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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진단>10대들 새 바람 ‘야오이’와 ‘팬픽’<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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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진단>10대들 새 바람 ‘야오이’와 ‘팬픽’<中>

여중.고생 62%가 경험

인천 모 중학교 3학년 최모양은 하루에 2~3시간 팬픽을 읽고 쓰면서 보낸다. 방학 때는 컴퓨터 앞에서 연예인 스타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읽는 것이 중요한 일과다. 또 직접 소설을 창작해 소설방에 올린 경험도 많다. 신화와 HOT의 팬인 최양 소설의 단골 주인공은 장우혁, 문희준 등 그룹 멤버들이다.

HOT 팬클럽 사이트에서 만난 박하림(중3. 16세)양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빠들 보고 싶을 때, 팬픽 같은 거 보면 그나마 덜 보고 싶죠. 관심있는 거니까 시간가는 줄도 모르겠고…”

10대 소녀들이 팬픽을 즐기는 한결같은 이유는 스타를 곁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대중문화에 스타와 팬이라는 관계가 형성되고 이른바 ‘오빠부대’가 위력(?)을 떨친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스타에 대한 소녀적 감성이 ‘집착’으로 드러나는 것도 ‘그 시절 한번쯤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런 측면에서 팬픽은 스타에 대한 10대들의 소유욕을 충족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다.

그런데 세간의 우려는 팬픽의 주된 소재가 동성애라는 점이다. “팬픽에 동성애가 아닌 경우도 가끔 있지만, 전 그런 건 잘 안 봐요”라는 박양의 말은 팬픽을 동성애에 대한 탐닉과 직접 연결시켜도 무방한 듯 보인다. 그러나 박양을 비롯한 수많은 팬픽 매니아들이 동성애에 집착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오빠들 사이에 다른 여자가 끼어드는 것이 싫어요”**

“어떤 애들 보면 오빠들이랑 자기 자신을 직접 연결시키는 경우도 있어요… 한참 오빠들 나오는 거 잘 보고 있는데 듣도 보도 못한 여자애랑 커플되면 짜증나잖아요”

박양이 남성 연예인들 사이의 동성애를 다룬 팬픽만을 고집하는 이유다. 자신의 우상인 ‘오빠’를 다른 누군가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질투를 느끼는 셈이다.

남자 연예인과 여자 연예인 커플도 10대 팬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다. “한번은 문희준하고 보아하고 커플시킨 소설이 있었는데… 그 사이트 장난 아니었어요. 누가 그런거 가만두겠어요?” 개인적으로 가수 보아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힌 최양이 이 대목에서 목청을 높인 까닭도 ‘오빠’를 그 어느 여자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팬픽에서 남성 연예인들 사이의 관계만 허용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것이 동성애 관계이건 친구 관계이건 ‘오빠들만의’ 관계가 유지돼야 하며, 그 사이에 다른 여자를 개입시키는 것은 팬픽 ‘에티켓’에 어긋난다.

이처럼 팬픽에 등장하는 스타들의 동성애 관계는 10대 팬들이 스타를 소유하고 자신의 욕구대로 창조할 수 있는 ‘스타 곁에 두기’의 적극적 수단이다.

***뻔한 내용을 탈피하는 수단, 동성애**

팬픽에 열광하는 박양은 내용과 구조가 흡사한 야오이에 대해서는 “야오이는 좀 거부감이 들어서 잘 안 봐요. 재미도 없구요…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스타가 나오는 거랑 전혀 모르는 가상의 인물들이 나오는 거랑은 차이가 있잖아요”라고 말한다. 박양이 팬픽을 통해 동성애 자체에 몰두하는 것은 아니라는 증거다.

반면 팬픽은 물론 야오이도 즐긴다는 최양은 “동성끼리 하는 건 이성보다 멋있구 예뻐보여요. 이성끼리는 왠지 더럽게 느껴지거든요… 팬픽하고 야오이하고 크게 다르다는 생각은 안 해요. 팬픽에는 스타들이 주인공이라서 더 재밌다는 생각은 들지만 야오이도 색다르니까 재미있어요”라고 동성애물에 대한 느낌을 밝혔다.

야오이 매니아들에게 이성 사이의 사랑을 다룬 만화와 소설은 진부한 로맨스다. 이들에게 동성애는 이성간의 ‘뻔한 내용’에서 탈피하는 수단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동성애자로 투영하는 것은 아니다. 박양은 야오이를 좋아하는 친구들에 대해서 “그냥 자신의 취향일 뿐이죠”라며 야오이 매니아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그러나 야오이가 동성애를 성정체성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점에 함정이 있다. 문학적 수준은 논외로 하더라도 극단적이고 노골적인 묘사가 자칫 동성애를 바라보는 또다른 편향을 유발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 자극적이고 왜곡된 동성애에 관한 인식이 여과없이 청소년들에게 유포될 수 있다는 우려도 무시할 수 없다.

최양이 책대여점에서 만화책을 선택할 때 그 1순위는 동성애 만화다. “그런 건 거의 ‘19세 미만’이라 잘 안 빌려주는 곳도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쉽게 빌릴 수 있어요”라며 기성세대의 단속을 비웃는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야오이 사이트도 최양에게는 유용한 정보창고다.

기성세대의 우려에 대해서도 10대 소녀들은 당당하게 제 목소리를 낸다. “이것도 우리들 놀이문화라고 할 수 있는 건데, 괜히 그것을 강압적으로 쓸데없는 것이라고 단정지으면 무시당한 것 같아요”라고 박양은 반박한다.

***여중.고생 62%, “팬픽, 야오이 접한 경험 있다”**

박양과 최양의 목소리가 10대 청소년 문화의 특이 범주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수도권지역 중, 고등학교의 한 학급씩을 임의로 선정, 설문조사를 한 결과 야오이와 팬픽이 여학생들 사이에 확산된 정도는 예상보다 높았다.

중3 여학생 38명, 고2 여학생 47명으로 총 85명의 학생중 야오이나 팬픽을 접해본 경험이 있는 학생은 53명(62%)으로 나타났다. 중학생은 21명(55%)이 야오이나 팬픽을 접한 경험이 있었으며 고등학생은 32명(68%)으로 나타났다.

또 야오이를 접해본 경험이 있는 학생은 전원 팬픽을 접해 봤으며, 팬픽만 접하고 야오이는 접해보지 않았다고 응답한 학생은 중학생 6명, 고등학생 9명으로 나타났다. 연예인 팬 사이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팬픽 문화의 저변이 야오이보다 두텁다는 결과다.

야오이와 팬픽을 접하게 되는 경로는 만화책(45%)이 가장 많았으며 인터넷(39%), 소설책(16%) 순이었다.

또 ‘야오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동성애와 관련된 용어로 답했으며, 팬픽에 대해서는 연예인과 관련된 용어로 답했다. 동성애 소재라는 같은 맥락에서도 학생들은 야오이와 팬픽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는 외면만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첨언을 붙인 학생도 있었다.

***“우리들의 놀이문화, 어른들의 눈으로 판단하지 말라”**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관심 속에서 팬픽과 야오이가 위치하는 지점은 이처럼 기묘하다. 야오이와 팬픽은 묘사의 수위나 표현 방식에는 동성애 하드코어를 방불케 하는 직설적인 면이 존재하면서도 10대 소녀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요인은 동성애 자체가 아니다.

청소년들이 밤새워 팬레터를 쓰거나 학교 수업은 빼먹어도 스타의 공연장에는 결석을 몰랐던 것은 이제 ‘옛날식’ 스타사랑이다. ‘선남선녀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10대 소녀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지도 오래다. 보다 적극적인 스타 소유욕, 새로운 로맨스로의 지향이 야오이, 팬픽 문화의 근저에 있다.

이렇게 보면 동성애 담론 지형에서 기묘한 위치에 놓인 것은 야오이와 팬픽,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10대 소녀들이 아니다. 단속과 용인의 중간에서 청소년들의 문화적 코드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위치가 오히려 어정쩡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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