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그렇게 됐나?”
“30년이란 세월이 흘렀군!”
지난 15일 저녁 서울 프레스센터에 속속 모여든 인사들은 감개무량한 듯 상기된 얼굴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71동지회(회장 이윤선)가 ‘10.15 위수령’ 30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갖는 자리였다. 대학가에 민주화운동이 치열하던 1971년 10월 15일 박정희 정권은 학생운동을 뿌리뽑겠다며 위수령을 발동하고 서울대등 10개대학에 휴업령을 내렸으며 대학생 2백여명을 제적,또는 강제징집했다. 당시 고초를 겪은 학생들이 이제 40-50대의 각계 중견이 돼 한자라에 모인 것이다.
71동지회는 이날 각계 인사 2백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과 학술심포지엄(주제:1970년대와 오늘의 한국)을 갖고 기념선언문을 채택했다. 또 ‘나의 청춘,나의 조국’이란 기념문집도 발간했다.
여기에 회원들의 뜻을 모아 발표한 ‘기념선언문’, 김진균 서울대 교수와 박석운 관악민주포럼 대표의 선-후배가 주는 글,회원들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71동지회 회원소개’부분을 기념문집에서 뽑아 소개한다.
<기념 선언문>
1971년 10.15 위수령 30주년 기념선언문
박정희 정권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를 탱크로 짓밟은 1971년 10월 15일의 위수령 발동이 벌써 30년이 되었다.
전국 주요대학의 휴업령, 그리고 2백 여명의 대학생들에 대한 학사제적과 강제징집으로 종결된 이 위수령 발동은 얼마 뒤 한국현대정치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절이었던 유신체제, 79년의 12․12 군사반란과 80년의 5․18 광주학살로 이어진 바 있다.
이 점에서 71년의 10․15 위수령은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한국민주주의의 중요한 역사적인 분수령이었다.
당시 제적과 강제징집을 당했던 대학생들의 모임인 우리 71동지회는 10․15 위수령 발동 30주년을 맞아 우리의 새로운 감회를 밝히고자 한다. 한 마디로, 지난 30년은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영욕의 시절이었다.
그 가운데 전반부 15년은 유신과 12․12 군사반란, 80년 5월 광주의 비극, 그리고 전두환 정권이라는 어둠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후반부 15년은 비록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나름의 성과를 거둔 시기였다. 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민주화의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고, 비록 양 김의 분열로 5년이 늦어지기는 했지만 40여 년만의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권이 출범할 수 있었으며, 이어 ‘국민의 정부’를 표방한 김대중 정권도 탄생하였고, 아직 부족하고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민주화가 진전되고 또 오랜 남북 대립을 넘어서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게 됐다.
이 점에서 우리 71동지회는 험난했던 민주화 운동에 미력이나마 기여했다는 사실에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 이 자리를 빌어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목숨을 잃거나 희생된 선배, 동지, 후배들에게 심심한 애도와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특히 우리 71동지회는 71년 제적과 강제징집 이후에도 각계 각 분야에서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발전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 왔으며,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을 팔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군사정권에 들어가 이들에 협력한 회원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수령 발동 30주년을 맞는 우리 71동지회는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사회, 경제 민주화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초보적인 정치적 민주화조차도 아직 극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여야 정치권은 모두 정략에 사로 잡혀 국민적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고 어렵게 획득한 정치적 민주주의의 제도들도 형해화(形骸化)되고 있다. 국민들 역시 지역주의의 포로가 되어 나라는 갈기갈기 찢겨지고 증오의 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
또 경제위기와 이의 극복을 위한 김대중 정부의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빈부격차는, 통계집계를 시작한 1979년 이후 최악의 수준으로 벌어져 많은 서민들은 생활고에 신음하고 있다.
게다가 민주화운동세력이었던 김영삼, 김대중 정권의 실정에 대한 국민의 실망에 따라 박정희 향수가 국민들 사이에 퍼져 가고 있고 이 같은 정서에 편승하려는 김대중 정권의 정략에 의해 박정희 기념관이 거액의 국고보조에 의해 건립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위수령과 유신의 가해자들을 포함한 군사독재세력들은 양 김의 분열과 대립을 교묘히 이용하여 한국정치의 캐스팅 보트를 쥔 채 아직도 버젓이 살아남아 한국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이 또 있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출신의 김영삼 전대통령과 김대중 현대통령이 함께 민주화운동 출신이라는 전력과 달리 사당(私黨)정치, 날치기 통과, 의원 꿔주기 등의 반민주적인 정치 행태를 서슴지 않음으로써 국민들 사이에 정치적 허무주의가 팽배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 경력이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조소와 경멸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우리 71동지회는 이 같은 참담한 현실에 대해 민주화에 참여했던 당사자로서 깊이 반성함과 동시에 국민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뜻을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결의를 표한다.
1. 우리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당사자임을 자임하며, 정체된 한국민주화의 재도약을 위해 각자 맡은 분야에서, 그리고 집단적 목소리를 통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을 다짐한다.
2. 우리는 여야 정치권에 당리당략적인 정쟁을 중지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의 민주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한다.
3. 우리는 김대중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반역사적인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대한 국고지원을 반대하며, 이의 즉각적인 중단을 촉구한다.
4. 우리는 71년 위수령 발동을 비롯하여 유신 독재, 5. 17쿠데타 등 민주헌정질서를 파괴한 낡은 군사독재세력과 부정부패에 연루된 인사의 정계은퇴를 촉구한다.
5. 우리는 한국사회의 민주적이고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 국민 모두가 지역주의와 증오의 정치 족쇄로부터 벗어날 것을 촉구한다.
2001년 10월 15일
71동지회 회원 일동
<선배의 글>
71동지회 30년을 기리며
김진균
서울대 사회학과교수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전 의장
현재 사회진보연대 대표
1971년이 지금으로부터 30년이 되었습니다. 이 동지회가 아마도 71년에 20대 중반의 나이로 지낸 분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 분들은 이제 새로운 세기와 중년기를 함께 맞이하고 있을 줄로 생각됩니다.
이 점에서 우선 이 동지회의 역사적 책무가 다른 어떤 세대보다도 남다르다고 봅니다.
1971년은 어떤 고비였다고 회고됩니다. 1960년의 4․19혁명은 대통령이 세 번 이상 연임해서 당선 취임하는 일은 제지되어야 한다는 약속을 국민적 차원에서 만들어 낸 것이었다고 봅니다.
일반 국민의 정치적 정서에서 대통령의 장기집권은 옳지 않다는 민주주의 원칙을 수립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4․19혁명을 무시하고 군사쿠데타를 통해서 집권한 박 정권은 71년에 와서 무모한 시도를 감행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다음해인 1972년의 유신체제를 굳히는 작업의 예비단계였습니다.
60년대 처음 4․19혁명, 그리고 한일국교회담 반대운동, 그리고 후반에 지속된 바와 같이 대학생들에 대한 통제 기제로서의 교련과목 설치와 같이 군사정권은 군사적 통제방식과 국가의 관료제적 통제의 헤게모니를 제고하면서 국민들을 철저히 국가통제 내로 포섭해 왔습니다.
거기에는 중앙정보부의 설치와 그 활동이 전국의 어떤 영역과 수준을 막론하고 미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장치가 4․19와 같은 국민․민중의 대중적 운동을 예방하거나 억압할 수 있다는 판단을 군사정권에게 주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소위 경제개발정책을 수행함으로써 빈곤의 상태를 벗어 날 수 있다는 전망, 한편으로 베트남 전쟁의 종결이 예상되는 데 따른 동북아의 안보상의 위기의식 등이 국민으로 하여금 억압된 국가통제를 수용케 할 것이라는 판단을 가능하게 했을 수 있습니다.
1970년에는 이미 농촌인구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도시와 공단으로 나아가 저임금지대를 형성해 주고 있었습니다. 전태일은 바로 그 시점에서 노동조건의 처참한 상태에 문제를 제기하며 분신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노동자가 서울의 청계천 좁은 노동공간에 있는 노동자의 실체를 상기했을 뿐만 아니라 산업단지에 조성되어 온 대공장에 남성 노동자가 대량으로 집결하고 있는 상태의 어떤 잠재성을 인지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1971년 가을에 드디어 박 정권은 민중과 대학생의 운동진영을 공격하였습니다. 대학교 교정과 건물에 드디어 잠바를 입은 경찰을 대부대로 진입하여 시위하는 학생을 연행 폭행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교문을 두고 대치하는 양상이었으나 그 해 드디어 경찰과 군대는 교내를 진입하고 대학생을 포로 다루듯이 하였습니다. 이 시도를 통해서 대학생과 노동자 민중을 잠재울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그 다음해에 드디어 박 정권은 대담하게 역사를 ‘전체주의’시대로 뒤돌려 놓고자 유신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박 정권의 유신체제는 70년대 끝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막을 내렸습니다. 아마도 71동지회 여러분들은 이 시기에 역사의 어떤 전환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80년대는 아직 민중의 힘에 의한 민주화의 대장정이 탄탄대로로 진입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민주화의 길을 닦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71동지회 여러분은 장기적인 군사정권의 시기를 청춘을 보내는 시기로 하여 이제 장년층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지난 30년간 몸소 체험하면서 살아 온 시기를 돌아보면 몇 가지 중대한 문제를 직면할 것입니다.
첫째, 정치적으로 기나긴 군사적 파쇼체제를 지나옴으로써 누구보다도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이의 실현을 위한 노력의 절실성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오랜 전체주의적 체제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것’에 대한 역동일시의 체질을 내재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민주화 지향을 위해서 체화되어 있을 수 있는 이 역동일시(逆同一視)의 요소를 청산해 내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어야만 민주화의 희망을 제대로 가꿀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둘째, 이제 본격적으로 민족의 통일문제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리라고 봅니다. 71동지회 연배의 민주적․민족자주적 세력이 선도해서 통일문제를 풀어 가야 하는데 냉전․반통일의 모든 문제요소를 제거하고 통일된 미래를 적극 형성해 가는데 헌신해야 하는 위치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을 훨씬 뛰어 넘는 전망이 요청될 것이고 현실적으로 사회주의를 참고할 근거가 소멸되었다고 판단된다면 미래를 전망할 준거도 추구해야 할 책무가 있다고 봅니다.
셋째, 아무래도 자본주의 모순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주 절실하게 당면하리라고 봅니다. 대다수 국민․민족․민중이 안정된 삶을 누리기 어렵게 정치경제학적 조건이 세계체제적 차원에서 전개되어 우리 사회에 압박을 주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풀어 갈 지혜가 71동지회에서 솟아나길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넷째, 아마도 71동지회 여러분의 자식세대가 무럭무럭 자라면서 여러분과는 다른 욕망의 세계를 전개하리라고 봅니다. 동시에 이 사회는 지구촌과 넓게 직접적으로 연결해 가는 세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아마도 거대적 차원의 가치와 미시적 차원의 인간가치에 대한 인식문제가 새로운 세대의 욕망문제와 연결되어 가늠하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인간을 폭 넓게 귀중하게 존중하고 서로 파괴되지 않고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그런 세상에 대하여 더 넓은 인식을 요구할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71동지회의 여러분 존재를 빛나게 해 주리라고 믿습니다.
진심으로 71동지회의 존재와 우의와 헌신성에 대해 축복을 기원합니다.
<후배의 글>
후배가 본 위수령세대 선배들
박석운
관악민주포럼 대표
민족자주 민주주의 민중생존권쟁취 전국민중연대(준) 상임집행위원장
위수령이 떨어지고 대학에 탱크가 진입하는 사진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던 30년 전 71년 10월 당시 필자는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다. 고등학생의 눈에 비친 당시 상황은 참으로 섬뜩한 공포였다.
이듬해 10월 유신헌법이 선포되고 박통의 영구집권체제로 들어서게 된 것이니,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로 표상되는 이른바 70년대는 70년 11월 전태일 열사의 분신과 71년 10월의 위수령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전국 각 대학의 수많은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당시 무더기로 제적당하고 한꺼번에 군대로 끌려갔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와서 선배들로부터 전수받은 학생운동사에서는 이들 학생운동지도자들 그룹이 “위수령세대”로 불려졌다.
위수령세대는 이후 학생운동에 앞장섰다가 “신세 조지는” 젊은이들의 전형을 창출한 셈이다. 이른바 “청운의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한 청년들이 새롭게 알게 된 민족사회의 현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떨쳐 일어났지만, 이내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무자비한 탄압을 받아 군대로 끌려가고, 또 감옥으로 행진해 가면서 가혹한 고난은 시작되었다.
지금이야 정권은 바뀔 수 있는 것이고 또 학생운동 리더로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가 나중에 정계에라도 입문할 수도 있겠거니 하지만, 당시는 군사독재정권이 마치 철벽처럼 버티고 있어 정권교체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학생운동에 나섰다가 사회 곳곳을 거미줄처럼 통제해 나가던 정보기관 등에 한번 찍히면 입신양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본인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 사실상의 “연좌제” 방식으로 줄줄이 고초를 당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위수령세대가 한꺼번에 강제징집되었다가 제대할 즈음인 1974~75년 무렵은 대통령 긴급조치가 잇달아 발동되면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영구집권체제를 공고히 하던 더욱 암울한 상황이었다.
이런 시기에 위수령세대의 우리 선배들은 좌절하지 않고 돈도 안되고 출세하는데도 전혀 도음되지 않을 뿐더러 형극의 길에 다름아닌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계속 앞장서 나가면서 또 후배를 길러내고 운동을 확산시켜 나가는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세계사적으로도 군사독재정권의 가혹한 탄압을 극복한 의미있는 사례라 할 수 있는 한국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그 수많은 신화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위수령세대는 크게 봐서 후배 학생운동 세대들과 동질감을 잃지 않은 첫 세대라고나 할까, 도중에 굴절되지 않고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학생운동의 사실상 맏형세대라고 볼 수 있다.
또 위수령세대의 선배들은 우리 사회의 진보적 흐름이랄까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수행한 세대라 볼 수 있다. 한국전쟁으로 단절되고 또 5․16 쿠테타로 초토화된 상태에서,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듯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흐름을 창출해 내는데 초석이 되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그나마 진보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은 위수령세대 선배들의 헌신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다.
그리고 많은 위수령세대 선배들은 학생운동을 거쳐 사회 각 분야로 진출해 나가면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찍혀 있어서” 유형무형의 감시와 견제를 받는다는 상대적인 불리점에도 불구하고, 선배들은 각고의 노력을 통해 이를 극복해 내고 사회 각 분야에서 나름의 경지와 영역을 구축해 나가면서, 이후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학생운동 출신 후배들을 각 분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후배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 하나가 있다. 벌써 30년이 되도록 끈끈한 정을 유지하면서 매우 튼튼한 조직력을 과시하는 모임을 유지,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오늘날 이미 사회 각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우리 선배들이, 그사이 연마해 온 “내공”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 각 분야의 실질적 사회민주화와 사회진보화의 향도자 역할을 기꺼이 감당해 나갈 의지를 모을 것이라는 점이 필자만의 기대는 아닐 것이다.
<회원 소개>
71동지회 회원소개
꼭 30년 전 1971년 10월 15일, 박정희 정부는 ‘10월 유신’의 사전 조치로서 이날 위수령을 발동, 학생들의 빗발친 민주화 요구를 틀어막곤 서울대 등 10개 대학에 휴업령을 내렸다. 동시에 전국대학을 상대로 200여 학생을 ‘데모 주동자 또는 주모자’로 제적시키고, 그 반수 가량을 강제징집으로 내몰았다.
그리고는 이듬해 72년 ‘10월 유신’을 발표, 한 치도 오차 없는 군부독재를 시행에 옮겼다. 이러니 위수령 제적학생 200여명은 곧 ‘10월 유신’의 제물(祭物)이 됐다. 참고로 전술한 민주화 요구란 69년 삼선개헌반대 데모로부터 71년 학원병영화(교련) 반대 데모까지를 아우름을 밝혀둔다.
그런데, 이 200명이라는 숫자는 하나의 동질성과 함께 역동성을 갖게 해 주었다. 71(칠일)동지회의 탄생이 그것이다. ‘10・15’ 20주년을 맞아 ‘71동지회’란 이름으로 정식 결성되었거니와 창립 당시 회원수는 110명이며 현재 회원수는 90여명이다.
71동지회가 민주화운동과 관련되어 결성된 단체인 만큼 정치성이 없지도 않으나 4월동지회나 6・3동지회와 다른 것은 회원가입에 보다 엄격성을 요한 점이다. 즉 앞서의 200여명이 모태가 된 것이고 다만 필요한 경우 “위수령을 전후한 시위 관련 징계학생”을 포함할 정도이다. 좀 폐쇄적이나 회원간의 상호연대감은 퍽이나 높다할 것이다.
이와 관련한 회칙이 창립기념책자에도 나와 있는데, 즉 ‘제2조(목적)’에 의하면 “이 회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실현을 위해 1971년도에 학생운동에 앞장섰던 정신을 살려, 사회 각 분야에서 그 정신을 구현하고 당시에 뜻을 같이했던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를 유심히 보자면 71동지회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실현을 위해’ ‘앞장섰던 정신’을 ‘사회 각 분야에서 그 정신을 구현’함”이라는 하나의 의무감을 내비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과연 71동지회는 지난날을 ‘그 정신’에 맞게 살아왔느냐는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게도 됨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설사 단체의 성격을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함”이라고 했지만 이의 전제가 되고 보다 상위개념이 되는 결성취지이자 단체정신이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실현”이란 점을 못 박고 있는데서 결국 아무리 ‘친목단체’라고 강조해도 정치성은 원천적으로 피할 수도 없음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71동지회는 1991년 정식 결성과 함께 창립기념책자로《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를 부제 ‘71년 10・15 위수령 세대의 증언’이라고 달아 발간한 바 있다. 오늘 이 기념문집은 71동지회의 ‘30성상’을 회고하는 동시, 미래를 전망하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특히 최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는 71동지회 회원 앞으로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 통지서’를 발부했는데, 이런 만큼 71동지회는 ‘민주화운동 관련단체’가 자연히 됨도 들어두고자 한다.
다음은 71동지회 주요 회원명단인데, 이를 듦으로써 회원소개를 대신하기로 한다.
○정계:민주당 김근태 심재권 이호웅 배기운 의원,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 김정길 이석현 유인태 이신범 전의원, 이준형 전 국민회의 안양만안지구당 위원장○자치단체장:고재득 성동구청장, 원혜영 부천시장, 양재호 전양천구청장○관계:이태복 청와대노동복지수석, 김대곤 대통령공보비서관, 김창수 주에티오피아 대사 ○학계: 김세균(서울대) 김재홍(경기대) 손호철(서강대) 김대환(인하대) 손예철(한양대) 김상곤(한신대) 이광호(연세대) 이영훈(성균관대) 임춘식(한남대) 송정민(전남대) 이광택(국민대) 이원형(호남대) 장상환(경상대) 조연상(목원대) 송인창(대전대) 심지연(경남대) 백운선(호남대) 김무홍(방통대) 교수○언론계:변용식 조선일보 편집국장, 장성효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원섭 한겨레신문 논설실장, 선경식 노동일보 편집국장, 조상호 나남출판사 사장, 조순용 KBS 정치부장, 김영일 MBC 보도본부 부본부장, 김진원 SBS 보도국장, 조원석 KBS라디오3국장○경제 및 기업계:정수용 ㈜빙그레 사장, 김건만 칠원공조 사장, 이윤선 티비엔투데이 대표, 전용호 빠팡에스프아 대표, 김영철 홀텍 사장, 서철용 노량진수산시장 사장, 목정래 전 SK텔레콤 부사장, 신종진 윌스어학원장, 성기철 ㈜씨스폴 대표, 이종대 범양상선 상무, 서정규 대한알미늄 감사, 임경철 삼성화재 경인본부장, 이명용 한국에너지관리공단 이사, 이종연 대한건설협회 홍보실장, 박홍석 울트라 감사, 장성규 ㈜신세계 상무, 오흥진 삼성물산 홍보이사, 최명의 SK증권 상무, 조문환 제일은행 기획예산부장, 최상택 택 코리아 사장, 김천홍 한국자산관리공사 이사○사회문화:최열 환경운동연합회 사무총장, 이해학 목사, 임진택 연출가, 황주석 YMCA 총무, 김국진 사무노련상임고문, 김용석 경기도자원봉사단체협의회 사무총장○전문:박원철 김&장법률사무소 변호사, 이대용 회계사, 최형무 최혁배 국제변호사 등.
허도학(경남신문사 서울지사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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