간의 몸살을 보태는 것 보다 훨씬 더 편안한, 그리고 친근한, 아니 인간의 사회와 역사에 더 걸맞는 가을길이 다름 아닌 서울에 있다.
구(舊) 중앙청 옆 경복궁 올라가는 대목에서 인사동-비원을 거쳐 동숭동 대학로에 이르는 길이 그것. 단풍은 눈에 띄지 않고 노란 은행잎들이 발에 밟힌다. 가을비가 내리면 밟힘이 흥건한데, 이상하게도 밟히는 것 뿐 아니라, 구두 발자욱뿐 아니라, 밟고 가는 자의 어깨에서도 연민이 묻어난다. 그것은 대상과 주체가, 자연과 인간이 구분되지 않는 연민이다. 엄혹은 없다.
일본총독부 건물과 미대사관, 그리고 출판회관과 한국일보사가 한데 어울려있는 기형의 한국현대사도 조금 지나면 그, `요란한 천박`의 시사성(時事性)을 벗는다. 그리고 조선 여성의 버선코와, 왜소하고 비겁한 채 권위만을 내세웠던 가부장 왕궁의 기와선이 몇 백 년의 시간을 거치며 서로를 용인하듯이, 자연은 종로와 강남에 밀려난 인간의 풍경을, 인간은 오래된 시간의 공간에 갇힌 자연의 풍경을 용인한다. 그리고 그 용인의 눈망울이 연못 속처럼 맑고 그윽하며 유구하다. `맑음`과 `그윽함` 그리고 `유구함`을 계속 겹쳐가노라면 길은, 걸음은 정말 무덤 속인 듯, 무덤이 아니라 `무덤 속`이 진정한 아름다움의 거처인 듯도 하다.
그 길을 걸으면 우리는 별로 과격하지 않아도 어느새 역사와 한 몸이 되는 아름다움의, 일원이 될 수 있다. 그렇다. 다소 원시적인 고대 그리스 비극의 장인 단풍의 공간에 비해 이 길은 그 후의 예술사(藝術史)와 같다.
영화배우 오정해를 만나러 가는데 웬 단풍, 혹은 은행잎 타령? 나는 오정해와의 만남을 위해, 아니 오정해를 미리 `느껴보기` 위해 그 길을 일부러 택했다. 어차피 그녀는 말을 많이 하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한 시간 정도(그녀는 요즘 `마당놀이` 공연연습에 푹 빠져 정말 바쁘다) `만나 줄` 것이고 처음부터 말이 통하기에는 나이 차가 너무 많다.
그녀는 나를 그냥 `아는 아저씨` 정도로 대해줄 것이고 워낙 뜬금없이 옛날을 들먹거리며 만나자 했으니 다소 귀찮기도 할 것이다. 물론, 착하니까, 일부러, 의도적으로 그러지는 않겠지만. 사실 기자에게 부탁하여 전화번호를 겨우 알아내 다이알을 돌렸더니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면서 `매니저`에게 연락을 하라고 해서 얼굴이 좀 화끈했었다.
뭐, 당연한 일이겠다. 그녀와 나는 5년 전 기독교방송(CBS)에서 방송을 하면서 한 1년 동안 마이크를 건네주는(나는 클래식음악 프로그램 MC를 맡았고, 오정해는 바로 다음 시간대의 `영화음악` 프로그램 MC) 사이였지만, 방송이란 게, 그렇다고 해서 서로를 잘 알게 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내가 한 시간을 일부러 기다려서 같이 점심을 먹은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CBS 방송극 근처에 위치 한 우리 집에 PD들과 어울려 와서 그녀가 직접 `음식솜씨`, 혹은 주방경력을 자랑한 적도 있지만, 방송이란 게, 그렇다고 해서 나처럼 문학하는 사람이 연예계 스타와 지속적으로 우정을 쌓기란 힘들다.
얼굴을 보면 금방 알아봤을 텐데…역시 나는 무대포라 문제야…. 5년 만에 전화로 이름 달랑 들먹이면 누가 대뜸 알아듣겠어. 나 이거 혹시 왕자병 아냐?…뭐 그런 생각으로 나도 긴가민가하다가 그때 오정해 프로그램 구성작가를 맡았던 강경미(지금도 구성작가인데, 그때와 달리 방송계 천하의 왕마담이다. 별명은 `강경하게 아름다운 여자`. 오정해 신혼휴가 때 추상미가 MC를 맡았었는데 그녀는 `추상적으로 아름다운 여자. ` 아, 그때 나는 정말 여복이 터졌었나 보다. ) 에게 부탁을 했다.
혹시 나, 모르냐고, 좀 물어봐 달라고. 강경미는 대뜸, `그럴 리가 있어요? 설마. ` 그런다. `알았어요. ` 그녀는 대차게 끊더니 얼마 안되어, 희소식을 전해왔다. 어이구, 선생님도 정말 노망인가봐. 왜 오정해가 선생님을 모르겠어요. 그럴 리가 있냐고 펄쩍 뛰던데. 아, 전에, 광화문 카페에서 만나 반가워서 인사도 드렸다 던대요, 참나. 나만 병신 됐네...
` 그랬나?‘ 그랬다. 어찌나 반가워하는지 무슨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었다. 남편하고 같이 왔는데. 인사하실래요?…그 말에 나는 대뜸 안심도 되었었다. 그 소문 떠들썩했던 63빌딩 대연회장 김대중(그때는 대통령이 아니라 야당 총재였지만, 이인제가 출마하는 바람에 `필패(必敗)의 후보`에서 `당선 가능성이 가장 큰 후보`로 일약 위치 격상된 처지였다) 주례의 오정해 결혼식에 참석했던 우리 `방송관계자` 몇몇은 어마어마한 정치권 인사들, 그리고 더 어마어마한 신랑 쪽 하객 축의금 행렬에 입이 쩍 벌어지면서 다소간 걱정도 했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돈부자와 연예인스타의 결합 운운의 천박한 얘기가 화제였던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가 보기에, 오정해는 가정을 너무도 원했고 너무도 중요시했다. 외롭게 자란 환경 때문에 그랬겠지만, 과연 `예술가` 오정해를 만족시킬 만한 가정이란 게 있을 것인가. 너무 일찍 실망할 것 아닌가…. 그런 요지였던 것이다.
미리 얘기지만 만나보니 가정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전보다 더 강하고 더 자연스러워졌다. 소원을 말하라니까 시간이 좀 더 나서 가족들과 같이 보내는 거요, 그렇게 말했는데, 당연하다는 듯 느낌표가 없었던 것. 그건 다행이고….
하여간에, 다시 용기를 내서 전화를 했더니 오정해가 `아, 선생님?` 하고, 무척 반가워한다. 그리고 동숭동 어디어디서 보자고 하는데 속사포라 받아 적을 수가 없을 정도다. 허, 이 아가씨. 성격이 매우 활달해졌네? 나는 그녀가 이미 한 아이의 어머니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뇌까렸다. 그리고 한숨 돌리고, 예의 그 `가을 길`을 통과했다. 왜 그랬을까?
5년 전 그녀와 처음 인사했을 때 그녀는 판소리 명창 김소희의 직계제자로 중등-고등-대학생부 명창 대회 상을 휩쓸고 하는 김에 미스춘향 선발대회 진까지 챙겨 시쳇말로 `미모와 가창력을 겸비한` 국악계의 기대주로서, 장안의 화제였던 임권택 감독영화 ‘서편제’의 여주인공 송화역(1993년)은 물론 흥행은 그만 못했지만 역시 소문이 무성했던 같은 감독영화 ‘태백산백’(1994년)의 소화역, 그리고 역시 같은 감독영화 ‘축제’의 용순역을 거치면서 대종상 신인여우상(1993년), 제1회 상해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1995년), 그리고 일본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여우주연상(1995년)을 거머쥔, 말 그대로 스타 중의 스타였다.
해외영화제 참가 당시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이 홀딱 반해서 `내 영화에 어떤 역이든 출연시켜줄 테니 한번만 만나 달라 `고 숙소까지 와서 껄떡(?)댔다는 소문도 CBS 방송국 내 자자하게 퍼졌지만 그건 사실 확인이 불가능할 테고….
어쨌거나 그랬는데, 그녀는 모종의 빛을 발했지만, 참 수줍고 얌전했다. 챙이 있는 모자를 썼다 벗었다 할 때는 `왈가닥`기가 아주 미세하게, 또 매력적으로 묻어났지만. 아니, 그건 그거고, 그녀를 감싸는, 얌전하지만 매우 딴딴한, 그게 아주, 의외가 아니라 당연해 보이는, 빛. 그게, 뭐지?
‘서편제’는 `판소리 예술`을 다룬 것. 오정해, 그리고 김명곤에게 걸맞다. 둘 다 판소리 고수니까. 이 영화에서 연기란 판소리(내용)의 형식쯤 되는 거였다. ‘태백산맥’은? 전라도 사투리, 특히 징헌 `벌교` 사투리가 꾸며가는 빨치산 투쟁기다. 이때 `사투리`는 다시 투쟁(내용)의 형식으로 된다. 좌익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소설이라는 한편의 시각과, 그것을 `빨갱이 소설`로 매도하면서 협박을 일삼았던 또 한편의 시간을 양쪽으로 밀어내면서 나는 ‘태백산맥’은 사실 소화의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사투리와 샤마니즘적 에로티시즘의 절묘한 통합이 다른 모든 이념과 주의, 그리고 등장인물, 심지어 전쟁 전체까지 아우르는. 이때 `소화 역`은 판소리 예술의 역사-현재적 발전에 다름 아니다. 죽음과 삶과 그 사이 장례식 자체를 주인공 삼았던 ‘축제’는 무엇인가? 조선 예술 미학의 핵심인 유현(幽玄)의 심화-완성이다.
그렇다. 오정해는 영화 속으로 진입하면서 판소리와 멀어지기는커녕 판소리의 (가창은 아닐망정) 예술 속으로 진입하는 행운을 누렸다. 아. 판소리와 영화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엄청난데… 이것이야말로 희귀한 사례며, 국악을 현재의 문화로 되살리는 일에서나 영화를 민족의 가치로 격상시키는, 이게 너무 `민족주의적`이라서 껄끄럽게 들린다면 최소한 영화의 민족예술적 품격을 높이는 일에서나 대단히 중요한 사례다.
아. 오정해는 딱 세 번 영화에 출연했는데. 그래. 김소희 못지않게 임권택도 그녀의 중요한, 결정적인 스승이었구나…. 내가 오정해에게 반했던 까닭이며, 5년 동안 그녀를 만나지 못했지만 늘 만난 것처럼 얘기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 까닭이며, 그녀의 장래가 궁금한 까닭이며 `가을길`을 미리 걸어 본 까닭이다.
김소희 얘기가 나왔지만, 그 대목에서 오정해가 모처럼 발끈한다. 뭐, 내가 영화에 출연했다고 굉장히 화를 내셨다고들 하는데. 심지어 저를 파문하셨다고 하는데요, 그건 사실과 달라요. 많이 격려해 주셨어요. 걱정을 좀 하시긴 했지만…. 그녀는 그런 말을 아무리 해도 소용없더라고, 인터뷰기사 나온 것 보면 다 그렇게 쓰더라며, '김선생님도 별 수 없이 그러실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김소희의 `격려와 걱정`이 이해가 간다. 아니 오정해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얘기를 들었더라도 이해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판소리에 대한 미안한 경험이 있다. 운동권에서 민족문화운동이 기세를 떨치면서 마당극-탈춤과 더불어 `판소리꾼`들도 제법 심심찮게 등장하여 `여흥`을 돋우곤 했는데, 그게 무척 갑갑하고 짜증스럽게 들렸던 거다.
노래 하나가 툭하면 10분을 넘는데다 사설이 요란하고 `구태의연`하게 웃기는데다가, `화끈하지도 않게 야`하고, 무엇보다 그런 `소리`를 해대면 너도 나도 대꾸를 해대고 `허이!` 추임새를 넣으며 노래의 집단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저열평준화-집단주의의 예술적 사례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굳이 막걸리 사발만을 고집하며 악을 써대는 그 복고적인 조선주의가 싫었다. 내게 그건 `성을 극복한` 예술이기는커녕 미개한, 성이 미완성으로 혼재한, 그래서 남색이 횡행하는 냄새나는 중세사의 한 현장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생각이 크게 잘못된 것임을 클래식 공부 다시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1991, 92년에 일제시대에 펴낸 전설적인 판소리 명창들의 sp음반들이 복각되기 시작한다. 콜럼비아판 ‘춘향가’(창: 김창룡 이화중선 오비취 권금주 북:한성준), ‘판소리 5명창’(김창환 송만갑 정정렬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판소리 선집’, ‘명창 이화중선 판소리 선집’, 폴리돌 판 ‘적벽가’(창;정정렬 이동백 김창룡 조학진 임소향 북:한성준), ‘동편제 판소리’(송만갑 송기덕 이선유 장판개 김정문 박중근) 등등….
이 `소리`들은 내가 이제껏 듣던 거와는 달랐다. 무엇보다 살기(殺氣)가 없었다. (예술에서 살기는 대개 아마추어리즘 혹은 딜레탕티즘과 천박한 구호주의가 결합한 결과다.) 그리고 동편제건 서편제건 격정으로 치닫거나 서정으로 젖어들지 않고 온갖 감정을 담지하면서도 그것을 매우 단아한 소리의 의상으로 전화시켜내는 고전주의적 품격이 있었다.
`고전주의`는 어느 정도 성을 극복했다는 뜻이다.(왜냐면 내용 자체가 형식으로 된다.) 그리고 `품격`이란 수천 년의 세월을 머금으면서 동시에 수천 년 뒤에 가닿는 불가사의한 일상성이다. 그들의 `소리`는 분명 구한말의 그것이었으되 현재에 와 닿아 있었다. 그리고 이 일상성의 심화를 통한 현재-당대성은 서양 고전음악의, 온갖 연주 해석사 및 공연문화를 통한 현재-당대화 보다도 더 현재-당대적이었다. 왜냐면 서양음악에는 역사와 발전이 있으되, 유현이 없다.
소리를 너무 질러 피를 몇 됫박이나 토하고 심지어 똥물까지 들이마시며, 서양음악의 기준으로 볼 때 거의 목소리를 `망가트리는 듯` 보이는 수련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판소리 예술이 지향하는 것은 실상, 남녀노소 및 자연현상을 두루 제 혼자 소회해야 하는 가창의 총체성 못지않게, 위대한 일상성이다.
어쨌거나, 그랬다. 그럴 때에 나는 오정해를 만났고 그 얌전한 빛에 매료되고, 감동했다. 한번은 영화배우 정선경이 ‘오정해의 영화음악‘ 초대 손님으로 왔다. 정선경이 누군가. 한양대학교 무용과를 다니다 장선우 감독에 의해 그 악명 높은(?) 에로티시즘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주연 여우로 발탁되어 `엉덩이 예쁜 여자`로 통하면서 한 시대의 `색끼`를 주도했던 배우 아닌가. 오정해와는 서로 라이벌 의식도 있을 테고, 어이쿠 그런데 옷이 저게 뭐야? 정말 야하네…. 섹시하네. 오정해 주눅드는 거 아냐? 오정해 끼가 밀리겠는데? 방송이 시작되면서 `생방송 관계자`들, 그리고 기타 등등이 그렇게 `걱정반 흥분반` 했지만, 결과는? 아무 일도 없었다.
둘의 `끼`는 방향이 정반대였으므로. 다만, 이번 편의 주인공은 오정해이므로, 오정해가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전혀 밀리지 않았고, 그 `얌전한 빛`을 발했다는 점만 적어둔다.
`가을길`을 걸어 또 무슨 무슨 `문화공간` 자가 간판에 붙었다는 약속장소를 찾느라 좀 헤매고 그러다가 다소 난감해지고 그럴 때쯤 오정해는 나타났다. 그런데, 인사를 엉거주춤 하고 자리에 앉으니, 허, 이것 봐라, 세월이 지난 만큼 또 결혼하여 아이도 있으니 오정해는 분명 애엄마 모습,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이를 너무도 사랑하는 엄마의 모습을 했으되, 전체 분위기에서 진한 초콜릿 내음이 묻어난다. 화장을 별로 안 했는데도, 아니 연습 직전이라 땀을 기대하는 분위기와 복장인데, 이것은 또, 뭐지? 판소리 예술의 `초콜릿 차원`이 있다는 얘긴가?
힘들기는 고등학교 때 판소리 배울 때 참 힘들었지요. 그 뒤로는, 여러 일을 했는데, 할 때마다 재밌고 신났던 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다행이고 또 행복해요. 후회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판소리 못 하는 거 아직은 괜찮구요. 이번에 마당놀이 하는데 정말 재밌어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구요. 텔레비전 드라마에는 한번인가 나온 것 같은데? 예, KBS2 TV드라마 천둥소리요. 매창 역이었지요…. TV드라마는 좀 뜸한 것 같다고, 잘 맞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고. 어쨌건 지금 하는 일도 바빠서요. `라고 그녀는 아뭏지도 않게 받았다. 하지만 나는 정말 TV드라마하고 그녀는 안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오정해를 그냥 탤런트로만 보고 오정해도 그냥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모를까. 매창 역은, 그 정도까지야 아니었더라도, 대충 얼버무린 배역 아니었을까. 그래서 피차 시들했던 것 아닐까. 뭐, 그렇단들, 그녀는 `탤런트 오정해`도 분명 받아들일 거다. 그녀의 `판소리 경험`은 고집이 아니라 일상의 튼튼한, 당연한 힘으로 된 터이므로. 가족처럼? 그래. 가족처럼.
최근 5년 동안 그녀 활동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단연 무대공연, 신파극과 뮤지컬이다. 물론 가창력과 연기력을 겸비한. 신파극이라…. 효도관광 상품으로 MBC가 개발한. 신파를 예술이라고 하기에는 아무래도 부적절하다. 오정해는 잘못가고 있는 걸까? `예술가` 오정해가 그래서는 안되는 것 아닐까? 대답은 노. 오정해라서 문제가 아니라, 오정해이기 때문에, 잘못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대공연이라는 게 정말 매력이 있어요. 사람들과 직접 대면하면서, 서로 호흡하면서 연기와 노래를 펼친다는 것이… 오늘날 `신파극` 현상을 결코 옹호할 수 없지만, 오정해의 예술사로 보자면 그녀는 판소리의 길을 또 한 차례 넓혀가고 있는 셈이다. `신파극`의 미래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판소리야 말로 (득음과정이) 극히 전문적이면서 (향유층이) 극히 대중적인, 그런 점에서 고전적인 전범이 될만한 예술이었다. 전문화를 빙자한 박제화를 통해 판소리 예술을 `오늘에 되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정해에게는 내가 부러워 할만한 또 하나의 스승이 있다. 중앙대학교 국악예술대학교 교수 최태현. 내가 아는 한 그는 우리나라 국악이론과 해금 연주의 1인자다. 겉보기에 매우 고색창연한 그와 한 1년 동안 공부 겸해서 정기적으로 만난 적이 있다. 나는 한 문화운동단체 대장으로 `국악의 전망`에 대해 그에게 묻고 배우고 함께 토론하고 그럴 때였는데 어느 날 `오음계` 얘기가 나오니 그가 대뜸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를 읊조린다. 나의 모든 사랑이···. 이게 바로 오음계 작곡이야…. 아, 나는 그때 뇌리에 섬광이 번뜩 빛나는 느낌을 받았다. 맞아. 국악은, 국악이야 말로, 대중가요의 튼튼한 토대로 거듭나야 한다….
그 뒤로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오정해의 `신파행`을 옹호하는 이유다. 몇 개월 전 방영되었던 KBS 주말연속극 ‘동양극장’을 나는 관심을 갖고 아주 재미있게 보았었다. `신파극` 배우들이 배우인 채로, 시대의 변화에 때론 순응하고 때론 울혈하면서, 또 타락하면서도, `예술가이므로 좌파`로 되어가는 과정을 기대했던 것 같다.
방영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차홍녀역을 이승연이 아니라 오정해에게 맡겨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 차홍녀는, 속에는 불화산을 지녔으되 외관으로는 `얌전한 빛`을 발했던 쪽이기 때문이다. 이승연은 반대 아닐까….그녀도 굉장한 연기자였으므로, 차홍녀역을 매력 있게, 원래 차홍녀에 맞게 연기해냈지만. 아, 이승연 `끼`도 있구나. 하긴, 끼없는 연기자가 연기자겠는가.
다시, 소원이 뭐냐니까 오정해는 예의 그 `가족과의 시간` 운운하다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말한다. 음반을 하나 내려고요. 아주 특이한. 저만의 색깔을 담아내는…. 나는, 짓궂은 기질이 발동, `판소리 말고 다른 가창력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나? ` 그렇게 물었다. 그랬더니, 엇 뜨거워라. 뭐예요? 하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정말 무섭다.
과연…. 그녀의 발끈함을 보고 나는 그녀에 대한 나의 이해가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 느꼈고,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현대의 온갖 대중예술을 통과한, 아니 관통하면서 그 모든 장점을 제 것으로 취한 판소리 예술. 그녀는 그것을 이룰 것이다. 아무도 그것을 `판소리`라고 부르지 않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무슨 대순가. 역사 학자에게는 역사 학자의 할 일이 있고, 족보-명칭학자에게는 족보-명칭학자의 할 일이 있고, 예술가에게는 예술가의 할 일이 있는 법이다. <끝>.
*오정해는 1971년 전남 목포 출생. 서울 국악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판소리 인간문화재 김소희여사에 사사하면서 국악인의 길을 걷다 93년 영화 ‘서편제’로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이후 ‘태백산맥’‘축제’ 등에 출연, 93년에 대종상 신인 여우상, 95년 제1회 상해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과 일본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휩쓸면서 일약 스타가 됐다. 국악에도 끊임없는 애정을 기울여 93년 10월 ‘심청가’, 97년 김소희 명창 2주기 추모 기념, 98년 창극 ‘광대가’ 등을 공연했다. 현재는 17일부터 시작되는 MBC 마당극 ‘암행어사 졸도야!’ 공연을 앞두고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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